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전히 웃고, 노래하는 우리의 꿈을 꾸지요”

[흐르는 강물처럼](마지막회) 지우 닝(1927년 말레이시아 출생)

“내 오빠는 우리가 지하활동으로, 그리고 정글로 들어갔을 때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어요. 오빠는 우리가 ‘산쥐(mountain rats)'-영국인들은 공산주의 게릴라를 이렇게 불렀다!-로서의 험난한 생활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확신했지요. 난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결심했어요. 50년이 지났지만, 나는 한 번도 되돌아가 본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도 다시 보지 못했지요. 어머니는 1960년대에 돌아가셨어요. 난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울고 또 울었어요. 인생은 이래요, 즐겁고 낙관적이어야 해요. 만족하며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좋을 일이 없지요. 항상 불행할 거예요. 인생은 짧아요, 그리고 끝이 있지요. 난 겨울에 죽지 않는 강인한 상록수 정신을 좋아해요.”

이 글은 지우 닝이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히 바치고자 하는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평등, 평화, 정의 그리고 미래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 깊은 한국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상록수에 대한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지우 닝의 이야기다.


젊은 날

젊었을 때 전 매우 활달했어요. 전 배드민턴, 야구, 배구, 탁구 등 다양한 게임과 운동을 즐겼어요. 방과후 집으로 곧장 간 적이 드물었고 가끔 숙제도 빠뜨리곤 했지요. 지금도 여자 아이는 집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안전하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18-9세였어요. 이차세계대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보다 훨씬 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그 때 나는 이미 혁명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지하운동과 연계를 가지기 시작했어요. 기간대오 친구와 부유한 집안출신의 학급친구는 매일 밤 우리에게 맑시즘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곤 했어요. 그래서 내 여동생과 난 맑스에 영향을 받았어요.

친구의 오빠는 희생당했고, 여동생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어요. 그 친구는 언니에 대해 심문을 받았으나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지요. 그녀가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을 중국으로 보냈어요. 친구의 오빠는 나중에 잔혹한 고문으로 죽었어요. 그 당시 블랙리스트에 오르기가 쉬웠기 때문에 피할 준비를 했어요. 게릴라가 되기 전에 전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좋은 친구를 보러갔지요. 그러나 나는 너무 위험해서 학교에조차 들어갈 수 없었어요. 학교 주변은 항상 경찰과 정보기관원이 깔려있었거든요. 제가 다닌 학교는 정부에 의해 ‘빨갱이’(공산주의자의 조종에 의한)라는 낙인이 찍혀 행동주의로 잘 유명했던 학교였어요. 우리 학교 졸업생중의 한명은 나중에 말라야 공산당(CPM)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지요.

당은 나에게 선생이 되라고 지시했어요. 난 아주 작은 학교의 유일한 선생이자 교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학교 종을 울리는 유일한 사람이었지요. 그 학교에는 20-3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5살 정도 되었고,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은 20살이었어요. 학교는 초등학교였는데, 단 한 과목 중국어만 가르쳤어요. 나는 역시 수업료를 받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게 내 월급이었어요. 학생들 가정방문을 하기도 했지요.

지하에서의 활동

어머니는 우리 활동을 지지해 주셨어요. 그러나 영국을 위해 일하는 시청공무원이었던 나의 배다른 오빠는 우리와는 정반대였지요. 어느 날 밤 우리가 지하 유인물을 인쇄하고 있을 때 내 여동생과 오빠가 갑자기 우리집에 찾아왔어요. 어머니는 우리가 하는 일이 법을 어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를 믿었기에 우리가 유인물 숨기는 것을 도와주었어요. 어머니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지만 좌익에 공감했거든요. 우리는 매우 단호했어요. 하루는 말라야 공산당(CPM)에서 유일하게 우리와 연락이 닿던 연락선이 체포되었어요. 그 사람이 “인터내셔날가”를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나중에 그 사람이 처형되어서 우리는 안전을 위해 집을 떠나야 했지요.

