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분열과 온갖 분란을 일으킨 박근혜 새 정부의 인수위가 48일간의 활동을 드디어 마쳤다. 아쉽지만 그들의 활동이 마감됐다고 해서 48일간 우리가 받았던 스트레스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자는 "역대 어느 인수위보다 조용하게 헌신적으로 일해주신 덕분에 앞으로 새 정부가 정책을 만들어 가는데 기반 구축이 잘 다져졌다고 생각한다“고 하는가 하면, 유민봉 간사는 "326개 공약 923개 세부이행계획 수립…역대 인수위 중 처음”이라는 자화자찬까지 아끼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이들의 불통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인수위는 밀실정치의 위험성을 충분히 보여줬고, 특히 LTE급의 광속으로 대선시기 약속했던 공약뒤집기가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지 역시도 증명했다. 이것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연금개혁안이다.
박 당선자는 선거공약으로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을 지급할 것이고, 이에 대한 재원 역시 준비됐다고 대선기간 내내 호언장담했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에 대한 증세 계획 없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여러 번 의문을 제기했었다. 이에 자신을 믿으라고만 강변했고, 원칙과 약속을 그토록 중시한다는 당선자의 실체는 두 달 만에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러나 분노의 포인트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보다는 48일간 자신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교묘한 연금정치를 작동시켜 공적 연금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근본 원칙까지 처참하게 무시했다는 점이다.
손 안 대고 코 푼 박근혜 식 연금정치
그 시작은 이랬다. 2012년도 대한민국 국민의 복지에 대한 열망과 삶에서 오는 좌절은 기존의 보수아이템으로는 극복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총선과 대선시기 새누리당의 좌클릭은 민주당의 정책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흡사해졌다. 결정적인 국면이었던 대선시기 노인빈곤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노령층과 노인부양층에 대한 적극적인 구애는 표로 연결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박 후보자는 20만원씩 어르신들께 꼭 드리겠다는 매우 명료한 메시지를 전국을 순회하며 자신의 공약의 우수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당선됐다. 이제 말로만 했던 약속을 이행해야하는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복지부 인수위 업무보고 이후 기초연금에 대한 재정방안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출처가 불분명한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초연금의 재원을 국민연금기금에서 충당하겠다는 보도는 인수위의 공식입장이 아니었음에도 사회적 반향은 너무나 컸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대거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에 연금탈퇴를 원한다는 내용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연금 전문가들도 이것이 사실인 냥 갑론을박에 나섰다. 그러던 중 납세자연맹은 놀랍고도 신속하게 국민연금폐지서명운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2월 21일 인수위 해단식을 앞두고 박근혜 정부의 140대 국정과제가 발표됐고, 기초연금의 재원은 조세로 충당한다고 밝혔다.
공적 연금제도 개혁과 관련해서 48일간 남은 결과는 불통을 기반에 둔 정보 및 소통의 차단으로 출처불명 정보가 국민들을 세대간, 연금 가입자와 비가입자간 모두를 갈가리 찢어 놓았고, 이제 정부가 손쓰지 않아도 국민연금의 신뢰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뒤에서 웃고 있을 박근혜 정부의 안도의 숨이 느껴진다. 공적 노후소득보장제도의 약화를 위해 복잡한 정치과정을 생략한 채 국민들 스스로가 제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손 안 대고 코풀기’ 정치의 야비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 방법이 성공했기에, 법 준수를 부르짖는 보수가 즐겨 찾을 정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 국민은 그야말로 만만한 상대인 것이다.
현재 한국의 공적연금은 사회보험방식의 국민연금과 조세운영방식의 기초노령연금으로 이루어졌다. 국민연금의 제도적인 문제는 변화된 노동시장과 조응되지 않는 점에서 발생하는 사각지대 해소 문제, 상당부분 적립방식으로 재정이 운용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될 기금고갈을 제도 존립과 연결시켜 국민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문제, 380조에 이르는 기금의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운영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보험이지만 가입자의 이해관계보다는 정부당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정책의 국가 독점성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참고로 국민연금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관료 및 전문가들은 특수직역연금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초노령연금의 경우 2007년 국민연금법 개혁 당시 낮아지는 소득대체율과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제한적인 기초연금적 성격으로 도입되어 대상자 포괄성 및 낮은 급여 수준이 대표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공적 노후소득보장 제도를 개혁하려면 정책목표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우선 공적 노후소득보장체계를 강화해서 세계 1위의 노인빈곤율을 해소할 목적이라면 전면적인 기초연금 도입이 정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재정에서 발목 잡히기 시작한 인수위는 기초연금의 정책적 목표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국민연금과 기초연금간의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국민행복연금 차등지급의 문제점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는 노인 전체의 25%미만이고 평균 급여액도 20만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우선 국민연금은 보험료 수준과 가입기간에 비례해서 급여를 받게 된다. 현재 노인세대는 연금수급 1세대로 1988년 제도시행과 더불어 가입했다고 하더라도 가입기간이 25년 미만이다. 국민연금은 40년 간 꾸준히 보험료를 납입해야 완전노령연금의 대상자가 되고 채워지지 않는 기간만큼 급여액은 감액된다. 이러한 제도의 미성숙을 감안한다면 65세 이상 노인의 국민연금 가입유무는 소득격차의 커다란 기준으로 작용될 수 없다. 그러나 인수위의 최종안에서는 기초연금 수급 대상층을 소득수준 70%의 기준과 국민연금 가입유무를 고려해서 총 4가지 집단으로 차등지급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한 것이다. ‘국민행복연금’ 차등지급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을 낳는다.
