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민중재판 인터뷰 5] 이동화 이라크인들의 친구

전쟁터의 악몽, 그리고 평화 배움터의 꿈
그들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라크에 왜 갔느냐는 물음에 이동화는 언제나 '그냥 살려고요, 그 사람들하고 함께 살고 싶어서요.' 하고 대답한다.

그들과 동일한 삶의 조건으로

……수영장을 아이들에게 개방을 하면 거의 두 달에 거쳐 하고 있는 공사는 일단락이 된다. 수영장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큼이나 신경도 많이 쓰이고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는 벅찬 작업이었다. 어쨌든지 간에 오전에 공부방으로 갔다. 페인트가 칠해진 수영장을 보았다. (2003년 8월 21일)

……현지 파트너인 아마르는 일단 경찰에 알 마시텔 헬스센터에 대한 경찰 경호를 부탁했고 오늘부터 알 마시텔에 근무하는 사람들 중 일부를 무장시켜서 시설 보호를 하고 있다. 아마르가 어제 나에게 와서 공부방 근처에도 총으로 무장한 사람 한 명을 보호하도록 하겠다고 얘기를 해서 내가 공부방 근처에는 아이들의 공간이기에 가능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꼭 필요하다면 공부방에서 약간 떨어져서 아이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보호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3년 8월 31일)

……그 곳 하이와트 지역 담장 밖으로 미군들이 주둔해 있는 경찰서가 보인다. 경찰서 지붕에서는 아마도 하이와트 지역 내가 훤히 보일 것이다. 내려보는 미군과 올려다보는 이 곳 사람들. 각 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연히 다른 입장. 다른 삶. 총으로 무장한 미군, 신발 없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 삶의 양 극단을 보여주는 하이와트에서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전쟁이 무엇을 남기는 지는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2003년 9월 20일)

……최대한의 안전책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 곳에서 현재 무엇이 발생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새벽까지 미군의 헬기는 저공으로 비행하고 있고 밤에만 들리던 폭탄 투하소리도 오늘은 친구를 만나러 갔던 바그다드 대학에서 세 번이나 들었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간이 거의 12시 가까이 되었는데 교전인 듯한 총소리가 심하게 들립니다. 부디 무고한 이라키들이 피해를 당하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많은 이라키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종교의식 기간인 지금 라마단 기간에 이 곳은 많이 불안합니다.

2003년 여름 이라크민중지원활동을 함께 하던 팀원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동화는 계속 바그다드에 남았다. 그 때 계획으로는 최소 6개월, 팀 활동이 끝나더라도 그곳에 계속 남아 이라크 인들과 함께 살겠다는 거였다. 그게 2003년 가을 겨울이었다. 동화는 겨울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한 말은 다시 이라크로 가야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반년의 준비, 2004년 6월 그는 다시 홀몸으로 이라크로 떠났다. 이번에는 최소 2년을 살겠다는 계획이었다. 동화에게 왜 이라크에 가느냐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그냥 살려고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요…' 하고 말하곤 했다. 구체적 활동 계획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라크에서 동화를 기다리고 있는 현지인 살람 씨와 함께 '국경 없는 어린이(CWB)'를 준비하는 일도 있고, 전쟁 피해의 기록을 이라크 인들에게 직접 듣고 정리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또한 전쟁의 잿더미가 된 그곳 가운데에서도 더 가난하고 힘든 마을에 들어가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을 하고 싶어하기도 했고, 점령군이 그 땅에 들어가 벌이고 있는 범죄 행위에 대한 감시도 하려 했다. 하지만 동화의 대답은 언제나 '그냥 살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함께…' 라는 말로 정리를 하곤 했다.

……그리고 약간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들과 동일한 삶의 조건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삶을 공유할 때 같은 시각과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한국에 전하고 싶다면 그들의 시각과 생각을 가져야 하니깐요. 하지만 잘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살아온 만큼이나 다른 조건에서 살았던 저이고 그만큼의 다름이 저에게 존재할텐데. 끝내는 흉내내기일지도 모르겠어요. (2004년 1월 이동화 님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평화를 기원하는 여러 벗들에게, 다시 이라크로 가려합니다.> 가운데에서)


몰타다 알 사드르의 민병대 마흐디 군인, 2004년 6월 18일.

이라크의 오늘, 피비린내 섞인 모래 바람

동화가 다시 들어간 2004년 6월의 이라크는 더없이 위험하고 혼란스러웠다. 동화가 얻은 숙소 바로 옆에서도 폭발물이 터져 건물이 무너졌고, 교전과 폭격은 익숙해지게 될 만큼 계속 되었다. 나자프와 팔루자, 사드르, 사마라, 바쿠바, 라마디, 쿠프, 바스라…… 모두 전쟁터였다. 도시가 봉쇄되었고, 융단 폭격이 벌어졌다. 점령군은 물을 끊고 전기를 끊었다. 그리고 도시 안에 가두어 두고 무차별 난사를 했다. 이라크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는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그 저항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침략국가 외국인을 납치, 살해하는 거였다. 닉 버그가 죽었고, 그리고 김선일 씨도 죽었다. 동화처럼 이라크에서 반전평화 활동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활동가마저 대낮에 납치되는 일이 있었다. 긴장되는 나날이었다. 날마다 최소 스물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외국인에 대한 납치 참수의 위협은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살람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이었다. 살람이 아침에 사담 궁전 (지금은 미군이 사용하고 있다.) 우측 정문에서 자살 차량 폭탄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어쩐지 시내로 들어가는 대부분의 도로가 폐쇄되었고 시내로 진입하려는 차량과 우회하려는 차량들이 엉켜서 교통정체가 극심히 이루어졌다. 살람이 옆에서 이리저리 끼어 들기도 하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차량 라디오에서 아랍 뉴스가 흘러나왔고 살람은 뉴스를 듣던 와중에 무릎을 탁 치면서 "셀림! 방금 무슨 뉴스가 나온 줄 알아? 오늘 아침에 이라크 교육부 담당 관련 정부관계자가 살해당했어.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는 이라크 외무 부차관이 살해당했잖아. 비슷한 시간에 당한 것 같아. 근데 그 교육부 담당 관계자가 이라크 내부 ngo도 담당해. 이런 제기랄!" (2004년 6월 13일)

……조심스럽게 최근의 고(故)김선일 님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살람은 제가 아는 이라크 인들의 의견과 비슷했어요. '자신은 현재 미군과 점령군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김선일 씨를 죽인 단체는 이라크의 저항세력이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된다. 그들은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절대 무슬림이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미군과 점령군이 일시에 철수했을 때 이라크 사회 내에 혼란이 올 수 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살람은 '미군과 점령군이 철수 할 때 사회적 혼란이 온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는 누군지 알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미군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미군과 점령군이 철수하면 더 이상 저항세력은 이라크 군인과 경찰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힘을 합해서 이라크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군인과 경찰들을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치안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이다.'라고 했어요. 늦은 시간이라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잠이 들었지요. (2004년 7월 23일)

……요 며칠 바그다드 내에서는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교전이 심해졌다. 어젯밤에도 쿵, 쿵하면서 산발적인 폭발음이 들리고 그 이후에 총소리와 헬기소리. 아침에 살람을 기다렸다. 어제는 금요일이어서 휴일이었기에 살람이 오지 않아서 하루종일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말지 기사 기고를 위해서 나가려고 준비중이었다. 아침 내내 살람은 오지 않았다. 아침 11시 30분, 살람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셀림(이동화의 이라크식 이름)! 도저히 네가 있는 가라데로 넘어갈 수가 없어. 벌써 3시간 째 길에서 가라데로 넘어가는 길을 찾고 있는데 모든 도로가 봉쇄되었어. 도저히 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하지?"
"살람! 집에서 쉬어. 그리고 내일 보자. 근데 바그다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셀림! 몰타다 사드르 군과 미군과의 교전이야. 그리고 중심가에 폭탄 공격이 계속되고 있고 오늘새벽에 팔레스타인과 쉐라톤 근처에 폭탄공격이 있었어.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꼼짝 말고 있어",
"그래…… 너도 몸 조심해!"(2004년 8월 7일)

……장소는 3일전에 있었던 폭탄 사고와 동일한 도로였고 이전의 폭탄 사고는 저희 집을 기준으로 약간 왼쪽으로 20미터 떨어졌는데 이번 폭탄 사고는 오른쪽으로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이전 사고와 비슷하게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진 것이었어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미군 차량이 지나갈 때를 노린 듯 했지만 미군의 차량이 지나가고 난 후에 터져서 미군의 피해는 없고 이라크 인 두 명이 사망했고 수명이 부상당했다고 하더군요.(2004년 9월 4일)


동화가 한국에 돌아왔다.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나 보다. 동화는 지금 며칠 쉬지도 못한 채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아주 바쁘다. 그곳에서 겪은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 그리고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 참을 수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실은 지금 동화나 나나 거의 비슷하게 그 일을 나누어 하고 다니는 중이다. 그런데도 굳이 동화를 만나 인터뷰를 하려고 한 건 지금 이라크의 모래 먼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래, 이제 더 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전쟁은 나쁘다, 파병은 나쁘다 하는 이야기말고 그곳 이라크의 먼지 바람 그것에 묻어 있는 피비린내는 실제 어떤지, 그리고 겁에 질려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그 땅 어미와 아기들의 숨소리는 어떤지를 말이다.

한국에 돌아오니 폭탄 소리가 없다.

- 편하게 하자, 동화야. 그냥 말하자. 나는 반말로 할게.

“아이, 저는 존댓말로 해야죠.”

- 아이, 너도 평소에 하는 만큼만 그렇게 해, 너무 깍듯하게 하지 말고.

“허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 네가 한국에 들어온 게 이제 3주 정도 된 거 맞나? 그치? 3주 정도 된 건데…….

“인터뷰 하면 뭐 인사도 하고 뭐 이래야 하는 거 아니야? (웃음)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웃음)”

- (무시하며) 그러니까 이렇게 농담도 하고, 여유도 많이 있어 보이고 그러는데 사실 3주 전만 해도 니 이라크에 있고 이랬을 때는 표현은 못했지만 정말 속이 타고 그랬거든. 진짜 그 표현은 어디에서도, 어떻게도 못하겠더라고. 이동화가 김선일이 될 수도 있는데, 지금은 이제 좀 맘놓고 하는데, 이동화가 죽을 수가 있는데, 그니까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그런 거 있잖아. 불길한 어떤 말이 현실이 될 거 같은, 그래서 말로는 표현 못하고 그랬으니까. 하여튼 니가 한국에 왔다 하는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경박스러운 걱정을 함부로 내 비치지는 못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그 불안함이 함께 있고 그랬다는 거야. 그런데 이제 왔고, 얼굴에 여유도 찾고 그랬는데 어떤지 와 보고 나니까.

