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 동안 유럽의 비극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가로막는 경향이었다.
이 대륙은 대대적인 녹색 성장 추진을 위한 투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무임승차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채택된 재정 규칙이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다. 올여름 드라기 보고서는 이러한 재정적 자기 장애가 기여한 투자와 혁신의 부진을 묘사했다.
이 자기 파괴적 체제의 핵심이자 아마도 가장 큰 피해자는 독일이다.
2009년 금융 위기를 배경으로,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민주당(CDU)과 사회민주당(SPD) 연합은 헌법 개정을 통과시켰다. 당시 두 당은 전국 득표율 69.4%라는 인상적인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연정’이라는 칭호를 가질 자격이 있었다. 3분의 2의 안정적인 의석을 바탕으로, 연방 정부가 정상적인 시기에 GDP의 0.35%를 초과하는 재정 적자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개헌안을 쉽게 통과시켰다. 다만 일부 경기 순응적 조정은 허용되었다. 주(州) 및 지방 정부는 균형 예산을 유지해야 한다.
그 결과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공공 투자 감소가 더욱 심화하였다.
만약 고도로 기능하는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해한 사례가 있다면, 이것이 그 경우였다. 내 글에서 자세히 다룬 바와 같이, 독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내 글의 여러 독자를 포함한 기술 관료적 진보 진영의 오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주류 정당들은 부채 제한에 대한 지지를 유지했다.
부채 제한에는 예외 조항이 있다. 그러한 순간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찾아왔다. 올라프 숄츠가 재무장관이자 부총리로 있던 시기, 그의 팀은 국내외에서 이 장벽을 돌파했다. 그 결과 독일을 위한 대규모 지출 프로그램과 유럽 차원의 ‘NextGen EU’(2020년 유럽연합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대규모 경기 부양 및 복구 프로그램)가 탄생했으며, 이 조치 없이는 유럽의 경제 회복이 훨씬 더 부진했을 것이다.
2021년 출범한 숄츠 주도의 신호등 연정은 메르켈-숄츠 정부가 남긴 정책을 이어갔다. 부채 제한을 우회하기 위해, 이들은 재정 장부에서 제외되는 기후 기금을 마련했다. 이어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독일군 강화를 위한 별도의 기금이 추가되었다. 또한 자금 부족을 보완하고 가용 자원을 확대하기 위해 코로나19 대응 기금을 재배치했다. 공식적으로는 강경한 재정 정책을 표방하는 기독자유당(FDP)의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도 이러한 조치를 묵인했으나, 2023년 11월 헌법재판소가 이러한 임시 회계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연정의 균형이 무너졌다.
한편, 야당의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이끄는 기독민주당(CDU)은 "방만한 지출"을 하는 정부를 끊임없이 맹렬히 비판했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역시 부채 제한을 적극 옹호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AfD는 원래 마리오 드라기에 반대하는 정당으로 출범한 만큼, 입장은 일관적이었다.
2024년이 되자, 신호등 연정을 지탱하던 재정적 타협이 붕괴했다. 정부는 점점 더 교착 상태에 빠졌고, 2024년 11월 6일, 숄츠는 이례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며 린드너를 경질했다.
숄츠가 트럼프 당선 다음 날 이러한 조치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워싱턴의 불확실성, 악화하는 우크라이나 상황, 독일의 탈산업화에 대한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졌다. CDU가 차기 정부를 이끌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부채 제한 완화에 동참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선거 기간 동안 메르츠는 어떤 정책 변화의 신호도 주지 않았다.
현재 CDU와 SPD가 새로운 정부 구성을 협상하는 가운데, 이들은 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기존 규칙을 완전히 뒤엎는 듯한 계획을 내놓았다.
* 군사 지출이 GNP의 1%를 초과하는 경우, 부채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
* 5천억 유로 규모의 특별 인프라 기금이 투자 목적으로 마련된다.
* 부채 제한의 장기적 미래를 논의할 위원회가 소집된다.
이 새로운 계획은 물밑에서 숄츠의 재무장관 시절 자문했던 전문가 네트워크가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룹의 핵심 인물은 야코프 폰 바이츠제커로, 과거 숄츠 재무부의 경제국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자를란트 주 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독일의 주요 연구 기관들과 함께 이번 계획의 틀을 구성했으며, 여기에는 학계, 정책 연구소, 기업 중심 그룹이 포함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주요 기여자로 지목된다. 클레멘스 푸에스트 (Ifo 연구소), 미하엘 휘터 (IW 쾰른), 모리츠 슐라리크 (IfW), 옌스 쥐데쿰 (뒤셀도르프 대학교).
시장은 총 부채 규모가 최대 1조 유로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독일 국채 시장이 즉각 반응했다. 글로벌 채권 시장에서는 예상보다 강한 반응이 나타났다.
