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노사관계로드맵 '이후'

현장은 새로운 정치노선과 지도력을 출현시켜야 한다

'노사관계법·제도선진화방안'(노사관계로드맵) 법안이 지난 8일 환경노동위원회, 21일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오늘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21일 법사위에서는 임종인, 노회찬 의원이 반대 발언을 했지만 찬성 9, 기권 1로 가결됐고, 오늘 본회의에서는 재석 167인 중 찬성 152, 반대 10, 기권 5로 통과되었다. 노사관계로드맵은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11월 30일 비정규법안 통과에 이어 노사관계로드맵까지 통과되는데 걸린 시간은 3년 3개월, 이로서 노무현정부가 추진해온 노동 관련 법제화는 형식적으로 완결되었다. 그리고 수차례 강조되었듯이 비정규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의 핵심은 비정규직 보호나 노사관계의 발전이 아니라 노동유연화 그 자체에 있다. 하지만 돌아볼 때 비정규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의 통과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노무현정부는 지난 3년간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법제화를 위해 치밀한 공작을 펼쳤다. 민주노조운동의 상층 공략에서부터 현장 공작까지 빈틈없는 계급투쟁 관리시스템을 가동했다. 자본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반으로 삼았고, 미디어를 통한 가공할 여론을 조성해왔다. 사회적 합의주의에 기반한 상생 논리는 정규직 현장 곳곳을 파고들었고, 노사정대표자회의가 결국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야 말았다. 시시때때 발표한 각종 '비정규직대책'과 적절한 공권력 투입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항을 교란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저항했지만 방어와 후퇴를 반복했다. 노사관계로드맵이 처음 머리를 내밀고 분위기를 살필 즈음, 얼마 후 2004년 1월 19일 민주노총 대의원 54%는 투쟁과 교섭을 병행하겠다는 이수호-이석행-강승규를 선택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사회적 교섭' 노선을 들고 나왔다. 수차례 대의원대회에서 물리적 충돌이 뒤따랐고, 강승규 비리 사건은 급기야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 반자본, 반정권 저항 의지마저 꺾어버렸다. 노무현정부의 노사관계로드맵과 이수호 체제의 '사회적 교섭' 노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궁합이 맞아떨어졌다. 최초에 우려했던 바 대로였다. 약간의 실리, 그것은 일부 정규직 노동자와 관료주의 노동운동을 위한 것이었고, 그 실리의 일부는 급기야 노조 비리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수호 집행부가 비리로 물러났지만,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조준호 집행부 역시 노동운동의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자본과 노무현정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사이 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와 중집 등 골간 운영은 '민주'노총이라는 이름마저 부끄러울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막바지에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에게,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회피를 공모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노선과 민주노동당의 대중투쟁 없는 의회주의 활동이 어울려 빚어낸 비극적이고 우울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조운동과 정치운동에서 노선과 정책과 지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 사회 모든 노동자는 노사관계로드맵 '이후'의 현장에서 살아야 한다. '이후'는 불행한 시대를 예고한다. 한미FTA 체결에 따른 자본의 횡포, 한미동맹 강화에 따른 한반도 평화 위협, 빈곤 심화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생존 압박에 맞물려, 노사관계로드맵 '이후' 현장 노동통제는 '이전'의 삶과는 비교되지 않는 삶의 유연화를 강요할 것이다. 자본가들과 신자유주의 지배분파들은 이를 기반으로 해서 대선과 총선을 거치는 동안 안정된 신자유주의 정치 재편을 추진할 것이다. 노사관계로드맵 통과가 노동법제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정치사회적 성격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장 노사관계로드맵 통과에 분노하고, 투쟁을 호소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법제화와 관련한 이상 버스는 이미 떠났다. 쟁이로 막을 단계도 가래로 막을 단계도 아니다. 저지, 무효화시킬 방안은 사실상 없다. 지난 수년간 방어와 후퇴의 저항을 해왔던 민주노조운동은 이제 그 막바지 현장에 서 있을 따름이다.

이제 주어진 현실을 차분하게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은 민주노조운동에게 '이후' 대응을 묻는다. 07년 시작과 함께 현장은 '이후' 전략을, 새로운 정치노선과 정책과 지도력을 출현시키기 위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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