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힘인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백원담의 시와 모택동](2) - 시를 읽는 모택동

1. 시와 정치

몇 년전 중국에서 모택동이 생전에 즐겨 읽고 표시를 해두었던 시들을 모아 책을 편집해 출판하였다.(畢桂發 主編, 《毛澤東 批,閱 古典詩詞曲賦 全編》 上下, 中國工人出版社, 1997).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이 십년 가까이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를테면 모택동의 중국고전애송시들이라고 할 터인데, 그것은 작가조차 모르는 수천 년 된 옛시(고시), 중국고대시가총집이라고 하는 시경보다 더 먼저 민간에서 불려진 시들로부터 청대까지의 전 역사시기를 망할 뿐만 아니라, 중국시의 다양한 갈래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놀라운 것은 그 시를 읽어간 모택동이나 그 시편들을 책으로 엮어낸 일만이 아니다. 그걸 많은 중국 인민들이 즐겨 읽는다는 것, 모택동을 따라 읽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터인데, 그것이 오늘의 중국의 한 장면임을 새기고 가고자 한다.

한편 모택동이 이처럼 중국의 시편들을 비롯한 고전문학작품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두고 가까이한 데에는 호남사범학교 시절의 한 스승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료 학생들이 '털보 원(袁)선생'이란 별명으로 부른 그 교사는 모택동이 알고 있는 중국고전을 다시 공부하게 했고, 모택동이 쓴 글을 보고 당시 사회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아 신문기사 식으로 글을 쓴다고 힐책하였다.

그는 모택동이 당시 본보기로 삼고 있던 양계초(梁啓初, 청말 민초 중국의 개혁가)를 경멸했으며 모택동의 문체를 바꾸기 위해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문장가로 간주되는 8~9세기 당(唐)나라의 한유(韓愈) 등 위대한 작가와 시인들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고 경서(經書)와 역사서에 나오는 전고(典故, 고전문장을 인용하여 글을 쓰는 것)들을 완전히 익히게 하였다.

1913년 12월 일자 모택동이 당시 공부한 공책을 보면, 위안 선생이 언급한 방대한 문학작품들과 그가 모택동과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육 내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고전 시대의 여러 가지 발음, 고대의 경제 사회 상황에 관한 올바른 이해, 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들의 정확한 신원, 당나라 시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삽입한 고대 유교 경전의 문구들에 대한 분석 등이다(조너던 스펜스/남경태,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 푸른숲출판사 2002, 43쪽).

모택동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 정통한 고문을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원털보 선생 덕분이었다며 감사해하고 있다.

모택동은 원선생으로부터는 중국고전에 대한 훈련을, 다른 한편 훗날 첫 부인인 양개혜(楊開慧)의 아버지인 양창제(楊昌濟)로부터 보다 심도있는 지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지도를 받았다. 모택동은 양창제가 어느 모로 보나 탁월한 인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양창제는 "칸트의 관념론과 영국 철학자들이 개발한 개인적 '자아실현' 이론들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포괄적인 윤리 체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모택동과 호남사범 학생들에게 윤리학적 논증을 지도했으며, 쾌락주의 공리주의 진화론 등에 내재한 도덕적 문제들을 탐구하였고, "가족이 나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중국의 뿌리깊은 종법적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고 가족이 개인을 지나치게 보호하면 개인의 자주성이 발전하는 것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고 한다.

  모택동의 침상과 곁에 놓인 중국 고전서적들

모택동은 양창제로부터 세계철학의 개념들과 핵심적인 분석 내용을 흡취할 수 있었으며,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했다. 도덕철학에 대한 모택동의 깊은 관심은 당시의 공책에 감동과 흥분에 휩싸여 적은 기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파울젠(Friedrich Paulsen, 독일철학자)의 '인간은 역사적인 삶을 살려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모든 사람은 '노력하고 창조하며, 사랑하고 존경하며, 복종하고 지배하며, 싸우고 승리하며, 시를 짓고 꿈꾸며, 생각하고 탐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대목에 경탄하면서 인간의 주체적 삶에 대한 그의 영원한 문화혁명의 기획의 저변을 이루는 문제인식들을 섭취해갔다.

모택동의 초기 사상 형성에 있어서 호남사범학교에서의 공부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그가 평생동안 중국의 고전시편들과 전통철학을 가까이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서구의 마르크시즘과 접목, 중국적 마르크시즘을 형성하는 근간을 이룬다고 하겠다.

