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약하지 않았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5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의 기록

5월 1일부터 2일까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견뎌 낸 뜨거운 시간들이 있었다. 주먹이 부르쥐어지고 이가 악물어질 만큼 참혹한 시간도 있었지만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속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다. 그 이틀간을 15개 장면으로 되짚어 보기로 하자.


#1 노동자들을 향한 유가족의 큰절

5월 1일 125주년 노동절을 맞아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계노동절대회가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조합원 5만여 명은 모든 것에서 실패한 박근혜 정부와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 뜻을 모았다.
다양한 발언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년간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고통을 나누며 행동해 주신 민주노총 모든 조합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몸을 굽혀 큰절로 인사하는 유경근 집행위원장에게 노동자들은 시청광장을 가득 채우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응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는 416연대가 준비한 ‘5/1~2 범국민 철야행동’에 민주노총도 함께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2 소망으로 끝나 버린 소망

경찰에 막힌 노동자들은 다시 종각역 사거리로 돌아왔다. 저녁 일곱 시쯤이었다. 방송차 위로 올라간 민주노총 김종인 부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안국역 쪽에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천여 명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오늘 세계노동절대회 행진은 여기서 마칩니다. 여기 계신 동지들 모두 안국역 유가족들의 곁으로 달려가 주십시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조 깃발을 흔들며 커다란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행진이 마무리되자 깃발들은 저마다 다른 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이튿날 아침까지 유가족들의 곁을 지킨 노조 깃발은 채 서넛이 되지 않았다. 안국역 부근에서 만난 한 금속노조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행진 끝나고서 단위가 조직적으로 철야행동에 참여한다는 결정은 없었다. 각 단위 노조가 알아서 참여하는 식이었다.”
민주노총 김종인 부위원장의 소망은 그렇게 소망으로 끝났다.

#3 낙서들




안국역 부근으로 가니 이미 많은 깃발들이 모여 있었다. 청와대 방면에 세워진 차벽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람들은 도시락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필로 아스팔트 바닥에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시꺼먼 아스팔트가 금세 거대한 칠판으로 변했다.

경찰버스로 둘러친 차벽은 어느새 예술가들의 공간이 돼 버린 듯 알록달록한 낙서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차벽에 적힌 낙서들 가운데 가장 심오했던 것은, 원래 버스 옆쪽에 적혀 있는 ‘경찰’이라는 두 글자 뒤에 누군가 그려 넣은 ‘?’였다. 과연 이 시대의 경찰은 누구의 편이며 어떤 존재들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짧고도 강한 낙서였다.

#4 물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밤 아홉 시가 넘자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이 차벽 뒤 어디선가에서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벽 왼쪽에 경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뚫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방패를 밀어붙이자 경찰은 사람 얼굴을 정확히 조준해 캡사이신 용액을 쏘았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물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대오 뒤쪽에서부터 크고 작은 생수병들이 끝없이 날라져 왔다. 어떤 사람은 갖고 있던 보리차를 꺼냈다. 캡사이신을 맞아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물로 얼굴과 손을 씻은 뒤에야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캡사이신은 다시 허공에 물보라처럼 튀었고 최루액을 끼얹은 듯 사방이 매캐해졌다. 똑같은 물을 쓰는데도 서로 쓰는 방법이 너무나도 달랐다.

#5 격리된 경찰들


조계사 쪽 길목으로 가 보았다. 경찰들이 방패를 앞세운 채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찰들을 휠체어 탄 사람들이 막고 있었다. 원래는 거꾸로 돼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경찰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 존재가 돼 있었다.

#6 통곡의 강


밤 열시 반을 넘기자 종로서 경비과장은 ‘살수차를 써서 강제 해산에 들어가겠다’고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물대포가 날아들었다.
물대포는 모두 셋이었다. 흰 물줄기가 밤하늘을 시원하게 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물줄기의 끝은 항상 사람을 겨냥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경찰은 유가족이든 시민이든 기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겨냥해 물을 쏘았다.
더구나 이것이 보통 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최루액을 얼마나 섞었는지 바닥을 흐르는 물줄기가 우유처럼 새하얬다. 사람들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기침과 재채기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숨을 쉬면 쉴수록 콧속과 허파를 철수세미로 긁어 대는 것 같았다. 경찰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독한 최루액을 서너 차례나 더 발사했다.

