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요청 잠시 쉬어갑니다 다시 오픈하겠습니다 ㅠㅠ
제 통장을 누군가 사기신고하셔서 정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난 3월 9일, 투쟁 현장에 조형물과 소품 제작 등으로 연대하는 문화활동가 A 씨가 SNS에 남긴 글이다. 계좌와 함께 후원 요청 글을 올린 지 약 4시간 만이었다. 누군가 A 활동가를 ‘사기범’이라며 계좌를 허위 신고했고, 그 결과 계좌가 지급정지된 것이다. A 활동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직도 계좌가 풀리지 않고 있다”며 황당해했다.
A 활동가에 따르면, 후원 요청을 올린 당일 오후 3시 17분부터 약 3분간 입금자명에 각각 '@DK***7', “불법토토”, “사이트”, “계좌신고”라고 적힌 1원이 계좌로 입금됐다. 이상함을 느끼고 곧바로 은행에 전화를 걸었지만, “(사기 여부를)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문화활동가 A 씨의 계좌에 입금된 1원
“불안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계좌를 정지시키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방법밖에 없다고요. 그런데 그때는 후원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계좌 정지는 어렵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한 30분쯤 뒤에 은행에서 문자가 왔어요. 사기 계좌로 등록돼 계좌가 지급정지될 예정이니 은행에 연락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원 입금 직전에 들어온 10만 원이 후원금이 아니라 이른바 ‘핑돈’(보이스피싱 피해금)이었던 것이다. 최근 사회운동진영에서는 A 활동가 사례처럼 ‘핑돈’을 입금해 ‘통협(통장협박)’, ‘통묶(통장묶기)’ 등으로 불리는 수법의 사기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10만~30만 원가량의 ‘핑돈’을 입금한 뒤, 1원씩 추가 입금하며 입금자명에 텔레그램 아이디를 남기고, 계좌를 풀어주는 대가로 금전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3월 초부터 ‘A학교 성폭력 사안,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 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a학교 공대위’)’, 병역거부자 B 활동가, 3·8 여성파업,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등의 후원 계좌들이 지급정지되는 사례가 속출한 바 있다.
통장협박 뒤에 '텔레그램 범죄 네트워크'
그렇다면 사회운동진영에 ‘통장협박’ 사기를 저지른 이들은 누구일까. A 활동가 계좌에는 1원의 입금자명으로 ‘@DK***7’라는 텔레그램 아이디가 남았다. 계좌 주인을 협박해 금전을 요구하기 위한 연락처였다. 텔레그램에 해당 아이디를 입력하자 곧바로 연락 가능한 계정이 확인됐다. ‘암행어사[제휴계정]’이라는 이름의 이 계정은 프로필 이미지에서부터 불법 계좌매입을 홍보하고 있었다. ‘a학교 공대위’의 후원 계좌에 남겨진 ‘@DU***’ 역시 ‘두친구’—유튜브 크리에이터 ‘두친구’ 패러디—라는 텔레그램 계정으로 연결됐고, 프로필 링크를 통해 자신의 ‘계좌매입방’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들 뿐 아니라 다른 ‘통협’ 팀의 사례들을 검토한 결과, ‘핑돈’을 이용한 통장묶기 범죄는 대부분 계좌를 매입하는 팀인 ‘장집’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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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와 ‘두친구’의 텔레그램 계정
텔레그램 유료 기능으로 ‘통협’과 ‘통묶’을 검색하자, 연결되는 범죄의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유사한 은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피(보이스피싱)’, ‘박제방(주민등록번호, 이름, 연락처, 주소, 가족 연락처 등 개인 신상을 공개하는 채널)’, ‘포토샵(범죄에 사용될 서류를 위조하는 조직)’, ‘세탁집(차명거래와 가상자산 거래를 통해 자금을 세탁하는 조직)’, ‘합숙(통장 명의자를 감금해 계좌 사용을 통제하는 방식)’, ‘장집(계좌를 매입해 대포통장을 수집·유통하는 조직)’, ‘오다집(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오더'를 주는 팀)’ 등 팀 단위로 명확한 역할이 존재하고, 이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함께 범죄 사업을 벌이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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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협박을 인증하는 텔레그램 채널의 게시물들
통협, 박제방, 불법도박… 알고 보니 한통속?
참세상 취재 결과, A 활동가의 계좌에 아이디를 남긴 ‘암행어사’는 약 8천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대형 ‘박제방’ 채널의 운영자였다. 통협에 사용한 아이디 ‘@DK***7’는 텔레그램 방끼리의 ‘제휴’ 요청을 전담하는 계정이고, ‘@DK***8’은 계좌매입을 문의하는 계정, 또 다른 계정으로는 ‘암행어사 박제방’과 ‘암행어사(소통방)’ 등의 방을 운영하는 식이었다. ‘암행어사 박제방’에는 10대와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비하와 함께, 얼굴 사진과 이름, 전화번호, 주소,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를 ‘박제’한 게시물이 수백 건 올라와 있었다.