앞으로 이 글에서 소개할 시편들은 바로 모택동이 젊은 날에서부터 애송해왔던 중국의 고전시편들이다. 모택동은 호남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으로 갔다. 당시 호남의 많은 학생들은 프랑스로 유학을 갔는데, 그러나 모택동은 중국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유럽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북경에서 모택동은 당시 북경대학교 교수로 있던 양창제 선생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장으로 있던 이대조(李大釗, 중국에 마르크스주의이론을 도입, 북경대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창설, 중국공산당 창당지도자)를 소개받고 도서관사서로 취직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북경의 진보적 인사들이 도서관의 사서라는 말단직의 관심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모택동은 당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양개혜와 사랑에도 빠지고, 무정부주의에 심취하는 등 방황을 하다가 1919년 초, 상해를 거쳐 장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5.4 운동을 겪으면서 학생정치활동에 심입, 호남학생들의 정론지인 <상강평론 湘江評論>을 창간, 편집장을 맡아 일했고, 신문화와 정치활동을 연구하는 단체인 <문화서사>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아마도 가장 특징적인 일은 1920년 8월, 모택동이 이전에 그렇게 공부했던 것처럼, 학생들에게 읽고 독자적으로 사고케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둔 '자수대학(自修大學)'을 창설한 일일 것이다.

이 대학의 교실은 선산학사(船山學社, 중국 청대 기철학의 대가 王夫之가 공부하던 곳)의 회관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모택동이 주도했던 중국혁명의 전체적인 미래상과 진로의 가장 극명한 상징처럼 보여질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자수대학은 대개는 근대사상,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에 주력했지만, 그러나 선산학사, 그리고 그것의 옛주인인 왕부지는 중국의 유물론자이고 민족주의사상가였던 바, 그것은 모택동의 사상적 거처가 비단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가장 중국적인 토대, 중국전통사상 위에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많은 중국공산당의 장래 간부들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고, 모택동 또한 바로 그가 세운 대학에서 그의 위대한 이론적 실천적 성과인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국적이라는 형용의 가장 핵질이 중국전통사상의 집약, 근간으로서의 '시'가 아닌가 한다.

시, 시라, 중국에서 과연 시란 어떤 의미이길래, 그리고 중국혁명의 지도자 모택동에게 시란 과연 어떤 의미이관대, 나는 모택동 사상과 실천의 근간을 감히 '시'라고 말하는 것인가.

해마다 봄이 되면 신학기에 나는 <중국문학의 세계>라는 과목을 통해 우리 학과 학생들을 광대한 중국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나 매해마다 강의내용을 조금씩 달리 하는데, 주교재는 있지만, 학생들에게 주로 실제적인 문학작품을 대함으로써 문학 속에 펼쳐진 중국의 너른 천지를 여기저기 나다니면서 느껴보고 만져보고 맡아볼 수 있도록 안내를 하는 것이다. 올해는 그 행로를 다름 아닌 모택동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는데, 그것은 나의 오랜 숙원을 풀어내고자 하는, 곧 모택동을 시로써 이해해온 나만의 독법과 정회를 학생들을 통해 사회적으로 풀어내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의 중국문학 강의는 어느 해이던 문학 혹은 시보다 음악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문학은 노래가사, 음악과 함께 태동되었고, 그 음악은 정치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음으로 인해서 음악과 정치, 문학과 정치의 관계상을 통해 문화대국 중국에 입문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옛날 염제 신농 씨가 천하를 다스리던 시절, 바람이 많아서 양기가 축적되므로 만물이 흩어져서 떨어지고 과실이 여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달(史達)이 다섯 현의 비파를 만들어 연주하니 음기가 도래하여 모든 생물이 안정을 되찾고 선장하여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갈천 씨의 음악은 세 사람이 소의 꼬리를 잡고 발로 땅을 차면서 여덟 곡을 불렀는데, 곡의 이름은 각각 재민(載民), 현조(玄鳥), 수초목(遂草木), 분오곡(奮五穀), 경천상(敬天常), 건재공(建帝功), 의지덕(依地德), 총금수지극(總禽獸之極)이었다고 한다.

한편 옛날 요임금 시대의 초기에는 음기가 많아서 모든 것이 제대로 통하지 못하여 괴고 쌓이기 때문에 물길이 막힘으로써 홍수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또 백성들의 사기는 침체되어 근육과 골격이 위축되어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춤과 음악(舞樂)을 만들어 춤추게 함으로써 침체되고 위축된 것을 통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요임금이 즉위한 뒤 질(質)에게 명하여 음악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질은 산림 속에서 나는 바람소리나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같은 소리를 얻어 가곡을 만들었고, 다시 사슴가죽(鹿皮)을 장군(缶장군 부, 액체를 담는 그릇의 일종)에 붙여 북을 만들었으며, 또 손으로 돌을 쳐서 맞추어 상제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경(磬)의 소리와 같게 하였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온갖 짐승들이 모여들었다. 고수(   눈먼 늙은이)는 다섯 현의 거문고(琴)를 연구하였다가 열다섯 현의 금으로 개조해서 그것을 대장(大章)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상제에게 제사지낼 때 사용하였다.

