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민중재판 릴레이 인터뷰 3] 캐쉬 캘리 평화활동가

전쟁하는 정부에 세금을 낼 수 없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평화의 숨을 쉬는 여자, 캐쉬 캘리

캐쉬 캘리, 그이가 한국에 온다는 선전을 보았다. 그 숨 막히던 폭격 속에서도 그이는 얼굴에 평온한 웃음을 잃지 않았고, 언제나 온화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무슨 성자나 구도자의 얼굴이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얼굴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담스럽기만 했겠지. 왠지 가식적인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 그런 얼굴과는 다르다. 올 해로 나이 쉰하나가 되는 그이의 얼굴은 마치 소녀처럼 해맑았다. 물론 캐쉬도 폭격이 심하게 쏟아질 때에는 어깨를 움찔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했다, 갑자기 전기가 모두 나가 컴컴해 질 때에는 겨우 손전등을 켜고서 불안한 빛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겁이나 불안함 따위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것도 없이 늘 의연한 얼굴을 했다는 게 아니다. 캐쉬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곧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고, 심지어는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장난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이의 마음에 있는 평화는 어린 아이의 마음 그것이었다.

2004년 10월 13일 한국에 온 캐쉬 캘리를 만나.


나는 그이를 지난 해 3월에 처음 만났다. 이라크에 있던 ‘알 카리지’ 라는 숙소. 당시에는 아직 이라크 전쟁이 시작하기 전이었다.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은 솔직히 말해 제대로 짠 준비 없이 무작정 이라크로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제 분쟁 지역에 직접 들어가 평화활동이라는 것을 해 본 경험이라는 게 전혀 없었고, 사전 계획이라는 것 또한 막연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활동에 어떻게 의미를 둘 수 있을지, 그리고 실제 전쟁이 눈 앞으로 다가온 상태에서 그곳에서 어떤 활동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할 수 있을지 그 어느 것도 뚜렷한 게 없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그나마 모델로 삼은 외국의 단체가 ‘이라크평화팀( IPT)’였고, ‘광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두 단체에서 거의 대표 격을 맡고 있던 이가 바로 캐쉬 캘리였다.

캐쉬 캘리는 흔쾌히 우리 숙소를 방문해 주었고, 숙소 마루에서 팀원들을 상대로 한 작은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캐쉬가 들려준 어떤 이야기보다 캐쉬의 얼굴과 몸짓에 배어 있는 평화의 기운, 어린 아이와 같은 맑음 그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이는 1991년 걸프 전 때부터 이라크의 전쟁터로 들어가 온 몸으로 평화를 심는 일을 해 왔고, 그 뒤로 경제 제재로 죽어가는 이라크의 아이들을 아파하면서 꾸준한 평화활동을 해 왔다. 그 사이에 미국 정부로부터 스물여섯 차례 체포를 당하기도 했고, 전쟁을 하는 정부에 세금을 낼 수 없다 하여 23년 동안이나 세금을 내지 않는 불복종을 선택한 채 스스로도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러한 그이의 삶의 모습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을 잇달아 노벨평화상의 후보로 올려지기도 했다.

“1990년, 나는 이라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이라크’를 어떻게 쓰는지 정도나 알았죠. I, R, A, Q. 그리고 걸프 전쟁이 일어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라크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고, 기사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잠깐, 잠깐… 지금 미국이, 미국의 금전적 이득을 위해,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거잖아’ 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었고요. 나는 그 즈음에 평화주의자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평화주의자가 된다는 일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채식주의자는 식사를 할 때에라야 비로소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밥을 먹지 않는 동안에, 끼니와 끼니 사이에만 채식주의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마찬가지다, 평화주의자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만 평화를 말할 수 없고, 전쟁 때 전쟁에 맞서면서 비로소 평화를 몸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캐쉬 캘리를 다시 만난 건 2003년 4월 2일 다시 들어간 바그다드에서였다. 실제로 이라크 현지에 공습이 시작하기 이틀 전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은 모두 요르단으로 나와야 했다. 그 가운데에는 이라크에 끝까지 남아 이라크 민중과 전쟁을 함께 겪어야 한다는 팀원들과 공습이 눈앞에 다가온 만큼 가까운 이웃나라로 가서 난민구호 활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들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런 상황 속에서 완전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이라크를 벗어나자는 팀원이 있다면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은 요르단으로 나오게 되었고, 예상한 것처럼 정확히 이틀 뒤 바그다드에서 첫 공습이 시작했다. 지금껏 끝나지 않은 전쟁이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요르단으로 나오지 않고 이라크에 머물던 한국인으로는 한상진, 유은하, 배상현 씨 셋이 있었는데, 그이들 셋은 팀으로 움직이는 비자가 아니라 개인 비자가 있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라크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요르단에 나와 있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이라크 행 비자를 다시 구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라크 행 비자는 나오지 않았다. 요르단 주재 이라크 대사관으로 찾아다녔고, 그곳의 직원들을 보면 무릎을 꿇고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처음에는 이라크 대사관의 하급 관리, 그 다음은 중간 관리, 끝내 대사를 만났다. 그리고 마침내 비자를 얻었다. 당시에 이라크 행 비자를 구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스페인, 미국, 영국, 일본…… 어느 나라 평화활동가도 비자를 구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4월 2일 폭격이 한참이던 국경 고속도로를 지나 바그다드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 이라크에 있던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은 유은하 씨 혼자였다. 함께 있던 한상진 씨와 배상현 씨는 각각 나름의 까닭으로 이미 요르단으로 나온 뒤이다.)

