“Chile desperto (칠레가 깨어났다)”

민주화 이행 이후 ‘이중전환’이 부른 계급불평등과 ‘30페소의 혁명’

10월 7일 시작된 칠레의 반정부 대규모 시위에 대해 드디어 집권 엘리트가 굴복하고 새로 헌법을 쓰겠다고 11월 11일 밝혔다. 이는 지난 10월 21일 양보조처에 이은 최종적인 항복 선언이다. 하지만 칠레의 앞길은 복잡다난해 보인다.

물론 그래도 이만큼 싸워서 이렇게 만들었다. 이번 대중시위의 결과는 칠레가 80년대 후반 점진적인 민주화 이행을 시작이후 거둔 가장 유의미한 정치적 성과다. 칠레는 이제야 피노체트 치하의 1980년 헌법을 개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그러니까 제한된 정치적 자유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라는 칠레 식의 이중전환이 부른 지난 10월의 계급투쟁은 과연 자유주의적 헌법 개정으로 미봉되거나 끝날 것인가?

칠레가 피노체트 군부 체제하 헌법을 이제야 개정하는 이유는,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해체와 소위 ‘민주화이행’이 철저히 엘리트 담합에 의한, 즉 ‘거래(deal)에 의한 협약으로 이뤄진,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피노체트 장군과 군부는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라 일컫는 아옌데 정부를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했다. 이후 군사평의회를 통한 군부통치를 지속하다가 스스로 유사 민간정부 대통령으로서 1990년까지 집권했다. 그리고 1980년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동유럽을 휩쓴 전 세계적인 ‘제3차 민주(자유화) 파고’ 속에서 피노체트는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나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허용하는 정치적 자유화를 점진적으로 단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아시아 민주화 물결 속에서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1987년 계엄령을 해제하고 다당제 선거를 허용하면서, 스스로 정치적 전환의 주역이 되어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단행한 것과 유사한 이행 경로다.

그리하여 1980년대 칠레는 느린 민주화 이행, 혹은 군부독재로부터 문민정부로의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치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민간정부 이양 이전부터 구 권위주의체제를 민주정체속에서 안정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한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후계자들을 군사평의회로부터 줄 세우기 시작했고, 군부를 자신의 부하들로 채웠다. 행정부와 사법부를 천년만년 권위주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철저히 피노체트의 군부로부터 ‘민간정부’로의 이양 혹은 변신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을 고안하고 정당화한 것이 바로 1980년 피노체트 군부하의 헌법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민간정부 이양’을 했다. 피노체트가 물러난 것이 1990년이다. 이것이 바로 칠레의 민주화 이행 방식이었다: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정치 자유화를 향한 ‘민주화 이행’.

민주화 이행이후 칠레는 한마디로 로버트 달이 말하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즉 형식민주주의 하에 선거로 정치권력의 교체가 가능한 정치체제가 됐다. 이행이후 군부에 긴밀하게 연결돼있는 우파 정당과, 열린 정치적 국면에서 새롭게 형성된 야당세력이 자리 잡았다. 피노체트 정권이 점진적으로 허용했던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우파정당들이었고 이념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세력이다. 그렇게 하여 크게 보면 구권위주의 군부 엘리트와 토지 자본가계급에 기반을 둔 우익정당과 부르주아지와 도시 중산층 등에 사회적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적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양대 이념으로 분화된 정당정치구조가 민주화 이후 30년간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강력했던 좌파와 무장투쟁세력은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해체됐다. 노조 역시 조직적 사회적 힘을 상실했다. 민주화 이행을 거치면서 1973년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렸던 피노체트도 물러났지만, 칠레는 결코 피노체트 이전의 정치 지형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칠레는 피노체트 퇴진과 민주화 이행으로 정치적으로 재민주화됐지만 1973년 아옌데 정부의 집권으로 가능성을 열어젖혔던 사회변혁과 정치변혁의 기회를 놓쳤고 지체되었다. 왜냐하면 칠레의 민주화 ‘이행’은 사회적 체제 변혁이나 개혁을 담보하지 못하는, 정치 엘리트간의 권력 투쟁을 용인하는 선거민주주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민주화 이행의 기본 성격이고 정치적인 효과이다. 필자는 민주화란 원포인트의 ‘이행(transiton)’이 아니라 전환(transformation), 즉 중요한 여러 결정적 국면과 이행을 넘나드는 장기적인 정치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민주화는 일직선의 한 방향의 변화가 아니며, 퇴보하여 반민주화, 탈민주화될 수도 있고, 다시 재민주화되기도 한다. 칠레 역시 피노체트 퇴진 이후의 민주화이행은 일종의 재민주화 과정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회혁명이나 정치혁명과는 거리가 먼, 최소민주주의를 담아내는 ‘자유주의적 정치적 전환’이었다.