“그니까 와서 바로 집으로 갔거든요. 나주로. 시간을 한 일주일 보냈는데, 내적으로 계속 뭔가 응어리 진 것들 하고, 하지만 뭔가를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어떤 의무감하고 비슷한 거 있잖아요. 잘 정리를 못하고 올라왔어요, 그냥. 시간이 가는 것이 너무 좀 안타깝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래서 올라와서 이제 뭐, 저는 원래 마음이 이렇게 다 정리가 되고 그래서 움직인다기 보다는 그냥 한쪽에 일단은 미뤄 놓고 있고, 해야 할 일 찾아서 빨리빨리 하는 게 나한테는 지금 나답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다니고 있어요.”

- 생각해 보면 지금 네가 느끼는 현실감이라는 게, 도무지 어느 게 현실이고 꿈인가 할 정도로 혼란스럽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 바로 3주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밤이면 공습이 떨어지고 거리에 나가면 가라데 거리든 어디든, 하이퍼 거리든 어디든 나가면 교전이 있고 이런 데 있다가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데, 여기 일상은 어느 세상에서 뭐가 있냐는 듯이 돌아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여기에서 느끼는 혼란이 어떨까 싶은 거고, 네가 한국에 와서 느끼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도 특히 한 3주 지나는 동안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랄까, 철군 운동에 대해서랄까 그런 것하고 관련해서 네가 지금 생각하는 거나 너의 지금 상태 같은 것 좀 들려줘봐.

“작년에, 제가 작년에 이라크에서 돌아왔을 때는 12월에 들어와서 바로 바끼통 거기 소망나무 농성장 갔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많이 춥다고, 한국은 너무 춥고, 너무나 다른 공간으로 순간적으로 이렇게 확 바뀌어 버리니까,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뀌어 버리니까……. 이번에도, 어떤… 그런데 의외로 그런 것들이 적어요. 계속 암만으로 빠져 나와서 정리할 때 느끼는… 어차피 잠깐 길게 갈 거 굳이 급하게 나를 추동하지 않겠다 라는 마음을, 다짐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저번처럼 나 아닌 바깥의 부분들, 다른 사람들, 한국의 외형들, 전기 들어오고 뭐, 폭탄 소리 안 들리고, 밤에 안심하고 자고, 술 먹고 이런 것들에 덜 휩쓸리고, 제 스스로를… 그러니까 니가 정말 길게 갈 수 있나, 길게 갈 수 있게 마음을 스스로 다잡고 그러고 있지요. 크게 뭐, 바깥 환경에 대해서 휩쓸리지 않는 거 같아요."

- 그 3주 동안에도 이런 저런 활동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주로 어떤 거였지?

“첫 주는 집에서 나주에서 계속 별보고… 시차가 적응이 전혀 안 되니까, 시차가 진짜 적응이 안 돼서 밤에는 술도 먹고, 술도 안 취하더라고요, 별보고 달보고 이렇게 있다가 올라왔죠, 올라오고 사람들 인사를 다녔죠,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있다가 15일까지 보고회를 하려고 이제 계속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보고서를 작성을 했고, 그게 이제 이번 주부터 시작을 한 거예요, 제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한 것들은. 전범민중재판 활동에도 결합을 해서 회의도 함께 하고, 강연도 다니면서 사람들 만나고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에 보고대회, 이동화 귀국 환영회 겸 보고대회도 했고, 아… 토요일이 아닌가, 맞지? 토요일. 토요일에 했고, 일요일에 1017 국제공동반전행동 집회에 나갔고, 또 어제는 사회진보연대에서 마련한 강연회도 가고, 계속 그렇게 일정들이 있었는데, 물론 앞으로는 더 바빠지겠지만, 그런 일정들을 치르면서 느끼는 건 어땠어?

“얼떨떨하구요. 진짜 진짜 얼떨떨하고, 누구 앞에 선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못할 짓이다, 이것도. (웃음) 내 역량에도 안 맞는 것 같고,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고.”

- 그 1017 집회는 갔을 때는 어땠고.

“너무 떨렸어요, 그 때는, 너무 떨려서…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는데, 사실은 지금 이라크 얘기를 끄집어내라고 하면 대부분, 정말로 대부분 많은 게 슬프고 안 좋고, 상황 안 좋은 게 대부분이라… 그런 이야기들을 또 계속 하면 사람들은 또 처음에는 공감을 받다가도 아, 가슴이 아프다가도 그런 게 계속 반복이 되면 곧 피곤해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거에 대해서. 그래서 뭐 그렇죠.”

2004년 10월 17일 국제반전공동행동 집회에서 앞에 나가 이라크 이야기를 전했다.

아부그레이브 교도소 - 전쟁은 인간을 악마로 만든다.

- 하여튼 동화 너한테는 이라크 현장의 최근 이야기에 대해 좀 더 나누었으면 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 이라크 전쟁이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들고 정말 끔찍하고 부도덕한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보여주는 게 있다면 하나는 아브그레이브 ‘포로학대’, 또 하나를 들자면 외국인들, 뭐 지금은 이라크 인들까지도 납치해서 해치고 있는 ‘참수’, 또 하나는 팔루자를 비롯해서 나자프, 알 사드르 시티 등등 해서 구역 도시 하나를 아주 조져버리는 그 ‘학살’. 그래서 포로학대와 참수와 도시 학살, 뭐 이 정도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것 같은데, 이것들에 놓고 하나 하나 얘기를 나누어 보려고 해. 하나는 먼저, 어… 네가 이라크에 있는 동안에는 그 쪽에서 사태가 더욱 심각하게 돌아간다 하면 네가 보내주는 일지만 기다리면서 그걸 읽고 그랬거든. 네가 보내온 일지 가운데 6월 15일 일지를 보면 포로 수감자로 아브그레이브 교도소에 있던 아흐메드 핫산이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먼저 핫산하고 만났던 얘기, 그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히 들려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또 하나, 핫산 이야기 뿐 아니라 실제로 포로학대에 대한 그 끔찍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라크 전역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것들이나 반응, 정서 같은 건 전반적으로 어땠는지도.

“일단 그 분을 만난 거는 굉장히 우연한 동기로 만나게 됐구요. 당시 그 날이 저희 씨떠블유비(CWB)가 전체 회의를 하는 날이었고, 그래서 저희는 거기에 참여를 하러 간 거였죠. 그런데 어떤 분이, 몸에 상처가 되게 많으신 분이 그냥 쭉 들어오는 거예요, 몇 사람한테 물어보면서. 아랍어로 하는 얘기라 잘 몰랐는데 저를 보기 위해서 오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살람한테 무슨 일이냐 했더니 살람이 얘기를 들어보래요, 저 친구가 영어를 잘하니까.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분이 바로 어제 나온 분이에요, 아브그레이브에서, 바로 어제. 그 분은 예전에 씨피티(CPT) 통역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이라크 진보 언론의 기자도 했었고, 영어를 되게 잘하더라고요. 근데 그 분이 바빌, 남부 쪽 바빌로 가서 관공서를 이렇게 쳐다봤는데 거기 있는 요원들이 잡아간 거예요. 자기는 그게 너무 억울해서 그렇게 그렇게 영어로 해서, 미군에게 얘기를 했는데, 그런데 전혀 그런 게 통하지 않고 바로 수감시켜 버리고…”

- 그럼 스파이 혐의나 뭐 그런 건가?

“…자기 말로는 공공건물 불법 침임, 뭐 그런 이런 걸로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니까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자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자기는 그냥 취재 차 나갔을 뿐인데 그 사람들이 와서 잡아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있으면서 이제, 자기는 이제 무기가 있잖아요. 확실한 신분, 그리고 영어. 그래서 이제 계속 미군들한테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대요. 그러면서 거기에 있는 수감자와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제 그걸 사진으로만, 아니면 보도만 들어서 대체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그 분이 참… 첫 마디가 테러블(terrible)이었어요, 너무 끔찍했었다고. 그 안에서 그 분이 겪은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었던 거 있잖아요, 진짜로, 굉장히, 가장 끝까지 가면 남지 미군이 여성 수감자를 강간을 하고, 거의… 가장 극단의 것이죠. 시작은 이제 뭐 먹을 것들, 고문들, 안 재우고, 때리고, 상자에 가둬 놓고 24시간 동안, 한 사람 옷을 벗겨 가둬 놓고, 뭐 이랬던 것들 그 사람이야 자기 본 대로 얘기를 척척 해주더라고요. 어후, 어후. (얘기하다 말고 힘들어 함.) 그러니까 어떤 그런 사실들은 뉴스를 통해서 접하기는 했었지만 그 사람에게 직접 입을 통해 드러난 것들은 사실 저에게 너무 충격이었거든요, 그것들은. 그 분은 자기가 봤던 모든 것들이 너무너무 억울한 거야, 그리고 자기가 당했던 것도 억울할 뿐만 아니고, 자기가 봤던 것들도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분이 이제, 그 씨더불유비(CWB) 사무실이 타흐리 광장 안쪽에 있는 건물에 있거든요, 그래서 막 돌아다니면서 외국 사람을 찾던 거죠. 그래서 나를 봤고, 그래서 막, 얘기를 막 하면서 자기 생활들, 자기가 봤던 것들… 뭐 여성이 강간당하고, 어, 정말로 심하다 하더라고요. 상자로 가두는 거는 자기도 갇혔대요. 특별히 끄집어낼 게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냥 넣어버리더라고. 그리고 뭐 하루의 배식 같은 것들, 먹는 것들, 물 같은 것도 굉장히 치욕적으로 대우를 받았다고.”

- 그럼 이라크 내에서는 그게 언론으로, 처음에 알 자리라를 통해서 나왔던가… 아니, 오히려 미국에서 먼저 터뜨린 거지? 미국 언론에서.

“으응, 타임지에서.”

- 그게 터뜨려져서 알려지기 전에는, 이라크에서는 실제 그런 거에 대한 소문이라거나 아니면 뭐 찌라시를 따로 이렇게 한다거나 그런 게 없었나?

