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와 조세: 그 계급적 성격과 정치경제학

[주례토론회] 재생산 위기와 성장체제 전환,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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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조세제도 검토의 의의
우리나라 조세의 규모와 구성: 증세의 여지?
조세의 본질: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복지국가가 무엇이길래…
증세의 의의: 잉여가치와 총노동에 대한 공적 통제의 확대
증세의 방법론: 중심 잡기의 중요성
맺음말: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증세 논의?

머리말: 조세제도 검토의 의의

요즘 세금 올려야 한다는 얘기가 곳곳서 터져 나온다. 복지 확대에의 요구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확대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일부 극우강경파를 빼면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동의하고 있다. 국가가 복지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런 돈을 마련하는 주된 수단이 바로 조세제도이기에, 증세의 필요성도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제기되는 중이다.

그런데 왜 복지 확대 요구가 나오고 있는가? 대중의 삶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의 삶은 왜 이렇게 어려워지고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때 연평균 10%를 넘나들던 우리 경제의 실질성장률은 이제 3%대로 줄어들었고, 올해는 지난 2012, 2013년에 이어 3% 미만 성장률이 점쳐지고 있다.

좋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존에 얼마간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던 모종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 체제가 어떤 계기에 의해 위기에 봉착했으며, 그 결과 대중의 삶이 팍팍해져 이를 치유할 수단으로서 복지제도 확충과 증세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복지가 가장 직접적으로는 현재 어려움에 처한 대중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강화되어야 한다면, 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에는─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일단 논외로 하고─완화되어도 좋은가? 달리 말해, 경제의 활력이 어떤 식으로든 회복되기만 하면, 우리는 기존의 경제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도 좋은가?

복지에 관한 논의에서, 이 마지막 질문의 제기 여부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보수는 그저 현재 둔화된 경제성장을 어떻게 하면 회복시킬 것인가를 궁리한다면, 진보는 이 고민을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까지 가져간다. 우리 사회에서 넓게 보아 ‘진보’에 속한 사람들은 그간 우리 경제의 성장 체제를 수출주도형 성장체제, 이윤주도형 성장체제, 적하경제(trickle-down economy) 등으로 불러 왔다. 각각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이 자리에서 반복할 여유는 없다. 어쨌든 우리 경제의 현황과 문제에 대한 진보적 논의들 사이에서, 현재 대중의 경제사회적 어려움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기존의 경제체제 자체에 내재해 있었으나 평상시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모순이 표현된 것이라는 데 대한 의견일치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즉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어려움은 단순한 자본수익성 저하, 자본 재생산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재생산의 위기라고 보아야 적절히 접근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사회 곳곳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복지에의 요구는 어려움에 처한 몇몇 사람들에게 잔여적인 복지를 제공하자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경제의 운용·성장방식 자체에 대한 반성에 입각한 적극적인 복지국가로의 진입 요구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확대 내지는 적극적 복지국가로의 진입을 위한 수단으로서 증세와 조세체계 개편이라는 문제도 단순한 기술적인 사안으로만─즉 ‘무엇을 위해서는 얼마가 필요하니, 이를 어떻게 마련하자’라는 식으로─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경제를 어떤 방향으로 개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현재의 조세체계가 거기에 어떻게 복무할 것인지를 우리는 고민해야만 한다. 그런데 복지란 국가가 행하는 경제적 역할의 일부일 뿐이다. 복지와 관련된 국가역할 강화가 국가의 다른 경제적 역할들과 동떨어져 진행될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의 문제는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 조세의 규모와 구성: 증세의 여지?

조세란 ‘국가가 국민에 대하여 반대급부 없이 강제적으로 걷는 돈’으로 흔히 정의된다(이창희 2015: 7). 세금은 세외수입, 기금수입 등과 더불어 국가 살림살이를 위한 수입원을 이루는데, 최근 우리나라 중앙정부의 수입과 지출의 규모는 다음 <그림 1>과 같다. 여기서 보듯 우리나라 정부의 규모는 꾸준히 커져 왔고, 그에 따라 조세의 규모도 증가해 왔다. 지방정부를 같이 고려해도 마찬가지다. 지방세는 1975년 총 조세(=국세+지방세)의 10%에 불과했으나 2013년엔 20.4%에 달하고 있다.

  <그림 1> 우리나라 중앙정부의 총수입과 총지출(단위: 조원) [출처: 국회예산정책처(2015a: 328) 가공.]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조세는 적당한 수준일까? 조세 규모가 국가의 경제적 역할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라면, 우리나라 조세는 국가가 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수준일까? 만약 충분하지 않다면, 그래서 증세가 필요하다면, 어떤 항목을 어떻게 늘려야(또는 줄여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조세의 총량과 구성을 살펴야 한다.

먼저 총량 차원을 보자. 2013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 국민들이 낸 세금은 국세와 지방세를 합해 255.7조원이었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인 규모 자체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해에 생산된 부가가치 총량, 곧 국내총생산(GDP)이 좋은 기준이 된다. 이렇게 주어진 해의 GDP에 대비한 조세의 상대적 크기를 조세부담률이라고 한다. 2013년 GDP가 당시 화폐가치로 1,428조원이었으므로, 이 해의 조세부담률은 17.9%이다.


그런데 조세부담률은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온전히 나타내기에는 알맞지 않다. 예컨대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민의료보험제도는 국가 역할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 제도의 운용을 국가는 세금과는 별도로 걷는 국민의료보험료로부터 주로 충당한다. 국민연금제도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금만이 아니라 각종 사회보험료 등도 국가에 납부하며, 후자는 사실상 세금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보려면 이러한 사회보험료 등도 조세와 함께 고려해줄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들은 사회보험료를 따로 걷기보다는 세금에 통합해서 국민의료보험제도 등을 운영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나라간의 제도적 차이 때문에라도 세금뿐 아니라 각종 사회보장기여금을 모두 합쳐서 GDP로 나눠줘야 나라간 비교도 의미가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수치를 국민부담률이라 하고, 2013년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은 24.3%였다.1


우리나라에서 사회보장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80년대 말 이후이므로,2 이때까지 한국의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후 국가에 의한 다양한 공적 사회보장제도가 그 실제적 적용범위를 넓혀감에 따라 양자의 차이도 점차 커졌고, 현재 국민부담률은 조세부담률보다 6%포인트 정도 높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이 모든 나라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기여금을 따로 걷기보다는 세금에 포함시켜 징수하는 경우엔 양자가 거의 같을 것이다. <표 1>에서 프랑스와 덴마크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민부담률은 45% 안팎으로 비슷하나 조세부담률은 덴마크가 20%포인트 가까이 높기 때문이다.

