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운동은 기후정의 운동이다

[비문명의 역습]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체제 전환 운동,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가을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여러모로 세상은 흉흉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의 설렘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 선선한 바람을 견디다 못해 결국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어느덧 곁으로는 마스크를 벗은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들고, 은은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좌중을 휘어잡는다. 가만히 듣자니 어떤 이는 벌써 해외여행을 떠나 명품을 사 왔단다. 어떤 이는 ‘흠뻑 쇼’에도, ‘불꽃축제’에도 다녀왔단다. 재테크로 돈을 벌어 외제차를 산 이도 있다. 맥주 캔을 따는 소리, 질투와 부러움의 탄성들, 한낮의 푸름을 간직한 채 무르익는 저녁놀. 여전히 코로나19로 시름 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지만, 다행히(?) 여기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평온한 풍경은 그저 반복해서 속삭일 뿐이다. 드디어 재난이 끝났다고.

그러나 너무 평온해서 평온하지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들이 세간을 떠돌았다. 그러나 결국 세상은 이전의 일상을 되찾았다. 아니, 그 이전과 닮았지만 실은 더 안 좋은 세상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는 이 재앙을 겪고도, 돌봄·의료·교육을 민영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는 제가 살아남고자 벌려놓은 폭탄들을 이제는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수억의 사람이 4년 전처럼 월드컵에 열광하며 탄소를 내뿜는 동안, 수억의 사람이 기후재난으로 거처를 잃어간다. 곳곳에선 어김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도 대기오염이 우리들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지난 9월 24일 서울 도심에서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행진이 진행됐다.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제국적 생활양식에 익숙한 시민들이 좀처럼 체감하지 못했을 뿐, 인류는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재난 속에 있었다. 대재난은 대개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한 조각씩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코로나19 사태도 인류세 혹은 자본세가 잉태한 기후위기가 가져올 파국적 결말의 한 조각일 뿐이다. 실제로 21세기 이래 코로나 등 인수공통감염병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현상의 주원인으로는 기후변화 및 산림 파괴로 기존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과 인류 간의 낯선 접촉이 지목된다. 이상 고온으로 바이러스를 옮기는 매개체들의 활동성이 급증하고, 점점 잦아지는 기후재난들 역시 온갖 감염병·전염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많다.

물론 코로나19는 기후위기와 별개의 독립적 재난으로 여겨질 만큼 자극적인 스펙터클을 뽐냈다. 이는 코로나가 이전의 것들보다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인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북반구를 먼저 공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재난이 일상화된 곳에서는 엄청난 재난조차 더는 인류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반면 가장 잘 사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재난은 금세 아포칼립스를 연상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비상사태에도 멈추지 않던 생산시스템이 멈추고, 선진국 시민들, 심지어 셀럽들마저 코로나로 격리되는 장면은 충분히 극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는 평등하다’는 말이 대유행 초기 세간을 떠돌았던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내 진실이 드러났다. 제국들은 자국 시민에게 백신을 가장 먼저 보급하고 일상을 빠르게 회복했지만, 남반구의 고통은 점점 가중됐다. 심지어 제국 내부에서도 팬데믹 불평등은 이어졌다. 로버트 라이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공공정책 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원격근무가 가능한 이들’과 저임금 필수노동자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원격근무가 불가능한 이들’, ‘수입이 없어진 이들’, 그리고 코로나 이전부터 격리 및 수용된 이들, 즉 ‘잊힌 사람들’은 서로 다른 팬데믹을 경험했다. ‘원격근무가 가능한 노동자’에 비해 다른 세 유형은 뒤에 언급된 유형일수록 더 큰 고통을 겪었다. 이 세 유형에는 가난하고 비백인인 이들이 첫 유형보다 많았는데, 이들의 코로나 감염·사망률은 부유한 백인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아! 아직 언급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대자본가들과 대지주들의 팬데믹은 어땠던가?

2018년 세계보건기구는 “사스, 에볼라, 메르스 이후 조만간 팬데믹 질병 X가 출현할 것”이라 예측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이 평온한 일상에서 새로운 대재난들을 예측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한 번은 비극으로 나타났으니,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나타날까? 이 질문에 즉각 대답하기란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다. 이제부터 역사의 반복은 어떻게 나타나건 대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후재난의 최전선에 선 장애인들, 그리고 에코-에이블리즘

6차 대멸종은 단숨에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대멸종은 가장 약한 고리를 우선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지난여름, 한반도에 쏟아진 기록적 폭우가 주거 취약 계층에게 유난히 잔혹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평소에 더 취약한 이가 대멸종을 향해가는 재난마다 더 취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럼 장애인들은 기후위기의 전선에서 어디쯤 서 있을까? 특히 앞선 라이시의 분류에 따르면, ‘시설에 갇힌 잊힌 사람들’에 당연하게 속해 있는 중증장애인들은?

