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할 뻔한 일이 벌어졌다. 현장에서 사살된 범인은 M16의 민수용 버전이자 미국에서 가장 대중화한 돌격소총인 AR-15를 이용했다. 탄환은 트럼프의 귀를 스쳤다. 본인의 주요 아젠다 중 하나인 '불법 이민' 관련 주장을 하는 과정에서 차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턱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트럼프는 비밀경호국 직원에 의해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주먹을 뻗어 “Fight!”라고 여러 차례 외쳤다. 연단 아래에서 최신형 모델인 소니 알파9 마크 3에 24~70mm 렌즈를 장착하고 대기하던 베테랑 사진기자는 이 순간을 찍어, 또 한 번의 퓰리처상 수상을 예약했다. 이 사진은 전 세계 주요 신문 1면에 실렸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앞다퉈 이 사진을 공유하고 있다. 푸른 하늘과 나부끼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트럼프는 마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현대 정치를 좌우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점에서 보면, 사진 한 장이 미국 대선의 향방을 바꿀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거라는 반론도 있다. 어차피 미국 유권자들은 극단적 형태로 양분해 있다.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은 공화당 지지층 결집 요인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피격을 당했든 당하지 않았든 대선일에 가까워질수록 양쪽 지지층은 상대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최대 결집을 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보다 바이든 사퇴론이 대선에 미칠 영향이 더 클 수 있다. 이건 민주당 지지층 결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선거라는 건 뚜껑을 열어볼 때까진 모르는 거다. 흥미로운 건 전략이 바뀌고 있다는 거다. 양쪽 모두 ‘통합’을 외치기 시작한 거다. 현직 대통령으로 상대 후보의 안전 보장에 대한 책임이 있고 “트럼프를 과녁 중앙에 놓아야 할 때(time to put Trump in the bull’s-eye)”라는 과거 발언으로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긴 바이든이야 그렇다 치자. 계층, 인종, 젠더별 갈라치기를 근간으로 하는 극우 포퓰리즘의 대표 주자인 트럼프는 왜 이 시점에 ‘통합’을 말하는 것인가?
일반적 분석은 트럼프가 상승세를 탄 김에 중도층을 공략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물론 트럼프가 암살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과거 의사당 점거 때 그랬던 것처럼 무책임한 선동에 나선다면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통합’을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트럼프가 ‘통합’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정치의 문법이 상대에 대한 ‘반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강조하듯,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근거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게 아니라 상대를 잘 반대하면서 ‘우리 편’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게임으로 정식화된 상태다. 모든 판단은 대개 상대적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절대적 기준이 없다. 따라서 게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가장 잘 반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원리는 상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될 것이다. 따라서 ‘반대’의 중요한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자체가 상대를 반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걸 증명하는 것도 된다. 상대가 ‘나’에게 부담을 느끼니 ‘나’를 반대하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반대’의 최대치는 제거하는 것이다. 사태의 진실과는 관계없이 트럼프는 암살 시도의 피해자가 되는 것으로 상대가 최대치로 반대하는 어떤 대상이 된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는, 증명의 완성이다. 공화당 지지층의 최대 결집은 이런 이유로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현대의 선거가 반대를 조직하는 게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덜 조직된 유권자층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양쪽이 최대로 결집한 박빙 승부에서는 소수여도 이들의 표심 역시 중요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상대편을 반대하는 ‘반대’의 게임은 ‘비호감’을 겨루는 게임으로 변모한다. 반대할 대상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호감도가 더 높은 쪽을 반대할 대상으로 확정하는 거다. 결국 싫어할 이유가 덜한 사람을 찍게 되는 것인데, 이 역시 어디까지나 상대 평가다. 따라서 트럼프가 ‘통합’을 말하는 것은, 공화당 지지층의 최대 결집은 이미 이뤄냈으니 이제 덜 조직된 유권자층, 즉 중도층이 자신을 반대할 이유를 감소시키겠다는 게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바이든 측의 후보 교체론이 일시적으로나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후보 교체론은 바이든 대통령이 TV 토론에서 단순한 부진을 넘어 이른바 ‘인지력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제기되었다. 이번 사태는 ‘이미지’의 차원에서 그런 대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바이든 측이 고령의 리스크를 걱정하고 있을 때, 트럼프는 총격을 입은 상태에서도 벌떡 일어나 싸우자고 외치는 강인한 인물로 각인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후보 교체론은 더 강하게 제기돼야 할 것이다. 이전까지 민주당 진영 내부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오바마 사보타주설, 오바마 부통령설, 미셸 오바마 출마설 등은 이러한 갈등의 수위를 나타내는 징표다. 그런데 트럼프 피격과 함께 이런 얘기들이 없어졌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 애초의 후보 교체론이 ‘트럼프 반대론’의 연장선에서 트럼프를 더 잘 반대할 인물로의 교체를 의미하는 거였다는 걸 드러내는 거다. 피격으로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아무리 그래도 총 맞을 뻔한 사람을 두고 이런 주장을 펼치기 어렵다)는 반대 논리 자체를 제기하기 어려운 국면이 되었기 때문에 후보 교체론도 힘을 잃은 거다.