  <표 1> 2012년 주요국의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단위: %) [출처: http://stats.oecd.org]

한편 <표 1>로부터 우리는 우리나라 조세총량이, 우리가 흔히 비교대상으로 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른 회원국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수준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 어느 쪽을 봐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나라는 어림잡아 GDP의 10%포인트 가까이를 세금으로든 사회보장기여금으로든 더 걷어야 OECD 평균에 도달한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와 OECD 평균 간에 국민부담률 차이는 줄어들어 왔지만(<그림 2>), 여전히 대한민국 국가의 경제적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고, 이는 복지영역만 놓고 봐도 그렇다.

  <그림 2> 국민부담률 추이 비교: 한국 대 OECD 평균(단위: %) [출처: 국회예산정책처(2015h: 68) 가공.]

이제 조세의 구성을 살펴보자. 조세를 분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조세를 징수하는 과세권의 주체에 따라 국세(=내국세+관세)와 지방세로 분류할 수도 있고, 법률상 납세의무자와 경제상 조세부담자(담세자)의 일치 여부에 따라 직접세와 간접세로 나눌 수도 있으며, 조세수입의 용도가 특정되어 있느냐에 따라 보통세와 목적세로 가르기도 한다. 한편 OECD는 조세의 부과대상, 즉 과세물건이 무엇이냐를 기준으로 소득과세, 재산과세, 소비과세, 기타로 각국의 조세를 분류해 통계를 낸다. 이하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표 2> 2012년 주요국의 GDP 대비 조세수입의 항목별 비중(단위: %) [출처: 국회예산정책처(2015h: 70) 가공.]

<표 2>는 2012년도 OECD에 속한 주요국에서 조세수입의 항목별 크기를 비교한 것이다. 각각의 수치는 각국의 GDP 대비 해당 항목의 크기를 나타낸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일반적인 조세항목들과 더불어 사회보험료가 고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맨 오른쪽의 ‘합계’에 있는 수치들은 정의상 각국의 국민부담률이 된다. 다시 말해 <표 2>는 각국의 국민부담률의 세부 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눈에 드러나는 특징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는 대체로 개인소득세, 사회보험료, 소비세(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부가가치세)가 낮은 반면 법인소득세와 재산세가 비교적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소득세·사회보험료·소비세를 중심으로 증세의 여지가 있다는 뜻인가? 나아가 법인소득세와 재산세는 조금 줄여도 된다는 뜻인가? 여기서 ‘증세’란 보통 세율인상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많은 논자들이 그런 취지의 주장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조세라는 것이 본원적인 경제활동 위에 매겨지는 것이므로 그 본원적인 경제활동의 양태에 따라서 나라마다 특정 세목의 크기가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무엇을 올려야 하고 무엇을 내려야 한다는 식의 논의보다는 경제 전체의 메커니즘 속에서 조세제도의 역할과 의의를 살필 필요가 있다.

일례로 법인세 항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표 2>에서 보듯 2012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법인세는 GDP 대비 3.7%로서, 노르웨이(10.5%), 룩셈부르크·호주(각 5.2%), 뉴질랜드(4.7%)에 이어 일본과 함께 공동 5위권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법인세가 지나치게 많이 걷히고 있다는 뜻일까? 나아가 법인세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법인세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일까? 기본적으로 특정 세목의 규모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과세의 기반이 되는 소득액이나 소비액 등의 크기와 세율이 그것이다. 즉 법인세의 규모가 비교적 크다면, 그것은 법인세율이 높아서일 수도 있지만 법인소득액 자체가 커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OECD 평균(23.4%)에 비해서는 오히려 낮은 편이다. 뿐만 아니라 법인세율은 지난 20여 년 동안 꾸준히 낮춰져 왔는데도 불구하고, 동시에 법인세의 상대적 규모는 추세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부터 2013년까지 경제규모(경상GDP)가 7.5배 커지는 동안 법인세수는 3.2조원에서 42.7조원으로 무려 13.2배 폭증했다(국회예산정책처 2015(3): 58~9). 왜일까? 바로 법인수의 증가와 부분적으로는 그 결과로서 법인소득의 증가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법인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심화되어 왔다는 얘기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보따리장사’가 꼴을 갖춰 버젓한 사업체로 성장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이것을 두고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법인의 수가 증가한다고 해서 반드시 법인세 비중이 커질 필요는 없다. 그와 동시에 법인에 고용된 노동자도 증가하고 이들이 내는 (근로)소득세와 소비세가 그에 비례해 커진다면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1997년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변화, 곧 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나 비정규직의 일반화에 따른 임금의 정체(박종규 2013), 그리고 상당 정도로 그 결과인 노동소득분배율 저하라는 현실을 떠올려볼 수 있다(주상영·전수민 2014, 이병희 2015). 또한 법인들 간의 양극화와 재벌·대기업의 중소 하청기업 ‘후려치기’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법인소득세율도 개인소득세에 비하면 좀 약하긴 해도 누진적으로 설계돼 있으므로, 법인소득이 양극화되어 대기업이 많은 몫을 가져가면 총법인소득액이 같더라도 법인세수총액은 커질 수도 있다. 2011년부터 3년간 통계를 보면 연간 소득금액 5천억원을 넘는 약 60개, 즉 최상위 0.01%의 법인이 약 40%의 법인세액을 납부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정이 이렇다면, 법인세의 상대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상에서 보듯이 증세의 가능성 내지는 필요성은 자명한 듯하지만, 실제로 어떤 세목을 어떻게 늘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특정 세목의 규모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율만의 문제가 아니며, 재분배 영역의 세율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3 물론 세율·세제의 변화로도 그 근본차원, 즉 본원적인 경제활동 영역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결국 본원적인 영역과 파생적인 재분배 영역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로부터 사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겠다.

