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기시다 정권을 규탄하는 이유

출처: Unsplash+ & Galina Nelyubova

1.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6~7일 방한하는데,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제3국 유사시 양국 협력 체제를 논의할 예정이라는 보도다. 중동, 아프리카, 대만 등에서 무력 충돌 사태가 벌어질 경우 자국민 대피에 상호 협력하는 내용의 협의를 진행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한다는 거다. 일본이 대피 협력에 관해 다른 나라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지난해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당시 한국군 수송기가 일본인 45명을 태워 한국으로 이송했고 일본 자위대 수송기도 한국인 33명을 일본인과 함께 태운 일이 있다. 군이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이번 방한은 군사적 협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회색지대에서부터 협력 수준을 높여가자는 방침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자국민 대피로부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군사적 협력의 파트너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아니냐는 거다. 자국민 대피에 관한 작전을 함께 할 정도면, 정보공유와 군수지원에 있어서의 협력 강화를 못할 것은 무엇인가?

한일 간 협의는 일본의 국내적 논의와도 발맞춰 가는 측면이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2일 ‘자위대 헌법 명기’ 등이 포함된 개헌 쟁점 정리안을 승인했다. 헌법 9조 1항(전쟁과 무력 행사의 영구적 포기)과 2항(육해공군 등 전력 보유 및 교전권 포기)을 유지한 채 자위대 보유의 근거를 헌법에 명시하는 게 핵심이다. 평화헌법의 기본 구조대로라면 현재의 자위대도 위헌 소지가 있는데, 그걸 해소하겠다는 거다.

재무장과 보통국가화는 일본 주류의 오랜 바람이다. 자민당 정권은 오랫동안 이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왔다. 그래서 이런 움직임은 놀랍지 않다. 이상한 것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했다는 점이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9월 말이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다. 그만두는 총리가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이는 것도, 방한을 통해 외교적 성과를 추가로 거두려는 것도 그 자체만 보면 어색해 보인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개헌 쟁점 정리안에 대해 “새 총리가 확실하게 계속할 수 있도록 전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에 단서가 있다. 후계구도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정치자금 스캔들 이후 주요 파벌이 해산한 상태에서 치러진다. 해산했다고는 해도 파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구심이 살아있는 파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일본 정계의 1인자 아소 다로가 이끄는 아소파는 해산을 하지 않았다. 기시다파는 해산했으나 현직 총리가 수장이라는 점에서 구심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기시다 내각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모테기파는 해산할 방침이고 정치적 타격은 있지만 여전히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다.

기시다 내각에서 비주류 파벌은 아베파, 니카이파, 모리야마파이다. 모리야마파는 소수인데다 해산 절차가 완료됐다. 아베파와 니카이파는 스캔들의 진원지로 해산이 불가피하고 각각 파벌 수장의 사망(아베 신조)과 잠정 은퇴(니카이 도시히로)로 구심이 크게 약화됐다. 비주류에는 ‘무파벌’ 구도가 작용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자리를 고이즈미 신지로, 이시바 시게루 등의 여론조사상 인기가 높은 주자들과 아베파의 다카이치 사나에, 니카이파의 고바야시 다카유키 등이 노릴 것으로 예상된다. 커튼 뒤에서 스가 요시히데가 고이즈미 신지로를 지원하는 형태로 구도 정리를 시도한다는 설도 있다.

다소 혼란스러운 비주류의 상황에 비하면 주류는 상대적으로(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다) 안정돼있다. 구심이 될 만한 유력 인사들이 존재하는 탓에 해산 여부와 관계없이 파벌의 합의로 주자를 합의할 수 있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변수로 아소파 소속의 주자로 고노 다로를 꼽을 수 있지만, 아소 다로가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 주지 않는데다 본인이 ‘당선 시 파벌 탈퇴’ 등을 외치고 있어 과거처럼 비주류인 ‘무파벌’ 구도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면 결국 차기 일본 총리가 누가 되느냐는 주류 3파벌 구도가 유지되느냐, 3개 파벌이 누구로 합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상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시다파의 실질적 수장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의향이 중요할 것이다. 마침 3일 기시다 후미오의 ‘아바타’이자 관방장관인 하야시 요시마사도 출마를 선언했다. 본인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기시다파의 ‘선수’를 자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협상 카드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현직 총리의 후계 구도 개입에는 나름의 명분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정책 계승’은 가장 무난한 소재다. 그런데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국내정치적 맥락에선 ‘계승’을 말할 정도로 성공을 거둔 정책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나마 외교, 특히 한일관계에서의 성과는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할 거다. 한일관계 개선을 실질적 성과로 앞세우면서 개헌 쟁점 정리안으로 이를 보통국가화라는 보편적 프로젝트로 맥락화하고, 이의 성과를 계승해줄 것을 차기 총리에게 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 구도에 개입하는 것이다.

2.