“자전거처럼 두 개의 바퀴가 굴러가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쪽 바퀴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 그리고 다른 한 쪽 바퀴는 저마다 자신의 고국에서. 가장 필요한건 미국과 한국, 그리고 스페인,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는 걸 거예요. 돌멩이나 그 어떤 무기도 들지 않고, 정책을 결정 내리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그곳을 문 닫아 버릴 수 있게요. 나 같은 경우에는 1980년 이후로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난 무기를 위해, 전쟁을 위해 돈을 낼 수 없거든요. 우리는, 우리 각자의 모습에, 삶에, 더 진지해져야만 합니다. 전쟁을 위해 돈을 내기 싫다면 내지 말아야 해요. 전쟁에 참가하기 싫다면 가지 말아야 해요. 물론 우리는 희생과 위험을 무릎 써야겠지요.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은 아주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잖아요?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그만한 위험을 우리도 감수해야 하는 거예요. 군인이 그곳에 위험을 겪는 만큼 우리 평화를 바라는 이들도 그 만큼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들어간 바그다드, 나는 용케도 이라크평화팀(IPT)가 모여 지내는 숙소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숙소에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허락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담 정권에서 내려 보낸 기관원에게 얻어야 하는 거였다.) 그곳에서 캐쉬 캘리를 다시 만났다. 솔직히 말해 나는 많이 겁을 먹은 상태였고, 아주 많이 불안했고, 앞으로 그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해 당황스러운 상태였는데 캐쉬 캘리의 얼굴은 순간이나마 그 모든 불안을 잊게 해 주었다. 아니, 캐쉬 캘리 뿐 아니라 그 곳에 있던 ‘이라크 평화팀’의 활동가들 모습이 거의 대부분 그랬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폭탄이 무서우리만큼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이들은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물론 폭격 한 발 한 발에 누구보다 마음 아파한 이들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평온함을 잃거나 당황스러워하면서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그이들은 아픈 것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날, 탱크 뒤에 보이는 건물이 이라크피쓰팀(IPT)가 머물던 숙소였고, 2층 베란다에 나와 선 이들이 이라크피쓰팀의 사람들이다. 미군 탱크 앞에서 걸개 글씨와 사진을 내들고 침략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집착에서 자유로웠기에 어떠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비밀은 그거였다. 캐쉬를 비롯한 당시 IPT 활동가들이 그 공포 아래에서도 평화로움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밀. 죽음에 직면한 공포와 불안, 그 어떤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하거나 피하려고 애를 쓴다면, 오히려 애를 쓰면 쓸수록 그 공포나 불안, 두려움의 지배에서 놓여날 수 없다. 달아나거나 피하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그 공포와 불안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을 뿐이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또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을 습관처럼 배게 한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채 허둥댈 수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캐쉬 캘리를 비롯한 이라크평화팀(IPT)원들은 자신의 맨 몸과 온 마음을 그대로 공포와 두려움 앞에 내놓았으니 더 커다란 공포를 마주해야 할 일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다 내 놓고 버렸으니 더 느껴야 할 불안은 물론 마음의 평온을 잃어 허둥대야 할 까닭 또한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평화로 가득했다. 아니, 평화로 가득했다기보다 공포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들이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던 까닭은 집착에서 자유로웠기에 그럴 수 있던 거였고, 그이들의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까닭은 자신의 처지를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라크 인들과 같은 자리로 두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이들 얼굴에 그토록 평화가 햇살처럼 흐를 수 있던 까닭이다. 이 평화는 ‘폭격 앞에서, 죽음 앞에서 담담하다’고 말할 때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거였다. 왜냐하면 캐쉬는 폭격 앞에서 담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쉬는 누구보다 아파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평화로웠다.

캐쉬 캘리가 한국에 왔다. 캐쉬가 나를 알아볼까? 설레는 마음만큼 꼭 그만큼의 긴장이 되기도 했다. 원래는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을 한 거였는데 캐쉬의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져서 인터뷰는 강연 뒤로 미뤘다. 행사장에 사람들이 가득 찰 무렵 캐쉬가 들어왔다. 캐쉬는 여전히 예뻤다. 나이 오십이 넘은데다 유난히 주름도 많은 아줌마인데도 캐쉬를 보고 처음 드는 느낌은 아, 예쁘다 하는 거였다. (나는 캐쉬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때 그이를 부를 때 캐쉬 할머니 하고 말하곤 했다. 그 정도로 얼굴에 주름이 많아 예순은 쉽게 넘지 않았을까 보였기 때문이다.) 캐쉬가 예쁜 건 다름이 아니라 그 웃음이 예쁜 것이고, 눈동자의 맑은 빛이 예쁜 것이고, 그이가 지닌 평화의 빛이 예쁜 걸 거였겠지. 캐쉬가 바로 두 줄 건너 앞에 앉았다. 캐쉬를 초대한 행사를 준비한 나눔문화센터의 박노해 님이 일부러 캐쉬에게 나를 가리켰다. 캐쉬는 눈이 커지면서 나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살아서, 이렇게, 만났다.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 지금, 계속해서 죽이고 죽어가는 지금,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지만 그래도 정말로 반가웠다. 만약 우리가 머물던 숙소 위로 미사일이 떨어졌으면 한 날 한 자리에서 함께 숨을 놓았을 수도 있는 그이를 말이다.

곧 캐쉬는 강연을 시작했고, 캐쉬는 자신이 이라크를 오가며 겪고 본 이야기들을 차분히 들려주었다.