조세의 본질: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

이제 조세란 무엇인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자.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 해 동안 생산된 부가가치 총액은 그 해에 행해진 총노동에 다름 아니다. 이 총노동은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각각 (총)임금과 (총)잉여가치로 일차적으로 배분되고, 각 개별 자본가는 자신에게 배당된 잉여가치─그 현상형태가 이윤이다─의 일부를 자신에게 자금을 대부해준 사람들에게 이자로,4 그리고 토지를 빌려준 이들에게 지대로 지급한다. 『자본론』에서 비판적으로 재구성된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분배’는 이렇게 완성된다. 요컨대 한 해의 총부가가치(국내총생산 곧 GDP)는 임금·이윤·이자·지대 등의 수입(revenue 또는 income)으로 나뉘는 것이다.

세금은 바로 이러한 경제활동을 기반으로 해서 매겨진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임금이란 노동력의 재생산비이므로, 원칙상 여기서는 세금, 즉 ‘국가가 국민에 대하여 반대급부 없이 강제적으로 걷는 돈’이 지불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금은 노동자를 제외한 여러 자산계급들만이 지불할 수 있고, 이윤·이자·지대는 잉여가치의 분할형태이므로 궁극적으로 총조세는 총잉여가치로부터 지불될 수밖에 없다.

  <그림 3> 생산과 분배에서 가치의 존재

그렇다면 자본가는 이러한 세금지불을 받아들일 것인가? 어쨌든 현재 OECD 나라들에서 총부가가치의 평균 30% 이상을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쥔 자본가가 세금의 지불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용인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의 기능이 자본가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의 기능은 첫째, 치안·국방 등과 같은 기본적인 사회질서 유지(police), 둘째, 도로·항만 등 경제적 인프라의 건설·유지·보수, 셋째, 의료·교육 등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 구축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로 국가의 사회질서 유지 기능은 자본 활동의 일반적 조건을 개선해줄 뿐만 아니라 자본가와 그 가족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점에서 자본은 거기에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불할 용의를 갖게 된다. 국가의 이 기능이 잘 이행될수록 자본가는 생활비에 드는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사회적 인프라 구축이라는 국가의 다른 기능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잘 닦인 도로는 동일한 양의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데 드는 시간은 물론 그에 필요한 불변자본(예컨대 운송용 트럭)의 양도 줄여줄 것이며, 훌륭한 국민의료체계는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을 크게 낮춰 자본가가 동일한 양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데 드는 가변자본의 양을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이상과 같은 국가의 기능들에 드는 비용은, 만약 국가가 그런 기능들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자본 스스로 어떤 식으로든 지불해야 할 것이므로, 더욱이 그런 기능들은 개별 자본들에 의해 분산적으로 수행되었을 때보다 국가에 의해 사회 전체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훨씬 적은 비용을 들일 것이므로, 전체로서의 자본가가 총잉여가치의 일부를 국가에 지불해 그러한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게 그들 모두에게 이득인 셈이다. 이윤율의 관점에서 다시 표현하면, 한 사회의 총자본이 주어진 기간 동안 일정한 양의 총이윤(=총잉여가치)을 얻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총자본량(=C+V)이 국가의 적절한 기능이 개입할 경우 줄어든다는 것이다. (김공회 2012: 448-49)

국가의 경제적 기능을 위와 같이 파악하면, 흔히 ‘복지국가’라고 하는 것은 주로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련이 있는 세 번째 기능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별다른 지시가 없으면 국가를 이러한 역할과 관련해서 고찰하겠다. 그런데ᅠ여기에서 세 가지 사항이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복지국가가 총자본의 이윤율을 높여준다고는 해도, 보통 자본가들이 복지국가 또는 복지제도의 확대에 찬성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전체로서의 자본과 개별 자본가들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국민들이 특정 재화나 서비스를 값싸고 쉽게 소비할 수 있게 한다면 특정 산업이 정부의 지원 아래 육성될 것인 반면 다른 어떤 산업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둘째, 실제 현실에서는 여러 자산계급들 외에 노동자도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노동력 재생산비용 이상의 임금을 사전에 자본가로부터 지급받았음을 의미할 뿐이므로, ‘세금은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분이다’라는 우리의 명제를 손상시키지 않는다.5 셋째, 원리적으로 노동자는 국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공공병원을 짓고 공공의료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그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자본이 임금지급이나 이러저러한 사내 복지로써 충당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되기 이전엔 회사 차원에서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선진국 중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그러하다. 이후 두 절은 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항을 실마리로 해서 풀어나가 보겠다.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복지국가가 무엇이길래...

모든 세금이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이고, 노동자가 세금과 국가의 경제적 기능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면, 노동자들은 전면적인 복지국가 도입을, 그리하여 국가의 적극적 증세를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복지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중에 나오는 ‘노동자는ᅠ복지국가 그 자체에 대해 중립적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반박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노동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가가 세금을 걷어 부랑자나 빈민, 노인 같은 경제적 무능력자들을 위해 쓴다면 그것이 진보고 좋은 일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원리적으로 보면, 이런 이들에 대한 관리도 국가가 하지 않는다면 자본 스스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의 관리는 한편으로 사회질서 유지의 일환으로서 자본의 재생산비용을 낮출 뿐만 아니라 산업예비군 관리라는 측면도 있어서 노동력 가치(=임금)를 일정 수준 이하에 묶어두는 기능도 동시에 수행한다. 사실 자본의 이러한 필요는 국가의 논리적 도입과 역사적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한편에서는 오로지 자본재생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진행되는 일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의 공공선 증진과 진보에 (뜻하지 않게) 기여할 수도 있다.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진보성이라고 한 것도 이런 점을 가리킨 것이었다. 어쨌든 주로 노동력의 재생산, 그리하여 삶의 재생산에 필요한 일들의 일부를 국가가 세금을 걷어 공적 방식으로 수행한다면,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 훨씬 더 보편적인 성격을 갖기는 할 것이고, 이 보편성은 비노동자(실업자 및 기타 임노동불가능자)도 포괄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한 공적 방식에 따른 노동력 재생산은 훨씬 더 안정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본의 요구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국가의 고유한 기능이라고 보긴 어렵다. 즉 자본의 입장에서 이러한 안정성은 그 자체로 노동력 가치를 낮출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나아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는 삶 자체의 안정성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노동자는 평생 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원칙상 임금은 노동자의 은퇴후 생활비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자 개개인이 각자의 삶을 철두철미하게 조직해 은퇴 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별 탈 없이 유지시키기는 쉽지 않다. 이때 국가가 강제적인ᅠ공적 연금제도를 운영한다면, 노후에 대한 걱정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이러한 안도감은 삶을 편안하게, 그리하여 세상을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국민의료보험제도나 의무교육제도 등도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복지는 인권이다.