한국의 코로나19 첫 사망자는 청도대남병원 정신병동에 수용된 장애인이었다. 그리고 2020년 2월, 국내 첫 코로나19 집단감염도 이곳에서 발생했다. 입원한 정신장애인 104명 중 102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됐으며, 이 중 7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에도 라파엘의집, 신아재활원, 성락원 등 여러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집단감염이 이어졌다. 지난해 2월 기준, 코로나19 사망자 중 52.3%가 장애인시설을 포함한 집단거주시설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정부에게는 ‘코호트 격리’ 외에 딱히 대책이 없었다. 한편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비-시민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치였던 ‘긴급 탈시설’ 요구는 곧장 묵살됐다.

시설 바깥을 사는 장애인들 역시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 “장애인의 치명률은 전체 인구의 열 배 이상이었다. 위중증 환자·사망자 4명 중 1명이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은 고위험군, 집중관리군, PCR 우선순위 대상 그 어느 것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1) 재난 전부터 부족했던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격리에 들어간 장애인들에게 안정적으로 제공되기가 더 힘들어졌고, 발달장애인 돌봄에 대한 별다른 대안도 없이 장애인 교육 기관들은 문을 닫았다. 보호작업장 중 상당수가 임시 폐쇄되면서 36만 원가량의 월급마저 끊긴 장애인 노동자들도 꽤 있었다. 지난해 2월, 발달장애인 부모 1,17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기간 ‘자녀 지원을 위해 부모 중 한쪽이 직장을 관뒀다’는 답변이 20%를 넘었다.

  지난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대표해 문애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기후정의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그럼에도 코로나를 겪고 되찾은 평온한(?) 일상은 펜데믹 이전의 시스템을 여전히 장애인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탈시설, 활동지원서비스 등 각종 돌봄 체계의 확대, 공적 교육·의료 시스템에 대한 지원의 확대도 모두 예산 논리에 막혀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돌봄노동의 공공성을 담보해야 할 서울시사회서비스원마저 돌봄 노동자에 대한 탄압에, 그래서 이어지는 돌봄서비스의 양적·질적 축소에 앞장선다. 장애인들이 겪는 만성적인 빈곤과 열악한 주거환경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초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공간들 덕에 각종 접근권이 제한된 장애인들이 감염병뿐 아니라, 다양한 기후재난으로부터 유난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더 논할 것도 없다. 장애인들은 기후재난이 폭우, 가뭄, 폭염, 혹한, 화재 등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도 당연한 것처럼 이 모든 재난에서 최전선에 위치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그동안 기후정의 운동과 장애인 운동은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해 왔다. 장애인들에 대한 임금노동으로부터의 배제,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빈곤과 ‘불구화’가 기후위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참 아쉬운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장애인들이 기후정의 운동에 포함되지 못하는 동안, 국가도 기후위기 대응에서 장애인들을 당연한 것처럼 배제했다. 파리기후변화협정 비준 당사국 192개국 중 35개국만이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에서 장애인을 언급한다. 유엔은 기후위기가 장애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인정하면서도,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 장소를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곳으로 마련해 논란을 빚었다.