그러나 모두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듯이, 독일은 이 정도의 부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명백한 일이었고, 전 세계 오피니언 면에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되는 것은 CDU-SPD 제안이 독일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이다. 이 계획은 터무니없이 오만한 기술관료적 구성이며, 2월 23일 선거가 초래할 정치적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의회를 뒤흔드는 기묘한 조작을 요구하고 있다. 부채 제한 개혁을 강력히 지지하는 나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메르켈 시절 거의 70%의 국민 지지를 받았던 CDU와 SPD가 이제는 가까스로 단순 과반을 확보할 정도라는 점이다. CDU와 SPD의 합산 득표율은 실제로 44.5%에 불과하다. 메르츠가 집권 다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5% 봉쇄 조항 덕분이다. 이 조항이 FDP, 바겐크네히트 운동, 기타 소수 정당으로 분산된 상당수 유권자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한 계획을 실행하려면, 메르츠가 이끄는 CDU-SPD 연합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정당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는 부채 제한으로 인해 무너지고 방금 선거에서 패배한 신호등 연정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CDU가 협력했다면, 심지어 린드너와 FDP가 반대하더라도 숄츠 정부는 부채 제한을 개정하고 필수 지출에 대한 헌법적 제약을 제거할 3분의 2의 다수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2024년 여름부터 재정 정책에 집중한 사람이라면, SPD(빨강)-CDU(검정)-녹색당(Greens)으로 구성된 이른바 ‘케냐 연정’만이 독일에서 유능하고 진보적인 정부를 이끌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이 명확했다.
그러나 메르츠는 어떠한 협력도 거부했다. 특히 녹색당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고, 선거 기간 동안 부채 제한에 대한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이제 메르츠가 총리가 되려는 상황에서, CDU와 SPD가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정부에 참여하지도 않은 녹색당이 ‘케냐 연정’의 일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 ‘오만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완곡한 표현일 것이다. 독일어로 표현하자면 Zumutung (터무니없는 요구)이다.
메르츠가 무엇보다도 피하려는 것은, 자신이 집권하게 될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2025년 2월 23일에 선출된 신임 연방의회가 개원하면 메르츠는 총리가 되겠지만, 3분의 2의 다수를 얻으려면 CDU, SPD, 녹색당, 그리고 좌파당(Die Linke)까지 포함된 비현실적인 연정이 필요하다.
좌파당은 일반적인 이념적 이유뿐만 아니라 국방비 증액 문제에서도 CDU와 정반대 입장이다. 지난주 주요 당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좌파당은 공공 지출 전반에 대한 부채 제한 완화에는 동의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CDU-SPD 협상단이 제안한 것처럼 국방비에 한정된 예외 조항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메르츠는 자신의 진영 내 재정 강경파(fiscal hawks)를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반적인 부채 제한 완화를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재정 강경파들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한 완화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전반적인 규제 완화에는 반대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 계획의 방식상, 인프라 및 국방을 위한 새로운 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은 일반 예산에서 충당되어야 하며, 이는 사회 지출에 심각한 압박을 가할 것이다. 이는 바이에른 기독사회당(CSU)의 마르쿠스 죄더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과 부합하지만, 좌파당과 SPD 내 남아 있는 진보적 세력의 우선순위와는 충돌한다.
요약하자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CDU-SPD의 이 극적인 제안은 신임 의회가 개원하면 3분의 2 다수를 확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들은 임시 국회에서 녹색당의 가상의 지지를 이용해 이를 밀어붙이려 한다.
CDU와 SPD가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 CDU 유권자들은 메르츠가 선거 기간 동안 취했던 입장과 CDU-SPD의 새로운 제안 간의 극명한 차이를 무시해야 한다. 이는 아마도 트럼프 당선을 계기로 정당화될 것이다.
* 임시 국회에서 신임 의회를 선제적으로 대체해야 한다.
* 녹색당은 CDU와 SPD가 새 정부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투표해야 한다. 이는 CDU가 스스로 거부했던 민주적 협력 행위다.
* 녹색당은 국방비에 대해서만 부채 제한을 해제하는 패키지를 지지해야 하며, 인프라 기금에서는 재생에너지 및 기후 관련 항목이 대놓고 배제되고 있다.
이 모든 조작은, 실제로 2월 23일에 선출된 신임 의회를 통해 개정을 추진해야 할 경우 필요한 타협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 조치를 실행할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다. 신임 의회의 첫 회의를 최대한 늦추더라도, 3월 25일까지는 반드시 개원해야 한다. CDU와 SPD가 앞으로 며칠 동안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필요한 표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분의 2 다수를 위해서는 489표가 필요하다. CDU와 SPD가 확보한 의석은 403석이다. 부족한 86표를 채우려면, 117석을 가진 녹색당이나 90석을 가진 FDP를 설득해야 한다.
가능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13일(목): 연방의회 1차 독회, 3월 14일(금): 위원회 심사, 3월 17일(월): 2차 및 3차 독회, 3월 21일(금): 연방참의원 표결. 만약 이 계획이 이 단계까지 도달한다면, 연방참의원에서도 더 많은 정치적 거래가 필요할 것이다. 3분의 2 다수를 확보하려면, 최소 두 개의 FDP가 포함된 주 정부가 CDU, SPD, 녹색당의 부채 제한 완화 추진에 동참해야 한다. 적어도 1천억 유로가 지역 및 지방 정부를 위한 인프라 기금으로 제공될 예정이다. 이는 지역 정부가 부채 제한 완화에 동의하도록 유인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아마도 ‘트럼프-푸틴 효과’가 작용할 수도 있다. 녹색당이 메르츠가 이끄는 CDU-SPD 연정을 지지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부채 제한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모종의 불완전한 거래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좌파당과의 묵시적 타협이 포함된 해결책을 메르츠가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우리가 이 순간을 10년 넘게 기다려 왔다 하더라도, 이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의회 정치의 냉혹한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확정된 사안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무모할 것이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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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