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예의

[식물성 투쟁의지](45)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에서 보낸 120일

하청노동자들의 죽음은 가능한 은폐되거나 비공식 속보로 전달된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 있는
울산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입구의 벚나무는
피기도 전에 벌써 지고 있었다

응급센터 소생실 침상에 하얀 천으로 덮여 있던 죽음들
생의 수기가 급작스럽게 중단된 신체는 사무적으로 방치돼 있었다
머리가 깨진 신체, 내장이 터져 나온 신체
뼈들이 창처럼 피부를 뚫고 나온 신체
전기가 훑고 지나간 고무인형 같은 신체
현대중공업 안전환경부는 사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무미건조하게 그들을 ‘부주의한 신체’라 불렀다
벗어나기 어려운 평가를 받은 부주의한 신체는
죽음 곁에서 말이 없고
피비린내가 그들을 요약하고 있었다

피비린내는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피비린내를 감당하기엔 내 어깨가 너무 좁다

울산대학병원 영안실
몇 시간 전 자신의 체온과 예기치 않게 결별한 신체가 관 속에 누워 있다
다하지 못한 말처럼 피비린내가 따라와 웅크리고 있다
유가족들은 영정사진처럼 울고 있었고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 간부들과 관리자들, 그리고 하청업체 관리자들이
그 울음조차 촘촘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난 홀로 하청노조 자주색 투쟁 조끼를 입고 기다린다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하청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10시간 … 20시간
울산대학병원 영안실 한 켠에서 기다린다
관 속이 따로 있을까?
현대중공업 관리자들의 눈빛은 살인자처럼 위협적이고
동료의 죽음을 찾아온 하청노동자들은
눈물조차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머뭇머뭇하다
내가 앞에 앉아 있어도 눈길조차 주지 못한다

형이고 동생이었던 동료의 핏자국을 옆에 두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음처럼 일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난 고개들을 들지 못하는 그들의 손을 몰래 잡아주고 싶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기다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예의다

자정 지나 관리자들도 어느 정도 빠져나가고
술 기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졸고 있는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오는 하청노동자들
몇 마디나 했을까
힘없이 내 멱살을 잡고 서럽게 운다
하청들 다 죽어가는 데 위원장이라는 놈이 뭐하고 있냐고 엉엉 운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에게 단결은 너무 멀고
파업은 꿈만 같은데
우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던 그들이
내 멱살을 잡고 엉엉 운다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않고 엉엉 우는 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였던
현장 추모 집회였던
작업중지권 쟁취를 위한 하청노동자 현장파업이었던

울산대학병원 영안실에서 보낸 120일!

(2012년11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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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 하청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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