“아니요, 있었죠? 작년에는 저 있을 때도 그 얘기 되게 많이 들었어요. 근데 설마 그랬죠, 설마. 이라크 사람들 얘기하는 것들, 그 때 아부알리(이라크인, 운전 기사)랑 알 마시뗄(한국 평화팀이 민중지원활동을 한 지역, 바그다드 시내의 아주 가난한 마을)에 있을 때도 아부그레이브에서 뭐, 뭐, 미군들 뭐 이렇게 하고, 죽이고 뭐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들… 스스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사실 또 믿기 힘든 부분들이잖아요. 설마, 설마, 설마 한 게, 딱…”

- 그래서 이제 그게 명백하게 드러나고,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뭐, 아까 얘기한 마호메트 씨처럼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서 증언을 하기도 하고 이러면서 보통 일반 이라크 사람들은 어떤 얘기들을 하는지, 쉽게 말해 이라크 사람들의 바닥 민심이라는 게 어떤지.

“이라크인 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들이 이제 치욕적으로 까발려진 거죠, 외부에. 사실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이것들이 밖으로 선정적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사실 우리가 접한 아부그레이브는 성에 대한 부분들이 굉장히 크잖아요. 벗기고, 고문세우고 뭐, 어떤 웹 싸이트에는 정말로 포르노처럼 걸고 막 그런 것도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아니고 미군이 거기에 자행한 학대의 실상, 또 미군이 전쟁에서 미쳐 가는 모습들, 그 안에 깔린 이라크인 들이 밝혀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사실은 이라크 인들이 안으로 감춰요. 물어보려고 해도 워낙 이슬람 문화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의 경우였기 때문에 이걸 내 놓고 싸우는 식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그냥 막… 아부알리 같은 경우도 아부그레이브 앞으로 같이 차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저기 보라고, 그러면서 이를 으드득 으득 갈아요. 그니까, 그 뭘까, 이라크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벌어진 그것 자체의 사실 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들에도 너무나 상처가 되고 그랬어요.”

- 그리고 또… 동화 너는 특히 이제 아이들을 좋아하잖아, 아이들. 애들도 그런 얘기하고 그러나?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런 걸 가지고 장난을 한다거나 아니면 무슨 놀이 같은 걸 만들어 논다거나…….

“그런 건 못 봤어요. 하여튼 사람들한테는 너무, 충격이에요.”

아부그레이브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나온 아흐메드 핫산 씨. 그이의 첫 마디는 테러블이었다.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포로 학대.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

- 그래, 여기에서 봐도 그렇게 놀랍고 끔찍스러운데 거기 사람들 마음은 어떻겠어. 바로 내 식구, 내 이웃이 그 끔찍스런 일들을 당한 건데……. 그리고 또 6월 말에 들어서서, 동화 네가 무엇보다 힘들었을 때가 그 때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6월 23일 일지가 그런 거였거든. 김선일 씨가 죽고 바로 다음 날. 그 일지를 보면 당시에 너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충격도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여기 사람들 이상으로 이라크 땅에서 홀로 지내면서 얼마나 다급하고 경황이 없고 그랬을까……. 어떠한 판단도 내리기 어려울, 내릴 수 없을 만큼 그러지 않았나? 나라면 할 수 있는 게 주저앉아 울거나 이불 뒤집어쓰고 있고 그런 거밖에 더 할 수 있었을까 싶거든. 당시에… 그러니까 당시로 돌아가 본다면 그 때 상황이나 그때 너 셀림 상황이나 심정은 어땠는지, 그리고 셀림하고 같이 계속 일을 해온 살람 아저씨도 김선일 씨 납치 비디오가 처음 공개되고 나서 끝내 참수로 끝이 날 때까지 그 급박한 상황 동안 물밑으로 굉장히 위험하게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들었어. 먼저 셀림 얘기부터 해서 살람 아저씨 얘기랑 그 때 당시 얘기들을 좀…….

“하… 진짜, 아……(깊은 탄식). 지금도 가끔 꿈을 꾸긴 해요. 살려달라는 거. 끔찍해. 끔찍했다기보다는 뭘까, 아……. 그러니까 22일 그분이 잡히고 처음 나온 알자리라 방송을 봤고, 그 전전날에 사우디에선가 미군이 참수되는 걸 또 봤잖아요? 그, 한 5일 전이었을 거예요."

- 닉 버그?

“닉 버그 말고. 사우디에서. 사우디에서, 그 참수 장면은 한국엔 안 나왔지만 거기서 또 봤거든요, 목 자르는 거를. 닉 버그는 한참 좀 전이었죠? 방송을 딱 봤을 때 이 사람 지금 안 풀어내면 이 사람 분명히 죽는다 하는 확신이 왔거든요. 어떻게든 뺏어야 했어요. 그니까 그 사람들은 분명히 이십 사 시간의 시간을 줬고, 좀 급하게 준 거죠."

- 사십 팔 시간 아니었어? 이십 사 시간이었나?

“이십 사 시간이었지. 아, 참 비슷한 경우가 많으니까 기억이… 이십 사 시간을 줬고, 그 소리를 딱 듣는 순간 시계를 먼저 딱 봤죠. 지금 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고, 지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가 새벽 세 시였는데 그 때 살람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고, 살람도 그걸 알고 다섯 시에 왔어요. 원래 살람은 새벽 세 시에 움직이려고 그랬는데 그 때 잘못 움직이면 총 맞거든요. 못나오는 상황이고, 통제가 끝나는 다섯 시에 바로 저한테 왔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막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거든요, 한국에 막 전화를 했지,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열 받는 게, 한국에서는 가만있으라는 거야, 나한테."

- <평화바닥>으로 전화한 거야?

“아니, 거기에 다른 활동가 한 사람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 분도 그 분 아는 단체로 전화를 하고, 나도 또 아는 단체들로 전화하고…… 나는 어떻게든 그러니까, 한국인은, 그 때는 정말 그랬어요. 한국인은 파병을 정말, 정말 원하지 않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의 파병 부분들은 국민의 몫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단체는 그 사람을 잡고 이십 사 시간 내에 파병에 대한 철회가 되지 않을 때에는 죽이겠다는 말을 확실히 했거든요, 김선일 씨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고. 그러니까 어떻게든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전하고 싶었어요, 파병에 반대한다는 부분들. 그러면 그 사람을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파병에 대한 반대 부분들, 미군에 대한 거부감들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래서 제 원래 계획은 각 방송사를 모두 만나서, 내가 만나서, 그게 알자지라에 났잖아요? 알자지라에 먼저 가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너무 당황스럽게도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나는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아 가지고, 새벽 다섯 시에 사람을 만나 가지고 살람이랑 나랑 어떻게든 우리 바그다드 내에 있는 알자지라 방송 찾아가자, 막 그걸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연락이 와서 다짜고짜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한국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나 그 말에 너무 쇼킹을 받아 가지고 여섯 시 반에 아부알리 집으로 가버렸어요. 너무 막, 위아래로 막, 다 막 혼돈스럽고, 막 미칠 것 같아 가지고… 제일 편한 데가 이제 아부알리 집이잖아요. 아부알리 집 가는 동안에 살람이 계속 우는 거예요. 우리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 분명히 죽는다고, 어떻게든 해야 되지 않냐고, 자기가 팔루자 갈 테니까,"

- 팔루자?

"응, 그 사람 팔루자에 있었거든. 갈 테니까 무언가를 하자고, 그 사람 죽는다고 막 그러는데, 나는 막 머리가 터져있는 상태고, 그래서 ‘살람, 살람, 살람… 가자, 가자, 가자, 아부알리 집으로.’ 그래서 아부 알리 집으로 갔죠. 그런데 아부알리는 그 때까지 몰랐어요. 내가 왔다고 하니까, 그냥 너무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가니까, 자라고, 근데 잠이 오나? 이불 뒤집어쓰고 이렇게 좀 있었죠. 근데 살람이 찾아왔어요, 저를 다시. 하운이(이라크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가 전화를 한 거였어요, 하운이가.”

- 살람한테?

“평화바닥에서 가만있으라고 얘기를 한 건 한 개인의 생각이었지 그게 평화바닥 전체의 생각은 아니라고, 평화바닥에서는 알려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살람 차를 타고 바로 갔죠. 피켓을 사기도 했고, 그리기 시작했죠. 막 작성해서, 이제 나가려고 했는데, 방송국이 어디인가를 알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있던 기자 한 분하고 피디 한 분에게 전화를 해서 얘기를 했죠.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그 기자 분이 버럭 화를 내는 거예요, 나한테.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냐고.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가지고… 시간은 계속 가는 거예요, 지금. 이십 사 시간에서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 나는 막 급해 죽겠는데 하는 말이 화를 확 내면서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하는 거냐고, 그냥 가만있으라고, 너까지 위험해진다고 그러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나잖아. 후. 일단 나갔죠, 피켓을 들고 차 타고 나갔죠. 살람이 가면서 그 얘기를 해요. 살람 집 옆에 모스크가 있고, 그건 수니 모스크고, 그 모스크의 이맘이 팔루자에 살아요, 팔루자에서 똑같이 이맘을 하고 있어요.(이라크에서는 사람들의 삶에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이 무척 크다. 모스크는 교회나 절, 성당과 비슷한 개념이고, '이맘'이란 그 지역의 종교지도자를 말한다.) 살람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시간을, 그 때는 이미 한 여덟 시간 지났어요, 시간이 많이 부족했거든. 그 때 우리가 자지라 방송 만나 가지고 설명하고 이런 거 해봤자 방송을 타려고 해도 아무리 빨라야 저녁 뉴스 밖에 안 나오거든요. 그럼 남은 시간은 진짜 얼마 안 남는 거예요. 살람이 조심히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한테.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팔루자를. 이맘과 같이 들어갈 테니까 너는 잠깐만 대기하고 있으라고. 순간적으로 막 고민했죠. 시간적으로 얼마, 몇 시간 안 남았기 때문에 위험할 때는 살람이 하는 게 가장 빠를 수 있겠다 생각을 해서 살람이 시내로 가다가 꺾어 가지고 알 후리아로 갔죠. 그래서 이맘을 찾아갔죠. 이맘을 만났어요. 그래서 살람이 그러더라고, 다녀오겠다고."

살람 씨. 2003년 한국에서 간 평화팀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일을 했다. 지금은 이동화와 함께 이라크에서 '국경없는 어린이'라는 엔지오를 준비하고 있다. 살람 씨는 김선일 씨 납치 비디오가 공개되었을 때 한국인 못지 않게 슬퍼하며 자신의 목숨에 위협이 있는 것을 무릅쓰고 김선일 씨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썼다.