순임금이 요임금을 이어 즉위한 뒤 연(延)에게 명하여 고수가 만든 금에다 다시 여덟 현을 더하여 23현의 금을 만들었다. 순임금은 또 악인인 질(質)에게 명하여 제곡(帝 ) 때의 구초(九招), 육례(六列), 육영(六英)의 가곡을 수정해서 노래하게 하여 임금의 덕을 밝히었다.

우임금은 즉위하자 천하를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큰 내를 소통시키고 막힌 데를 끊어서 물길을 열고, 황하의 용문을 깍아서 넓히고, 흐르는 물을 크게 통하게 황하로 끌어들이고, 삼강(三江, 황하, 양자강, 회하)과 오호(五湖)를 소통시켜 동해로 흘러들게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이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고요(皐陶)에게 명하여 구장(九章)으로 된 하약(夏 )의 곡을 짓게 하여 치수의 공을 밝혔다고 한다.

또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천자의 지위에 오를 때 하(夏)나라의 걸(桀)왕이 무도한 짓을 하여 백성들을 포악하게 다루고 제후들의 나라들을 침략하고 법도를 짓밟는 등 천하가 그 근심과 피해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탕왕은 육주(六州)의 제후들을 인솔, 걸왕의 죄를 규탄하자 공명을 크게 이루었고, 백성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탕왕은 이윤(伊尹)에게 명하여 대호(大護)의 악곡을 짓게 하고 신로(晨露)의 곡을 노래부르고 구초와 육렬의 가사를 수정하도록 해서 스스로의 미덕을 표명하게 하였다.

주 문왕이 기산(岐山)에 있으면서 서백(西伯)이라 일컬으니, 제후들은 포학한 은나라의 주(紂)왕에게서 떠나 문왕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때 산의생(散宜生)이 은나라를 쳐서 무너뜨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문왕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의 아들 주공 단(周公 旦)이 시를 지어 올려 "문왕이 위에 계신다면, 그 고명함이 하늘처럼 밝고, 주(周)는 옛나라이지만 국운은 새로운 기운이 넘친다"라 읊어 문왕의 덕을 칭송하였다.

  2003년 12월26일, 모택동 탄생 110주년 기념 당안전

무왕이 즉위하여 여섯 사단을 인솔하고 은나라를 토벌하였는데, 여섯 사단이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기 전에 선봉대가 목야(牧野)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군대들을 돌려보낼 때 포로들과 죽은 적군에게서 벤 귀를 종묘에 갖추어 올렸다. 그런 뒤 주공에게 명하여 대무(大武)의 음악을 짓게 하였다.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동방의 은나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성왕은 주공에게 명하여 그것을 평정하게 하였다. 은의 후예들은 코끼리를 길러서 길들이고 그것을 전쟁에 사용, 동쪽 지역을 소란하게 하였다. 주공은 드디어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쫓아내어 양자강 이남까지 밀어내었는데, 여기서 삼상(三象)의 곡을 지어 주나라의 성덕을 찬미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중국에서 음악과 정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건설과 그것의 정당성을 백성들로부터 부여받기 위하여 민심을 달래는, 혹은 민심의 동의를 구하는 방법으로 음악을 만들었고, 그 음악으로서 백성들은 지배자의 정치역량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 음악의 가사가 바로 시였으니, 그렇다면 시와 정치, 문학과 정치 또한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모택동과 시의 관계의 연을 풀어내기 위해 모택동이 평생을 두고두고 읽었다는 중국 시편으로 다가가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시는 중국에서 정치의 최고이상향을 그려내고 있는 요임금시절의 노래로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바다. 아래 시는 중국에서 정치의 최고의 경지, 가장 높다란 정치지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이른바 무위정치, 스스로 그러한 정치의 경지라고 할 것인데, 공자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성인정치의 실상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해 먹으니,
황제의 힘인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飮,耕田而食,帝力于我何有哉! (古逸 擊壤歌)


황제도 부럽지 않은 삶, 해가 뜨면 일어나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새가 둥지를 찾아들 듯이 집에 가서 쉬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가서 먹을 것을 충당하니, 이처럼 자연스러운 삶의 경지에 이르면 황제라는 권력인 들 부럽지 않으니,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이처럼 백성들이 먹고사는데 걱정없이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순응하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장 바람직한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택동 역시 이 시에서처럼 중국 정치의 근본을 대다수 민중적 삶의 지반 위에 세우고, 그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믿는 문화정치의 경지를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시를 읽은 시절로 보면 젊은 날이지만, 그러나 모택동의 시읽기는 평생을 두고, 치열한 전쟁터일수록 더욱 자기내발력을 일으키는 어떤 긴장과도 같은 것으로 작용했던 것이니,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람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신념과 낭만적 기개, 그리고 치열한 현실 전투정신 덕분이 아니었던가 한다.

