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박제된 사할린 한인

[방방곡곡99절절](8) 수많은 김상(김씨) 오지상(아저씨)을 기억하며

‘참 기구한 인생들도 많다..’

가난 때문이든 질곡의 역사 속에서 당한 희생이든 멀리서 찾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듣기에도 버거운 사연들이 많다. 그 중에서 일제 식민지시대에 중국, 일본, 러시아, 하와이 등 이 땅을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있다.

사할린. 그곳에 처음 가 본 것은 2006년 9월이었다. 필자가 현재 일하고 있는 KIN(지구촌동포연대)라는 단체에서 상근을 하기 시작한 해였다. 재외동포의 역사와 인권을 위해 일을 한다는 단체에서 상근을 시작했지만, 솔직히 재일조선인 외에는 많이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각설하고, 아무튼 좋았다. ‘사할린..’ 약간은 부푼 마음으로 떠났다.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질 듯했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내 팔뚝만한 게 다리를 뜯으며 마시는 보드카 한 잔은 쉬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그리고 배 한척 다니지 않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자면 해탈의 경지에 오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렇게도 깊고도 슬픈, 한 많은 질곡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이때부터다. 사할린한인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이 시작됐고, 그러면서 매년 한 두 번은 사할린을 가게 되고 사할린한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게 됐다.

  한글로 적혀있는 조선인 리성식님의 묘지
“리성식”
1898년 9월 19일 출생.
1983년 8월 24일 사망.
강안도 양군건 양군면 장거리.

아마도 강원도 양구군을 적으려던 것이 아닐까...
2009년 처음으로 유즈노사할린스크(주도)에 있는 제1공동묘지에서 ‘조선인 묘지조사’를 시작했다. 사할린주의 각 지역에 있는 공동묘지에는 러시아인들과 함께 조선인들이 묻혀 있다. 대부분 조선인묘들은 밀집돼 있다. 살아 있을 때도 서로서로 힘이 돼 주며 모여 살지만, 죽어서도 서로 의지하는 것일까.

여름에는 어른 키만큼 자란 머위를 낫으로 쳐가면서 조선인 묘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는 좌표를 찍고, 사진을 찍고, 비석에 적힌 모든 내용을 기록한다.

별다른 정보가 없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이름, 생몰일시, 본적, 묘주 등 비석에 많은 것들을 적어 놓는다. 정확한 한자로 쓰인 것도 있지만 이렇게 우리말이지만 정확하지 않게 쓰인 것도 있다.

이런 조선인 묘지가 남사할린 전체에 4만여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만 할 뿐 누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한 것은 모른다. 정부차원에서밖에 할 수 없는 사업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예산을 투입해야하지만 2011년 예산안 날치기 처리로 ‘조선인 묘지조사사업’ 예산이 누락돼 버렸다. ‘덕분에’ 사할린으로 아버지를 보내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70년을 기다려온 국내 유족들의 꿈도 한 순간에 물거품이 돼 버렸다.

러시아 연방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 사할린

  사할린섬의 위치
사할린은 러시아 연방의 하나의 주(洲)이지만, 1905년 러일전쟁 이후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기까지 북위 50도 이남지역은 일본령이었다. 이로써 사할린에는 탄광노동자, 비행장 건설, 철도 부설, 제지 공장 등등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모집, 관알선, 강제징용 등의 방법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탄광에서의 폭발사고, 붕괴사고, 배고픔과 질병 등 누가 얼마나 죽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 당시를 기억하는 1세들은 거의 사망했거나 영주귀국 했고, 사할린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저~기 탄산(탄광) 있는데 어디 근처일거요. 모르지. 어디다 묻었는지..’ 이런 대답밖엔 들을 수 없다.

다행히 묘지가 있고, 훼손되지 않은 묘들은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묘가 있어도 훼손되거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묘들은 독신자들의 묘다. 주위에 사는 한인들이 불쌍히 여겨 묘자리를 마련해줬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더 이상 돌봐줄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사실을 기억하고 증언해 줄 1세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상 오지상(김씨 아저씨), 조상 오지상(조씨 아저씨)

일본 패전 후 사할린 땅에는 조선여성들이 많지 않았다. 남편을 따라 왔거나 엄마 등에 업혀 온 어린 아이들 뿐이었다.