- 그 이맘이 팔루자 지역의 이맘이면서 동시에?

“예, 같이…”

- 한 사람이 후리아 지역(살람이 사는 지역)의 이맘이면서 팔루자 지역의 이맘도…

“3일은 이제 후리아에도 있고 3일은 거기에도 있고. 그래서 갔어요, 그들 둘은. 저는 이제 다시 살람 집으로 와서 살람 전화를 대기하고 있었죠. 살람이 딱 왔어요, 저한테. 살람이 팔루자 들어가는 순간에 아까 말한 그 기자가 저한테 전화를, 그니까 제가 먼저 전화를 할 때 살람 전화번호로 했거든, 기자가 뭔가 불안해서 나한테 전화를 한 건데 그 전화를 살람이 받은 거죠. 살람 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이 전화를 하니까 친절하게 설명을 했나봐.”

- 으응, 그 때 당시 계획에 대해서, 이맘하고 같이 팔루자로 직접 들어가서 그 쪽 납치 단체하고 협상을 시도할 거라는 그런 얘기들?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기자는 더, (목소리를 낮춰) 사실은 기자도 대사관하고 같이 협상을 했었어요, 같이 들어갔어요. 대사관이 기자의 라인을 빌렸거든요. 그래서 기자랑 대사관이 한 라인으로 협상을 하고 있던 중이었죠.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 아, 김선일 씨를 납치한 단체 쪽하고?

“단체인지는 몰라요, 그거는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솔직히 내가 볼 때는 그 쪽도 헛짚은 것 같은데… 하여튼 그렇게 했나봐요.”

- 하여튼 그 때 기자도 대사관 쪽하고 같이 해서 뭔가 힘을 쓰고 있던 거구나, 구출을 하려고, 협상을 하려고…….

“살람이 간다고 하니까 그 쪽에서는 크게 놀란 거죠. 잘못 혼선이 나면…”

- 한 쪽에서 협상이 들어갔는데 또 협상 들어가고 막 그러다 보면 저 쪽에서 오해할 수도 있고, 이쪽에서 무슨 꿍꿍이속을 가졌나 하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고…….

“하여튼 갔어요. 갔고, 그 쪽 사람들 일부, 약간 하부를 만났어요. 거기서 그 사람들, 하부 사람들 의외로 약간은 좀 뭘까 우호적으로…”

- 아, 납치 조직의 하부 사람을 만났다고?

“만났어요, 실제로. 만났고, 우호적으로 얘기를 했고, 그리고 바그다드에 있는 자신들의 어떤 좀, 보다 큰 곳으로 가라고 안내를 해줬고, 그러면서 살람은 자신의 연락처를 줬죠.”

- 안내를 해줬고……?

“그러니까 거기 조직에 있는 사람하고 이렇게 이맘하고 살람 만났는데, 이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괜찮았고 이 사람들이 바그다드로 다시 가면 거기에는 좀 더 큰 그 사람들하고 만나라고 연락처를 알려줬어요. 그러면서 살람은 자신의 연락처를 가르쳐준 거죠. 살람이 다시 왔는데, 이제 살람도 마음이 불안한 거죠. 왜냐하면 그 기자한테, 그 기자가 아주 심하게 말을 한 거죠.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줄 아냐 하니까 살람도 이제, 자기도 김선일 씨에게 도움이 되려고 일을 하고 있는 건데, 지금 뭐 이렇게 혼선이 나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어쩐다 하니까 나한테 바로 왔어요, 바그다드로 바로 가지 않고. 나한테 바로 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하고 말을 해서 제가 이제 그 기자에게 연락을 했죠. 무슨 일이냐니까 기자 분이 솔직한 몇 마디를 했어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도 그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협상 이런 것에서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거든, 나는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한국의 단체들이 이라크에 와서 했던 것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고, 협상은 좀 아닌 거 같아서, 그러면 살람, 우리는 기다리자. 그 때부터 우리는 기다렸죠. 밤새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 날 밤에 아무런, 알자지라를 봤는데, 소식이 없는 거야. 아, 살았나보다. 이십 사 시간 거의 넘어갈 때였어요, 살았나보다 하고 밤을 꼬박 새고,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소식이 계속 없길래 아, 진짜 살았나보다, 아니면 뭔가 수가 있다 보다 하면서 약간은 좋은 기분이었어요. 일단은 그 혼돈에서 꺾어서 이제 아, 뭔가 되는구나… 그래서 이제 다시 집으로 갔죠."

- 그 때까지는 이제 아부알리 집에 있던 거지?

“아니, 아니. 원래 집에 이제… 이번에는 아부알리 집에 안 있었고, 하얄 자메 라는 살람 친척 집에 있었어요. 다시 그 쪽으로 가서 이제 살람도 밤새 잠을 못자고 나도 못자고 그래서 그렇고 잠 좀 자자. 잠을 자고 오후 2시경엔가 일어나서 계속 뉴스를 봤는데도 소식이 없는 거야. 살았나보다. 살았나보다……. 근데 갑자기, 씨…… 뉴스가 자막으로 확 뜨네. 그 날 23일 날, 그 날 23일. 오후 한 3시나 됐을까? 죽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거기 시간 3시니까 한국 시간으로 하면 오전 정도 되겠네."

- 한국에서 아마 새벽 밤에 막 터졌지.

“김선일 씨 죽고 나서 저는 그냥 하루 또 누웠죠, 그냥 계속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무섭고 외롭다는 생각 많이 들어서 살람한테 연락을 하는데 살람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하루 종일. 나는 너무 불안한 거예요, 살람 본의는 아니지 않느냐 싶어서. 핸드폰 다 꺼놓고 집에도 없고. 살람이 그 다음 날 밤에 저한테 몰래 왔어요. 그러더니 암만으로 가자고 그래요. 단지 저는 그게 내 안전의 문제인줄만 알았어요. 근데 뭔가 다른, 살람이 뭔가 숨기고 있었거든요, 나한테. 암만으로 피해야 된다는 건 그 필요성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갈 생각은 아직 없었거든요. 살람이 제발 가자고, 이유는 가서 알려주겠다고……. 암만에서 듣고 보니까 살람이 그 쪽에서 협박을 받은 거예요. 살람의 연락처가 갔잖아요, 그 쪽 단체 사람한테, 연락처를 줬는데 걔네 중의 누군가가 이맘한테 경고를 했어요. 걔네들은 이미 참수를 했었고, 그것들은 이제 그만한 그냥 어떤 감정이 아니고, 그게 다 잘랐을 거 아니에요, 목을, 그러면서 한국인 때문에 온 이라크도 난리가 났는데, 살람의 연락처가 걔들 쪽에 넘겨져 있고, 얘들이 이맘한테 어떤 식으로든 간에 메시지가 간 거 같아요. 이맘은 그래도 어떻게든 어느 정도 종교적 힘이나 상징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지만 이맘이 살람한테 바로 도망가라고 한 거거든요. 도망가라고 빨리 딴 데로, 위험하다고……. 그래서 많이 힘들었어요, 암만 나와서도. 많이 힘들었어요.”

한국인의 죽음 이전에도 이라크 땅에서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죽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하루 평균 최소 스물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간다. (사진 출처 http://usaterror.tripod.com)

이 사람들은 매일 매일 죽어가고 있다.

- 김선일 씨가 죽고 난 뒤에 살람 아저씨가 며칠 뒤였을 거야. 한국으로, 아마 은하 씨한테 편지를 보냈던가? 그 편지에서 살람 아저씨가 한국 사람들한테 미안해하고 있다고, 한국 사람들 마음이 어떨까 걱정된다고, 뭐 이런 얘기였고. 또 며칠 뒤 셀림이 보낸 일지를 보면 아부알리에게 찾아갔을 때 아부알리나 그 딸이나 친척들도 이제 셀림한테 미안해하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일반적인 그런 이라크 사람들 마음이 다 그렇지 않을까 싶거든. 그 외국인 참수가 한국인 김선일 뿐만 아니라 지금 계속 되고 있고, 이라크 임시정부에 협조적인 이라크 사람마저도 납치되어서 참수를 당하고 있는데 이 계속된 참수 행렬 앞에서 이라크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뭐 셀림이 평소에 가까이 했던 주변 사람들이나 셀림이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참수에 대한 부분들이 두 가지가 있는데, 왜 우리가 참수가 이렇게 이렇게, 납치와 참수들이 형이 말한 것처럼 이라크 전쟁을 말하는 세 가지 키워드 중의 하나로 꼽히느냐 하는 거거든요. 실제 거기서는 외국인의 참수에 대한 부분들은 사실은 지금까지 약 백 명이 넘게 잡혔고 삼십 명 넘게 죽었어요. 이 숫자보다 훨씬 높게 범죄 집단에 의해서 이라크의 돈 많은 아들들 딸들이 잡히고 있거든”

-점령 국가에서 온 외국인 납치말고?