이렇게 복지국가는 원리적으로 자본의 재생산을 더 쉽게 만들고 거기 필요한 비용을 줄여주는 노릇을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일정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복지국가의 이러한 상반된 성격은 그에 필요한 비용을 누가 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낳기도 하는데─물론 앞에서 모든 세금=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라고 했으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원론적 답변은 가지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일단 지금 우리는 복지국가가 갖는 ‘진보적’ 성격은 당분간 무시하고 단순화를 위해 우리 사회가 자본가와 노동자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즉 우리의 관심을 경제적 차원에만 한정시키면서 <그림 4>를 보자. (가)의 선분 전체는 사회 전체의 총부가가치, 즉 총노동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가변자본(=임금, a+b 부분)과 잉여가치(=이윤, c 부분)로 나뉘어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그들의 수입으로 각각 귀속되는데, 특히 노동자는 b 부분만큼을 의료비로 쓴다고 가정하자. 그가 이를 자신의 임금으로써 조달하든 자본가로부터 현물로(예: 회사가 운영하는 병원을 통해) 받든 상관없다. 그런데 이때 국가가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면 어떻게 될까? (가)와 (나)를 비교해보자. 이제 기존에 노동자에게 지급되던 의료비에 해당하는 부분은 자본가에겐 직접적으로 노동력 가치를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의료보험제도 유지를 위한 세금을 국가에 납부할 뿐이다. 또한 과거 개별적으로 처리되던 비용들이 사회적으로 모여 규모의 경제를 내면 총의료비용이 줄어들 것인데(b→b1), 이는 곧 총가변자본의 축소를 의미한다(a+b→a+b1). 따라서 이제 노동자의 임금은 a로 축소되고, 의료보험제도를 위해 필요한 세금총액 b1은 자본가가 국가에 부담하게 된다. 물론 이는 자본가가 직접 납부할 수도 있고, 그것의 일부 또는 전부를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한 뒤 노동자로 하여금 (소득세나 의료보험료 등의 형태로) 납부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각각의 방식이 갖는 상이한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실질은 변함이 없다.

  <그림 4> 공적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따른 노동력가치 저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총노동시간이 불변인 한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낮춰 잉여가치의 크기를 증가시킨다는 점이다(c→c+b2). 최근 보수진영 일각에서 나오는 복지확대론의 기저엔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최근 우익 진영의 복지확대론은 자본수익성의 전반적 저하에 따른 총자본의 대응이다. 복지(국가)가 정녕 이런 것이라면, 노동자는 그에 대해 중립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노동력 재생산에 대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복지국가가 도입된다고 해서 반드시 임금수준이 오르고 노동자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물론 공적 의료보험제도 덕분에 줄어든 가변자본(b2)이 전부 잉여가치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절약분의 일부 또는 전부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요구의 결과 노동자에게 돌아가 실질임금 상승을 낳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노동시간의 단축에 따라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런 결과들은, 적절히 타협되기만 하면 잉여가치 증가와도 공존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복지국가에 대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범국민적’ 합의의 경제적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고찰은 왜 복지국가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보다는 ‘어떤 복지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높이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복지국가를 통해서만 달성되는 진보는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기술진보 및 생산성 증대가 있을 때 그 과실의 일부를 노동자가 전유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요컨대, 위 예에서의 실질임금 상승이나 노동시간 단축은 복지국가 그 자체의 미덕은 아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차원에서) 복지국가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진보성은 무엇일까? 앞서 밝혔듯 복지국가란 무엇보다 노동력 재생산의 일부를 국가가 공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통 노동력의 재생산은 임금을 수단으로 한 소비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복지국가란 (노동자의) 소비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제도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비할 수밖에 없는 재화나 서비스에서부터 도입되기 마련이다. 교육, 보육, 의료, 노후보장 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과거에 개인은 의료서비스의 대가로 병원에 직접 돈을 냈어야 했지만,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면 그 지불 주체가 국가로 바뀐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전에 개인들이 국가에 세금(또는 의료보험료)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러한 지불방식 및 지불주체의 변화 자체엔 진보적인 요소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국가가 개인의 주요한 소비항목의 조달에 개입함으로써 해당 상품의 생산과 공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란 역사적으로 특수한 계급관계, 곧 자본-임노동의 생산관계에 입각해 있고, 자본주의를 변혁한다는 것은 바로 그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변혁운동은 생산영역에서의 계급투쟁에 각별한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영역에서는 기계를 멈추고 자본가의 양보도 강요해낼 수 있는 단결된 노동자라도 임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면 의도가 뻔한 광고에조차 속아 넘어가는 무기력하고 개별화된 소비자로 전락하고 만다. ‘소비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생산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 대체로 임금인상과 다소간의 노동관행 개선에 머물러 왔듯이 제품 품질이나 기타 소비자 권리의 약간의 향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공적인 계급투쟁의 결과 이루어진 임금인상은 더 많은 소비로,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관계망의 심화와 확장으로, 노동자의 그 관계망으로의 더 철저한 종속으로 귀결되기가 일쑤다.

이렇게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적 소비영역은 급속도로 팽창해 나갔지만, ‘소비자’가 생산 및 생산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복지국가 하에서 국가가 몇몇 소비영역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나아가 수요 자체를 강제로 만들어 나감에 따라, 곧 ‘독점적 수요자’로 등장함에 따라 국가가 해당 품목의 생산 그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예컨대 국민의료보험 제도의 도입과 함께 국가는 보건의료산업 전체를 통제하고 그 발달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의사와 약사들을 (준)공무원화하고 보건의료 관련 연구활동을 국가주도로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산업 전체를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경제에서 복지국가가 갖는 진보적인 의의이며, 역사적으로 그것은 복지국가 특유의 힘이었다. 이러한 힘은 지금처럼 노동자 계급의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전통적인 노조를 통한 운동이 파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떠오른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료보험 제도의 도입이 이러한 기능을 별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보건의료산업, 특히 대형 민간병원과 민간보험·제약 산업을 팽창시켰을 뿐이고, 의사와 약사는 국민건강보험 도입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 사회의 ‘특권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복지국가인가’라는 질문의 중요성이 다시금 절감된다. 흔히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하에서의 복지국가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단계’라고들 하는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요구가 단순한 인도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진보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지국가가 이상과 같은 의의를 가질 때뿐이다.