#7 유가족들은 강하다

경찰의 최루 물대포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맨 앞에 서서 물을 맞은 이들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이었다. 이튿날 오후까지 경찰들과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있었지만 언제나 맨 앞에는 유가족들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 힘이 나오기에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지쳐 주저앉은 한 유가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 마지막 순간만큼은 안 힘들어.”
최루 물대포 사격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차벽 앞으로 모여들었고 유가족들도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 유가족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경찰들을 향해 말을 쏟아 냈다.
“너희도 부끄럽지? 그러니까 눈 내리깔고 방탄모에 방탄복 입고 이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거 아냐? 오늘밤 같은 일은 경찰기록에도 남을 거고 역사책에도 논문에도 낱낱이 기록될 거야. 너희들 나중에 자식 태어나서 너희들에게 엄마 아빠는 그때 어디서 뭐했느냐고 물으면 이야기할 수 있겠어? 못해. 너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1년 전,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경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식 하나 못 살린 죄인’이라며 두 손을 싹싹 빌던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8 삼성서비스노동자의 이야기

밤 열두 시가 넘자 차벽 앞에서는 자유발언이 시작되었다. 어느 대학생은 끝까지 이 자리에 함께 있어 주지 않은 민주노총이 많이 야속하다고 말했고, 어느 할아버지는 종로서 경비과장에게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자유발언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부산에서 올라온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저는 부산 지역 삼성 노동자입니다. 삼성서비스지회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아까 캡사이신 물대포 많이들 맞으셨죠? 저도 이렇게 독한 건 오랜만에 맞아 봅니다. 작년에 염호석 열사의 유골을 지키기 위해 경찰들과 맞서면서 캡사이신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티니 나중엔 맛도 있었습니다. MSG 맛이 나니 아마 라면 좋아하시는 분들은 먹을 만할 겁니다. (웃음) 저희는 그렇게 싸워서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 원칙을 깨고 마침내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세월호 투쟁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삼성노동자들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들 곁에서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9 ○○뉴스 기자, 눈 까뒤집다


현장에서 만난 어느 영상 활동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경찰들 앞에서 계속 영상을 찍고 있는데 기자처럼 생긴 어떤 여자 분이 사복 경찰과 계속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뭔지 궁금해 그쪽을 얼쩡거리면서 계속 찍었더니 그 여자 분도 제가 신경 쓰이는지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자 분이시냐고 물어보니 명함을 꺼내 보여주는데 ○○뉴스 기자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랬어요. ‘어차피 ○○뉴스면 국가기간뉴스통신사니 경찰과 한통속이겠네요?’ 그러니까 그분이 제 앞에서 충혈된 두 눈을 까뒤집으면서 ‘이거 왜 이러세요? 저도 아까 캡사이신 맞았거든요?’ 이러고 가 버렸어요.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죠.”

#10 내게 산소 같은 저항

새벽 두 시부터는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경찰들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 시민들을 인도로 몰아넣었고 유가족들을 따로 고립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거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일 뿐 경찰벽을 뚫지는 못했다.
네 시가 넘도록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고 나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 잠들기 전에 내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경찰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가게 하죠? 이렇게 하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지금 두 번째 파란불입니다. 두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 지금 세 번째 파란 불입니다. 세 번째가 되는 동안......”
눈을 뜨니 어느새 푸르게 동이 터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손전화를 꺼내려는데 귓가에 아까 그 목소리가 흘러들어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게 하나요? 지금 마흔아홉 번째 파란불입니다. 마흔 아홉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계속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서 길을 열고......”
내가 잠든 사이에도 끊임없이 숫자를 세며 경찰과 맞섰을 그 아주머니는 오십 번째를 넘기자 그만 지쳤는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경찰들의 얼굴이 좀 풀리나 싶었던 것도 잠시, 절대로 지칠 리가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옆을 보니 웬 아저씨가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의 단추를 꾹 누르고 있었다.
경찰들에게 꽁꽁 포위당한 채로 맞이한 그날 아침이었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항들이 나의 숨통을 조금 트이게 했다는 것을 그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알고 있을까?