“예, 그 둘이 같이 가는 거예요. 사회가 불안하고 전체적으로 전쟁으로 혼란스러우니까 실업률이 50%가 넘고 범죄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근데 이라크를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정보를 얻는 통로라는 게 언론이잖아요. 수없이 많은 이라크 내에서 교전들, 저항세력들의 교전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정당한 전쟁들은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일단 기사거리가 되는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밖으로 알리다 보면 시작되는 건 분명히 납치 그리고 참수. 언론에서 진정으로 원했던 거는 이라크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과 동일한 입장이라는 것들이라는 거죠, 언론에 깔려 있는 거예요. 실례로 현재 지금 하루의 교전 횟수는 펜타곤 발표에 의하면 한 달에 천 건이 넘어요. 5월 같은 경우는 오천 가까이 됐거든, 한 군데가 나오지가 않아요. 근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만 한 달에 네다섯 건, 특히나 김선일 씨라던가 오무 전기 노동자들, 그리고 최근에 미국인 두 명, 영국인 한명, 그런 사고 한번씩 나면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기사거리가 된다는 걸 알기에, 계속 나가고 그것들이 이라크 내에서 번져가고 있어요. 어쨌든 그런 부분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라크 내부가 그렇게 단순히 납치와 참수, 이런 부분에서 한, 정말 한 단면일 뿐이에요, 그것들도 분명히 범죄 집단에 의한. 이라크 내부에서 저항세력들이 분명히 경고를 여러 번 했어요. 더 이상, 이렇게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참수하는 일은 이슬람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중단해라, 계속 이어지니까 공식적으로 저항 세력들이 자신의 몸을 오픈시키면서 알아리비아 방송을 했었죠. 그리고 그 내용이 이라크 내부에 있는 알이라키아 방송으로 나왔거든요. 그런 것들은 한국에 안 나오거든요. 그리고 팔루자같은 경우에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 그러니까 주변 이주 노동자들, 터키나 스리랑카 이쪽 노동자들이 잡혔는데 그 소식을 접한 팔루자 주민들이 꺼내줬어요. 그런 예가 되게 많거든요. 그러니까 절대로, 외국 사람들은 납치하고 돈거래하고 참수하는 것들을 이라크 사람들은 절대로 동조하지 않아요, 범죄 집단이 벌이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생각을 해요. 근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왜 헷갈려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국도 이전에 식민지 시대일 때 사회가 완전히 민주적으로 질서가 잡힌 사회가 아니었잖아요? 그 당시도 강도가 있고 폭력배가 있고 어떤 범죄 집단도 있고, 분명히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 외 저항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덧칠하지는 않거든요. 정말 언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첫 번째고 이제 두 번째. 분명 그러한 참수가 존재하고 있어요. 예전 같은 경우에는,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어느 순간에 인식이 되요 처음에 잡았을 때는 대부분 풀어주고, 얼마 간 잡았다가 풀어주고 이랬었는데 이런 것들이 그들이 느꼈을 때 굉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거든, 언론들만 봐도. 한 나라 전체가. 그런 방법들이 정말 조그만 위협으로 큰 효과를 얻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범죄 집단 내에서는 좀 더 활성화되는 거죠. 하나 잡으면 백만 달라, 이라크 애들, 부잣집 애들 잡으면 이만, 삼만 달라 쯤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외국인들을 잡으면 백만 달라예요. 거래라는 거죠. 정치적 목적이 필요한 애들, 범죄 집단들 범죄 집단들이 서로 연결이 돼 가지고 일단 이제 이쪽에서 한 명 잡고 이리 넘겨요. 그럼 여기에서 인질로 이용을 하는 거죠."


- 실제로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어떤 조직에서는 한국인 납치를 위해 구체적인 어떤 계획을 가졌다고 그런 보도가 있기도 했는데 김선일 씨 죽고 그 뒤로 무섭지는 않았어? 그런, 그런 거 있잖아. 전에는 예를 들면 사둔 스트리트를 걸어갈 때 그냥 다 다정한 얼굴로 보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면 혹시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까 긴장이 된다거나, 아니면 저쪽에서 나를 흘깃 쳐다봤는데 저 사람이 나한테 무슨 위협을 가하지 않을까 하고 괜히 사람들이 다 의심이 되는…….

(대답 없음)

- 그 동화 네가 쓴 일지를 보면은, 어느 날은 일지라기 보다는 그냥 너 까페 이라크 평화여정에 썼던 거야. 거기서 하루… 그 날이지, 아부 알리 집에 갔다가 아부알리 딸이 그랬다고 그랬가? 한국군이 파병하려는 이유가 뭐냐 하고 이런 얘기를 물었는데, 그 때 네가 너무 혼란스럽고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지금 김선일이 죽었다 이런 얘기를 막 했다면서 부끄러워하면서 쓴 글이었거든. 우리는 김선일 하나가 죽었지만 이 나라에서는 벌써 수만 명의 김선일이 죽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야. 나도 한국에서 김선일 씨의 일이 있은 뒤로 다시 광화문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나 우리 군대의 파병에 대해서나 사람들이 다시금 집중을 하게 될 때에는 ‘그래, 이 힘으로라도, 이제라도 정말 파병을 막았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거든. 왜 우리는 김선일 씨의 죽음 앞에서만 이렇게 일어서나? 그 동안 그 많은 이라크 인들의 죽음에는 왜 이렇게 함께 아파하지 못하고 분노하지 못하고 무감각해져가면서 외면하고 있었을까……. 그 민족이라는 거, 국가, 국가주의 그런 거, 이런 게 어떤 때는 정말 벽으로 느껴지더라고. 그랬을 때 네가 거기에서 느끼는 건, 그 땅에서 생각한 건 더 하지 않았을까 싶어.

“일지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부알리 딸 에스마가 그런 게 아부알리의 친척 옴 알리의 여동생, 그 분이 이제 그분이……. 그날이 이제 살람하고 내가 암만으로 나가기 전 날에 아부알리한테 간 거죠, 아부알리한테 인사를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 분은 뭔가 얘기를, 영어가 짧았는데도 뭔가를 표현하고 싶었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았어요. 김선일 씨 잡혔는데 왜 한국 정부는 두 시간 뒤에 파병한다고 이야기를 하냐고, 그것 때문에 죽인 것 안아니냐고, 이렇게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그 분이 영어가 짧고 하니까 왜 한국 파병하냐고, 그러니까 나는 들었을 때는…"

- 으응, 따져 묻는다고 들렸구나? 질책을 하고 있다고.

“ …예에, 지금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지, 나는 너무 힘든데, 왜 나한테 지금 파병 얘기를 하냐고,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파병을 반대하고, 나는 이라크에서 시위도 나름대로 했다고 이렇게 나름대로 했다고, 그런 스스로 보호들을 찾게 되고 그랬는데, 그래서 좀 화를 내듯이 그 분한테 얘기를 한 거죠. 그리고 나서 그날 암만으로 나갈 때 팔루자에서 또 폭격이 있었어요. 23명 죽었었거든, 그날도. 암만 가서 저도 들었어요. 우리는 진짜 김선일 씨 하나 때문에 나라 흔들리는 수준에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매일 매일 죽어가고, 그나마 김선일 씨의 죽음은, 물론 김선일 씨를 죽인 일은 아주 옳지 못하고 어떻게 해도 정당화할 수 없지만, 그나마 파병하지 말라는, 그들의 분노가 표출된 어떤 이유를 붙인 거였잖아요. 파병을 하면 사람들을 죽이니까, 죽일 거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 이유도 없이 그냥 이라크 인이고, 미군을 미워하고, 아니면 이라크를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친구들, 가족들, 아들들 딸들, 조카들 죽어나가면 그 심정은 어떻겠나 생각을 했죠. 그래서 그 때 다시 느꼈던 거는 참…… 이동화 문제다. (쓴웃음) 지금 제가 문제에 걸맞은 답을 하고 있나요?"

- 내가 질문을 정확하게 못했지 뭐. 솔직히 너 만나러 나오면서 뭐랄까 인터뷰 준비를 잘 못했거든. 그걸 뭐라고 할까, 자신이 있어서 그랬다고 할까? 적어도 이라크 활동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너 일지를 거의 기억하고 있을 만큼 꼼꼼히 챙겨 읽고 그러기도 하고, 사실 거의 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냥 만나서 즉흥적으로 하면 되겠지 했거든. 좀 많이 바쁘고 정신이 없기도 하고 말이야. 좀 미안하네. 그래도 잘 해 보자. (웃음)

"……그리고 나서 그날 암만으로 나갈 때 팔루자에서 또 폭격이 있었어요. 23명 죽었었거든, 그날도. 암만 가서 저도 들었어요. 우리는 진짜 김선일 씨 하나 때문에 나라 흔들리는 수준에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매일 매일 죽어가고,"

한국 대사관에 감금, 그리고 귀국

- 그래서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으로 돌아오는 결정이. 아까도 얘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김선일 씨 죽고 암만으로 잠깐 나갔던 것도 그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는 나 때문에 오히려 나를 돕고 있는 이라크 인이 위험에 처하는 거, 그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번에, 일시 귀국이지? 귀국을 한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나 때문에 오히려 나와 관계한 씨더블유비(CWB)나 살람 씨나 아부알리 씨 같은 이라크 인들에게 위험이 가게 될 것을 생각해서 나오게 된 것도 있다고 알고 있거든. 물론 다른 까닭들 또한 많겠지만. 게다가 너는 작년에 여섯 달을 들어가 활동했고, 나오자마자 다시 준비해서 이번에 들어갈 때는 최소 2년은 있겠다고 들어간 거잖아. 이라크를 오간 다른 사람들이 말하자면 단기간의 어떤 캠페인이나 지원, 조사 같은 것을 했다면 너는 그야말로 같이 살 생각으로 들어간 거였고. 네가 줄곧 얘기하던 게 그거였으니까, 무슨 활동을 하더라도 잠깐 가서 만나 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같이 살면서 하고 싶다고. 그만큼 이라크 인들에 대해 느끼는 것도 남다르고 말이야. 어땠어? 한국으로 다시 나오면서.

“한국으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건… 어처구니없게도 내 의지나 판단, 주변 상황 같은 게 아니라 대사관에 감금돼 있던 상황 때문이었죠. 9월 7일 날 이제 집 근처에 있는 그 이탈리아 활동가들이 납치되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 후에 상황들을 보면 더 이상, 그 전까지만 해도 나의 활동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리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기도 했는데, 막상 저하고 비슷한 활동을 한다고 하는 외국의 엔지오, 평화활동가가 잡혀가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그게 대낮이었거든요, 대낮에. 대낮에 이십 명이 사진을 들고 가서 그 사람들을 끌고 갔어요. 그러니까 깔려 있는 거죠, 범죄 집단이. 그래서 나는 그리 크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내 주변에 있던 살람, 하이달, 아부알리, 알리 모든 사람들이 다 적어도 바그다드는 아니다 했었고, 슐레마니아를 얘기했어요. 슐레마니아를 가서 일단 준비했던 진행들, 원래 씨더블유비(CWB) 연대활동이잖아요, 더 크게 느낀 것들은 현재 학살들을 알리고 싶었어요. 너무나… 계속 갈 거거든요, 계속 사람들을 죽일 거란 말이죠. 그러면 이거를 이라크 땅에 있으면서 다른 외신보다 제대로 알려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슐레마니아의 하이달의 아버지가 거기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조건들이 좋았어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일단 안전하고 조건들이 맞고, 그래서 슐레마니아로 갈려고 결정을 했고, 하이달하고도 얘기가 끝났어요. 그런데 나도 거기에서 씨더블유(CWB)를 정리하고 나오기 위해서는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고, 하이달도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하이달도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동안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현지에 있었던 그 집, 가라데 집은 그(납치당한 이탈리아 활동가) 잡혔던, 이미 내가 오픈이 많이 됐어요. 이 일주일의 시간을 어디에 있을까 생각할 때 팀원들이 대사관에서 제의가 왔으니까 그 쪽으로 가라, 그게 제일 안전하다 했거든요.”

