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방글라데시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출처: Unsplash, Austin Curtis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에 관련하여,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속한 세계가 방글라데시에 대해 얼마나 적게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코로나19가 글로벌 의류 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한 "셧다운(Shutdown)"의 한 섹션을 쓴 이후, 방글라데시에 대해 자주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 지난 반세기 동안, 특히 최근 수십 년 동안 방글라데시는 위대한 개발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방글라데시는 주로 NGO들이 주도하는 친빈곤 성장 이야기로 자주 언급되었다. 아래 '이코노미스트'의 그래픽은 그 장르의 전형적인 예시다. 방글라데시의 1인당 GDP는, 2000년에 매우 낮은 수준에서 시작하여, 먼저 파키스탄을, 그리고 나중에 인도를 추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기후(위기)에 가장 많이 노출된 '커다란' 나라 중 하나다. IMF가 2019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2050년까지 방글라데시는 해수면 상승으로 영토의 17%를 잃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국가 농경지의 30%가 사라질 것이다.

2024년 8월 5일, 불과 한 달 전, 학생들이 주도한 혁명으로 셰이크 하시나의 권위주의적 선거 정권이 전복되었지만, 이 사실을 축하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정말 섬뜩한 일이다. 파이낸셜 타임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등을 확인해 보면 반응이 얼마나 미미했는지 알 수 있다. 몇 주 전 팟캐스트에서 방글라데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캠 아바디와 포린 폴리시에 정말 감사한다.

팟캐스트에서 그 소식을 다룬 것은 좋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이후로 계속 나는 고민에 매여 있다. 

이 거대하고 중요한 나라에서 이처럼 극적인 격변이 일어날 수 있는데도 "우리" 대부분이 무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캠과의 대화를 제외하면 방글라데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맨해튼의 우버 운전사들 뿐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밝은 분위기였다.

지난 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정말 이 순간의, 우리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현재 진행 중인 이 상황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방글라데시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읽으면서, 그리고 방글라데시가 1971년 독립 당시 글로벌 담론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깨달으면서, 이 질문은 나에게 더욱 절실해졌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압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해졌다. 1971년에는 지구에 37억 명의 인구가 있었지만, 이제는 82억 명이다. 인상적인 뉴스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방글라데시 사례를 보면, 정보 전달 채널이 사건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반응을 제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이것은 서구가 덜 호기심을 갖고 덜 관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가? 서구도 그런 의미에서 지방화된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들을 평가할 수 있는 진지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은 내 일이 너무 과중해 그 이상을 할 수 없지만, 내가 느낀 당혹감과 혼란을 기록하고, 최근 몇 주 동안 방글라데시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방글라데시의 건국 위기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1971년 참전 용사의 후손들을 우대하기 위해 할당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이번 학생 봉기를 촉발했기 때문에 시사적이기도 하다.

#1 기본적인 사실: 사람들은 흔히 독립한 신생 국가가 분리된 국가보다 인구가 적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71년 파키스탄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1947년 파키스탄의 일방적 건설은 무슬림이 대부분인 영국령 인도의 두 지역을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현대의 파키스탄)을 나누는 거대한 민족적, 문화적 차이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인구, 경제,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기이한 불균형이 발생했다. 196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군부의 권력 중심이 있던,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서파키스탄의 인구는 4,200만 명이었다. 같은 시기에 동파키스탄의 인구는 5,0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그래서 민주화가 시도되었고 벵골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에서 패권을 확립했을 때, 그들은 파키스탄 공동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서파키스탄의 군 지도부와 선출된 지도자들 모두 받아들이기를 꺼린 사실이었다.

#2 놀라움: 1960년대 군사 통치하에 파키스탄은 매우 성공적인 성장 모델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동파키스탄 지도부에게 국내외에서 자원과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

권위주의적이고 현대화된 아유브 칸 장군의 지도 아래(1958-1969), 파키스탄은 초기 "아시아의 호랑이" 중 하나로 선전되었다. 결정적으로, 서파키스탄은 그들의 큰 경쟁자인 인도를 훨씬 앞서 나갔다. 

이러한 성장은 1960년대에 예외적으로 높은 수준의 외국 원조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일반적인 원조의 경우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다. 오늘날 파키스탄은 전략적 중요성, 막대한 인구, 시급한 필요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비해 훨씬 부유해진 세계로부터 GDP 대비 훨씬 적은 원조를 받고 있다.

출처: World Bank

그러나 1960년대의 초고속 성장은 파키스탄의 두 지역 간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서파키스탄은 훨씬 더 많은 투자와 성장을 보였지만 동파키스탄은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출처: Industrial Policy In Pakistan

이것은 특히 분통한 일인데, 동파키스탄의 벵골 경제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의 중요한 수출 엔진 중 하나였으며, 그 수익이 계속해서 파키스탄 국가의 금고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3 1968년 전 세계적으로 학생 시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방글라데시에서 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동파키스탄 학생 운동이 서파키스탄의 통치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며 국가적 봉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독립된 방글라데시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1968년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서는 이것을 전혀 알 수 없는데, 이는 서구 대학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 점은 스리나스 라하반이 그의 필수적인 1971년 글로벌 정치 연구에서 능숙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 인터뷰는 그의 중요한 책에 대한 훌륭한 보완물이다. 