제가 예전에 기독교인이었거든요. 정부는 기독교인을 공산주의자로 의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기독교인 친구와 함께 지내기도 했어요. 그곳은 아주 떨어진 곳이었는데, 우리는 4명의 여성 세포조직이었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정기적으로 기독교집안을 방문했었어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이미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믿지 않았지요. 운이 좋았던 건지 우리 당 연락선은 숨을 거두면서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도 충분할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고, 곧바로 지하 유인물 인쇄를 다시 시작했어요.

그 때 당은 우리와 함께 일 할 다른 지하세포에 있던 인쇄공을 보내주었어요. 그는 매일 우리 집으로 왔고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지요. 불행하게도 그는 곧 체포되었고 역시 교수형을 당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도망을 쳐야 했어요. 우리가 집을 떠날 때마다 당은 우리에게 눈을 떼지않았고 우리를 위해 망을 봐 주었지요. 결국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직후 나는 산으로 들어가서 게릴라운동에 참여했어요.

일본 점령 시절로 돌아가 보다

나는 어린아이였어요. 나의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고혈압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버지는 어머니보다 30살이 많으셨지요. 아버지가 4번째 부인인 어머니와 결혼하셨을 때 어머니는 아직 10대였다고 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재혼을 안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사이에서 6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고요. 일본이 말라야를 침공했을 때 나는 초등학교 4, 5학년 정도 되었어요. 나는 전쟁상태에 있지 않았던 중국으로 갈 수 있었지요.

나는 내 고향 대신 수녀들에 의해 운영되는 영어학교에서 공부를 했어요.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선생님이나 학생 모두 외양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우리는 옷 입는 데 주의를 많이 기울였고 선생님들은 모두 기성복을 입었어요. 차림새가 시원찮은 중국인 중학교와는 매우 달랐다는 이야기지요. 나는 학교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학교 등록금을 다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곧 나는 학교가기를 거부했어요.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중국어를 가르치는 모든 학교의 문을 닫았어요. 어머니는 페낭을 떠나서 모든 식구가 시골에 사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에게 가기로 결정했어요. 일본군은 쉬지 않고 페낭을 폭격하고 있었지요. 어린아이였기에 우리는 몰래 언덕꼭대기에 가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구경했어요. 폭격이 중단되었을 때 바다를 보기위해 조심스럽게 나갔지요. 그곳 어디에도 눈에는 배 한척이 보이지 않아 매우 적막했어요. 일본군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했을 때 어느 곳을 가건 여성들을 학대했어요. 일본군은 백주대낮에 심지어는 예닐곱의 어린소녀까지도 겁탈했어요. 어머니 당신도 젊었고, 우리가 거의 10살 전후여서 매우 걱정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산의 동굴로 숨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일본인들이 어디에서건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단하는 “정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일본군은 당시 아홉살이나 열 살밖에 안되었던 내 남동생을 데리고 갔지요. 남동생은 이틀 밤낮을 감옥에 있었어요. 남동생은 보석으로 석방되었어요. 나중에 일본인들은 만약 어떤 지역에서 반일 운동가를 발견하면 반경 50스퀘어마일 이내 모든 사람을 잡아들일 것이라고 겁을 주었어요.

오래지 않아 언니는 중국인 중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언니 남편은 일본인회사에서 일했어요. 어느 날 또 다른 “정화사업”이 있어서 우린 모두 아침 여섯시에 일어났어요. 우리는 집 바깥에 모였고 반일 저항분자라고 의심되는 사람의 이름이 불려졌어요. 그들의 대부분은 남자였어요. 그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검은 옷을 입고 두건을 한 사람이 이들을 불러냈어요.

배신자들이 그들이 생각할 때 일본에 저항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들을 지적했고, 트럭에 그들을 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그리고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어요. 우리는 언니가 일본어 선생님이라고 일본인 관리에게 얘기해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나 역시 나중에 일본을 위해 일하는 직업을 얻었어요. 나에게 입을 유니폼과 배지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일종의 협조자라는 이야기였지요. 내 직업은 고기 무게를 재고 파는 사람을 감독하는 것이었어요.