이라크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땅

“1998년에 우리 단체는 팔루자로 갔습니다. 팔루자는 바그다드에서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곳이에요. 우리는 1991년 영국군이 팔루자에 있는 한 다리를 폭파시키려다 실수로 해서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시장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1998년 그때는 미국이 금방이라도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팔루자로 가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장에 도착하니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전단을 준비해 갔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의 전단지를 받고 싶어서 서로 밀치면서까지 우리 앞으로 몰려들었어요. 나는 보다시피 키가 작아서, 그 소란함 속에서 우리 단체로부터 떨어지게 되었거든요. 나는 이라크 인들에게 둘러싸였고, 속으로 ‘이런 게 폭도들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가운데에서 아주 흥분한 한 남자가 내 얼굴에 대고 영어로 말을 했습니다. “너희 미국인들, 너희 유럽인들아. 너희가 우리 집에 오면, 우리는 너희라면 너희가 기르는 짐승들에게도 주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물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게 우리가 가진 것의 전부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아이들까지 죽이겠다고? 너희는 더 이상 우리 아들을 죽일 수 없어. 우리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다고!” 나는 이라크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제게 다가와 정중하게 “마담, 당신은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저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서 차 한 잔 하세요.” 하며 나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작은 원 바깥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그이는 내가 그 안에 있다가는 어떤 군중 심리 같은 것으로 해서 더 큰 곤경을 당하게 될 거라 생각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그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 준 거였지요. 그렇게 해서 나는 작은 벤치에 앉아 따뜻한 차를 받아들고 있었고요. 그이는 나에게 내 다른 팀원들도 찾아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자고, 꼭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내가 이라크에서 겪은 흔한 일이에요. 이라크 인들은 미국 정부가 한 일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못했지만 언제나 친절하고 호의적이었습니다.

내가 알 아마리아 방공호에 갔을 때도 그랬어요. 이건 199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던 이야기인데. 그때 나는 알 아마리아 방공호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파괴된 건물을 본 순간 난 그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목이 메어 왔어요. 그런 내 허리에 손을 두르는 작은 손이 있었습니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눈에 올리브빛 피부를 가진 아이가 “웰컴! (환영해!)” 하고 말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곧 다른 아이들도 몰려 와 우리에게 “웰컴”, “아메리카”, “하우알유”, “굿모닝” 하고 말을 하며 장난 걸기도 하고 놀았습니다. 한 아이는 자기 인형 팔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인형 피부가 내 피부만큼 하얗지 않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려 했고요. 그런데 저 쪽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정색으로 차려 입은 어머니 둘이 걸어왔어요. 나는 속으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오는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우리가 마실 차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다가오는 그이에게 나는 내가 아는 아랍어인 “아나 아메리끼아. 아나 아씨파 (나는 미국인이에요,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라라라라라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고 말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역관에게 했어요. “우리는 당신이 당신네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이나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나는 그 어머니 또한 그 방공호에서 자신의 동무들과 이웃들을, 자매를, 그리고 ‘가다’라는 이름의 딸 아이 하나를, 그리고 이야기도 꺼내지 않으려 했던 아들 하나를 잃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지만 그이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친절했습니다.”


▲ 알 아마리아 방공호의 모습. 미군은 걸프 전 당시 폭격을 피해 민간인들이 숨은 방공호로 조준해서 폭탄을 쏘았다. 한 번도 모자라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방공호 안으로 또 한 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민간인들의 피난처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른 명백한 전쟁 범죄였다. 이 두 번의 폭탄 공격으로 죽은 이의 목숨은 모두 420여 명. 그곳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단 열 두 명이었고, 58명의 어린이와 200여명의 여자, 그리고 나머지 노인이나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전투가 끝났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한 어린이 병원에 일하는 의사가 있어요. 그이는 아주 좋은 의사였고, 나는 그이를 매우 존경해요. 1998년 병원 상황이 최악이던 때 우리와 함께 일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이는 병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빛이 없다고 우리에게 미안해했고, 병원에는 악취가 풍겼으며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누가 의사를 애타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서둘러 그리로 달려갔고, 우리도 그 뒤를 쫓아 따라 나섰습니다. 의사는 아주 자그마한 몸집의 일곱 달 된 아기 위에 엎드려 아이를 살려보려 했습니다. 아이는 낳은 지 일곱 달 된 아이라기보다는, 뱃속에서 일곱 달 째 된 태아라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아주 작았습니다. 아이가 병원에 온 까닭은 영양실조였는데, 병원에 와서 아이는 병에 감염되었고, 그것이 온 몸으로 퍼졌습니다. 아이의 심장은 더 이상 배고픔과 열을 견뎌 내지를 못하고 결국 심장 마비를 일으켰습니다. 응급 처방으로 한 인공호흡은 그나마 성공이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희망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이 엄마에게 “부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산소도 없고, 산소관도 없습니다.” 하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나를 자기 옆에 앉힌 다음 내 어깨가 눈물로 축축해지도록 울었어요. 그 병동 안에서 아이를 안고 있던 다른 엄마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많은 엄마들은 프리알을 위해 울었고, 또한 곧 프리알과 같은 죽음을 맞게 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이 또한 살아서 병원을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프리알의 엄마는 손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관을 들고 아이 코에 갖대 댔습니다. 하지만 그 관은 무용지물이었지요. 그 관의 두께는 연필 굵기만 했는데 프리알의 콧구멍은 그 연필의 가장 끄트머리만한 크기였거든요. 물론 산소도 없었지만요. 우리는 아기 프리알이 목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영국에서 온 마튼이라는 간호사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나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이곳은 아이들을 위한 사형수 감방 같아요.” 하고 말을 했습니다. 5살도 안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기들이 엄마의 품에 안겨 설사로, 수행성 질병으로, 폐렴으로, 신장 질환으로, 천식으로, 암으로…… 아무런 죄를 저지른 적도 없는데 죽어가야 했습니다.”


캐쉬 캘리는 지금의 전쟁 상황 또한 끔찍하고 무섭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뿐 아니라 전쟁 뒤의 전쟁 상황의 비극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적어도 전쟁 중 벌어지는 참상에 대해서는 누구나 안타까워한다. 당장 피를 흘리며 죽고 죽이는 전투 상황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고, 마음을 절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잊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91년 걸프전이 죽인 이라크 어린이는 전투 상황이 끝난 뒤가 더욱 많지 않았던가? 캘리는 “전투가 끝났다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면 경제조치와 봉쇄를 통한 경제 전쟁이 뒤잇는다, 걸프전이 끝난 뒤 98년까지만 해도 5세 미만 어린이 50만 명 이상이 약을 쓰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이는 걸프전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가 다른 분쟁 지역에 눈을 돌리고 활동을 하는 동안 이라크에 대해 잊고 지내던 것에 대해 괴로워했고, 부끄러워했다.