거기에는 방글라데시 학생 시위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사만다 크리스티안센의 훌륭한 에세이가 있는데, 이는 현재 상황에서도 인상 깊게 울려 퍼진다.

1968년에 학생들은 당연히 파키스탄의 국경과 지역 규모를 넘어 정부 지도자들에게 골칫거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엄격한 검열을 받았고, 파키스탄 내 반정부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하는 데 제한이 있었지만, 다른 나라의 학생 활동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양을 보도했다. 사실, 1968년의 "파키스탄 옵저버(Pakistan Observer)"에서는 학생 봉기가 많은 보도를 차지했고, 베트남 전쟁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분노한 젊은 세계"라는 주간 칼럼이 있었으며, 다양한 봉기에 관한 기사를 다루었다. 이러한 일간지를 읽다 보면 청년들의 반란으로 세상이 뒤집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비록 파키스탄의 학생 활동에 대한 기사는 없었지만, 다른 영역에서의 보도를 통해 청년의 정치적 주체의식을 자극하고, 다카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을 국제적인 맥락에 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신문 기사는 다카 대학 학생들을 "글로벌 60년대"의 청년이라는 더 큰 "상상된 공동체"와 연결해 주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영국 신좌파의 떠오르는 젊은 스타인 타리크 알리였다. ... 다카 대학 학생이자 캠퍼스에서 잘 알려진 정치 운동가였던 아사드 우즈 잠만의 잔혹한 암살은 이 운동에 강력한 동력을 불어넣었다. 학생 사회는 캠퍼스의 인기 있고 저명한 구성원의 죽음에 깊고 개인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가 총에 맞은 직후의 끔찍한 모습, 피가 그의 등에서 쏟아지는 이미지가 다음 날 아침 거의 모든 신문의 표지를 장식했고, SAC(Student Action Committee, 방글라데시 독립 운동 당시 동파키스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학생조직)는 그를 기리며 3일간의 애도를 선언했다. 학생들은 죽음 다음날 모여 아사드의 피로 물든 셔츠를 기둥 위에 올렸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쓰러진 동지를 애도하며 모였다. 토파일 아흐마드는 "그날 우리는 아사드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그는 우리 중 한 명이었다. 단순한 벵골인이 아니라 다카 대학의 학생, 진정한 우리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라고 회상한다 (2010년 개인 인터뷰). 아사드는 학생들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었다. 순교자 아사드를 위한 널리 퍼진 시는 학생들의 감정을 이렇게 담아낸다: 

피처럼 붉은 올레안더 다발같이, 

저녁노을의 불타는 구름같이, 

아사드의 셔츠가 펄럭인다

거센 바람 속에서, 끝없는 푸른 하늘 속에서.

형제의 깨끗한 셔츠를

그의 누이가 수놓았었다

마음속 소망의

고운 황금 실로

별처럼 빛나는 단추들을

그의 나이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애정 어린 손길로

그 셔츠를 햇빛 가득한 뜰에서

말리곤 했었다.

이제 그 셔츠는

어머니의 뜰을 떠나

밝은 햇빛에 빛나며

석류나무의

부드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을 떠나

이제 그것은 펄럭인다

도시의 중심 거리에서,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 꼭대기에서,

모든 구석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거리에서,

어떻게 그것이 펄럭이는지

멈춤 없이

태양에 타오르는

우리의 메마른 가슴 위에서,

공통된 목적을 위해 단결한

의식 있는 사람들의 모든 모임에서.

우리의 약함, 우리의 비겁함,

우리의 죄와 수치의 흔적들-

모두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숨겨져 있다

이 찢긴 아사드 셔츠의 가련한 조각은 

우리 고동치는 마음들의 저항적 깃발이 되었다. 

#4 1971년 위기가 고조되면서 파키스탄 군부가 대규모 무력 탄압을 감행했고, 동파키스탄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뿐만 아니라 힌두교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는 곧 현지와 글로벌 미디어에서 '집단학살'로 묘사되었으며, 홀로코스트와 비교되었다.