- 아아,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지내는 것 때문에 대사관으로 갔던 거구나.

“이미 다른 활동가 한 분은 들어가 있었고, 그 날 발생할 때 바로 들어갔고 저는 안 갔거든요, 거기는 죽어도 그건 아닐 것 같아서. 근데 그 다음날 살람 만나고, 그 다음 날 다 만나서 대사관 들어오라는 제의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까 니 마음 알겠지만 가는 게 낫겠다고 그랬거든요, 사람들이 다. 거기에서 일주일간 시간을 있고 그 다음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 대사관에서는 계속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그럼 제가 대사관으로 들어가겠다고 얘기를 하면서 그러면 활동 보장이 될까요? 저, 슐레마니아에 갈 건데, 그러니까 그래? 깜짝 놀라면서 그러라고 했거든, 괜찮다고. 그 다음 다음 날 이제 대사가 명령을, 바깥출입을 봉쇄시키고, 무조건 이라크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런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자유를 통제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버틴 거지, 거기서 그냥 버텼죠. 한국에서 형도 단식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 안에서 나도 단식을 시작하고 있었지. 그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더 갑갑한 거지, 이라크 대사관 애들이나….”

- 그 때 대사관 직원은 몇이나 있었어?

“꽤 있었어요. 다섯 명 정도 있었어요. 자이툰 부대 군인들이랑. 그니까 막 어떻게 쫓아내야 되는데, 당시 마지막까지 이라크에 남아 있던 한상진이랑 이동화를 쫓아내기는 쫓아내야겠는데 그게 우리 한국 법상으로는 불가능한 거잖아요. 그래서 그 안에서 버티기만 하면 이긴다고 생각했어요. 대사관 직원들은 막 비상이 걸려가지고 밤새 회의를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 시간은 이삼일 정도가 갔죠. 그러더니 밤에 정식으로 나를 불러서 얘기를 하는 것들이… 찾아낸 거야. 6월 28일 날 이라크 임시 정부가 새로 섰고, 제가 들어온 게 6월 5일이었잖아요? 다시 들어간 건 7월 17일이고. 7월말에 이민국이 생겼고 이민국에서 새로 만든 조항 중 하나가 외국인들은 입국 비자가 아닌 체류 비자 받아야 돼, 체류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그 조항이 생겼어요. 그 비자를 받지 않을 경우에는 48시간 내에 강제추방.”

- 아아, 정권 이양이 되면서 그 조항이 생긴 거구나.

“그걸 대사관직원들이 이민국하고 계속 연락을 하다가 발견을 한 거죠.”

- 법적 근거를 찾은 거구나, 쫓아낼 수 있는.

“당시에 이라크 내에 있는 씨피티(CPT)라든가 다른 단체들은 전혀… 사실은 법률이 생기면 공표 시간도 있어야 하고, 알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우리는 전혀 듣지를 못하죠, 그런 것들을. 그게 무슨 정부야, 아직 정부가 구성된 것도 아니고. 48시간 내, 그 때 48시간 내에 나가지 않으면 고발하겠다, 이민국에, 그래서 강제 출국 시키겠다, 라는 거였거든요. 이라크 임시 정부랑 미군하고는 거의 상명하복, 우리랑 똑같은 거죠, 죽이 잘 맞아요, 이라크 임시정부랑 한국 정부랑. 그래서 아마, 강제추방을 당해도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문제는 이것들이 분명히 임시 정부 내에서 새로운 조항인 강제추방하고 난 뒤에 재입국 비자를 안 내줄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강제 추방되어서 나갈 때에는 두 번 다시 이라크에 들어올 수 있는 비자를 받기가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컸죠."

이동화가 살고 있는 집 오른쪽 30미터 떨어진 곳에 폭탄 공격이 있었다. 도로에 숨겨 놓은 폭탄이 터진 것인데, 미군 자동차를 겨냥한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섬멸 작전과 저항

- 얘기를 듣고 보니까 당시 상황이 그려지네. 그냥 막연하게만 대사관에 감금됐다더라, 거의 쫓겨나듯이 귀국을 하게 됐다더라 하는 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귀국할 때는 그런 스토리가 있었구나. 그래, 그 상황들은 그렇고, 이제 동화에게 중요하게 듣고 싶은 건 갈수록 더 심한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는 바그다드의 상황에 대해서거든. 네가 보내준 일지들 가운데에도 여기는 진짜 전쟁이다, 이라크는 전쟁 중, 바그다드 전쟁 중 이라고 하는 대목을 보면 그런 게 실감 있게 전해지더라고. 어떤 날은 동화 너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으로 두 집 건너에 있는 가라다 거리의 건물에 폭탄 터지는 일이 있었다거나 살람이 너를 만나러 오려 하는데 그 길 위에서 교전이 심해서 올 수가 없다거나 하는 얘기들도 기억나거든. 실제로 그 도시에서 겪었던 전쟁 상황, 전투 상황, 사람들이 느끼던 긴장감 같은 게 어땠는지.

“8월 달에, 2일인가? 각 기독교 단체 다섯 군데가, 가라데에 그 큰 기독교 그 있잖아요, 교회. 이제 그 다섯 곳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밤에 집이 울릴 정도 소리를 열댓 번 들어요, 밤 내내. 형도 폭격 떨어질 때 있었으니까 알 거예요. 그니까 창문이 흔들리고 창문에 있는 먼지가 확 올라오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게 하룻밤에도 한 열 몇 번이 그런 거예요. 가까운, 가라데 입구의 사드르, 사드르에 폭격을 하는 거예요, 사드르, 계속 비행기로. 거의 8월 달은 내내 그 소리를 듣고 사는 거예요. 주간 같은 경우에는 가다가 쿵 하면 달려가 엎드리고, 그러다 또 걸어가고, 또 쿵 엎드리고. 가라데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정말 동시 사방에서 터져 나가는 거예요. 총소리 같은 것들도 뭐 그냥 드드드드드드드 하고. 나중에는 익숙해져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밤에 소리가 안 들리면 어, 무슨 일 있나? 할 정도로. 9월 달 돼서는 정말 집 근처에서, 대낮에. 형도 어딘지 거기 알아요. 그러니까 싸둔 스트리트에서 가라데 거리, 아웃사이드 말고 인사이드로 조금만 들어가면 밖에서 음식 먹는 데, 그 옆에가 터졌어요. 그 음식 먹는 데 맞은편 도로가 우리 집이거든. 이게 직선으로 하면 이십 미터도 안 돼요. 그 다음날 그 식당에서 이쪽으로 십 미터만 더 가면 있는 쪽, 거기가 당한 거예요. 근데 이게 건물이 당한 게 아니고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졌어요."

- 그럼 그 매설은 그럼 미군 탱크를 겨냥한 건가?

“그렇지, 그런데 두 번다 실패한 거죠. 나중에는 어디 나가면 제대로 갈 수가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도로에서 연기 같은 거 보이는 것들, 시커먼 연기 보이는 것들이 너무 일상사 되는 거야. 이런 소리 뭐 이런 느낌들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들도. 사방에서 막 연기 피어오르고, 완전히 통제를 못해요. 너무 막 심하게 교전이 붙어서."

……8월의 나자프와 알 사드르 시의 이라크 인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미군은 아파치 헬기와 탱크를 앞세워 대대적인 저항세력 소탕, 섬멸 작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쫓겨가는 그들은 그동안 외형상 자제를 했던 무력 작전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은 계속적인 반미 도시들이었던 팔루자와 바쿠바, 그리고 라마디, 사마라, 그리고 바그다드 내에서의 알 사드르 시입니다.

오늘 새벽과 오후에 있었던 팔루자 지역의 맹폭으로 인하여 백 명 이상의 이라크 인들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미군의 폭격에 팔루자 지역의 사람들은 팔루자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현지 방송을 통하여 접했습니다.

미군의 대대적인 소탕, 섬멸 작전으로 인하여 저항 세력들이 밀집되어 있는 바그다드 중부 도시들은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군은 작년 8월부터 지속적으로 수니 삼각 지대와 바그다드 내 알 사드르 시에 폭격을 감행하고 지상 군사 작전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결과는 미군 사망자 수천 명을 만들었을 뿐이고 더불어 그 수십 배의 이라크 인들의 죽음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미군은 멈추지 않고 폭격과 군사 작전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로써는 이라크에서 석유 이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중동 지역에 대한 그들의 지배전략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 그러한 폭격과 군사 작전을 시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피의 악순환은 이라크 민중들에게 사회 혼란, 치안 부재의 상황을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이라크 경찰들과 군인들은 미군과 같이 활동한다는 이유로 저항 세력들에게 증오의 대상, 공격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이에 그들도 자체 방어에 활동을 전념하다보니 실제 그들이 맡아서 해야 할 치안 유지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치안 부재 상황을 틈타 이라크 내부에서 활동하는 범죄 집단의 범죄 또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이라크 민중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어서 각 집마다 총기를 휴대하고 있고 밖으로 외출하거나 장시간 운전을 할 경우에는 항상 총기를 휴대하고 있습니다. 저와 가족 같이 지내는 아부알리도 하루 종일 운전을 하는 일을 하는데 차내에 권총을 소지하고 있더군요.

알 사드르 시와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습니다. 바그다드 내에서 가장 극빈한 지역이면서 계속되는 미군의 군사 작전으로 그들의 증오심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이에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기보다는 항상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악순환입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이라크를 총과 대포, 헬기와 비행기로 짓밟았지만 지금까지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인들 가슴속에 증오와 분노만을 심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2004년 9월 9일)


몰타다 알 사드르의 사진을 들고 있는 소년

그곳의 아이들을 거리로 나가게 했고,
그 아이들이 총을 들게 했고,
그 아이들을 전쟁터에 죽게 만들었고


-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한국에 나와 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제대로 상처를 씻지도 못한 채 바로 여러 가지 반전평화 운동에 결합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전범으로 법정에 세우는 전범민중재판 운동으로 많이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 그 과정에서 동화가 그 곳에서 겪은 것들, 그리고 이동화가 함께 지낸 이라크 인들의 눈물과 하소연, 그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 같은 것들을 증언하고 다니게 될 텐데, 이동화가 지금 힘을 쏟고 있는 그 ‘전범민중재판운동’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거 같애?