▲ 2003년 6월, 침략군의 이라크 점령이 시작한 뒤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지원해서 지원해서 마련한 알 마시뗄 헬쓰센터 앞. 아이들에게 필요한 약은 턱없이 모자라다.


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라크에는 스무 번 넘게 다녀왔고, 우리 단체(광야의 소리)의 활동은 1996년부터 시작했어요. 물론 그 이전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이라크에 갔고요.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그 해 8월까지 이라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까마득히 그곳을 잊었습니다. 나는 이라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 스스로에게 매우 부끄럽습니다. 이라크에서 걸프전을 겪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 나는 팔레스타인 피쓰팀을 시작했고, 사라예보와 보스니아에 다녀왔고, 그러면서 영어 교사로 계속 일을 하기도 했고, 아이티에도 다녀왔고, 미국 북쪽 지방에서 핵무기에 반대하는 걷기 운동을 벌이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지내기는 했지만 이라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라크에서 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이 오십 육만 칠천 명이나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전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탱크와 미사일로 밀어붙이던 전쟁은 모습을 바꿔 경제 전쟁이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 지경이 되도록 무얼 하고 있었나? 전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우리는 종종 2차 대전을 기억하면서 독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왜 바로 옆에서 사람들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는데도 독일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 질문은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까? …… 그래서 우리 단체가 막 이라크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너무 편찮아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장에나 잠깐 다녀오거나 빨래를 하는 때 정도 밖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이 활동(이라크 피쓰팀) 준비를 인터넷과 전화기로 해야 했고요.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 ‘지금 미국에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신경을 쓸 수 없다.’ 하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나는 전화상으로나마 ‘아나아씨파, 아나아씨파, 미안해요, 미안해요.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되는 걸 막기 위해 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할게요.’ 하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르는 척 뒤돌아 그냥 지나갈 수 없었어요. 아니, 그럴 수 있다 해도 나는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하고 싶어요. 그래도 노력하려 할 뿐이에요.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 있는 곳,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정말 우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현실을 바로 보게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다음 전쟁은, 그리고 그 다음 전쟁, 그 다음 전쟁을 막는 일은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니까요. 지금 미국은 마치 ‘로그 코끼리’ 같아요. 사회학을 공부하면 로그 코끼리에 대해서 배우는데요, 로그 코끼리는 위험한 수위가 되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지내거든요. 너무 거칠어졌기 때문에 다른 코끼리와 함께 무리를 지어 함께 도우며 살지 못하고, 제 멋대로 짓밟고 다니며 사는 그런 모습으로요.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해요.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이 끔찍한, 하지만 은폐되어 있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끔 다 바쳐야 합니다.”


핵무기 격납고에 옥수수를 심어 감옥에 가던 때

“핵무기 격납고 위에 옥수수를 심어 감옥에 가던 때 이야기에요. 먼저 그 격납고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높은 담을 넘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 담 위에는 가시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요. 솔직히 말해 나는 무서웠어요. 그러다 걸려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담을 넘어 무사히 내려 온 뒤에도 계속 불안해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하지만 나는 내가 하려 했던 대로 그 자리에 옥수수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담에다가 대자보 몇 장을 붙이고 나서 적당한 곳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새 소리가 들리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좋은 아침이었어요. 내 마음도 평온해 졌고요. 그 때 저 멀리서 웬 자동차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자동차 위에 기관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차는 쏜살 같이 달려오더니 내 앞에 끼익 하고 섰어요.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그리고 철모를 쓰고 총을 둘러 맨 군인 넷이 차에서 뛰어 내렸어요. 그러더니 그이들은 내가 서 있는, 내가 옥수수를 심은 그 만한 넓이 정도 둘레를 둘러싸고 쪼그리고 앉아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캐쉬 캘리 웃음)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려 했어요. 군인들은 “손을 드십시오” 했다가 “양손을 머리 위로 드십시오” 하고 말을 하기도 했고 왼쪽으로 한 걸음을 가라는 둥 오른 쪽으로 한 걸음을 가라는 둥 이런 저런 명령을 계속 해서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다시 저 담을 넘으라는 소리만 하지 말아라’ 하고 말을 했어요. 그 담을 넘어 들어올 때 정말 무서웠거든요. 다행히도 그이들은 담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니까 그이들은 나에게 무릎을 꿇게 했고,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래 놓고는 세 명의 군인들은 다시 자동차를 타고 가버렸어요. 내 생각에는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까먹어서 그 순서를 찾아보려고 군대에서 나누어준 교본 같은 걸 찾아보러 간 게 아닌가 했어요. (웃음) 하여간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군인 하나와 나 뿐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꾼 채 두 손을 올리고 있었고, 그 군인은 내 뒤통수를 총으로 겨누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까 나는 기다리다 지쳐 심심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군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지는 못하고 똑바로 앞만 보면서요. “나는 교사에요, 나는 아주 가난한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거든요. 내가 나가는 학교는 모두 합해야 아이들이 50명 정도 밖에 안 되는데, 해마다 그 가운데 셋 정도가 죽어요. 갱단 간의 총싸움으로 죽기도 하고, 혹은 칼부림으로 죽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나라 예산 중에 핵무기와 관련해서 쓰이고 있는 이 많은 돈이 우리 학교처럼 가난한 학교나 그곳 아이들을 위해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하고 그 군인에게 물었어요. 그리고 또 물었어요. “옥수수가 자랄 것 같아요?” 그러자 군인은 강한 남부의 억양으로 “글쎄요, 잘은 모르겠는데, 꼭 자랐으면 좋겠네요.” 하고 대답 했어요. 나는 다시 “같이 기도 하실래요?” 하고 물었고, 그 군인은 “네, 그래요.”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제가 당신의 평화를 전달하는 창구가 되게 해 주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는 희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는 삶을 줄 수 있게 해 주소서…….” 하고 이 기도를 함께, 아니 사실은 내가 다 하다시피 했지만, 기도가 끝나자 그 군인도 “아멘”이라고 말하기는 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군인이 나에게 물었어요. “물 좀 드실래요?” 나는 너무나 목이 말라 있었거든요. 계속 긴장해 있었지, 또 몇 시간 째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오, 감사합니다” 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뒤를 돌아볼 걸 그랬어요. 그 군인은 나에게 “부인, 머리를 뒤로 좀 젖혀 주시겠습니까?” 하고 했고, 나는 시키는 대로 머리를 뒤로 젖혔습니다. 그러니 군인은 머리를 젖히고 있는 나에게 입을 벌리라 하고 물을 부어 줬어요. 마치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벌레를 먹여주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죠. 아,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 군인으로서는 나에게 물을 주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군인이 나에게 물을 먹게 해 주려면 허리에 차고 있던 수통을 내려놓고, 그 뚜껑을 열어야 했을 텐데 그러려면 총을 내려놓아야만 했을 테기 때문이니까요. 그건, 특히 그 상황에서는, 군인으로서 정말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었을 거예요.