증세의 의의: 잉여가치와 총노동에 대한 공적 통제의 확대

복지국가, 좀 더 개념적으로는 국가에 의한 노동력 재생산의 공적 통제가 위와 같은 의의를 갖는다면, 이를 위한 증세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인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많은 ‘합리적인’ 논자들이 저부담-저복지와 고부담-고복지는 선악의 관점에서 파악해서는 안 되고, 그러한 복지체제(regime)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기에 인위적으로 바꾸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 중 몇몇은 복지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로부터 이것은, 하나의 제도집합으로서의 ‘복지체제’ 자체에 대해선 타당할지 몰라도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제한성 극복에 있어 복지국가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다른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 세금을 많이 걷어 국가가 노동력 재생산을 포함한 경제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통제를 가하는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다시 강조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되려면 우리 모두의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더 진보적인 것이다.

원리적으로 세금이란 잉여가치의 공제분으로서 그 자체로 잉여가치의 일부에 대한 공적 통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세금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일부가 비시장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공급될 것이므로, 세금의 증대는 임금의 축소로 흔히 연결된다. 결국 더 많은 세금은 잉여가치, 나아가 총노동에 대한 더 많은 통제인 셈이다. 물론 이 통제가 진보적 의미를 갖는 것은, 세금을 매개로 생산 영역에 공적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요즘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특히 부각되는 세금의 소득 재분배 기능은 인도적인 차원에서는 중요하지만 자본주의 극복에는 별 효험이 없다. 이러한 조건까지도 충족될 때 비로소, 더 많은 세금을 통한 국가의 더 많은 경제적 역할이 진정으로 진보적인 의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를 분배의 영역에서 통제하고, 둘째, 생산의 영역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자본을 통제함을 의미한다. 생산과 분배라는 이중의 차원에서 진보적인 성격을 발휘하는 것이다.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피케티(Thomas Piketty)의 중요한 한계도, 그가 조세의 이러한 의의를 거의 무시한 채 그것을 단순히 소득분배의 측면에서만 인식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거둬들인 세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매우 중요한 차원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6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생산과 분배의 양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통제는 생산의 차원에서(만) 주로 사고되는 경향이 있었고, 기업과 산업의 국유화는 그 최고 형태였다. 그런데 산업 국유화는 대중에게 (어떻게) 이로운가? 신자유주의의 다른 말이 민영화임을 우리는 안다. 서유럽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에도 1997년 외환금융위기 이후 민영화 물결이 몇 차례 몰아쳤고, 이러한 투쟁에서 운동진영은 국유화된 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질 경우 해당 산업이 공급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오를 것임을 들어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다. 즉 산업이 국유화되면 해당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에 이윤이 포함되지 않을 것이기에 가격이 싸고, 이것은 그 자체로 대중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다.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한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한 위와 같은 생각은 사실 올바른 것이 아니다. 본래 상품의 가치는 거기 들어간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며, 생산을 조직하는 주체가 민간인가 국가인가 하는 것은 거기서 나오는 상품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국유산업에서 상품의 가격을 책정할 때 ‘이윤’에 해당하는 부분을 뺀다는 것은 상품의 가격을 그 가치 이하로 매긴다는 것일 따름이다. 물론 이럴 경우 주어진 상품이 대중에게 더 싸게 공급된다는 겉보기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국유산업들이 대체로 필수품 성격이 있는 재화·서비스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윤’ 부분까지 가격에 고려되어도 그에 대한 실질소비량이 유지되는 수준에서 임금이 조정(=상승)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윤’을 포함하지 않아 값싼 국유산업의 생산물들이 노동자에게 각별히 이로울 까닭은 없다. 이를 일반화하면, 노동자는 물가에 대하여 중립적이다(cf. EM 2013).

오히려 이러한 가격하락은 자본에 이롭다. <그림 5>는 이를 쉽게 보여준다. (가)를 하나의 특정 산업, 예컨대 전력산업이라고 하고, (나)를 그 외의 모든 산업이라고 하자. (i)은 이 모두가 민간에 의해 소유되고 운영되는 경우다. 하첨자를 무시하면, 각 산업에서는 C만큼의 물적요소에 V+S만큼의 인적요소(=총노동)가 덧붙여져 C+V+S의 가격을 갖는 상품이 생산될 것이다. 여기서 V는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을, S는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을 대표한다. 단, 여기서 상품의 가치(=가격)는 각 상품을 생산하는 기술적 조건만을 온전하게 반영한다고 하자. 즉 독점 등의 역할은 배제하자. 이제 (가) 부문이 국유화되는 경우를 생산해보자. 이를 통해 전력생산부문에 공공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자본이 아니므로, 이제 전기의 가격은 C1+V1+S1이 아니라 C1+V1으로 책정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기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생산의 기술적 조건은 앞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며, 여전히 거기에선 V1+S1부가가치생산된다. 한편 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전기 가격의 하락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므로, 모든 산업에서 그 하락분만큼의 임금하락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하여 (ii)에서 V2′가 (i)에 비하여 정확히 S1만큼 줄어든다(V2′=V2-S1).7 이 가변자본의 감소분은 다른 조건에 변동이 없는 한 정확히 (나)의 이윤으로 산입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서 이윤총액은 S2′=S1+S2가 된다.