“짧게나마 이라크에서 이제 사람들을 만났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을 봤고, 사람들의 삶을 박살내고 있는 점령, 우리 소위 말하는 전쟁, 그들이 생각하는 학살 이런 것들을 보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전쟁은 끝내야 되고, 끝내기 위해서 내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되죠. 끝내는 방법들은 다양하다고 봐요.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끝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건 뭘까? 내가 만약 이라크에 있었으면 현재에 있는 상황들을 사람들에게 함께 알리고, 그리고 나는 알림과 동시에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고통들을 나누고 함께 하고, 이 사람들에게 당신에게도 친구가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한테 계속 생겨나는 것은 온통 적밖에 없어. 정말 갈수록 그런 것 같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질서들, 문화들 그 짧은 기간에 정말 많은 게 해체된 것 같아요. 이라크 사람들이 만나보면 뭐라고 하냐면 사담 때 겪은 이십 삼 년의 기억보다 지금 올해의 일년 기억이 크다는 거죠. 얼마만큼 미국의 점령 자체들이 심각한가 하는 걸 반증한다고 봐요. 그 사람들 이십 삼 년 간의 지배란 게 얼마나 크겠어요. 그거 진짜로 막, 진짜로 시아파도 막 탄압하고 죽이고 대량 학살하고 그랬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때는 사담이었고. 이슬람이었고, 이라크였다는 거죠. 지금은 그게 아니에요. 내적으로 갈수록 붕괴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여하튼 어떤 여러 가지 이유에서든 전쟁은 막아야 되고, 그리고 점령과 이러한 학살들을 막아야 되는데 그걸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면 나는 한국인이고, 또 지금 한국 정부, 내가 속해 있는 국적의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고 있고, 하나의 가장. 가장은 아니지만 세 번째로 큰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이거 막아내야 하거든. 그래서 한국에 와서 만난 활동이 전범을 민중의 힘으로 재판하자는 것, 아주 매력적인 운동이다 하고 생각했거든요.

소위 지금까지 방식대로 파병 철회를 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가고, 물론 의미 있고 중요하죠, 이게 잘 됐으면 좋겠는데. 작년 3월 달에 전쟁하지 말라고 한국에서 집회하고, 데모 집회하고 몇몇 사람들은 직접 전쟁터가 된다는 장소로 갔지만 전쟁은 났잖아요. 전쟁이 나면서 동시에 파병하지 말라고 그렇게 거리에서 시위를 했지만 또 다시 파병을 됐고, 또 시간을 흘러 흘러 흘러 흘러서 추가 파병 얘기가 나왔을 때 한국 사람 또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들의 선의, 의지들이 정치권 전체를 바꿔 버릴 만한 어떤 현재의 역량들은 결과적으로는 안됐다는 거죠. 좋아요. 계속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진 기억에는 해도 안 된다는 스스로 패배의식도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외부 동력들도 갈수록 줄어들 것이고. 하지만 이것들은 자신들이 피곤하고 힘들다고, 그리고 내부에 있는 어떤 이라크 내출혈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거는 막아야 되거든, 끝내지 않으면 안 되거든. 전범민중재판이 현재 전쟁을 막는 가장 지고지순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전쟁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를 풀어야 되겠죠. 전 세계의 여론들, 미국의 선거, 어떤 정치적인 부분들, 타협들… 제가 생각했을 때 전범민중재판은 지금까지 해온 운동과 방법적인 차이가 있고, 그것들이 좀더 뭐랄까 거리에 나오기 힘들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 힘든 사람들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 스스로도, 나는 너무, 전쟁을 일으킨, 수없이 많은, 사실은 하나의 구조겠지만, 그 안에서 핵심적 기제를 하고 있는 부시라든가 블레어, 노무현을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런 상태로 그들이 용서가 되고 그들이 합법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을 받게 되면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전쟁들은 또다시 반복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민중들을 팔아먹고 있지만 민중들은 거부하고 있거든요. 사실 이런 관계지만 민중들은 한번도 그들을 심판한 적은 없거든요.”


- 그래, 지금 이야기한 내용들이면 벌써 그 셋에 대한 전범 기소 이유가 될 텐데. 어, 동화도 물론 기소인이… 됐나? 되겠지? 동화는 그네들이 저지른 이 많은 전쟁 범죄의 행위들, 아마 다 늘어놓자면 백서가 모자랄 만큼 이루 말을 다 할 수도 없을 텐데, 그 가운데에서도 동화가 이 전범자들의 행위를 세상 앞에 밝힐 때 가장 힘주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어떤 걸까? 말하자면 노무현과 부시, 블레어를 전쟁범죄자로 법정에 세우는 이동화의 기소이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부상시켰고, 이건 직접적인 피해들. 그리고 간접적인 피해로 사람들의 삶의 기반들을 붕괴시켜놓고 여전히 그 붕괴를 고착화시키고 있고, 그들의 문화를 박살냈고, 삶의 조건들에 여러 가지가 있는 거야 다 아시죠? 전기, 전화, 여전히 지금 전기가 정말 기기 막힐 정도로 절박한데, 뭐 특히 도로도 그렇고. 그 삶의 문화를 박살냈고, 삶의 본질을 박살냈고……. 그곳의 아이들을 거리로 나가게 했고, 그 아이들이 총을 들게 했고, 그 아이들을 전쟁터에 죽게 만들었고, 더불어 형을 굶게 했고. (웃음)"

이동화가 삶을 나누며 함께 지내던 이라크 인들. (왼쪽부터 하이달, 아부알리, 파라.)

피와 학살로 얼룩진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 그래,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텐데. 나는 동화 얘기 들으면서 아까 위에서 얘기한 것 가운데 고개를 크게 끄덕인 것 중의 하나는 마음에 미움을 심어줬다고 하는 것, 이게 되게, 이 죄도 굉장히 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들 적으로 느끼게 하고, 적대하게 만들고, 사람들, 지금 이라크에 있는 점령군이건 점령을 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이건 그 마음속에 다 미움을, 그 어떤 꼬챙이처럼, 이렇게 품고 살 수 밖에 없게 만든 것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전쟁 범죄 행위인가……. 그러니까 구체적인 삶의 그러한 조건, 물적 조건뿐만 아니라 관계,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이것 또한 지나칠 수 없는 전쟁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하튼 동화가 거의 뭐 작년부터 작년 올해 두 해 동안 그렇게 이라크를 껴안고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느끼는 절망, 또는 동화가 구체적으로 받은 상처 같은 게 있다면 그런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중요하게는, 이제 사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잿더미가 된 이라크에서, 그 전쟁 상황 아래에서 안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다면 네가 찾는 건 그 잿더미 어디 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글쎄, 네가 말해주는 그 희망의 싹이 우리 모두에게도 싹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내 바람이 섞이기도 하고.

“나아지겠죠, 나아져야죠. 일지를 한번 썼는데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잖아요. 하지만 그 땅에서 돌아올 수 없는 그 사람들 있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거 아니야? 그냥 한탄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굉장히 건강하게 살려고 해요.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든 아침 일찍 일을 나가려고 하고 또 애들 건강, 뭐, 학비, 밥 이런 거 하면서. 그러니까 나 같은 건, 그 사람들을 만나서 보면, 온통 절망과 이런 걸로 가득 차서 어떻게 살아가나 그랬어요, 정말로. 정말로 많은 사람들은 총을 들어요, 그래서. 하지만 정말 또 많은 사람들은 총을 든다기 보다는 삶을 살아가고 있거든요. 나는 그게 민중의 힘이라고 봐요. 내가 희망을 갖는 것들은 말로 표현되는 이런 희망들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삶의 모습들, 여전히 아부 알리, 지금은 이동화도 없고 해서 힘들지만(웃음), 하루에 어떻게든 일거리를 찾아서 새벽 6시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막 들어오기도 하면서도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기도하고, 사람들 만나고 웃고, 내가 가면 챠이 대접해주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은 밖에서만 보면 온통 이라크는 피와 학살로 얼룩질 것만 같지만, 내부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가족들을 지키고 살아가려고 하고 있거든. 난 그게 그 사람들의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사실 직접적으로 이거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면 분노가 끓어올라, 그 사람들은 막, 그래가지고 막, 아부알리 같은 경우는 참 정말 내공이 깊어서(웃음), 살람은 약간 좀 틀려, 아부알리하고, 바로 막 스스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 울기도 자주 울고

“응, 하지만 앞으로 나도 배워야 할 것 같애, 아부알리한테. 나아지겠지, 나아지겠지, 신이 도와주겠지…….”

- 응, 그래. 나도 질문을 왜 이렇게 암울하게만 했나 싶은데, 이라크 기억하면 그 안에서도 되게 행복한 순간, 소중한 순간, 즐거운 순간들도 많잖아. 그런 얘기 한 번 듣고 싶다. 동화 너에게는 이라크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때가 가장 행복하고 좋았어?

“…… 아, 뭘까. 그냥 전 애들하고 같이 있으면 그게 막 좋았거든요. 다시 이번에 알마시뗄에 갔잖아요. 그런데 애들을 우연찮게 봤어요, 사실은 몰래갔었어요, 따지고 보면은. 나중에는 몰래 갈 수밖에 없었죠. 애들이, 그 짧은 순간 차타고 지나갔는데 애들이랑 나랑 눈이 딱 마주친 거야. 애들 눈빛이 확 변하면서 (웃음) 굉장히 자주 많이 봤던 애들이거든. 그러니까 애들도 바깥에서 오오오오오 이러고 놀라 하는 거야, 나도 오오오오오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이러고 있는 거고. 그런 일이 되게 많았어요, 마시뗄 같은 데 가면. 그리고 가라데 가도, 처음에 이렇게 운신의 폭이 좁았어요, 담배도 사러 나가야 되고 맥주도 사러 나가려면, 그런데 혼자 다니기에는 위험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쪽 애들하고 친하게 잘 지내게 되었으면 했는데, 그런데 애들은 어디나 같은 거 같아요. 작년에 봤던 그 ‘쏘라쏘라’ 아이들하고, 지금의 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애들은 나보고 계속 신기해하고, 이렇게 다가와서 막 친근하게 하고, 내가 좀 잘해주면 친근하게 하고, 나중에 몰래 혼자 와가지고 축구 스티커, 호나우드 이런 거 뭐라고 써 가지고 막 주기도 하고…….”

- 아, 근데 쏘라가 뭐지?

“사진기 이 양반아.”

- 아, 맞아 맞아. 까먹었다 야. 어떻게 그게 생각이 안 날까? 아 정말.