한일관계에서의 성과는 윤석열 정권이 거의 일방적으로 양보한 게 주효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입장에선 마지막으로 ‘추수’를 하러 오는 셈이다. 이게 보편적 이익이 된다면 한국 정부가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방법이다. 앞서도 봤듯 기시다 정권의 움직임에 발을 맞추는 것은 결국 일본의 재무장과 보통국가화를 정당화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이전 정권과는 달리 이를 ‘국익’으로 규정할 것이다. 한미일의 군사적 협력 필요성을 정권 차원에서 꾸준히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 입장에선 어떤가? 일본의 재무장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군비확장을 부채질하고 우발적 충돌을 포함한 군사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아시아의 주류들이 군비를 축소하고 평화 지향적 통치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방도를 궁리하는 것이 지금 진보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국내 정치적 논의의 토양은 매우 척박하다. 윤석열 정권은 자신들의 대일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비판을 ‘괴담’으로 치부하며 ‘반일=죽창가=민주당’이란 등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보수언론까지 가세해 ‘민주당이 괴담까지 동원한 반일로 정치적 이익을 보려 하지만, 국민들은 일본 여행도 더 많이 가고 일본 컨텐츠를 즐기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어진 지 오래라 효력이 없다’는 식의 선전에 나서고 있다.

물론 더불어민주당 역시 껍데기뿐인 반일 메시지로 진지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양당의 상태나 주장과 관계없이, 진보정치가 자기 기준을 갖고 이를 대중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실제 행동에 나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진보정치의 부진도 자기 기준보다 양당과의 거리감이나 상대적 포지션을 앞세운 탓이 컸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말이 있는데, 진보정치가 무엇보다 회복해야 할 것은 ‘지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해외 정치의 정보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국민의힘이냐, 반-민주당이냐라는 식의 상대적 포지션이 아니라 근본적 차원의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여기서 독일 정치인의 사례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거 같다. 현지시각 1일 독일 튀링겐 지역 주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위, 작센 주의회 선거에선 2위를 차지했다. 이들 못잖게 주목을 받은 것은 두 개 지역에서 11~15%대 지지율을 기록하며 ‘신호등 연정’을 구석으로 밀어낸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이다.

한국 언론은 이 신생정당을 급진좌파 정당, 좌파포퓰리즘, 보수좌파 정당 등 다양한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딱지를 붙이는 건 한국 언론의 기준에 간단하게 맞지 않는 포지션을 갖고 있어서다. BSW를 이끄는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난민 수용, 유럽 통합, 정체성 정치 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기계적 기준으로 보면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입장은 사민당, 녹색당 등의 주류화 된 좌익보다 AfD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AfD와 BSW 모두 구 동독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공학적 판단의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결론이 유사해보이더라도 과정을 짚어보면 다른 결론이 될 수 있다는 걸 평가해야 한다.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변은 AfD의 그것과는 다르다. 가령 이렇게 질문해보자. 독일은 2차대전 이후 어떤 나라여야 했나? 독일의 과거에 대한 반성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목전에 두고서는 거의 무너졌다. 일본처럼 독일 역시 우크라이나전을 재무장의 핑계로 삼았다. 난민은 군사적 충돌이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다. 독일이 ‘우크라이나 국민을 돕자’는 명분으로 재무장에 열을 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난민 수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무엇이 무엇을 정당화하는가? 이는 재무장을 포기하고 평화군축을 추진하면서, 난민을 수용하는 대신 그들의 고향을 인도적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재건을 추진하는 것과 어떤 다른 결과를 낳고 있는가?

물론 자라 바겐크네히트의 주장은 논쟁적이다. 실제 자라 바겐크네히트 그룹의 좌파당 탈당 국면은 혼란스러웠다. 그를 지지하는 구 동독 지역의 대중이 그의 좌파적 지향에 다 동조한다고 볼 수도 없다. BSW의 끝이 AfD의 성과에 부화뇌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 초라한 기회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무장과 난민 문제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떤 ‘영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노동계급에게 전쟁은 러시아편이냐 우크라이나편이냐를 선택하는 게임일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좌우파 주류 정치냐 극우포퓰리즘이냐의 선택이다. 다른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은 마치 여성 유권자냐 ‘이대남’이냐의 선택지처럼 현실 정치의 테이블 위에 오른다. 그러나 진보정치가 짊어져야 할 숙명은 그러한 현실과 기준의 불일치를 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반일이냐 친일이냐의 논쟁 구도처럼 돼버린 대일정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본질을 되살려야 한다. ‘괴담을 유포하며 반일민족주의에 편승하고 더불어민주당에 굴복한다’는 저차원적 프레임을 되뇌이는 이들을 스스로 우습게 만들어야 한다. 왜 ‘북한, 중국, 러시아에는 침묵하느냐’고 묻는 피장파장-내로남불 논리의 애호가들 역시 더 할 말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평화군축이라는 대의명분에 더욱 분명하게 호소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덧붙이는 말

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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