#11 경찰의 덫

길을 멀찍이 돌아 유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경찰들은 여전히 청와대 쪽 방면에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반은 인도에, 나머지 반은 차도에 앉아 있었다. 한 유가족이 경찰을 향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도로 가지 말라며! 그래서 차도로 가려는데 왜 못 가게 해? 그럼 우리 보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날아가? 어떻게 인도로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 있어?”
뻔하고도 진부한 수작이었다. 경찰은 유가족들의 목적지가 어디든 청와대 방면으로 가는 듯하면 무조건 길을 막는다. 그런데 막을 명분이 없으니 왜 막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인도로는 갈 수 없다고만 되풀이한다. 그래서 차도로 가면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을 어겼다며 불법시위로 몰아붙인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이상 꼼짝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다.

#12 악에 받친 유가족들


일곱 시가 넘자 완전히 날이 밝았다. 유가족들이 하나둘 경찰 앞으로 모이더니 밧줄을 꺼내 차례로 목에 감았다. 한 사람이 밧줄을 목에 한 바퀴 감고 옆에 넘기면 옆 사람이 그 줄을 받아 자기 목에 감고 다시 옆으로 넘기는 식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목을 이어 맨 유가족들은 그대로 경찰벽을 향해 돌진했다. 종로서 경비과장은 유가족들이 ‘위험한 시위행위’를 하고 있다며 방송차 안에서 떠들어 댔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탈진한 유가족들이 하나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밧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자 유가족들은 다시 방패 앞에 앉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한 유가족은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사람들이 달려와 그 유가족을 말리며 바닥에 눕혔지만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13 방패 앞 뜨개질


봄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꾸벅꾸벅 졸며 유가족들 옆에 앉아 있는데 경찰들의 방패 앞에서 노란 실로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가족은 아니었다. 무얼 하고 있는지 가서 물어보았다.
“별을 뜨고 있어요. 평소에 아버님들이 발언하실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을 것’이라 말씀하세요. 그래서 아버님들의 그런 뜻을 저희가 좀 이어 보고자 이렇게 별을 만들게 됐어요. 광화문 농성장에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함께 별을 뜨고 유가족 분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있어요.”
노란 실로 짠 노란 별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14 경찰에게 유가족이란?

범국민 철야행동은 원래 오전 11시에 광화문 광장에 모여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록 경찰은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청와대가 아닌 광화문으로 간다고 해도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차도 일부와 인도 전부를 막고 있는 경찰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차도 바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가족들이 ‘우린 막아도 좋으니 시민들에게는 인도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이 방패 사이로 사람들을 지나가게 했다. 흥분한 몇몇 사람들이 왜 유가족들만 못 지나가게 하느냐고 경찰에게 따지자 경찰은 간단히 대답했다.
“저분들은 일반 시민이 아닙니다.”
유가족들이 일반 시민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재차 물었지만 경찰은 다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15 유가족들은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다


오후 두 시가 될 때까지 유가족들과 경찰들의 몸싸움은 계속되었다. 경찰들은 이제 대놓고 유가족들의 얼굴에 캡사이신을 겨냥해 쐈다. 다른 누군가를 겨냥하다 잘못 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찰벽 앞에서 유가족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두 시가 넘어서야 유가족들이 조계사 쪽 길을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광장에 도착해 잠시 쉰 유가족들은 기자들과 시민들을 모아놓고 마무리집회 겸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 있을 힘도 없었던 나는 그때 광장 구석에 있는 화단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 앉은 한 유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어제부터 꼬박 현장을 취재했다고 하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갈아 마셔 버리겠다고 써 주세요. 이제 우린 악 밖에 남은 게 없어요.”
나는 꼭 그렇게 써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기자회견 사진을 몇 장 찍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 유가족은 다른 유가족 품에 안겨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이틀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유가족들은 강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버티지 못한다. 약하기 때문에 자꾸만 잡아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 손 맞잡아 준 다른 손들과 함께 유가족들은 이틀을 보냈다. 이틀 동안 유가족들은 강했다. 그러나 그 힘은 유가족들을 비롯해 서로 손 맞잡은 모든 이들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그건 곧 나의 힘이기도 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걸음 옮길 힘도 없던 나는 유가족들에게서 받은 힘, 혹은 내가 유가족들에게 전해야 하는 힘 같은 것이 몸에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아 가만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고는 분향소 앞에서 시민들과 얼싸안고 울고 있는 유가족들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광장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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