“그리고 뭐 애들 축구하는 모습, 공원에서 뛰어노는 모습.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가라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로 티그리스 나오잖아요, 이렇게. 좀 넘어가면 사담 궁전이고. 티그리스 강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 집, 좀 올라가면 티그리스 강 공터가 좀 있어요, 잔디밭이거든. 막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 때 나가요. 저쪽 사담 궁에서 연기가 확 피어오르거든, 한 방 맞은 거지. 그런데 이쪽에서는 사람들 앉아서, 저희들끼리 앉아서 그네타고 공놀이하는 거 보면. (쓴웃음) 그니까 저 쪽은 전쟁이고, 이쪽은… 그래봐야 방위 1키로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이동화는 지금도 전쟁의 악몽을 꾼다. 하지만 그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일구어갈 평화배움터의 꿈을 꿀 때면 절망만은 아니다. 그이는 다 무너지고 타버린 폐허 위에도 희망의 싹은 새로 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전쟁의 악몽, 그리고 평화배움터의 꿈

- 그래, 내가 있던 작년 공습 초기에도 그랬어. 하루에 삼천 발씩 미사일을 퍼부어 대고 있는데도 마을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나와서 그냥 공 차고 놀고 그랬으니까. 나는 걷다가도 지축이 울리는 폭탄 소리가 나면 겁이 나서 움찔하곤 하는데 거기 사람들은 겁도 안 나나 봐. 그게 그만큼 단련이 되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인샬라, 인샬라 하는 그네들의 정서가 받쳐줘서 그런 건지. 그럼 동화는 앞으로 계획은 다시 세웠어? 이라크로는 다시 들어간다고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는 나올 때부터 평화 배움터를 붙잡고 나왔어요. 전쟁 지역에 팔루자나 사드르 둘 중의 하나로 들어갈 것 같은데 거기 애들을 만나러 가려고요. 이라크 안에서 함께 하던 친구들이 오케이하면 갈 거예요. 그 전까지는 준비를 하면 돼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사실 뭐 그렇게 잘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그 안에서 겪은 경험들이 소중할 수 있잖아요? 이것을 푸는 작업이 좀 정리가 되면 전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될 거고 비행기 값을 모으기 시작할 거고.”

2003년 11월 동화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한 첫 마디 말도 "형, 다시 이라크 가자."는 거였다. 솔직히 말해 그 때는 그저 이라크에 두고 온 사람들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리 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반전평화팀원들 또한 툭 하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다시 가고 싶다고, 차라리 그곳에 가 있고 싶다고……. 하지만 그거야 정말 가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는 어떤 그리움이나 아니면 막연하게 그려보는 바람으로 하는 말이었다. 처음에 나는 동화가 하는 얘기도 그런 막연한 바람 정도인 줄만 알았다.

한국에 돌아온 동화는 다시 재입국에 대한 준비를 차근차근 시작했다. 이번에 다시 가면 최소 2년은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은 같이 살겠다는 뜻이었다. 그곳에 가서 이라크 인들을 만나더라도 어떤 활동의 대상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동화는 그 계획을 뒷받침해 줄만한 단체나 개인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하지만 어느 단체에서도 적극 나서지 않았다. (내 생각에 동화의 활동 방식은 그리 표가 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말해 동화의 활동은 그다지 생색이 나는 그런 활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기획이나 이벤트로 언론 플레이를 할만한 것이 동화의 계획에는 없었다. 동화는 오히려 그런 식의 기획이나 이벤트를 지양했고, 드러나지 않게 삶의 바닥에서부터 이루어나가는 연대를 찾고자 했으니 말이다. 그랬으니 활동이라는 것도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생각해 나름의 '이슈 파이팅'의 구실로 삼는다 했을 때는 이동화의 계획이란 아주 매력 없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더니 동화는 어느 날부터 인력 시장을 통해 건물 짓는 공사장으로 하루 품 일을 다닌다. 우선 당장 떠날 비행기 삯만이라도 어디 단체나 후원에 기댈 생각말고 제 힘으로 마련해야겠다 하면서. 꼬박 석 달 막 일을 다니면서 비행기 값을 모았다. 동화는 정말로 이라크로 가고 싶어했고, 전쟁터에서 그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건 다시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니까는 작년 겨울에 나왔을 때도 오자마자 형 다시 이라크 가자 하고, 그때부터 준비를 해서, 결국은 뭐 진짜 노가다를 뛰어서 비행기표를 마련을 했고,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서 준비를 해서 올 유월에 갔었고, 또 이렇게 와서도 다시 이라크 들어가기 위해 발만 동동 구르는 거 같은데, 늘 너를 보면, 이라크 평화를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그런데 이동화한테 정말 이라크는 뭘까, 이라크 전쟁은 뭐고. 가서 사람들하고 그렇게 몸을 부대끼고, 그렇게 부둥키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못 견디게 하는 이라크는 뭘까?

“이라크는 이라크지, 하하하. (웃음)”

- 근데 뭐가 그렇게 이동화 발목을 잡고, 부르고 그러냐고.

“일단은 거기 있는 사람들이 참 좋아요, 여전히, 여전히. 그 사람들이 너무 좋고, 한국에서 가족 이런 거하고는 약간 틀리게. 그리고 내가 거기에 있거나 한국에 있거나 항상 어떻게든, 어떤 일에든 나를 쓰이게 하고 산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있으면 좀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들과 있음으로 해서 좀 더 잘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많이 필요로 하는 거기도 하고, 그 사람들한테 진짜로 필요한 건 친구기도 하고, 나는 그 옆에 있고 싶고, 그러니까……. 만약 그 사람들이 내가 있음으로 해서 위험하고 정말 오지 말라고 하면 정말 안가요. 안 가고, 보고 싶어도 못가죠. 그런 게 좀 되고, 거기 있음으로 해서 크게 뭐 이런 거보다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셀림 니가 옆에 있고, 정말로 친구로서 옆에 있고 그래서 좋아한다면 나도 뭐 나름대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도움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게 지금 당장처럼 전쟁의 잿더미가 된 곳을 찾아가 준비하는 평화배움터일 수 있겠고, 아니면 그곳 상황을 바깥으로 제대로 알려내는 일이기도 하고, 뭐 그런 거요.”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를 떠나는 나를 보면서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되뇌였다. 비행기는 허망하게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바그다드를 떠나왔다. 속으로 울었다. 밖으로도 눈물이 흘렀다. 옆에 사람이 볼까봐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았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밑으로 보이는 바그다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요르단 암만 공항에 내렸다. 싸구려 숙소를 구하고 잠깐 한국에 소식을 보내고선 그 날은 긴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내 방문을 열고 나를 납치해 가는, 쿵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눈을 떠서 문을 확인하니 여전히 잠겨있다. 다시 잠에 들어서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다시 누군가가 문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열어 제끼고 나는 놀라 문을 쳐다보면 여전히 문은 잠겨있다. 이런 악몽은 처음이었다. (2004년 9월 18일)

……7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미군은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했어요. 특히나 그동안 외교적 방법과 정치적 방법으로 대처했던 쉬아파 그룹의 세력에 대해서 그들은 학살 방식으로 작전을 바꿨고 쉬아파 최대 저항그룹인 몰타다 알 사드르 측에 대해서 총구를 들이대기 시작했지요. 이에 8월은 또 하나의 학살의 달이 되었어요. 쉬아파 최대 성지도시 나자프를 3주 동안 봉쇄하고 탱크, 헬기, 장갑차를 이용하여 집 밖에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 무차별 난사하였고, 미군의 총구를 피해 집안에 피신하고 있는 무고한 이라크 주민, 여성, 아이들에게 전기와 물을 공급하지 않았지요. 더불어 바그다드 내 최대 빈민 도시이자 쉬아파 집단 거주 도시인 알 사드르 시도 마찬가지로 학살을 진행했어요. 나자프의 경우에는 쉬아파 최대 성지도시라는 보호막이 어느 정도 작용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미군이 정치적 협상의 방식으로 그들의 작전을 바꿨지만 그러한 보호막이 없는 알 사드르 시에는 밤에는 전투기를 이용한 폭격, 주간에는 헬기와 탱크를 이용하여 거주지역 진입작전, 그리고 주위에 보이는 이라크인들 학살, 도시 전체 봉쇄, 물과 전기 공급 차단, 통행금지령.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알 사드르 내에 거주하는 저항 세력을 섬멸하려 했어요.

저 역시 8월부터 시작된 미국의 학살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심하게 자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의 이유야 어찌되었든 눈앞에서 뻔히 전쟁과 학살이 눈에 보이는데 그냥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그래서 나자프로 달려가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라크 어린 얘들 손 붙잡고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서(외국인 신분) 민간인 가옥에서 그들의 폭격에 저항해야 하지 않나? 사실 나자프와 중 남부도시에 끈이 많은 아마르와 아부알리를 만나서 잠깐 제 뜻을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을뿐더러(모든 도로가 봉쇄가 되었고 안에 있는 기자들도 이미 철수명령이 내려져서 기자들도 없는 상황) 현재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는 민병대의 하부조직에 의해서 처형당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에 이는 이라크 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알 사드르 시로 눈과 귀가 돌아갔어요. 그리고 한국 월간지에 보낼 원고의 주제를 핑계삼아서 알 사드르 시에 거주하고 있는 거주민을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 지역은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쟁과 학살의 피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그 지역의 아이들이 학교와 교실이 없어서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아주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행상을 하고 있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계속 미군의 학살이 진행되다보니 그들의 가슴속에 계속 분노와 증오가 쌓여서 총을 들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바로 무장 세력에 합류하여 전쟁터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죠. (2004년 9월 20일)


동화는 바그다드를 뒤로하고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동화는 아프다.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학살 때문에 아프고, 동화가 좋아했던 그 땅의 사람들 때문에 아프다. 그리고 총을 드는 아이들 때문에 아프다, 총에 맞아 죽어 가는 아이들 때문에 아프다.

너무 아픈 동화는 그래서 지금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을 만나러 뛰어다니고 있다. 동화는 이라크 때문에 아프고, 이라크를 잊었던 사람들도 동화를 보면서 다시금 그 아픔을 마음에 새긴다. 지금 이라크 땅에서 벌이는 전쟁 범죄 행위들은 용서할 수 없다. 전범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12월 민중재판을 열 때까지 동화는 울면서 그 이야기를 하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 동화는 다시 이라크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전쟁을 끝내는 것이 중요한 만큼,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손을 잡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화는 그것을 잿더미가 된 아이들의 동무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려 한다. 죽고 죽이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하다가도 평화 배움터 구상을 얘기할 때면 그 어둡던 얼굴에도 밝은 빛이 피어난다. 힘내라, 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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