물론 대선은 11월이고 그때까지 또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구도의 변화를 추동하는 문법이다. 상대를 어떻게 반대할 것인가에만 매달리면서 실제 대통령 선거의 본질적 성격에 있어 논해야 할 중요한 대목, 미국은 어디로 가는 것이며 세계를 어디로 이끄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양쪽 진영 모두가 거의 의도적으로 논쟁을 회피하고 있다. 즉, 우리는 트럼프 피격과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이게 현대 정치의 기본 문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어디나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요즘 뉴스는 그야말로 드라마 같다. 해병대원 순직 사건이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을 만나 국정농단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누가 일부러 만들어 보라고 해도 나오기 어려웠을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계와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 블랙펄 인베스트라는 회사의 대표를 지냈다는 이종호 씨가 했다는 말들을 보면 사태는 분명히 심상찮다.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은 한겨레에 “천공보다 센 신공이 나타났다”고 썼다.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같았으면 벌써 휴대전화가 압수수색 됐을 것이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무엇을 하는지 ‘세월아 네월아’다. 오히려 공수처 검사들이 과거 이종호 씨 변호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수사에서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게 공익신고자 측 주장이다.
이종호 씨 관련 녹취록 보도가 나온 건 6월 25일인데, 공익신고자 조사는 7월 4일에 이뤄졌다. 회피 신청은 조사 전에 이뤄졌어야 할 텐데, 문제의 공수처 검사가 이날 조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놓고 회피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언론에 폭로를 이어가는 공익신고자 측 ‘카드’를 다 확인하려고 한 것 아닌가? 공교롭게도 이 이후 이종호 씨 측의 적극적인 언론 대응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부분 ‘난 거짓말쟁이였다’는 예상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태가 이쯤 됐으면 특검이든 뭐든 무슨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권은 성의 없는 반박과 ‘침대 축구’로 일관하고 있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권은 뭘 지적해도 전 정권 탓이나 야당 탓을 해왔는데, 이제 그것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점에 도달했다. 여론의 차원에서 ‘상대를 반대할 자격’을 상실한 거다. 자기 문제에 대해선 이런 식으로 일관하면서 ‘전 정권 비리’나 ‘이재명 사법 리스크’ 등을 앞세워 악화한 여론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이화영 1심 판결과 이에 근거한 검찰의 기소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던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다시 ‘분칠’에 나서고 있다. 트럼프가 ‘통합’에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총선 결과에 더해 해병대원 순직 사건과 김건희 여사 관련 논란 등으로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최대 결집은 이미 이뤄질 수 있게 됐고, 이제 중도층의 ‘반대할 이유’를 줄이는 프로젝트에 돌입하겠다는 거다.
그 소재는 ‘감세’다. 구체적 입장을 정한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종부세에 대한 근본적 검토,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유예 등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당내 일각에선 상속세 일괄 공제 한도를 현행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늘리는 세법 개정안을 준비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나같이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한 중산층을 염두에 둔 이슈파이팅이다. 이번에 전당대회를 치르고 나면 꼭 ‘이재명 대표 체제’가 아니더라도 지방선거, 대통령 선거, 총선을 연이어 유사한 체제로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는데,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책임론을 완전히 벗지 못한 상황에서 주식 시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이슈로 여겨지는 의제까지 감당하는 건 부담스럽다는 얘기일 거다. 특히 앞선 세금 문제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자산투자자들이 선거 시기에 더불어민주당에 ‘반대’할 수 있는 전형적 구실이니만큼 그걸 미리 없애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디테일에선 이견이 있겠지만 감세의 방향에 대해선 이 정권과 양당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셈이다. 만일 진보정당이 충분한 조직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이 사안을 양당에 대한 반대 논리로 활용하면서 지지층 결집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은 더 이상 한국 정치에서 유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즉 이런 문제로 더불어민주당은 ‘반대’를 당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재명 전 대표는 오히려 더 유연하고 대담하게(?)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 ‘반대의 정치’를 기본 문법으로 하는 현대의 대의민주주의가 보여주는 정치의 본질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전 세계 정치의 공통분모 같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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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