여러 아이디를 사용하는 '암행어사'의 계좌매입용 계정 프로필
a학교 공대위 계좌에 아이디를 남긴 ‘두친구’ 역시 계좌매입방을 운영하며, ‘양빵팀’과 ‘밸런스팀’을 찾는다는 홍보를 이어갔다. 모두 불법도박 사이트에서 성행하는 신종사기와 관련한 팀이다. 기자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통해 ‘두친구’에게 통장 지급정지에 대해 질문했지만, 계좌와 예금주명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곧바로 계정을 차단했다. 이들 외에도 텔레그램 유료 기능을 사용해 ‘통묶’, ‘박제방’ 등을 검색하자 불법토토, 박제, 대포통장 및 대포유심을 판매한다는 글이 다수 검색됐다. 이들에게서 타국에 있는 보이스피싱범들에 대한 내용과, 타국으로 출국해 통장 명의를 넘기는 ‘출국장’을 모집하는 게시글 등 국제범죄와의 연관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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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일부 채널에 올라온 캄보디아 범죄집단 블랙리스트 박제방 일부, (두 번째)출국장(명의자가 외국으로 출국하여 판매하는 통장) 모집글, (세 번째)타국 명절로 인해 ‘핑돈’ 입금이 어렵다는 공지
신종 사기수법 ‘통협’, 사회운동진영이 특히 취약해
병역거부를 선언한 B 활동가도 유사한 피해를 겪었다. 병역거부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2월 말부터 후원을 요청했는데, 한창 후원을 받아야 할 시기에 계좌가 묶인 것이었다. B 활동가의 계좌에 남은 텔레그램 아이디 역시 범죄 네트워크에 연루된 인물로 보였다. B 씨는 “모금을 받기 위해 또 다른 계좌를 열어야 할까” 고민했다면서도, “언제 또 누가 이 계좌를 정지시킬지 모른다”면서 “만약 다른 사람의 계좌를 썼을 때, 그 사람도 지급정지가 되면 입출금이 다 안 되는 상황”이라며 모금을 지속하지 못하는 상황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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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와 ‘두친구’가 각각 자신의 ‘박제방’과 ‘매입방’에서 홍보를 하고 있다.
텔레그램의 범죄 채널들을 확인한 결과, ‘통묶(통장묶기)’ 사기는 크게 원한 관계에 기반해 특정 계좌를 묶는 형태와, 무작위로 수집한 계좌에 핑돈과 텔레그램 아이디를 보낸 뒤 금전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계좌가 노출된 자영업자, 유튜버, 중고거래 참여자들의 허위 신고 피해가 수년째 논란이 되어 왔지만, 피해가 빠르게 확산하는 데에 비해 정부 차원의 뾰족한 해결책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계좌를 대중에 공개하는 사회운동진영의 후원 계좌가 쉽게 수집되고 피해가 급증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여기에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한 금융테러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점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의 입금에서 이상함을 느끼기 힘들다는 점도 위험을 키운다.
역시 피해를 본 a학교 공대위의 C 집행위원장은 “지급정지된 계좌라는 문구 탓에, 후원금을 보내려던 시민에게 (사기범으로)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다”며, “동료 활동가의 계좌도 유사하게 정지되는 일”이 있어 “다들 ‘이거 또 공격받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다”고도 전했다. 문화활동가 A 씨 또한 “이제 계좌를 오픈하는 것이 너무 겁이 난다”며, “그 사람이 넣은 10만 원(핑돈)이 묶여 있어, 은행이 3년간 계좌를 관찰한다는데 해지할 수도 없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모두 은행에 이의신청을 넣는 등, 자신이 사기범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신종사기, 이제 당국이 나서야
고소를 고민하고 있다는 B 활동가는 “(은행에 지급정지를 신청한 사람이)경찰에 서면 접수를 하게 되면 기본 3개월에서 수개월 넘게 계좌가 지급정지될 수 있다고 들었다”며, “범죄에 사용된 계좌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고, (보이스피싱)피해자와도 합의를 해야 하고, 돈을 반환하는 과정까지 남은 일이 쉬운 과정은 아니”라고 부담을 밝혔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다른 피해 활동가들 또한 아직 고소·고발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A학교 공대위’ 계좌에 아이디를 남긴 ‘두친구’와 기자의 대화. 인터뷰임을 밝히기도 전, 기자를 차단했다.
사회운동진영의 피해가 이어지던 시기, 시민들의 피해 사례도 SNS를 통해 잇따라 공유됐다. 계좌가 지급정지됐다는 사실을 알리는 법무법인의 게시글이 올라오는가 하면, A 활동가 사례와 동일한 ‘암행어사’의 텔레그램 아이디 ‘@DK***7’가 계좌 입금 내역에 남겨진 사례도 목격됐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 26일 경찰청, 금융감독원, 은행연합회 등과 합동 간담회를 열고 “신종수법의 피싱범죄까지 뿌리 뽑을 수 있도록 가용한 행정수단을 총동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허위 신고로 인한 계좌 지급정지의 대책은 빠져 있어, ‘통협’과 ‘통묶’ 사기에 대한 해결책 마련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김주호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활동가는 “개인정보 유출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신종 사기 수법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며, “통장협박을 당하더라도 금전을 보내거나 텔레그램으로 연락해 협박범들의 요구에 따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금융기관에 충분히 소명해야 한다”며, “빠르게 경찰 또는 금융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통장협박’ 피해를 보았다면 즉시 은행 또는 금융감독원(☎1332)에 신고한 후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계좌가 아님을 소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16조에 따라, 보이스피싱을 허위로 신고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한편 참세상은 연재 시작 전, 취재 중 취득한 모든 자료를 서울경찰청에 제출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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