육군병원에서 일본인 병사를 간호하기

일제검거가 있을 때면 언제나 내 직업 덕분에 탈출 할 수 있었어요. 나 역시 일본인학교에 들어갔고, 내 일본어 선생은 매우 훌륭한 해군 중위였어요. 그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일본노래를 많이 가르쳐주었지요. 그 선생님은 가끔 우리 집에 들리곤 했어요. 나중에 내 친구와 나는 일본인병원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어요.

우리는 간호사가 되기에는 너무 어려서 전화교환원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병원의 중국인은 낮은 수준의 천한 일들이 배당되었지요. 의사는 모두 일본인이었고 간호사는 대부분 중국인이었어요. 우리는 전화교환원으로 있으면서, 커서 근처 일본 해군병원 간호사가 될 것이라고 결심했어요. 우리의 소망은 이루어졌지요. 우리는 일본인 직원들이 매일 점심을 위해 약국을 비울 때 대신하는 역할을 배정받았어요. 우리는 가장 젊은 직원이었고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일본인들이 우리를 신뢰했지요. 일본인들은 나이 많은 중국인 직원들을 믿지 않았어요. 병원에서 모든 군인환자는 일본인이었거든요. 일본인은 그들 국민에게조차도 사납고 공포스러웠어요. 성병에 걸린 많은 해군병사들은 그들의 상관에게 매우 심하게 두드려맞기도 했고요. 심하게 뺨을 맞는 건 물론, 헌병이 길고 날카로운 칼로 협박을 하기도 했지요. 일본군 하급병사는 거들먹거리지 않고 괜찮아 우리는 좀 더 잘 지낸 편이었어요.

내 친구와 나는 일본인 직원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기숙사와 더 나은 음식과 같은 특권을 부여받았어요. 일본인 직원들은 항상 좋은 음식을 충분히 먹었지만 중국인 직원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일본인 직원들이 먹고 남은 잔밥으로 개를 키우는 한이 있어도, 중국인 노동자는 충분히 먹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언제든지 중국인 직원들을 돕기위해 노력했어요. 우리는 일본인이 보이지 않을 때, 친척이 병에 걸린 중국인 직원을 위해 몰래 약과 포도당을 조제해주기도 했어요.

병원에서 우리의 업무 중의 하나는 병사들의 혈액샘플을 채취하는 거였는데, 하루에 20명 이상을 채취했어요. 만약 장비가 고장이 나면 우리는 손으로 튜브를 이용해 그들의 피를 뽑으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우리는 혈액의 수분함량을 재기도 했어요. 우리가 그 일을 끝내고 나면 비타민을 줬어요. 일본인들은 비타민이 우리의 몸을 강하게 해줄 거라고 이야기 해 줬어요.

중국어를 하는 일본인 병사들

병원에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몇몇 괜찮은 일본인 병사들과 환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중국어로 말해도 상관없을 때 중국어로 우리에게 얘기를 하곤 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원래 어디 출신인지 얘기를 않으려고 했어요. 어느 날 그들 중 한사람이 그의 어머니는 대만인이고 그의 아버지는 본토 중국출신이라고 고백했지요. 일본군으로 징용을 당한거지요.

생체실험

매일 5시가 되면 모든 직원들은 퇴근하고 병원은 고요해지지요.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병원 앞에 세워져있는, 피가 떨어지고 있는 트럭을 봤어요. 이런 일은 매일 밤 계속되었어요. 이상한 것은 그 트럭이 그곳에 몇 시간씩 주차되어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지요. 어느 날 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거의 반쯤 죽은 인간을 수술을 하고 있는 수술실을 보았어요! 두려웠어요. 수술실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방안에서 수술기구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전에 중국어 신문들이 여기에 쓴 적이 있었어요. 나는 마침내 트럭에서 죽도록 방치된 이 사람들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들은 노동자로 보였고 일본인들은 생체실험에 그들을 이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화가나고 분노했어요. 이 얼마나 비인간적입니까! 그 이후로 일본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바뀌었어요.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한 열정을 잃었어요. 얼마 후 일본은 항복했지요.