나는 그 날 그 군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사실 어떤 일이건 옳은 일과 그른 일로 딱 잘라 나누어 놓은 뒤 이건 옳고 저건 틀려 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것처럼 쉽고 편한 게 없어요. 하지만 그 군인은 그러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무장해제 하면서까지 선의를 행했고요. 나는 그 날 뒤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나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 되어서 파괴적이고, 위험하고, 나아가 이 지구를 망가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도전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감동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미군이 바그다드로 점령해 들어왔을 때, 캐쉬 캘리는 침략군의 병사가 되어 들어온 미군의 병사에게 간식을 내어다 주며 이야기를 걸고 있다.


점령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마저 끊어 놓았다.

- 바그다드가 미군에게 점령된 뒤 지엠씨를 타고 암만으로 나오던 게 바로 엊그제 일 같아요. 저는 그 때 암만으로 나온 뒤에는 한국에서 모아서 보내는 구호기금과 물자를 가지고 다시 이라크로 들어가 알 마시뗄이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아이들과 지내고 왔는데요, 그리고 그것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파병을 막는, 철군을 하게 하는 운동을 하고 있고요. 캐쉬는 그 때 바그다드가 미군에게 점령되던 4월 이후에는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하며 지냈어요?

“나는 4월 21일에 바그다드를 떠났어. 그리고는 미국으로 돌아가 점령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다녔지. 그리고 다시 9월과 10월에 이라크에 들어갔고, 12월과 1월에도 들어가 있었어.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는데, 점령군이 철수해야 하는 것은 단계적이고 뭐고 당장 점령을 중단하고 모두 나와야 해. 어서 점령군 철수 계획을 잡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하는 활동 가운데에는 ‘정의의 자동차 (wheels of justice)’라고 미국을 전역을 돌아다니며 평화교육을 하는 버스가 있고, ‘테러 대응은 정의를 쌓는 것(Counter Terror: Build Justice)’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그리고 피점령국 시민이 되어 보기 체험(Life under occupation) 같은 것을 하기도 해. 이건 주로 학생들이 피점령국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하는 것을 직접 겪어 봄으로써 몸으로 이해하기 위해 단전 체험(전기 없이 지내는 것) 같은 걸 하는 거야. 이런 활동들을 하면서 다른 단체들하고 함께 실천할 것들에 대해 준비하기도 하고 있어. 돌아오는 봄에 어떤 직접행동에 함께 나서자는 제안을 하며 말이야.”

- 최근 이라크를 다녀오며 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가장 최근에 이라크에 갔던 건 1월이었어. 전기는 낮에 3~4시간 나오는 게 고작이었어.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기름이 많이 모자랐어. 그래서 차들이 기름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섰어. 어떤 경우엔 이틀 밤을 줄서야 하는 경우도 있었어. 벌써 그때부터 납치나 자동차 납치에 대한 불안이 컸어.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 보려 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초조해 지고 있었고. 일자리들은 쿠웨이트 사람이나 요르단 사람들에게 자꾸 넘어가고 있었거든. 이라크 사람들은 배재된 채 말이야. 그걸 보면서 이라크 사람들은 더 화가 나고 실망하게 되었지. 많은 이라크 사람들은 ‘그래 전쟁은 끔찍하겠지만 다 끝날 거고 그런 다음부터 잘 살 수 있게 되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만 가고 곧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아주 크게 실망하고 있어. 우리 입장에서는 이라크에 있으면서 이라크 사람들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우리(미국인)가 그곳에 있다는 까닭만으로 우리 가까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위험에 빠지는 거였지. 그래서 우리가 살던 집을 문 닫았어.

지난 방문 때에는 죄수로 잡혀간 다섯 사람의 식구들이 자기 아들들 소식을 알아 봐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서 이라크 남쪽에 있는 한 감옥에 다녀왔어. 나는 그곳에서 검은 두건을 쓰고 매달려 있는 남자나 개목걸이를 목에 매고 있는 남자 사진이 아니더라도 죄수들 상황이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스무 살 남짓 된 청년들이 밤이면 정말 춥고, 낮에는 정말 더울 천막 수용소에 있었어. 그이들은 자신들이 낸 서류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접수되고 데만 적어도 아홉 달은 기다려야 할 거야. 그이들이 잘못한 거라곤 군대가 차지하고 싶어 하는 건물에 살고 있다는 죄 밖에는 없거든. 이라크 사람들이 그토록 분해하고 점점 격해지는지는 심정은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봐.