그리하여 점진적이고 느린 민주화의 장기적인 정치과정이 시작됐다. 1990년 피노체트가 완전히 정치권력에서 물러난 후 칠레는 우파정당과 ‘신자유주의’적인 민주정당이 정치권력을 교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권력 교체가 가능한 선거민주주의, 급진적 정당을 배제한 정당구조 하에서 우파 정당과 신자유주의 정당세력은, 1980년에 입법한 피노체트 독재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독소적인 노동법 체제를 유지하는데 합의했다. 그렇게 제한된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와 구조조정의 정치를 거듭했다. 이것을 정치적 자유주의적 전환이후에 이뤄진 경제적 자유화, 신자유주의적 경제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민주화의 두 번째 정의가 필요하다. 민주화는 이행이 아니라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봐야하며, 그것도 정치적 경제적 전환이 연쇄적으로 이뤄지는 일종의 ‘이중전환’의 장기적인 정치과정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정치적 민주화라는 정치적 전환과 경제적 자유화라는 경제적 전환이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체제전환’, 그러므로 이중전환(dual transform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 바 있다.1) 그 점에서 1974년 포르투칼, 스페인을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라틴아메리카의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등, 아시아의 필리핀, 한국, 대만, 일본 등, 동유럽의 폴란드, 체코슬라바키아, 유고슬라비아, 구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및 자유화 등으로 이어진 ‘전 지구적인 3차 민주화 파고’는 단순히 개별 국가들의 정치적 이행이 전 지구적으로 겹친 우연성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후 진행된 전 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제 전환(혹은 구조조정) 역시 단지 개별 국가들의 경제정책이 전 지구적으로 우연히 동시에 발발한 것이 아닐 것이다. 칠레의 이행양식은 이를 특유한 경로를 통해서 드러내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례다. 더 나아가 이번 10월의 칠레 시위는 과연 민주주의체제의 정치적 경제적 이중전환에 대해서 어떤 평가와 판단을 내려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민주화이행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은 민주주의의 전환과정에 대한 질문을 대중 스스로의 봉기를 통해서 전 지구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칠레 이야기로 돌아가서, 민주화 이행이후 30년 동안 칠레는 그럼 어떠했는가? 칠레는 브라질과 더불어, 남미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소위 말하는 남미의 잘사는 나라인데, 빈부 격차는 멕시코와 더불어 1,2위를 기록할 정도로, 계급 격차가 큰 사회가 됐다. 칠레는 2010년 남미 최초로 OECD에 가입했고, 1인당 GDP는 1만 5천불을 넘어섰다. 또한 수도 산티아고에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될 정도로 대중교통이 잘 깔려 있는 등 남미에서도 가장 우수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상위 1%가 칠레 전 자산의 33%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 양극화, 빈부의 격차가 심하기도 하다. 칠레는 피노체트 군부가 아옌데 정부를 쿠데타로 몰아낸 직후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받아들이고 모델로 삼은 국가이다. 이 점 역시 주목해야할 점이다. 이른바 ‘시카고보이즈’ 출신의 경제학자들 관료들이 피노체트 하에서 중용되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정치를 폈고, 이는 1990년 민주화 이행이 이뤄졌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오히려 자유주의를 신봉한 이른바 민주정당들은 신자유주의를 더욱 옹호하고 완성하는데 매진했다.

그리하여 이행이후 칠레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공공 부문의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교육과 의료, 연금, 가스, 수도 등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모든 공공 서비스가 철저히 경쟁에 기반을 둔 시장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칠레의 정치적 자유화 혹은 민주화 이행은 경제적 자유화를 위한 정치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전환의 실체다. 칠레의 사례는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단지 친연성을 넘어서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 브라질, 멕시코, 심지어 최근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부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민주정부 심지어 좌파 정부하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자본가 카르텔을 해체하지 못했거나 강화했다는 점 말이다. 그리하여 민주화 이행이후 30년 동안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이며, 평화로운 정권 교체, 수평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져 ‘민주화 이행’에 성공한 나라가 됐다. 그러면서 칠레는 민주화 이행이후 민주주의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가장 심한 대표적인 국가가 됐다.

