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시카, 매향리에서 희망을 만나다

[에뿌키라 장정일기](9) - 5월 19일 매향리

우리는 팔일 째 걷고 있다. 7시 반부터 걷기 시작하면 밤새 들은 이야기들이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채 발길을 붙잡는다. 대추리의 파헤쳐진 밭과 무너진 대추초교, 아침에 판결을 받으러 법원에 간다는 지킴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오후 쯤 되면서 어떤 문제를 생각한다기 보다는 그야말로 신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때쯤 우리의 피켓은 새로운 구호로 바뀌어 간다.


어떤 날은 햇빛과, 어떤 날은 긴 길과, 어떤 날은 구불거리는 산길과 만난다. 긴 간척지를 걷는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바람이다. 모자를 흔들고, 몸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우리는 기존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것은 매 순간 시작되어야 했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매향리. 몇 년 전까지 미공군 사격장이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폭격에 주민들은 소음과 공포에 시달려 왔다. 심각하게 높은 자살률, 작은 일에도 폭력적이 되던 마을 주민들, 아이를 유산하는 여성들.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폭격연습이 가져다 준 재앙이었다.

전만규 씨는 아무도 그 문제를 주목하지 않았던 70년대 말부터 20년간 미공군 사격장 철페를 위해 싸워오셨다. 실상 매향리의 투쟁과정은 대추리와 매우 비슷하다. 미군에 의해 주민들의 기본적인 삶이 파괴되는 곳. 그러나 외부에선 주민들의 싸움을 “빨갱이 집단의 횡포”라는 말로 매도했다고 한다. 지금 매향리는 평화마을이고, 미공군 사격은 사라졌다.

대추리를 빠져나온 우리에게 매향리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50분 행진과 10분 휴식을 여러차례 반복했으며, 마지막 행진은 길고 빠르고 힘들었다. 그러나 매향리에 도착한 순간, 우리의 피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매향리 숙소는 투쟁본부이자, 매향리 투쟁의 살아있는 전시장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낡아 보였으나, 난방이 잘 되는 방, 깨끗한 화장실, 편리한 주방, 푹신한 이불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며칠 간 씻지도 못한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전만규 씨가 나타났다. 인사도 나누기 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실천가들. 군더더기는 없다. 그것은 우리를 맞이하는 그분의 행동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먹을 것, 잘 것, 씻을 것들을 챙겨주시더니, 잠시 뒤엔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티브이를 들고 나타나셨다.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 있다고...

잠시 뒤에 우리에게 숙소를 소개해 주신 김석찬 선생님과 함께, 매향리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7-8분 가량이 오셨다. 우리가 거기서 들은 게 단지 매향리 공군 사격장의 싸움이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화성호 간척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새만금과 대추리가 같은 문제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매향리에서 화성호 이야기를 들으며 절감했다.

참여해 주신 분들이 바로 화성호 살리기 시민연대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자기를 소개하는 대신 지금 벌이고 있는 활동을 소개하셨다.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내가 하는 활동’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소개를 한다.


활동가들은 다양한 입장과 삶의 이력을 갖고 계시다. 간척사업으로 피해를 본 어민, 이득을 볼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던 농민, 그곳에서 삶을 꾸려오신 활동가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대추리에서, 농민회에서, 새만금에서 들은 내용과 통한다. 한국의 땅, 특히 서해안을 둘러싼 지대는 온갖 개발로 항구는 막히고, 땅은 신음하고 있었다. 수난은 몇 대에 걸쳐 일어났다. 대추리가 일제시대, 미군정기, 그리고 지금까지 세 번 쫓겨난 것처럼. 그저 바다를 부쳐 먹고 살던 어민들은 어업권을 신청할 수도 없었고, 보상금도 충분히 받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없었다. 보상금은 금세 사라지고 말 것이었을 뿐 새로운 삶을 구성할 기반이 되지 못했다.

좋고 비싼 땅은 외지인들이 차지했고, 바다와 땅에서 쫓겨난 서민들은 바다에 나가 포장마차를 한다. 포장마차가 바다를 오염시킨다며 그들을 단속하는 경찰을 피해. 자신들, 정부, 행정관료들이 그 모든 삶을 파괴했으면서 말이다. 오늘 만난 활동가들은 계속 어업을 할 수 있도록 개발을 멈추거나, 혹은 전업 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삶 뿐만이 아니다. 서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항구는 모두 막힌 거나 다름 없다. 도요새, 물떼세 등 철새 도래지인 화성호에서 새들의 삶도 파괴되었다. 이 피해는 곧 모든 인간에게 돌아갈 것이다. 전만규 씨는 슬픈 농담을 던진다. 만약 화성호가 간척사업으로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금 여러분 앞엔 꽃게가 수북히 쌓여 있었을 거라고.그것도 경제적인 효과라기보다는 잠시 잠깐의 행정적 실수, 혹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인간의 추방이자 생물들의 추방이 명령된 곳. 그곳이 한국 국토의 대부분이 아닐까?