일본인들을 모두 데리고 일본으로 떠난 배가 ‘우리’도 데리러 올 거라 믿었다. 고향에 가려면 러시아여성과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향에는 이미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조선 여성이 아니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도 안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조선땅으로 데려다 줄 배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1, 2세들의 언어습관을 보면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가 혼재돼 있다. 여담이지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인1: “저기에 ‘게키죠’가 있었잖아.”
한인2: “게키죠? 게키죠가 뭔가?”
한인1: “극장말이요.” (‘劇場’을 일본어로 ‘게키죠’라고 읽는다)
한인2: “아, 소오?!” (‘소오(そう)’는 ‘그래’라는 뜻)


만담 같은 광경이지만,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내가 없을 때 저 양반 지나가면 식사하셨는지 꼭 챙겨라’

  코르사코프시의 항구가 보이는 언덕. ‘망향의 언덕’이라 불린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인 2세들은 독신 남성들(한인 1세)을 김상 오지상, 조상 오지상, 이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마약과 술에 취해 살던 아저씨들로 기억한다.

길 가던 할아버지를 보면 집에 들여 김치와 밥을 내 놓고, 며느리에게 ‘내가 없을 때 저 양반 지나가면 식사하셨는지 꼭 챙겨라.’라고 당부하던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아저씨들인데..’ 하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왜 저들이 저렇게 망가져서 살다가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만 했는지.

2000년. 1세들이 한국으로 영주귀국 할 수 있게 된다. 약 1천명에 이르는 대규모 영주귀국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태생이며, 부부 혹은 남남, 여여로 1가구 2인을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자식들은 사할린에 남아야한다.

  공항에서 배웅하는 가족들
1세들은 60년 가까이 고향땅에 계시는 부모님도 만나뵙지 못하고 지내면서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이제는 자식과 생이별 할 차례다.

고향땅을 밟는 조건은 가혹했다. 영주귀국을 위해 떠나는 날 사할린 공항은 부모님을 보내는 자식들과 자식을 놔두고 가야만 하는 슬픔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어 마치 거대한 초상집과 같았다고 한다.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21개 지역으로 영주귀국이 이루어졌고, 그 수는 4천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사할린에는 자식 혹은 병환 등의 이유로 영주귀국을 하지 못한 한인 1세들이 있다.

  결혼식 사진(서두남, 당시 18세)
서두남 할머니(1925년생)는 일제식민지시기에는 ‘가나야마 도미코’라는 이름으로, 소련 시대에는 ‘따마라’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현재 사할린주 돌린스크시에서 자식들과 살고 있으며 영주귀국은 포기했다. 자식들을 놔두고는 못 가신다면서...

이들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다.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은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 받는 분들이 대부분이다(참고로 사할린의 물가는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다음으로 높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라도 ‘혜택’을 받으려거든 영주귀국을 하는 방법밖엔 없다.

현재 사할린에 남은 한인 1세는 1200~1300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실태조사가 돼 있지 않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도대체 그 동안 우린 무엇을 해 온 건지...

“우리를 아주 잊어삐리고 있는 거 같애요”

어떤 한인의 말이 가슴이 와 박힌다.

사할린한인들은 이 낡은 사진처럼 역사 속에 박제돼 있는 듯하다. 70년의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사할린한인들. 이제 이들을 사진 속에서 꺼내서 제대로 봐야하지 않을까.

현재 사할린한인은 4세까지 이어지고 있고, 사할린에 약 3만 여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17대 국회에 이어 18대 국회에도 영주귀국 문제, 사할린한인 실태조사, 묘지조사, 3,4세 교육 문제 등을 포괄한 ‘사할린한인 지원 특별법’이 발의됐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사할린한인들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사할린주 남서쪽 해안

*이은영 님은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 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http://www.kin.or.kr/
*방방곡곡99절절을 기획 연재하고 있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는 2011년 글로컬 페미니즘 학교 수강생을 모집중입니다. www.glocalactiv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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