영국인이 되돌아오다

일본인들은 먼저 그들의 간호사들을 트럭 적재함에 태워 일본으로 돌려보냈어요. 일본 헌병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칼을 휘둘렀어요. 그들은 화가나 미친 것처럼 보였고 단칼에 사람을 죽일 듯 했어요. 일본인들이 병원을 떠나고 난 후 우리는 병원에 그대로 남겨졌어요.

일본인들이 떠난 후 영국인들이 돌아왔어요. 중국인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고, 나는 내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나는 사범학교에 들어갔고, 혁명사상의 영향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우리 반은 3일간 파업을 계속해서 선생님 한 명을 사임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어요. 그 선생님은 학교의 KMT(China Nationalist Party, 대만의 전 지배정당인 중국민족주의자당)멤버였던 선생님들 중의 한명이었거든요. 그 선생님은 학생들의 정치적이고 진보적 행동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당시에 학생들이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고무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게릴라 전사가 되다

내가 게릴라에 합류했을 때는 벌써 20살이 넘어서였어요. 나는 당원이 될 것이라고 서술된 한 장의 종이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어요. 거기에는 인민에 봉사하는데 충성을 서약하고, 한마음으로 당을 따를 것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 종이 위에는 맑스와 엥겔스의 사진이 있었고요. 군생활은 매우 엄격했어요. 우리에게 남녀관계는 허락되지 않았고 남녀는 별도의 숙소에서 잤지요. 밤에는 취침을 알리는 호각소리에 나면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잠을 자야했어요. 매일 우리에게 할당된 일과 과제를 수행한 후, 대형강의실에서 학습을 위해 모였어요.

우리는 중국 언어와 교양을 공부했고 말레이, 타이, 필리핀 춤을 포함한 그룹댄스를 배우기도 했어요. 축제 때는 돈은 없지만 포커를 할 수는 있었어요. 나는 수백명으로 구성된 12대대에 속해 있었지요. 규율과 지휘권은 매우 엄격했어요. 실수를 하는 어느 누구든 벌을 받았지요. 우리는 매일 아침 점호를 받았았는데, 그 때마다 지도자는 우리에게 그날의 훈화를 했어요.

훈화가 끝나면 우리는 훈련과 반복연습을 10분에서 15분 정도 했어요.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숙소에 쉬러갈 수 있었어요. 그러면 아침 8시경 아침식사를 위한 휘슬이 울렸어요. 그 휘슬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의미했어요. 우리는 식사용으로 개인 주석식기를 사용했어요. 우리는 밥은 자기 분량을 먹었지만 반찬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었지요. 우리는 캠프에서 위생에 매우 조심했어요. 우리는 병이 번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주방용기를 나누어 쓰진 않았어요.

전신원으로 일하다

우리는 통신을 주고받기 위해 비밀코드를 사용했어요. 전신원으로서 내가 일하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어요. 밤이 조용하고 전보의 빈도가 더 많았기에 밤에 일했어요. 보통 전보는 밤 11시 또는 12시에 왔고 우리는 다음 날 새벽 2-3시까지 일했지요. 그러면 지휘관이 전보를 해독하라고 다시 깨우기 전인 10시에서 11시까지는 잠을 잘 수 있었어요. 전보가 없을 때는 우리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코드를 고안했지요. 이러한 코드들을 고안하는 것은 각각의 코드가 4자리 숫자의 다른 조합을 필요로 하기에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두뇌작업이었지요. 우리는 모든 다른 군부대들을 위해 코드를 표준화해야 했어요. 또한 우리는 적들이 코드를 교란하는 것을 막기위해 정기적으로 코드를 바꿔야했어요. 우리는 지휘부에 있었기에 많은 전보를 받았어요. 매일 모든 게릴라부대들로부터 소식을 받았답니다.