행정가와 정치가들은 가난한 어민이나 농민의 꿈을 사기쳐 헐값에 사들인다. 절망한 심리를 이용해 개발을 서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발로 이득을 얻는 것은 농민이나 어민이 아니라 개발재벌들이다. 활동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어! 민들에겐 나라가 없다.”“서해안 어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고 그것은 화성호를 트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만금보다 먼저 물길이 막힌 화성호의 오염사례들은 새만금의 문제를 푸는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계셨다. 환경문제에 대해 올바로 말하는 지식인을 찾기 어렵다고. 인문학적으로 올바른 말을 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두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주 구체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성호 살리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돌아가신후 다시 전만규 선생님과 둘러 앉은 우리들. 대추리 문제를 고민하던 우린 이런 성급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매향리가 그랬듯이 대추리도 승리할 수 있는 지혜를 나누어 달라고. 그러자 전만규 선생님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특별한 지혜라고 할 것은 없다고. 지혜라기 보다는 10년이고 20년이고 지치지 않고 활동을 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매향리에도 어려운 순간은 많았다고 한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방해하고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만규 선생님과 매향리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머리, 많은 돈, 엄청난 지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은 대단히 구체적이며 운동은 끈질긴 의지로서만 매번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희망이다. 앞서간 많은 분들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가 만나 이어지길 빌어 본다. 이미 절반을 넘어버린 우리의 대장정. 대장정 이후를 질문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할 일을 느끼는 우리의 의지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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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돌이

    수유의 활동가들께서, 맹목적 자본이 그러하듯, 뭔가를 뽑아먹기위해서, 서해안을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돌, 바람, 풀, 나무들, 그리고 그것들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소통하면서 사는 사람들과 어떤 기운을 나누고 영감을 얻기위해 단지 '걸으며 느끼고, 생각을 퍼올리'는 활동에 지지를 보냅니다.

    파괴의 주범인 건설자본은 자신들의 상품(집)을 광고할 때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라고, 그것이 정복의 대상임을 공공연히 암시합니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에 자신을 얻고, '웰빙 - 유기농, 친환경 등' 의 수사학을 동원하여, 민중과 자연과의 직접적이고 호혜적인(?) 소통을 무력화시키고, '생태계를, 자본에 의한 개발을 통한 상품'으로서 소비하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에 굉장히 강력한 환경단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만금이 막히고, 천성산이 뚤리고,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중복건설되고 있습니다. - 이 기획은, 공공사업의 대부분을 독점입찰하는 원청건설자본과 관료들이 추동합니다.'

    한반도에서 '진보'의 관념에, 생태주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고민해 주세요.
    인문적 시각, 사회과학적 시각, 생태적 시각 등으로 분절되어있고 좀체로 그 연관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현재의 '진보'의 담론에 어떻게 생태적 시야가 결합할 수 있을까요?

    그 대장정을 통해 얻은 지혜와 영감을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 꿈돌이

    수유의 활동가들께서, 맹목적 자본이 그러하듯, 뭔가를 뽑아먹기위해서, 서해안을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돌, 바람, 풀, 나무들, 그리고 그것들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소통하면서 사는 사람들과 어떤 기운을 나누고 영감을 얻기위해 단지 '걸으며 느끼고, 생각을 퍼올리'는 활동에 지지를 보냅니다.

    파괴의 주범인 건설자본은 자신들의 상품(집)을 광고할 때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라고, 그것이 정복의 대상임을 공공연히 암시합니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에 자신을 얻고, '웰빙 - 유기농, 친환경 등' 의 수사학을 동원하여, 민중과 자연과의 직접적이고 호혜적인(?) 소통을 무력화시키고, '생태계를, 자본에 의한 개발을 통한 상품'으로서 소비하라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에 굉장히 강력한 환경단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만금이 막히고, 천성산이 뚤리고,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중복건설되고 있습니다. - 이 기획은, 공공사업의 대부분을 독점입찰하는 원청건설자본과 관료들이 추동합니다.'

    한반도에서 '진보'의 관념에, 생태주의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고민해 주세요.
    인문적 시각, 사회과학적 시각, 생태적 시각 등으로 분절되어있고 좀체로 그 연관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현재의 '진보'의 담론에 어떻게 생태적 시야가 결합할 수 있을까요?

    그 대장정을 통해 얻은 지혜와 영감을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 수유+너머

    결코 분절되어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자본은, 폐허를 만들면서만 축적을 계속해나가니까요.

    새만금과 평택 등지의 싸움들이 보여주듯
    많은 주민들은 여전히 '개발'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고
    정부는 그 환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개발 운운하면서요.

    여러가지 부문의 운동들이
    독자성을 가진 채 네트워킹해야하지 않을까.
    지루한 회의만 거듭되는 연대가 아니라

    그것의 시급성을ㅡ
    자본의 폭력성이 무섭게 심해지는 요즘
    정말로 절실히 느낍니다.

    대장정을 통해 얻은건 지혜와 영감.이라기 보다
    그 모든 것이 따로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구요.
    더 많은 부문의 운동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집합적 신체를 꾸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연구실에 한번 놀러오세요.
    진보 담론과 생태적 시야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결합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얘기해봐야죠!
    자세한 방문일정과 하고픈 이야길 미리 주시면 더욱 좋구요!
    (www.transs.pe.kr)

  • 수유+너머

    결코 분절되어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자본은, 폐허를 만들면서만 축적을 계속해나가니까요.

    새만금과 평택 등지의 싸움들이 보여주듯
    많은 주민들은 여전히 '개발'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고
    정부는 그 환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개발 운운하면서요.

    여러가지 부문의 운동들이
    독자성을 가진 채 네트워킹해야하지 않을까.
    지루한 회의만 거듭되는 연대가 아니라

    그것의 시급성을ㅡ
    자본의 폭력성이 무섭게 심해지는 요즘
    정말로 절실히 느낍니다.

    대장정을 통해 얻은건 지혜와 영감.이라기 보다
    그 모든 것이 따로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구요.
    더 많은 부문의 운동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집합적 신체를 꾸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연구실에 한번 놀러오세요.
    진보 담론과 생태적 시야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결합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얘기해봐야죠!
    자세한 방문일정과 하고픈 이야길 미리 주시면 더욱 좋구요!
    (www.transs.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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