거기다 발표된 병원의 통계 자료들, 병원들은 그 상황들보다 아주 나빴으면 나빴지 나을 리는 없을 거거든, 발진티푸스, 티푸스라는 균이 있는데, 그 균이 일으키는 병이 몇 가지가 되나 봐. 그 중에 하나가 장티푸스고. 발진티푸스는 계속 40도가 넘는 고열이 나는 병이래. 전염성이 있고, 그 발진티푸스가 5420 건이나 된다는 거야! 그리고 오염된 물. 아이들 가운데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영양실조 상태 어린이는 전체 어린이의 27%야. 이건 정말 심각한 수치들이지. 그런데도 미국은 5240억 달러를 군대에 쏟아 붇고 있어. 그 가운데에서 이라크 재건으로 할당된 예산은 24억 달러. 그것마저도 고작 3억 밖에 쓰지 않았어. 그나마 그 3억도 대부분 안전이나 ?경호 부분, 경찰에게 쓴 거야. 왜 나머지 돈을 안 쓰는 거야, 대체 뭘 기다리고 앉아 있는 거냐구! 폴 브레머가 있을 당시 그 사람 임기 끝 즈음 순식간에 8억 달러를 집행했는데 정확히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 생각엔 아무래도 군부대나 경호 같은 곳에 쓰인 것 같아. 게다가 그 사람이 쓴 돈 8억은 이라크 석유로 얻은 이득이었어.

점점 이라크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도 쉽지 않아. 좀 부유한 사람들이야 인터넷이 있다지만, 이라크 사람들하고 갈수록 단절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우리가 이라크에 있을 때 한 긴 회의에서 전쟁이라는 것이 모든 걸 다 파괴한다고 해도 우리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유대만큼은 끊지 못하게 하자고 했는데, 이 점령은 그 유대의 끈마저도 끊어지고 있는 것 같아.

9월 7일에 납치된 네 사람 가운데 시모나와 라하드, 특히 라하드 그 둘은 내가 잘 아는 이들이었어. 그 사건으로 분명해진 건 누구 건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자기가 만일 납치가 되면 이라크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게 될 거라는 거지.

심하게 폭격 당한, 사담 시절에 사담 군대들이 있던 경비 부대에 간 일이 있거든. 꽤 넓은 곳이었지, 한 대학교 캠퍼스만 했을 거야. 그런데 그 커다란 폭탄 파편과 폭탄 껍데기 폭탄으로 부서진 온갖 돌멩이, 철사들이 굴러다니는 곳에 한 사백 가구가 들어가서 살고 있었어. 물론 아무 것도 갖춘 건 없었지. 전기도, 물도, 배급소, 진료소, 학교도……. 대체 왜 그 사람들은 그곳으로 이사를 간 걸까? 그거야 간단하지. 전에 살던 곳에서는 더 살 수가 없었으니까. 또 어쩌면 거기서 살다보면 누가 보고 집을 지어주지 않을까 싶기도 했던 거고. 하지만 조그마한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벽 세우는 걸 돕기 위해 땅 속에 묻힌 벽돌을 찾아 손으로 땅을 파는 모습은 정말 마음이 아팠어. 그리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에 무슨 빨간 반점들이 났더라고. 그래도 그런 모습들은 희망적인 거지, 재건을 위한 몸짓이니까.”


-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라크에 참전했다 돌아온 미군 병사를 만나 본 일도 있어요? 혹시 그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러한 이야기도 나누어 본 것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내가 강연을 다닐 때 몇몇 강연에서 내 말에 동의한다는 군인들을 만난 일이 있어. 그들도 내가 말하는 것처럼 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라크에 있을 당시에는 군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징계가 무서워 자기 생각을 솔직히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거든. 징계는 여러 가지로 내려질 수 있대. 그리고 다시 만나기로 한 병사 중에 참 만남이 기대되는 병사가 있어. 그이는 다시 이라크로 가는 걸 거부한 병사였어.”

- 최근에도 얼마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고 들었는데요, 그 이야기는 어떤가요?

“미국에 군사 전투 학교가 있어. 그리고 그 학교 졸업생 출신들이 고문, 실종, 암살, 대량 학살 사건과 관계가 있었어. 미국은 이라크라는 독립국을 아무 증거도 없이 침략한 거야. 그래서 우린 그 부대에 들어가서 살인마가 되는 훈련을 이제 그만 시키고 그곳을 문 닫고 사람들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법은 이제 그만 가르치라고 요구했어. 이 시위로 해서 2004년 3월부터 여섯 달 동안 옥살이를 한 거야.”

- 한국에서는 실제로 파병을 하고 난 뒤로 오히려 반전 운동이랄까 파병 운동이 오히려 힘을 잃은 듯하기도 해서 몹시 안타까운데요,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나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날마다 그토록 죽어가는 목숨을 생각한다면, 목숨을 살리는 일에서 어떻게 느긋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요. 물론 이 평화운동은 궁극으로 아주 길고 긴 운동이 되어야 하기는 할 텐데요, 이런 것과 관련해서 캐쉬 캘리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사람은 누구나 시기(때)를 가지고 있고 이젠 좀 천천히 가는 때가 온 거지. 난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믿어. 첫째도 둘째도 교육이라고 생각해. 물론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 오늘 외국인 노동자 쉼터에 갔다가 정말 놀랐는데 여하튼 그곳에 계신 한 분이 그러시더라 각 세대마다 자기 목소리, 자기 활동을 찾아 그걸 드러내야 한다고.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나에게는 어른들 이야기를 듣는 게 도움이 많이 됐어. 그렇게 할 걸 권해주고 싶어.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되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했던 말, 그들이 했던 활동, 그들의 경험, 그들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봐. 물론 그 사람들을 비판할 부분도 많겠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옆으로 밀어 놓고 충분히 들어봐. 어떨 때는 페미니즘이 뭔지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지. 그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다가 책상을 쾅쾅 치고 해서 많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난 그 사람들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캐쉬 캘리는 우리의 평화운동을 ‘자원을 나누고, 단순하게 살고, 덜 소비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건 다시 말해 우리가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저마다가 '단순한 삶'과 '비폭력적인 삶', '봉사하는 삶'을 살 때에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풀뿌리 운동을 살리는 노력