민주화의 정치과정과 궤적, 그리고 민주화이행 이후 정치와 사회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여러 면에서 칠레의 민주화는 한국과 비교될만하다. 한국 역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지만, 빈부 격차는 미국보다 더 심하고 소득불평등이 심한 나라다. 2017년 OECD자료와 한국 통계청 가계금융복지 조사 자료를 대조해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불평등이 높아지는 순서를 배열해 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0.355로서 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칠레·터키·미국 다음으로 5번째 불평등이 높은 나라다.2) 즉 미국을 빼면 남미에선 멕시코 칠레, 중동에선 터키, 그리고 아시아에선 한국이다. 또한 한국 역시 민주화 이행이후 구 권위주의 엘리트와 보수 자유주의 양당 정당정치체제의 선거민주주의가 안착돼 좌파노동정치를 봉쇄하고 있는 정치지형이다. 민주화 이행은 엘리트 간 거래에 의한 협약으로 귀결됐고, 이후 민주주의 정치과정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아닌 배제, 즉 ‘노동 없는 자유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했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세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노동에 대한 구조조정 정치를 펼치고 비정규직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재벌체제를 강화하면서 불평등을 오히려 강화해왔다. 칠레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굽히지 않는 피네라 정부가 있다면 한국에 문재인 현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 개악을 통해서 장시간 근로를 용인하고, 고용형태의 유연화를 최종심급에서 완성하는 국면에 도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칠레, 양국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중시위의 성격과 양상이다. 지난 10월 한국에서 문재인정부의 지지세력이 서초동에서 조국 법무장관을 ‘수호’하고 검찰개혁을 하자고 거세게 외치고 다른 한편에선 문재인 좌파정권 축출을 외치는 우익 시위가 맞불을 놓으며 정치적 진영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칠레에서는 10월 7일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돼 마른 들판에 놓은 불처럼 번져갔다. 시위는 10월1일 정부가 고작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을 인상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칠레의 국부 33%를 차지하고 있는 1%의 기득권과 유신계급은 죽어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법정 최저임금 월 30만1000페소(2019 기준, 약 47만 원)인 사회에서 지하철 요금이 30페소 올라 830페소(월 3만3200페소·약 5만2000원)가 된다면, 최저임금의 4분의 1 가량을 출퇴근 교통비로 써야 한다. 30페소(약 50원) 인상안은 그동안 쌓여 있던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10월 7일 청년학생들이 시작한 시위는 점차 대규모화됐고, 매일 전개됐으며,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시위 참가자들은 사회전반의 불평등에 대한 항의 구호들을 외치기 시작했다.

피네라 정부는 시위 첫날부터 군대를 불러들여 시위 진압에 나섰다. 칠레 전역에 1만 명의 군대를 풀어 강경기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진행과정을 보면 칠레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이어졌다. 시위는 도시 청년들이 주도했고, 이들은 지하철역에서의 게릴라 시위를 역마다 이어가면서 공권력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효과적인 전술을 취했다. 이는 홍콩 시위대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파상형으로 시위를 진행하고 흩어지는 일종의 도시 게릴라식 시위를 하는, 일명 ‘물처럼 (be the water)’ 시위와 유사한 면도 있다. 홍콩에선 SNS에 수십 개의 단체 토크 방들, 수만 명 수십만 명이 가입된 방들을 통해서 집결지와 전술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이런 전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칠레 시위의 경우는 아보카도 등 큰 농사를 짓는 대농장주들이 배타적으로 누린 ‘물 수탈권(사유화)’으로 인해 농촌에서 도시로 떠밀려온 농민들의 반감과 분노 등까지 다양한 민중 생존권의 문제와도 이어져, 도로 봉쇄 시위가 칠레 전국으로 번져갔다. 군대를 동원한 강제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예봉은 꺾이지 않고 갈수록 급진화됐다. 시위대는 매일 오후 5시 산티아고 바케다노 지하철역에서부터 피네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 대통령궁까지 900미터 거리에 운집하여 군경찰에 맞서며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접근을 시도했다. 더불어 시위 이후의 경찰폭력은 심각한 수위에 이르러, 최소한 23명이 사망했고, 2209명이 중상 위주로 부상을 당했다는 칠레민간인권기구의 보고가 있다.