현재까지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연구자들과 선전가들은 "300만 명"의 희생자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알자지라는 2010년대 셰이크 하시나 정권이 주도한 전쟁 범죄 재판의 맥락에서 이 문제에 대한 요약을 시도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거대하고 의도적인 학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도로의 거대한 난민 대탈출이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내정과 국가 주권 문제를 넘어선 국제적인 우려로 간주되었으며, 그로 인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유튜브 아카이브 덕분에,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의 원본 TV 보도와 우려사항, 참여시를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 위기가 전 세계 가정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1971년의 뉴스 보도 중에서 두 가지가 특히 눈에 띄었다: 첫째,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Dateline Bangladesh"의 포괄적인 리포트다. 이 불편한 링크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며 유튜브가 직접 링크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ITN의 이 영상 모음은 탈식민지 시대의 영국 보도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5 닉슨 행정부와 특히 키신저의 역할은 널리 논의되었다. 다카 주재 미국 영사관 직원들이 목격한 폭력에 대해 워싱턴에 항의했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미국 외교 서비스 내에서 윤리적 담론에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게리 배스의 책은 이 모든 것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그 냉담함 외에도, 미국 정책의 특이성은 라하반의 위기 비교 연구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라하반은 미국이 방글라데시 위기의 지역적 맥락을 무시하고, 이를 단순한 냉전의 논리, 즉 '적의 적'이라는 잔혹한 논리로 축소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워싱턴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파키스탄을 베이징으로 가는 경로로 사용하여 소련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하반의 해석에 따르면 소련과 중국 모두 이 위기에 대해 더 정교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키신저식 현실주의가 단순히 윤리적으로 야만적일 뿐만 아니라, 위기를 단순한 지정학적 논리로 축소함으로써 사실상 현실적이라기보다 단순하고 원초적이었다는 것이다.

#6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과 서방의 그에 대한 공모에 대한 분노는 팝 문화의 극적인 동원을 촉발했다.

이 동원은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동원보다는 더 짧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글로벌 상상력의 범위에서 1971년 방글라데시를 위한 동원은 인상적이었으며, 여전히 감동을 준다. 조지 해리슨과 라비 샹카르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주최한 유명한 방글라데시 콘서트에 대한 이 리포트는 주목할 만한 시청 자료다.

존 바에즈는 방글라데시를 위한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헌사를 바쳤다. 담대한 이들은 앨런 긴즈버그가 제소르 로드에서 난민 행렬을 기리며 쓴 추모시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여들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그들의 예술적 완성도라기보다는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강한 글로벌 참여 의식이다. 둘째, 폭력과 대탈출의 규모를 전달하기 위해 "수백만"이라는 수사를 고집하고, 이를 홀로코스트와 연관시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국가의 이름, 즉 "방글라데시"를 발음할 때 느껴지는 흥분과 신선함이다. 위키피디아가 설명하듯, 이는 고대의 뿌리를 소환하는 현대 민족주의의 전형적인 창조물이다.

'방글라데시'(즉, '벵골의 나라')라는 용어의 어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Aaji Bangladesher Hridoy"(1905년)와 카지 나즐룰 이슬람의 "Namo Namo Namo Bangladesh Momo"(1932년) 같은 벵골의 애국가들이 이 용어를 사용했다. 1950년대부터 벵골 민족주의자들이 동파키스탄에서 정치 집회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7 독립 이후, 신생 국가 방글라데시는 극심한 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방글라데시는 인도에 크게 의존했고, 인도는 그 새로운 영향력을 주저하지 않고 활용했다. 1970년대 초반의 유가 및 식료품 가격 충격 속에서 방글라데시는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였다. 1972-73년에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고, 1974년의 전면적인 기근으로 이어졌다. 이 역시 방글라데시의 정치와 개발 모델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1980년대 이후 방글라데시는 새로운 형태의 개발 금융, 특히 그라민 은행과 마이크로파이낸스 모델의 실험실 중 하나가 되었다. 나오미 호세인의 이 흥미로운 책은 방글라데시의 성공 이야기가 1970년대 초반 신생 국가의 탄생을 동반한 충격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방글라데시는 '바구니 케이스'(The basket case, 경제적 재난을 의미하는 표현)로 불리던 불안한 출발에서, 오늘날 인간 개발 성과로 찬사를 받는 국가로 성장했다. 방글라데시는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이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는 증거를 제공하며, 현대 세계 질서에서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고 있다. 만성적으로 취약한 거버넌스 상황에서 어떻게 이러한 급속한 성과가 가능했을까? ⟪원조 실험실(The Aid Lab)⟫은 이른바 '방글라데시 역설'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빈곤과 개발에 대한 공공 정책과 그 결과를 평가한다. 방글라데시의 성과가 시장 중심의 경제 개혁으로의 조기 전환 덕분이라는 기존의 통념에 반하여, 이 책은 1974년 대기근 이후 생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계약이 엘리트, 대중, 원조 기부자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 개발의 탄탄한 기초를 마련했고, 가장 빈곤하고 불안정한 계층, 특히 여성의 문제에 집중하는 데 기여했다. 1970년대의 환경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위기를 다룬 장들에서, 이 책은 기근의 교훈이 어떻게 빈곤층을 위한 성장 및 사회 정책을 강화하는 의제가 되었는지, 그리고 방글라데시 국가와 비정부기구들이 글로벌 경제에 참여하면서 인구를 보호하고 번영할 수 있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중소득 국가가 된 방글라데시는 세계 원조 개발의 실험실로서 국경을 넘어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으며, 방글라데시는 글로벌 경제 통합과 기후 변화의 위험을 헤쳐 나가는 개척자적인 길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

이 요점 목록에는 깔끔한 결론이 없다. 다만 이 글이 유용하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이를 추가할 수 있는 시간, 에너지, 정신적 여유를 찾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Chartbook 315 Talking about Bangladesh. Or, rather, why aren't we talking about Bangladesh?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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