- 그 동안 캐쉬 캘리는 벌써 오랜 시간 동안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운동, 전쟁을 막는 활동을 해왔잖아요. 그것도 미국에서 뿐 아니라 전쟁터인 이라크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 곳곳으로 반전평화의 씨앗을 뿌리며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평화 운동을 하면서 안으로 느끼는 갈등이나 힘겨움이 있었다면 어떤 거였을까요? 또는 반전이나 평화에 대한 같은 바람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활동을 하다가도 그 방식이나 내용에서 벽이나 어려움을 느낀 일은 없는지, 그러한 경험이 있으면 들려주세요.

“진정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과 폭력과 위협이란 방법을 쓰지 않고 함께 하고자 한다면 어디에서라도, 누구라도 평화의 길에 함께 하는 건 좋은 거지. 하지만 평화의 길에 직선대로는 없어. 나 같은 경우에는 그 길에서 교육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무기를 만드는 데 돈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권력자들을 향한 직접적인 도전이 되는 활동 그리고 그것이 감동으로 이어지는 활동에 함께 하는 걸 좋아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라크로 간 군인들이 감수하고 있는 위험만큼이나 위험한 활동을 하기도 하는 거지. 앞에서 말한 그러한 방식들이 있다면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싸우는 것, 자기 마을에서 촛불집회나 작은 모임을 하는 것, 토론회를 하는 것, 뉴스레터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들도 있을 거고, 그것들 모두 중요한 거지.

앞으로 해 나가기를 바라는 방향이 있다면 풀뿌리 운동을 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다 한 도시에 모이게 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자기 고장의 모임을 살릴 수 있게 계속 격려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거야. 그리고 어떤 날이나 어떤 달을 정해서 각자 자기 고장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 거야. 아니면 성명서를 동시에 같이 낸다던가.
그리고 나는 사실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아. 이라크만 왔다 갔다 스무 번 정도 하긴 했지만 그걸 빼고는 영국 한번, 아일랜드 한번 가본 게 전부야. 그런데 나는 이번에 한국에 올 때도 내가 쓰게 될 비행기 연료가 마음에 걸렸어. 나 스스로 내가 태우는 석유량을 조심하려고 해. 시카고에서도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를 빼고는 비행기 대신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 모두 한숨 돌리고 느리게 갈 필요가 있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안에 어떤 폭력이 숨어 있는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해. 그리고 소박하게 우리 자원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지. 아, 너한테는 이런 이야기 더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야. (웃음) 그리고 단식은 잘하면 나쁘진 않지, 하지만 몸이 자라고 있을 때는 조심해서 해야 해. 아참, 이번에 단식할 때는 물만 먹으면서 44일 굶은 거니?”


- 아니요. 물, 소금, 효소요.

“그랬구나. 나도 물만 먹으며 28일까지 단식해본 적은 있는데 44일은 정말 대단한 걸.”

- 한국에서는 지금 부시와 블레어, 노무현을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세우는 ‘민중재판운동’을 벌이고 있거든요. 민중들이 스스로 법정을 열어 이들의 범죄를 심판하고 단죄를 하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시민들이 그 권력자들을 전범자로 기소한다는 이유서를 저마다 쓰고 있어요. 저마다 나름으로 전범 기소의 까닭을 쓰게 될 텐데요, 캐쉬 캘 리가 그이들을 전범자로 기소한다면 그 많은 전쟁 범죄행위 가운데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아프고 분노하게 하는 것인지 듣고 싶어요. 그리고 캐쉬 캘리도 이 전범재판 운동에 함께 하실 뜻이 있다면 그러한 내용으로 기소장도 써 주시면 좋겠고요.

“무엇보다도 나는 경제 제재를 해서 오백만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게 만든 것, 그리고 전쟁을 일으켜 이라크라는 한 나라를 철저히 파괴시킨 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나와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잘못을 돌리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은 지금도 너무 많이 가지려 하고,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많이 낭비하는 모습이야. 저마다 개인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모습은 결국 국가로 하여금 더 많은 무기를 가지게 하고, 다른 나라가 도전하지 못하게 위협하게끔 하는 거거든. 바로 그것 때문에 전쟁이 났다는 걸 인정한다면, 나는 이 전쟁을 나게끔 한 것은 어느 몇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 방식에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저 잘못한 사람은 누구다 누구다 하면서 손가락질하는 방식은 좋지 않은 거 같아. 왜냐하면 그렇게 누가 잘못했네 하고 손가락질만 하다 보면 내 책임은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바뀔 지에 대한 고민은 잊어버리는 거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평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부터 바뀌지 않으면 대체 누가 바뀌겠어. 그래서 기소장은 쓰지 않을게. 하지만 난 어떤 방식이든 평화를 향한 활동은 다 가치 있다고 생각해.”


▲ "나 스스로 내가 태우는 석유량을 조심하려고 해. 시카고에서도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를 빼고는 비행기 대신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 모두 한숨 돌리고 느리게 갈 필요가 있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안에 어떤 폭력이 숨어 있는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해. 그리고 소박하게 우리 자원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야지."