결국 피네라 대통령은 10월 21일부터 양보 조치들을 연이어 제안했다. 우선 문제가 됐던 지하철 요금 30페소 인상안을 철회했고 다음으로는 단지 지하철 요금인상만이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며 연금 20% 인상, 이어서 비싼 수가의 의료행위를 건강보험에 포함시키는 것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모두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지난달 10월 25일 120만 명의 대규모 참가로 시위는 정점을 찍게 되었다. 외신에 따르면 이는 칠레 역사상 가장 대규모 시위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할 수없이 피네라 칠레 대통령은 11월중순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12월 초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총회 개최를 취소한다고 10월 30일 밝혔다. 그리고 11월11일 칠레의 집권 중도우익 자유주의정당의 세바스티안 피네라 정권은 항복인 듯 더 이상의 시위가 급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큰 유화책을 제시했다. 곤잘레스 블루멜 내무장관은 이날 피네라 대통령과 집권연정은 국회가 헌법 개정안을 마련한 뒤 이를 국민투표에 붙이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렇게 하여 칠레 시위대는 피노체트가 남긴 마지막 ‘군부 유산’인 헌법 개정이라는 정치적 성과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헌법의 개정, 이것은 시위대의 전체 요구가 아니었다. 그건 단지 시위 요구조건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한 달여 이어지며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르면서 칠레의 시위대가 외친 것은 단지 지연된 헌법의 개정뿐만 아니라 소위 민주화이행이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욱 공고해진 자본가-엘리트 기득권 동맹에 대한 계급적인 좌절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분노였다. 아이들까지 나와서 든 손피켓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면 부자들이 두려워한다”, “피네라 탄핵,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칠레의 미래다”등이 쓰여있었다. 칠레 시위를 상징하는 구호는 ‘Chile desperto(칠레가 깨어났다)’였다. 시위대는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다(NO SON 30 PESOS, SON 30 AÑOS)”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며, 그리하여 이번 대규모 시위를 ‘30페소의 혁명’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제 대중시위의 분노와 거센 저항 앞에서 정치엘리트는 피노체트 군부체제가 물러났어도 계속 유보시켰던 헌법 개정을 민중에게 던져주면서 회유하고, 그것으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불평등 모순과 체제적인 위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지연된 정치적 자유화, 민주화를 이번 헌법 개정 국민투표로 시행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봤듯이 점진적 민주화 이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칠레의 정치과정이야말로 민주화이행이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당의정하에서, 신자유주의 지배 엘리트화한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고수해왔던, 추악한 담합의 산물이었다.

지금 칠레 민중의 분노는 1980년 이른바 피노체트가 남긴 ‘피노체트 헌법’을 이제 와서 개헌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미봉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화를 담아내는 헌법 개정만으로는 칠레 민중이 외치는 ‘사회시스템을 바꾸어야한다!’는 요구를 담아내기 힘들다. 물론 이번 시위이후가 어찌 될 것인가 역시 칠레 민중에게 달린 문제이다. 그들 스스로 외쳤듯이. “칠레는 깨어났다”일지, 혹은 다시 침잠할지. 그 과정은 단지 한달 간의 대중시위를 넘어서서 길게 봐야할 것이다.

덧붙이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란, 또한 얼마나 훌륭한 ‘당의정’이란 말인가. 혹은 열전을 냉전화하는데 얼마나 훌륭한 체제란 말인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이후 한국 사회를 생각해보라. 80년대 전반기 변혁의 열기를 집어 삼킨 것은 바로 정치적 민주주의였다. 그리고 또한 덧붙이면, 한국에서는 왜 사회적 불평등을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가? 칠레에 ‘30페소’라는 도화선이 있었다면 한국에서는 과연 무엇이 민주화이행이후 대중의 잠자는 계급의식을 깨우고 행동으로 떨쳐 일어나게 만들 도화선이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라면 그건 분명히 노동일 텐데, 그 노동은 어떤 노동의 모습일까?



<각주>
1) ‘이중전환’ 개념에 대해서는 권영숙, 2017,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환과 시기구분, 1987-2006’, <사회와역사> 115권 및 2018, ‘촛불의 운동정치와 87년체제의 ‘이중전환’’, <경제와사회> 117호 참조
2)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3384839 잘 살수록 소득불평등 낮아…분배하되 성장동력 키워야, <중앙일보>, 2019.11.20

2019년 칠레시위 연보

10월1일 칠레정부 지하철요금 30페소(50원) 인상 발표
10월7일 최초의 시위 산티아고에서 시작
10월21일 지하철 요금 인상안 철회 등 일련의 복지 조처
10월25일 120만 명 최대 규모 시위
10월30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및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총회 개최 취소 발표
11월11일 개헌 및 국민투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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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 노동사회학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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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만, 단체들을 보면 의욕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사노위 등으로 대부분 그 의욕이 상실됩니다. 또한 한마디로 한국은 싸울 단체가 없습니다. 또 문재인 정부가 2%대의 경제성장률만 유지할 수 있다면 투쟁을 할 동력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노동계는 합법에서 시작하여 합법으로 다 끝납니다. 지금 한국은 "노동"이 아니라 "선진국"이 더 화두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