  <그림 5> 산업국유화에 따른 공공요금 책정의 효과

다시 말해, 경제의 일부가 국유화되었으나, 전체 자본가가 얻어가는 총이윤의 양은 불변인 것이다. (i)의 경우엔 (가)의 자본가가 S1, (나)의 자본가가 S2만큼의 이윤을 얻었지만, 이제 (나)의 자본가가 S1+S2를 모두 가져간다. 즉 교환·분배영역에서 잘못된 가격설정으로 국가생산부문에서 생산된 잉여가 고스란히 자본가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 경우 (가) 부문은 국유화되었지만 거기서 생산되는 잉여─총노동 중에서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잉여. 노동자들은 과거와 똑같이 8시간 일해서 4시간어치의 임금만을 얻어갈 것인데(=잉여가치율 100% 가정. 곧 V=S), 이때 그들은 전기의 가격이 어떻게 책정되든 상관없이 여전히 4시간의 ‘부불노동’을 하는 것이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제를 가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겠다. 첫째, 생산 내부에서의 통제다. 극단적으로 말해, 국유화된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잉여노동을 하지 않도록 그들의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생산량을 종전과 같은 수준으로 맞추려면 전보다 2배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할 것이고, 노동시간 단축에도 불구하고 노동력 재생산비용은 불변이라고 가정하면 지출될 총임금이 종전의 2배가 되어, (가)에서 상품가격이 C+V로 책정되어도 이 가격은 상품의 총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다(V=2V1=V1+S1이므로). 결국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해당 산업을 진보적으로 재편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이러한 재편, 곧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이 단결된 역량을 발휘하는 한 타 (민간) 산업에도 진보적인 영향─현재의 예에선 노동시간 단축─을 미칠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한 사정에 따라 (가)의 노동시간이 4시간이 아니라 6시간 등으로 절충적으로 책정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우리의 분석을 본질적으로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국유산업에서 생산되는 ‘잉여’에 대한 두 번째 좀 더 ‘온건한’ 통제방식은, 당분간 자본의 구성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가격은 상품의 가치대로 받는 것이다. 즉 <그림 5>-(ii)의 (가)에서 생산된 전기의 가격을 C1+V1이 아닌 C1+V1+S1으로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가는 마치 민간자본과 같이 가격책정을 했지만 실제 자본이 아니므로 S1을 곧장 ‘이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저하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나)에서의 임금하락도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가 취할 S1은, 전기 가격이 C1+V1일 때와 비교하면, 자본가의 총이윤으로부터 공제분을 이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교환·분배영역에서 가격책정 전략을 통하여 종전 총잉여가치(S1+S2)의 일부(S1)를 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과 비슷한 성격이 있으며, 이제 정부는 이를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위한 전기 무상공급 등이 그것이다. 흔히 진보진영에서는 공공요금은 무조건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상으로부터 낮은 공공요금이란 결과적으로 이윤의 공적 통제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임이 드러난다.8 오히려 적정 수준의 공공요금을 유지하면서, 그러한 가격을 갖는 공공재화·서비스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임금인상을 압박하는 것이 올바른 운동의 방향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논의를 짤막하게 정리해 보자. 우리는 복지국가 일반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변혁시킬 수 있는 복지국가만이 진보적인 입장에서 옹호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세란 바로 이러한 복지국가를 위한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럴 때에만 바람직하며, 기본적으로 세금이란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분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자체로 분배의 영역에서 잉여가치(=이윤+이자+지대)에 대한 더 많은 공적 통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편 지난 세기에 그러한 통제의 최고형태가 바로 특정 산업의 생산 자체를 아예 국유화·사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생산영역에서의 ‘궁극적인’ 조치가 분배영역에서의 면밀한 가격통제 등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 진보적 의의가 퇴색될 수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이제 다음 절에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불붙고 있는 구체적인 증세의 방법론들을 일별하면서 증세에서 견지할 진보적 원칙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증세의 방법론: 중심 잡기의 중요성

2절에서 밝힌 대로, 우리나라는 현재 다른 선진 자본주의국들에 비하면 조세규모가 매우 작은 편이고, 현재보다 약 50% 정도는 세금을 더 걷어야 OECD 평균에 닿을 상황이다. 그러면 이를 어떤 식으로 실행할 것인가? 어떤 증세 방식이 노동자와 대중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면서도 진보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최근 한국사회에서 증세와 관련해서 나오는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현재 집권한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인 새누리당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복지확충은 필요하지만 그에 필요한 재원마련은 증세가 없어도 가능하다는 ‘증세 없는 복지’론이다. 여기서 ‘증세’란 ‘세율 인상’을 뜻한다. 이와 정반대 극단에서 적극적인 증세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본격적인 복지국가로 진입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는 오직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가야 하므로 보편적 시민증세 형태로 증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보편증세’론이라고 하자. 셋째로, 현행 세제는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고 대중의 삶이 파탄나는 데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있기 때문에, 증세도 부자들부터 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들은 조세정의를 먼저 세워야 하며 복지에 대해선 단계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조세정의’론으로 이름붙일 수 있다.

각각은 그 나름의 타당성과 장단점이 있다. 먼저 ‘보편증세’론을 보면, 이 입장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오건호는 “복지를 위한 증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회복지세를 도입하자”라면서 이러한 보편증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지금까지 보편복지진영이 요구하는 증세 방안은 소수 상위계층과 대기업을 대상으로 삼는 ‘부자증세’였다. 이는 사회양극화 시대에 복지재정 책임이 누구에게 가장 큰 지를 선명히 드러내는 의의는 지닌다. 하지만 시민들이 스스로 납세 책임을 구현하면서 부자, 대기업에게 증세를 요구할 경우 증세의 사회적 압박은 훨씬 강력해 질 것이다. (오건호 2015: 16)

이 입장은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등과 같은 단체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기술적으로 꽤 정교하게 세공되었으면서도 ‘복지국가’라는 목표를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증세’라는 전략 자체가 얼마나 유효할지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차이가 아닌 소득수준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각 집단에 속하는 이들에게 상이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낳을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도 숙고해볼 여지가 많다.

다음으로 범진보진영 내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조세정의’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한국인의 복지와 증세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할 때 부자증세를 통한 조세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1차 전략이 되어야 하며, 소위 ‘보편적 증세’를 통한 전면적인 증세는 적절한 조건과 상황이 도래한 시점에서 선택할 2차 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단중기적인 시점에서 우리가 실현하고자하는 핵심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필요한 재원 마련은 과세기반을 확충하고 재정지출구조를 바꾸며 무엇보다 부자증세를 실현함으로써도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기에, 보편적 증세까지 진보진영이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태수 2015: 10)

‘조세정의’론은 언뜻 보아 계급적 입장에 입각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그들이 ‘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갖는다. 과연 누가 ‘부자’인가? 2015년 현재 1억 5천만 원을 넘는 소득에 대하여 소득세 최고세율(38%)이 적용되고 있는데, 연소득 1억 5천만 원 이상이면 부자인가? 또는 올해 초 ‘연말정산 파동’에서 정부가 세부담 감소와 증가의 경계로 삼았던 연소득 5천5백만 원 이상이면 고소득자인가? 이와 같은 다소 소모적인 논란 때문에 현재 증세와 관련된 논의는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고, ‘조세정의’론도 그 외관상 정당성을 빛내줄 수 있는 내실을 키우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진실은, 부자가 누구인지를 확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부자가 누구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로 하여금 세금을 더 내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압박수단을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리라.