단순한 삶, 비폭력적인 삶, 봉사하는 삶

캐쉬 캘리는 기소장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캐쉬 캘 리가 말한 그것이 바로 언젠가부터 내가 힘들게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면서도 비행기에 태우는 연료가 마음에 걸렸다고 말하는, 비행기 대신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려고 한다는, 자신이 태우는 석유량을 조심하고 있다는 고백들이 말이다. 그 이야기는 나를 바닥부터 통째로 흔들던 말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던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과 그대로 닿고 있는 말이어서 더욱 놀랐다. 그래, 나는 그 말씀을 새겨듣고 난 뒤부터 몹시 괴로웠다. 차를 몰고 나갈 때마다, 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나는 또 기름을 태우고 있다는, 이래서 또 이라크의 어린 목숨 하나를 더 죽게 하고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전쟁을 막는 일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백성들을 전쟁터로 몰아 놓고 있는 권력자들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자들은 지금 정책 하나를 잘못 쓰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죽이고 있고, 무고한 이라크 민중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 권력자들, 그 범죄자들을 민중법정으로 세운다는 것은 우리를 죽이는 자들이 더는 우리를 죽일 수 없게끔 하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최소한 우리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고, 우리의 기본권, 평화권을 지키는 일이다.

캐쉬 캘리의 말처럼 우리가 그 권력자들을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세우는 운동이 자칫 그네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심판과 단죄에만 갇혀서 우리 스스로 ‘내 책임은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캐쉬는 기소장 쓰는 일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이는 자칫 전범민중재판 운동이 놓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제대로 일러 주었다.

캐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앞으로 법정이 열리기 전까지 또 한 장의 기소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시와 블레어, 노무현을 고발하는 것보다 먼저 했어야 하는 것, 내가 먼저 썼어야 할 것은 나를 고발하는, 나를 기소하는 기소장이었다.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기소의 까닭들이 앞 다투듯 떠올랐다. 그 동안 나는 얼마나 석유 자원을 함부로 쓰며 살았고, 소비에 기대어 살았고, 기계에 의존해서 살았던가. 분명 이 전쟁을 막는 일은 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권력자들, 전쟁범죄자들을 압박해서 멈추게끔 하는 일이겠지만, 전쟁 없이 지속가능한 세계로 갈 수 있게 하는 답은 저마다 각자의 삶을,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내는 것에 있을 것이다.

캐쉬 캘리는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고 난 뒤 나를 보며 다음부터는 단식을 하지 말고 다른 걸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단전, 전기를 끊고 기름 없이 지내는 것을 말이다. 요즘 내가 집중하고 있는 고민에 닿아 그런지 몰라도 나는 그 말이 마음에 확 다가왔다. 그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저항, 비폭력의 저항이라 생각했다. 석유개발권을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 석유개발권을 차지하겠다고 우리를 서로 죽이고 죽게 하는 세상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저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들을 때는 우습게 들리려는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우스운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단식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한다. 당장 하루라도 완벽하게 석유와 전기 없이 지내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캐쉬 캘리는 전쟁 없는 세상이 되려면 우리 모두가 ‘단순한 삶’, ‘비폭력적인 삶’,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으며 함께 살아가는 삶이 실천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전쟁이 그친 상태라 하더라도 그건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일 뿐이지 ‘평화’는 아니다. 진정한 평화란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배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미국에서 생산 금지 조치되었던 소형 핵폭탄(robust nuclear bunker penetrator)이라는 무기 재생산 허가안을 검토 중입니다. 이것은 곧 군비 확장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요.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여기 한국도, 이제 새롭게 핵 군비 확장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핵전쟁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이러한 전쟁 세력에 견줄 때 평화 운동이란 이제 겨우 태어난 두 살짜리 아기의 단계 정도로 보입니다. 아직 걸음걸이가 서툴러 넘어지기도 하고 앞을 향해 잘 걷지도 못하지요. 하지만 지금이야 비록 서툰 아기의 걸음이지만, 질질거리고 비틀거리며 엄벙덤벙 넘어지는 술주정뱅이 전쟁광보다는 훨씬 낫다고 봅니다. 이 질질거리고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술주정뱅이가 바로 전쟁광 미군의 모습이고 미군이 앞으로 추진하겠다는 계획의 실체입니다. 우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정의 손을 내밀며 위협과 폭력의 지배 아래에 미래를 만들어 나가 싶지 않다고 외쳐야 합니다. 폭력으로 지친 세상에 비폭력은 꼭 필요합니다. 비폭력의 가능성을 믿고 반드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캐쉬 캘리는 평화활동을 하고 다니며 아름다운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이로 해서 우리가 기쁘다. 많은 이들이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아직 서툰 아기의 걸음이지만 잘 걷지 못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아기의 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움보다 희망이 더 크게 느껴진다. 캐쉬 캘리는 우리의 평화운동을 ‘자원을 나누고, 단순하게 살고, 덜 소비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이는 스스로가 자신의 말처럼 살고 있다. 가난하고 단순한 삶을 실제 살아가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으로 언제라도 맨몸과 심장, 따뜻한 웃음만으로 찾아간다. 다시 지난 해 4월의 기억이 떠오른다. 미 점령군이 마침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들어왔을 때 캐쉬 캘리의 눈에 고이던 눈물. 그이의 눈물은 맑고도 깊었다.

*통역은 전승로 님이 도와주셨습니다.

태그

박기범 , 전범민중재판 , 캐쉬 캘리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기범 (동화작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헉...

    너무 길다. 좀 신경 좀 썼으면...

  • 헉...

    너무 길다. 좀 신경 좀 썼으면...

  • 진영

    좋다.. ㅡ.ㅡ

  • 진영

    좋다.. ㅡ.ㅡ

  • 민정

    울면서 다 읽어 본 걸요.

  • 민정

    울면서 다 읽어 본 걸요.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