시민운동진영이라고 다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생태·환경 운동에서도 에코-에이블리즘(eco-ableism)이 횡행한다. 에코-에이블리즘은 생태주의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그 과정에서 장애인들을 배제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어떤 장애인은 빨대 없이는 물을 마실 수 없지만, 그저 ‘소비 습관의 변화’만을 강조하며 빨대 사용 자제를 촉구하거나, 기후재난 대응에서 장애인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등의 입장은 이미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에코-에이블리즘의 사례다. 기후재난의 효과를 자극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그것이 기후재난에서 기인한 것이건 아니건, 장애 자체를 ‘비극적인 것’, ‘사라져야 할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장애와 기후위기를 함께 논의하는 장들이 조금씩 마련되고 있지만, 이곳의 담론들 역시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 담론들은 대개 장애인들이 기후재난에서 입게 될 피해에만 주목하며, ‘기존 시스템 안에서’ 장애인들의 재난 대책을 안정적으로 갖추는 데 집중한다. 심지어 기후위기에 대한 근본 대응은 아예 장애계 바깥의 과제로 위임돼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위기에 더 잘 ‘적응’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치중한 담론들이 과연 기후위기로부터 장애인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체제 전환에 대한 요구 없이, “해수면이 높아지면 물에 뜨는 집을 만들겠다, 기후가 불안정하니까 스마트팜을 하고 전기 자동차를 만들자”(2) 따위의 대응에 집중하는 태도들이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처럼, 이러한 입장들 역시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9월 24일 서울 도심에서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행진이 진행됐다.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장애인 운동 안에서 이미 시작된 ‘우리들’의 체제 전환 운동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서 등장한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한다”는 구호가 기후위기 최전선에 놓인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으로 가닿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섣불리 좌절할 필요는 없다. 장애인들이 그동안 투쟁 현장에서 외쳐온 목소리들 속에서 기후정의 운동의 지향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현장들이 기후 문제를 딱히 직접 의식하지 않은 채 구성됐음에도 그렇다. 현재 진보적 장애인 운동계의 핵심 요구는 탈시설과 장애인의 지역사회로의 완전한 통합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난관에 부딪히는 가장 큰 이유는 시설 거주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설 거주 장애인의 가족들은 탈시설이 확대될 시, 이들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안게 될 것을 우려해 탈시설을 반대한다. 거주시설 노동자들 역시 시설이 폐쇄될 시,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시설을 유지하고자 한다. 심지어 시설 거주 장애인들 상당수도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불안해한다.

그런데 만약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주장하듯 안정적 활동지원서비스 제공 등을 위한 양질의 돌봄 일자리가 대폭 확대된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 거주시설 노동자들은 안정적으로 고용승계가 보장될 것이다. 장애인들의 자립도도 훨씬 높아질 것이고, 따라서 장애인 가족들의 돌봄 부담 역시 많이 경감될 것이다. 나아가 장애인들에게 적합한 교육, 의료, 주거, 이동 등의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마련된다면 어떨까? 이것들이 이윤 논리에 휘말려, 그 본 목적을 상실하지 않게끔 공공성이 제대로 확보된다면? 그때에도 장애인들은 지금처럼 가족들에게조차 ‘어딘가에 항상 가둬 보호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로만 여겨질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장애인 운동의 요구들은 이윤·성장 중심의 생산시스템에서는 결코 안정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후정의 운동의 체제 전환 요구에서처럼, 장애인을 포함한 민중들의 수요가 공적으로 파악되고, 여기에 맞게 사회가 일자리를 창출, 구성원들을 거기에 적절히 배치하는 민주적 시스템이 구축될 때만이 장애인 운동의 지향이 성취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보장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와 수탈, 그리고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장애인들에 대한 배제 속에서 성장해 온 자본으로부터 생산의 통제권을 민중의 손으로 탈취해 와야 한다.

이러한 기획이 꿈같은 소리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태 사회주의자 안드레아스 말름은 이와 같은 비판에 이렇게 반박한다. “우리는 언제나 비현실적이라느니, 이상주의자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시민들은 코로나 국면에서 [현 생산시스템을 멈추는] 비상 행동에 나서기를 망설였던가? 인류의 거의 절반이 팬데믹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했다.”(3) 말름의 대안에는 생산시스템의 통제권을 어떻게 인민의 손으로 탈취해 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전략이 부재한 등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비상사태에 맞서 현 생산시스템을 멈출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오늘 마로니에 공원에 펼쳐진 이 평온이 어떤 존재들의 착취와 수탈의 결과물이 아닌 채 새롭게 펼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라도 원할 때면 언제라도 이 일상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두말할 여지 없이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생산시스템의 변혁이 필요하다. 장애인 운동은 이미 의도치 않게 기후위기에 맞선 체제 전환의 혁명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 혁명을 시작한 이들은 장애인 운동계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리에게는 아직 역사를 다르게 반복할 기회가 남아있다. 체제 전환의 가능성은 저 멀리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이 체제와 어떠한 방식으로건 맞서 싸워온 투쟁 현장들에 담긴 생생한 목소리들 사이에 있다. 이젠 이 현장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1) 박주석, “장애인의 일상이 여전히 재난인 이유”, 《워커스》 2022.8.
(2) 채효정, “기후위기를 해결할 열쇠는 ‘돌봄’과 ‘저항’”, <복음과 상황>, 2022.8.
(3) 안드레아스 말름, 우석영·장석준 옮김,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마농지, 2021,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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