이렇게 장단점을 따지다 보면, 증세도 않고 복지지출을 늘리는 것은 ‘궤변’이라고 비난받는 박근혜 표 ‘증세 없는 복지’론도 그 나름의 장단점과 의의가 있음이 드러난다. 현 정권이 추구하듯이, 50조원(2013년 기준 국세 33.8조원, 지방세 16.1조원)에 이르는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하고 전체 경제의 20% 안팎이라는 지하경제를 제대로 양성화하면 세율 인상 없이도 상당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맞다. 뿐만 아니라 조세분야 외부의 다른 정책에 의해 임금이 전반적으로 인상되거나 소득분배가 개선되어도 ‘증세 없는 복지’는 달성이 가능하다. 예컨대 임금인상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기업이윤의 감소를 의미하므로 법인세수를 감소시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소득세수와 소비세수는 증가할 것이므로 전체적인 세수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러한 임금인상은 복지수요도 줄일 것이므로, 약간의 임금인상으로도 상당한 ‘복지’가 달성 가능하다.9

이렇게 ‘증세 없는 복지’론은, 비록 그 출발부터 진보진영의 조롱거리였지만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진영 입장에서도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하고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세수기반을 확충할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 표 ‘증세 없는 복지’론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경제를 진보적으로 재편하겠다는 비전 없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 정부는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세제를 합리화하고 여기서 나온 추가적 세수를 복지에 쓰겠다는 그 나름대로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올초 연말정산에서 그 우선순위를 그릇되게 설정함으로써 호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정부는 부자들과 재벌 대기업에 돌아가는 다양한 혜택들은 무시한 채, 상당수의 서민들에게 적용되는 교육비와 의료비 등의 공제를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우선순위에서도 잘못된 것이었지만, 교육비·의료비 공제제도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국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절에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도입된, 그러니까 그 자체로 ‘복지’ 성격이 있는 공제제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제항목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오직 그것을 능가하는 정도의 복지제도의 도입이 수반되었을 때뿐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올초 ‘연말정산 대란’ 사태 당시 들끓던 대중적 분노를 ‘이기주의’로만 치부하면서 ‘이 정도 증세도 못 받아들이는가’라며 각을 세웠던 일부 진보진영 논자들은 충분히 사려 깊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경제의 진보적 재편을 위한 비전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증세 없는 복지’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진보진영의 다른 두 입장, 곧 ‘보편증세’론과 ‘부자증세’론도 대체로 그렇다. 이런 한계가 단순한 ‘공백’이기만 하다면 앞으로 채워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입장들은 소득 범주의 물신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론적·실천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주지하듯이 경제적 범주의 물신화를 비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서 임노동자의 노동을 실체로 하는 상품가치가 분배의 영역에서는 생산을 둘러싼 각 경제적 계급들의 수입(=소득)─노동자의 임금, 자본가의 이윤 또는 이자, 지주의 지대─으로 분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꼬집는다. 이에 따라 일반인은 물론이고 경제를 이론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학자들조차도 그들의 일상적 감각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후자(분배 영역의 범주들)를 중심으로 생산과 상품가치도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상품가치는 임금·이윤·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계급들이 그 생산에의 기여분에 따라 임금·이윤·지대를 수입으로 챙겨가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는 관념이 생산된다. 당연히 이러한 외관(appearance)은 자본-임노동 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특수한 조건과 거기서 벌어지는 착취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누구의 주머니에서 추가적인 세금을 뽑아내야 하는가’, ‘복지국가의 비용을 누가 대야 하는가’ 등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증세논의에서 상이한 입장들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당위론적 질문들은 모두 소득범주의 물신화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그 분석적·비판적 지평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노동자의 소득이므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은, ‘우리 손으로, 우리의 소득으로 만드는 복지국가만이 진짜 복지국가다’라는 주장만큼이나 허무맹랑한 것이다. 과연 노동자의 소득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고정된 크기인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가르치는 대로 만약 노동자의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고 이것이 실질치의 차원에서(in real term) 당분간 일정하다고 한다면, 이제껏 우리가 가정했던 대로 노동자에 대한 증세는 곧 명목임금의 상승을 야기하지 않겠는가? 나아가, 소득이 크면 무조건 좋은가? 더 많은 소득(=임금)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굴레에의 더 강고한 포섭이자 더 많은 자본주의적 소비를 의미할 뿐이라면, 우리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소득 보장과 소득재분배를 위한 ‘진보적’ 조치들, 자본과 부자들의 복지비용 지불 등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자본주의의 사멸은 잉여가치뿐 아니라 임금이라는 범주의 소멸까지도 의미하지 않는가? 이 소멸은 자본-임노동 관계의 파괴적인 해체를 통해서만 달성될 것인가? 혹시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복지국가를 통해 서서히 사멸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자, 조세가 분배의 일부이고, 경제의 분배상태라는 것이 생산영역에서의 자본-임노동관계를 정점으로 한 여러 경제적 계급관계들의 반영이라면, 조세의 규모와 구성, 그리고 조세부담의 계급간 배분에도 그러한 계급역관계가 깃들어있을 것이다. 현재 소득과 조세의 일정한 분배상태가 주어져 있고, 일정액의 증세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이상에서 우리 논의에 따르면 어떤 식으로 조달해도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법인세 인상이나 최고소득세율 인상 등의 형태로 자본과 부자들로부터 뽑아내든, 저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면세 축소나 소비세 인상 등의 형태로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뽑아내든, 궁극적으로 이 추가적인 세금은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일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엔 공제가 직접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엔 개인소득·소비세 인상→임금인상→이윤축소와 같은 식으로 간접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증세 그 자체의 실현 여부이지, 그 직접적인 지불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냐는 부차적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증세란 총자본과 그 분파에 대한 총노동, 나아가 사회전체의 투쟁이다. 하지만 이 투쟁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증세를 이뤄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모인 세수가 잉여가치의 실질적인 통제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변혁을 위해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한 투쟁의 목표가 된다.