중국에서의 훈련

나는 한 때 훈련을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지만 보안 때문에 중국에서의 자유로운 여행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시간은 교실에서 보냈어요. 중국에 있는 동안 자유시간에 우리는 야구를 하거나 영화를 보기도 했어요. 그러나 일반 극장에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우리의 행동반경은 당 교육원에 제한되었어요. 그 당시 문화혁명이 시작되어 우리 교육과정은 중단되었고 되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월남인

베트남 동지들은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어요. 1960년대 중국에 가기 위해 베트남을 통과해야 했는데, 매우 따뜻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어요. 우리는 중국으로의 여행을 새로 시작하기 전 반 년간을 베트남에서 지내야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베트남 동지들은 인민들의 집단 거주지를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해 주었어요. 북부 베트남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긴 했지만, 우리는 손님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나는 내 두 눈으로 집단 거주자들의 가정을 보았는데 고기도 생선도 없었어요. 먹을 것이 정말 없었어요.

소대 지휘자로서

나는 매일 마지막으로 소대의 일과 업무를 평가해야 했지요. 그리고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연설을 해야 했어요. 결국 전 내 임무에 피로를 느꼈어요. 휴식을 가지게 되었죠. 아무도 내가 반복적으로 같은 연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어요. 난 매번 새로운 연설을 쓰기엔 너무 게을렀고, “지도자를 믿어라 당을 따르라 등등”과 같은 똑같은 오래된 얘기와 똑같은 오래된 구호를 사용했어요.

우리는 행진을 하거나 문화전시 그리고 이러저러한 것으로 중국을 모방하고자 노력했지요. 우리 대대는 매우 커서 정글 깊숙이 행진을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사회자와 지도자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커다란 단상을 만들기까지 했지요. 그들은 다른 분대들을 사열하기 위해 그곳에 서있었고 우리는 행진을 하면서 그들에게 경례를 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고 우리는 다시 미소를 보냈고요. 사열 후에는 음식과 게임들이 제공되었어요.

이름을 바꾸다

우리는 항상 이름을 바꾸었어요. 우리가 한 소대에서 다른 소대로 바꿀 때면 언제나 우리의 정체성을 숨기기위해 이름을 바꾸었지요. 그리고 우리가 같은 곳에 계속 있다고 해도 아무도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게 정기적으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시험들

학습에서 우리가 맑스를 공부할 때면 우리는 그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토론했어요. 그러나 그건 주로 암기하는 일이었고 나는 그걸 매우 잘했어요. 우리는 매번 장이 끝날 때마다 시험을 치렀어요.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사상을 공부했고 말레이시아의 맥락에서 그들의 사상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어요.

마침내 평화

우린 평화협정이 체결이 되고 나서야 이걸 들었어요. 우린 정글을 떠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지요. 우린 혼란스러워 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우린 정상적인 생활에 적응하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정글 안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거든요.

내 꿈들

최근 전 아주 자주 꿈을 꿔요. 그 꿈은 모두 게릴라부대에서 의사였던 린 동(Lin Dong)의 동생 린 홍(Lin Hong)의 여동생에 관한 거예요. 그 사람의 파트너는 어느 행진 도중 페락강에 빠져서 죽었거든요.
그 당시 그는 이미 병들어 있어서 등에 있는 전신기를 무겁게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부대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에 대해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어요. 만약 전신기를 옮기는 것이 너의 임무이면 너는 그것에 대해 끝까지 책임이 있다는 거지요. 너는 너의 생명을 다해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거예요. 그가 강에 빠졌을 때 몇 몇의 우리 말레이 동지들이 즉시 그를 구하러 강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죽었어요. 그가 죽었을 때 린 홍은 비탄에 잠겼지요.

내가 그녀에 대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아세요? 우리가 병들었을 때 그녀가 우리를 어떻게 치료해 주었나, 우리는 얼마나 마음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던가. 나는 그녀가 오후 단지 잡담을 하기위해 우리에게 들렀던 것을 기억해요. 내 꿈에 일들은 정확히 그들이 했던 그대로예요. 난 여전히 함께 웃고 노래하는 우리들에 대한 꿈을 꿔요. 나는 마음 깊은 대화를 위해 어디론가 가서 서로의 손을 잡았던 것도 기억하고요. 그런데 내가 이런 꿈에서 깨면, 이제 이런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실감하지요.

[번역]하제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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