첫째, 전체 노령층에 대한 기초적인 소득을 지원함으로써 노인빈곤 예방에 기여하는 기초연금의 목표를 망각하고 있다. 캐나다의 조세로 운영되는 기초연금(Old Age Security)은 모든 노인에게 제공하되, 연간 총소득이 일정수준 이상의 노령층에 대해서 이듬해 소득신고를 통해 기준 초과분을 상환하도록 되어 있고(clawback), 상위 약 2%에 해당하는 고소득자들만이 급여대상자에서 제외시킨다. 2012년 5월 기준 기초연금급여수준은 평균 약 510달러로 한화로 50만 원 이상이다. 기초연금의 효과는 1980년 21.3%에 이르는 최저소득 이하의 노인층이 2004년도 5.6%로 감소되었고, 이후도 5%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캐나다는 노인빈곤율은 OECD 평균치인 13.5%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물론 캐나다도 재원조달과 관련된 정치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금은 재정적 변수보다는 정치적 변수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국민행복연금은 이러한 기초연금의 기본 원리는 모두 버려둔 채 국민연금 제도와 이상한 동거를 일방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공적 노후소득보장제도의 기본 요소인 소득재분배의 형평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경우, 국민행복연금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가입기간이 길어야 한다. 가입기간은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거나, 소득이 안정적인 경우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비정규직의 경우 계약기간의 불안정성과 해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가입유지 뿐만 아니라, 가입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상당하다. 그런데 국민연금 가입자의 형평성을 제고한다는 명목으로 가입기간과 기초연금의 급여수준을 비례시킨 것은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더 많은 사회적 급여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국민연금의 대표적인 문제였던 비정규직 및 저소득층에 대한 낮은 포괄성 문제에 이들에 대한 급여 깎기 문제를 가중시킴으로써 소득재분배의 역진성을 매우 강화시킬 수 있다. 도대체 누구에게 행복을 주는 연금이 되는 것인가?
셋째, 소득하위 70%의 국민연금 이탈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소득 99만원인 사람이 15년간 국민연금에 보험료를 납입할 경우 약 23만 원 수준의 급여를 받게 된다. 반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국민행복연금으로 20만원을 받게 된다. 물론 전자의 경우 가입기준이 적용된 국민행복연금을 받게 된다면, 후자보다 총량으로는 더 많은 급여를 받게 되지만, 저급여 수급예상자들은 총량으로 보기보다는 기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20만원을 받는데 내가 왜 오랫동안 국민연금을 납부해야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또한 소득이 없는 주부와 같은 임의가입자는 가입의 유인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소득이 낮거나 없는 여성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즉 정체불명의 국민행복연금의 도입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가입자의 유인효과가 떨어짐으로써 국민연금제도를 약화시켜 오히려 공적 노후소득보장 구조가 약화될 것이다. 공적 노후소득보장 구조의 약화로 덕을 볼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민간연금보험사이다. 어쩜 이리도 딱딱 잘 맞아 떨어질까?
결국 박근혜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공적 노후소득보장체계를 약화시켜 불안해 보이는 국민연금을 믿는 대신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노후를 스스로 준비하도록 보이지 않게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임순례 감독의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최해갑은 원작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로 국가의 일방적인 정책이나 제도 모두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국민연금 납입 고지서가 문제가 되어 국민연금공단지사에 방문한다. 공단 직원은 노후에 가난하지 않게 살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국민연금을 납입해야한다고 안내하면서 국민연금 납입은 국민의 의무라고 안내한다. 이에 대해 최해갑은 "그럼 나, 오늘부터 대한민국 국민 안 해!"라고 외친다. 이 장면을 두고 ‘나도 국민 안 하고 싶다’고 공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최해갑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평소에 ‘국가, 국민, 애국’ 이 삼종 세트에 대해 당연하기보다는 불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국가는 노동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권력과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우가 많다. 국민의 경우 나는 이건희나 어버이연합의 어르신들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데(뭐 그 분 역시도 그럴 것이고) 국민이란 이름으로 묶여 각자의 이해관계를 불분명하게 하는 것 역시 마땅치 않다. 그리고 누군가를 착취하고, 전쟁지역에 파병하고,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국가폭력 등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정당화 되는 것에 대해 울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에 대해서만큼은 최해갑 처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가 현대화 국면에서 제멋대로 만든 제도를 노동자와 시민의 투쟁으로 일군 87년 민주화의 성과로 이듬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국민연금제도는 적어도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보험보다도 우수한 보장성을 갖고 있다. 이에 국가는 기금에 대한 욕망은 거대하지만 보장성에 대한 부분은 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국가의 속내가 저러한데 어렵게 지켜온 국민연금을 우리 손으로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적어도 국민을 이렇게 만만하게 보는 저들에게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의지 없는 국가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와 정치력으로 지켜 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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