물론 현실의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를 포함한 개인에 대한 소비세 인상이 임금인상 및 이윤축소로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의 힘이 그러한 연쇄를 가능케 할 만큼 크지 않다면 말이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는 증세의 직접적 부담책임이 누구에게 지워지느냐도 비로소 중요한 고려사항이 된다. 즉 자본에 대한 직접증세는 잉여가치의 축소일 수 있는 반면, 개인에 대한 소비세 인상은 개인의 삶의 수준 저하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10 계급역관계가 노동자 입장에서 열세에 있을 때, 생산성 상승에 상승하는 정도의 임금인상도 관철시켜내지 못하는데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증세는 실현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그것이 덜 어려울 수는 있다. 임노동이라는 사회의 특수한 이해관계로서 자본과 직접 맞붙어야 하는 임금투쟁과는 달리 자본(과 부자)에 대한 증세는 ‘국민’과 ‘사회’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통한 ‘공공선’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을 압박할 수 있는 장(場)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공정과세’론이 대표하는 입장이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일 따름이다.11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경제 전체의 메커니즘, 그 안에서 맺어지는 경제사회적 계급관계의 양상 등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제출되고 있는 기존의 논의에서는 바로 이런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소득 범주를 물신화하지 않으면서, 즉 추가적인 세금을 누구의 주머니로부터 뽑아낼 것인가 하는 지극히 속류적인 차원으로 문제를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증세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나아가 그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위력적인 철폐도구로 전환시킬 계획들을 고민해야 한다.

맺음말: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증세 논의?

증세에 대한 이상과 같은 의의부여는 노동계급 운동들이 세금에 대해 취해왔던 기존의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그간 진보진영은 적극적인 복지국가로의 진입을 요구하면서도, 거의 일관되게 자기 자신들에 대한 증세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소득세나 소비세의 인상이 자신들의 삶의 수준을 압박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증세는 곧 도저히 노동자라고 볼 수 없는 부유한 개인들에 대한 소득과세(최고소득세율 인상, 금융소득과세 등), 또는 자본에 대한 직접 과세, 곧 법인세 인상이나 기타 재산세 인상에 다름 아니었다.12 그러나 만약 이들이, 예컨대 법인세 인상분의 일부를 자본이 상품 가격을 통해 소비자, 곧 노동자에게 전가시킬 수도 있음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어떨까? 그들은 법인세 인상에도 반대할 것인가?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자발적 증세 운동을 펼치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에서 지적했듯, 현재와 같은 계급역관계의 열세 상황에서는 ‘국민’과 ‘공공선’, 필요에 따라선 ‘사회적 책임’ 등의 이름으로 거국적으로 자본가와 그 주변 계급들을 압박하는 것이 우월한 전략이다. 그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간 노동계급 운동들도 앞서 지적한 소득에 대한 물신주의적 이해에 입각해 자신들의 입장을 지극히 협소한 지반 위에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주의에서 벗어나, 한편으론 경제 전체의 메커니즘 속에서 분배와 조세 문제를 조망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논의한 조세와 국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진보적 의의를 떠올리면서, 현재의 경제 체제를 어떻게 변혁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진영은 하루빨리 조세와 관련된 비전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관철해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주

1)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보통의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급여의 9%를 국민연금으로 적립하는데, 이 중 절반(4.5%)은 사업주가 부담한다. 국민부담률에 고려되는 ‘사회보장기여금’에는 이러한 사업주 부담분도 포함된다.

2)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게 1989년이고, 국민연금제도도 1988년에 도입된 뒤 단계적으로 그 적용범위를 넓혀 1990년대 후반에 현재와 같은 꼴을 갖추었다.

3) 개인소득세 분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개인소득세의 규모가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개인소득액 자체가 작거나 개인소득세율이 낮음을, 또는 이 둘 모두임을 뜻한다. 또한 소득세율은 누진적 구조를 갖기 때문에 동일한 소득총액에 대해서도 소득분배의 양상에 따라 상이한 소득세수가 나올 수 있다. 이 밖에 각종 공제제도도 영향을 끼친다.

4) 중간에 금융기관이 개입해 일정한 수수료를 받지만, 궁극적으로 이자의 수취자는 잉여화폐소유자들이다. 다만 현대 경제에서 그러한 잉여화폐소유자는 개인뿐 아니라 법인기업이나 금융기관 자신, 또는 정부일 수도 있다.

5) 이러한 다소 번거로운 절차, 즉 자본으로부터 곧장 세금을 걷는 게 아니라 ‘임금인상에 뒤이은 보편적 조세징수’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갖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세금을 지불하는 ‘정상시민’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정치 영역에서의 보통선거제도에 해당하는 경제 영역의 기제가 된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김공회(2012: 458-59) 참조.

6) 그런데 엄밀히 말해 피케티의 경우, 높은 소득세의 부과는 세수증대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고, 실제로 현저한 세수증대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그에 따르면 고소득자에 대한 세율이 살인적으로 높아지면, 애초 그러한 고소득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케티가 세출, 곧 정부의 지출 측면에 대해서는 면밀한 분석을 비워두는 까닭이기도 하다.

7) 이에 따라 전기생산부문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 즉 V1도 줄어들 것이나, 이는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무시하자.

8) ‘무상버스’ 등과 같은 ‘무상’ 시리즈도 그렇다. 노동자의 임금이 고정된 양이라고 가정할 수만 있다면 이는 곧 대중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할 테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전체 메커니즘을 고려하면 사정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제값을 받고, 그렇게 모인 재원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진보적인 방식일 수 있다.

9) 이런 점에서 ‘증세 없는 복지’론은 ‘임금이 복지다’라는 ‘소득주도성장론’과 묘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

10) 물론 전자의 경우에도 자본은 세부담 증가의 일부를 상품가격 인상으로 벌충할 수 있다. 이 또한 적절한 임금인상 등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노동자 및 개인의 삶의 저하를 의미한다.

11)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론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이론적 인식이 대중담론의 차원에서는 다양하게─특정한 유형의 증세‘론’으로─발화될 수 있다.

12) 어떤 이들은 오늘날 보통의 노동자들도 일정한 재산을 주택 등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재산세에 반대하기도 한다. 하태규(2015) 참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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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예산정책처(2015g), 『조세의 이해와 쟁점 (6) 조세지출』, 국회예산정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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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영·전수민(2014), 「노동소득분배율의 측정: 한국에 적합한 대안의 모색」, 『사회경제평론』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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