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프레임과 파국으로 가는 기차 올라타기

[칼럼] 최저임금은 노동자 민중의 ‘덫’이다

미국의 루비니 교수가 다시 얼마 전 2013년 미국 경제 파산과 세계 경제 파탄을 경고하고 나섰다. 미국은 작년에 이어 올 초에도 안정화 자산 2조 달러를 풀었다. 총 4조 달러를 20%에 육박하는 미국 실업률을 해소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루비니 교수는 작년에도 세계가 세 번째 공황 단계 초입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거기다가 일본 지진 해일로 금융완화를 위해 80조 엔을 긴급 자금으로 풀었다. 피해 복구비용으로는 30조 엔이 들어갈 전망이다. 포르투갈에 이어 스페인이 IMF 자금을 받을지 주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풀린 이 막대한 돈 탓에 국내 경제는 고물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드디어 청년들이 고통의 임계점에 들어서자 촛불을 들었다. 방학하기 무섭게 알바노동 시장에 편입되는 학생들은 최저임금을 못 받아도 등록금에 보태려고 학업을 포기하고 돈 벌러 나선다. 이미 2명 중 한 명은 백수로 살아야 한다.

노동자의 현실은 더하다. 학생도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지만 복지사각 지대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버텨나가는 사람 숫자가 400만이 넘는다. 저임 노동자는 200만이다.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재벌은 316조 이상의 돈을 곳간에 쌓아 두고 있다. 은행은 매년 이자 수입으로만 36조를 쌓아두고 있고, 대학은 36조 이상의 돈을 곳간에 쌓아두고 있다.

노동자는 국가를 상대로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는 현실에서 부득불 국가를 상대로 최임 협상을 한다. 노동자 민중은 최저임금이라는 이 덫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1인당 최저생계비가 52만 원이다. 1만7천 원 정도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돈이다. 그것도 허름한 집만 달랑 있고 버스 타고 오고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돈이 최저생계비다. 수족이 멀쩡해 일 해 봐야 돈 백은 고사하고 이것저것 떼고 나면 고작 6~70만 원만 손에 쥐어진다. 넓고 편안한 집도 아이들 사교육은 언감생심이다. 재벌과 은행의 곳간을 털지 않고서는 도저히 짐승처럼 살 수도 없는 현실로 가고 있다. 혹자가 말하듯이 88만원 세대를 넘어 경제성장율 1%, 고용 0%의 ‘폐허세대’가 다가온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최저임금 운운한다. 최저임금은 우리가 자본과 국가의 프레임에 걸려들었다는 증표다. 다른 대안프레임이 마련되어야 한다. 국가만 가지고 다그칠 일이 아니다. 대학자본, 은행자본, 재벌의 곳간을 털어야 한다. 동학혁명이 고부군수의 곳간을 털었듯이 부자 증세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배를 불려 온 자본들로부터 돈을 긁어내야 한다. 노동자는 생활임금을 프레임으로, 일반 시민은 기본소득을 프레임으로 자본과 국가 양 쪽에 삶의 질을 요구해야 한다.

민주당도 민노당도 한나라당도 민주노총도 복지와 노동의 관계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 명박 대통령은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노동조합을 용서할 수 없다고 얼음장을 놓고는 반 값 등록금 천천히 진행시키라고 지시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정동영을 찾아간들 정당과 국가는 모든 문제들을 만지작거리다 말 것이다. 국가와 재벌이 보장소득을 자기들의 곳간에서 내놓지 않고서는 고통의 임계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이윤율이 계속 하락하는 한 국가와 자본은 전 방위적으로 시민과 학생을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임금에 하방 압력을 넣을 것이다. 이미 임금은 클리포드 기어츠가 말한 바의 퇴축(退縮)현상처럼 하방운동을 시작했다. 그 좁디좁은 노동시장에 쐐기처럼 들어가 봐야 저임금 고강도 노동만이 기다린다. 자본은 자기들의 곳간을 사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한다.

우리는 이제 빈곤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최저임금은 우리가 빈곤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징표다. 최저임금, 수급자, 최저생계비 등 우리들이 사용해 왔던 모든 용어들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폐기, 그리고 새로운 대안 프레임의 제시를 이론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때다. 파국으로 접어들고 있는 자본주의를 플랫홈에서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모든 문제를 국가라는 틀 안에서 해결하려는 발상도 문제다. 자본주의가 거덜 나는데 국가가 온전할 리 없다. 국가를 대체할 코뮌이 생성되지 않으면 국가도 자본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벨기에에서는 시청을 코뮌이라고 부른다. 지자체가 코뮌 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자체를 국가 조직으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지자체를 국가 조직으로 남겨 둬 봐야 세금만 포탈해 간다. 조선 시대 때 세금이 어디 노동자 민중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던가.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아니더라도 이명박 정권의 고소영 강부자 내각에서 우리는 인간 이하 말종들의 작태를 지겨울 만큼 봤다.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거덜 내고 생명을 앗아가는 세상을 변혁시키려면 새로운 대안적인 계급 정당 기치 아래 각 지자체를 파리 코뮌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전망 수립이 필요하다. 과거 코뮌의 역사는 코뮌이 공황의 시대를 어떻게 견디고 극복해 냈는지 보여준다. 2012년이라는 정당정치의 담벼락을 넘어 미래를 보지 않으면 결단코 고도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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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 꼬뮌 , 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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