옛날 요임금은 자신이 얼마나 정치를 잘하는 지 알아보기 위해 네거리에 나가 사람들이 양이라는 악기를 치며 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살기가 얼마나 편하면 황제조차 관심이 없다는 것인가. 그런 정치이상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의 노래에서도 전해진다.

우리 백성들을 세우시니, 그대가 지극함이 아닌 것이 없도다.
부지불식간에 황제의 법칙을 따르리.
立我蒸民,莫匪爾 .不識不知,順帝之則.(<古逸 康衢謠>)


그러나 사실 이의 노래는 강구 곧, 네거리에서 백성들이 요임금이 무리한 행함이 없이 태평세상을 다스려가는 것에 대한 감동을 담고 있지만, 앞의 노래와 비교할 때 억지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다. 요임금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스러운 통치를 표상하지만, '황제의 법칙을 따르리 順帝之則'라는 마지막 구절에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거기에는 통치세력이 어떤 정치적 의도에서 노래를 유포한 성격이 강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고대부족국가 형성에 있어서 통치권이 확립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되겠다. 모택동에게 있어서 정치란 이처럼 백성들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새로운 질서에 조응하며 사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는 신화 속의 중국과 현대 중국에 공히 관통되는 중국식 문화정치학의 의미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전긍긍, 매일 매일 근신하며 살 것.
사람은 산에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미언덕에 자빠지는 것이니.
戰戰栗栗,日謹一日.人莫 于山,而莫 于 .(古逸 堯戒)


요임금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삶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심 또 조심. 신중하게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 시의 핵심은 가장 사소한 일로 인해 인생을 가장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젊은 날부터 평생을 혁명전쟁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힘겨운 도정에 있었던 모택동으로서는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은 혼신의 힘으로 물리쳐갔지만, 자신의 내면과 더불어 혁명과 사회주의, 중국 내부의 모순들과 더 치열하게 맞붙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이 짧은 경구와도 같은 시를 읽을 때마다 모택동의 내부모순, <모순론>의 그 중요한 의미내함들이 떠오르는 것은 오늘 우리 진보세력이 맞고 있는 이 체제내화의 유혹, 그 거대한 반동의 흐름 때문일지 모르겠다.

"거대한 대륙을 다스리자면, 최고의 통치자는 시인이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 가도가도 끝이 없는 중원천지, 그 너머 광활한 대지를 살아가는 숱한 사연들을 안고 가자면 한눈에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이 없이는 정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가장 뛰어난 정치지도자는 시인이었고, 시로써 세상을 바라보고 시로써 세상을 아울어갔던 것이다."

  한겨울에도 모택동기념관을 찾는 중국인민들, 모택동을 따라 시도 읽는다

문학강의의 첫 시간 마무리 말을 나는 항상 그렇게 되뇌인다. 주나라 때의 시가총집은 시삼백, 시경은 다름 아닌 중국 전역에서 시를 채집해서 천자에게 올려 천자로 하여금 민심의 향방을 읽게 하였으니, 중국 최초의 봉건통치국가인 한나라 때 한무제가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악부를 관청으로 두었던 것은 중국에서 시와 정치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해주는 가장 뚜렷한 표징이 아닌가한다.

모택동 역시 혁명운동 과정에서 문예의 위상과 역할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문화대중화를 통한 민중의 의식화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숱한 시인과 소설가, 공연예술가들을 농촌으로 하방시키며 중국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적 삶에 일치되어가서 그들의 희노애락을 배우고 익히며 그로부터 다시 거듭나기를 바랐던 모택동의 심경과 기획은 그것이 작가들의 창작행위에 어떤 억압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당시 중국현실에 비추어보면 가장 원칙적인 선택이 아니었는가 한다.

모택동은 그의 인민들이 자기조차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그러한 삶의 주인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원한 혁명의 어떤 완결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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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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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잘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시리즈로 연재되는 건가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주 흥미있는 주제입니다.

  • 바로 보자

    주은래도 마찬가지...티벳에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학살극을 자행한 모택동이나, 남한에 투자하는 일본기업에게는 중국투자기회를 안주겠다고 협박한 주은래나...

  • 독자2

    문화혁명에 대해서 이래저래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시'에 초점을 맞추시는 만큼 문화혁명 전반에 대해 다룰 수는 없겠지만, 위 글에 있 듯 예술을 통한 의식화 작업이나 예술가들의 하방 그리고 민중들의 '반응(?)'등에 대해선 좀 자세히 서술해 주실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 생명의 나무

    '망할 뿐만 아니라'는 '망라할 뿐만 아니라'의 탈자가 아닌지요? 탈자가 몇 개 더 있습니다. 내용은 있는데, 없는 한자도 보입니다. 수정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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