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은 체제의 문제다!

좁은 골목에 쨍한 노란색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낡은 건물 벽면에는 사이버펑크틱한 네온사인 조명들이 걸려 있다. 간판과 조명보다 더 좁은 간격으로 붙어 있는 파란색 간이테이블에는 파인애플 샤베트와 치킨 한 마리, 그리고 맥주 몇 잔. 같은 구성의 테이블이 수백 개 늘어서 골목을 곽 채웠으니 장관이다. 풍경의 한복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한 손에는 피켓을 들고 있다. 그 무리의 가운데에 무대가 있고, 뮤지션의 공연과 발언이 번갈아 이어진다. 마주보고 있는 가게에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다. 척 봐도 수 십 년은 됐을 나무 테이블과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희끗한 흰머리의 노인들과 활동가, 젊은 손님들이 섞여 앉아 있고 노가리 몇 마리와 맥주가 놓여 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풍경과 그 터줏대감 을지OB베어의 마지막 즈음 모습이다.

쨍한 간판은 프렌차이즈로 유명한 만선호프, 을지OB베어의 건물주였다. 정신없는 풍경의 한복판에서 구호를 외쳤다.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 그렇게 집회를 하고 나면 연대인들은 노래를 틀고, 피켓을 든 채로 구호를 외치며 수백 명 인파 사이를 행진했다. 날선 눈총과 시비를 견디다보면 호응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멋모르고 만선호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집회 무리에 끼어 한참을 쳐다보다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을지OB베어 강제집행 이후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출처: 박김형준

젠트리피케이션의 얼굴들

이 지난한 풍경은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다. 1980년 문을 열어 맥주와 노가리라는 불문율을 개발하고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일궈 정부 지정 백년가게, 골목 전체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만들어 낸 을지OB베어는 그렇게 몸부림치며 가게를 지키려 했다. 그 가게가 노가리와 맥주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기에 일군 골목이건만, 골목 전체를 집어 삼킨 자본은 끝내 상징적인 첫 가게의 간판마저 소유하려 했다. 2022년 4월 21일 새벽, 기습적으로 이뤄진 강제집행 끝에 을지OB베어는 가게를 잃어야 했다. 40년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 테이블은 뿌리 내리듯 바닥에 붙어 있었다. 새벽녘 들이닥친 용역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테이블을 뜯어냈다. 뽑히듯 들려 나온 테이블과 아침이 오기 전 끌어내야하는 것처럼 급히 끌어내린 옛 간판이 바닥에 나뒹군다. 강제집행을 당한 날로부터 가게가 다시 개업하고 골목을 완전히 떠날 때가지 을지OB베어의 가족, 연대인, 단골들은 시위를 이어갔다. 그 첫날, 한 젊은 사장이 찾아오더니 흰 머리 지긋한 을지OB베어의 사장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제 막 가게를 개업하셨단다. 을지OB베어처럼, 오래도록 사랑받는 가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 꿈이 철거당했다며 한참을 울었다. 사장님은 그저 다독이다가, 그이가 떠난 뒤에서야 담배를 물고 내려놓지를 않는다.  

을지OB베어의 옛 풍경. 출처 : 박김형준

도시 공간을 재편하여 더 높은 임대료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욕망은 멈출 줄을 모른다. 종이 한 장의 권리인 소유권을 결코 뚫리지 않을 방패삼아 굳건한 자본은 때로는 재개발 조합의 이름으로, 때로는 건물주, 때로는 아파트, 때로는 전세사기의 이름으로 도시민의 공간을 침범하고, 파괴하고, 빼앗아 끝끝내 소유하고야 만다. 을지OB베어 강제집행이 있기 전, 이미 을지로 지역은 재편되기 시작했다. 한때 골목의 장인들이 나서면 비행기 한 대를 만들 거라던 공구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쪼개지더니 주상복합이 들어서고 있다. 각기 다른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고, 이웃 골목과 협업하며 이뤄 놓은 생태계가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소규모 공장들과 장인들이 만든 미로 같은 골목은 레트로 유행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관할 구청인 중구청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비롯해 을지로·청계천 일대가 이 도시의 자랑이라며 너스레 떨다가도 기회만 있으면 개발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의 숫자를 다 세어볼 수 있을까. 홍대 두리반, 아현 놀란곱창, 아현동 포장마차 거리, 서촌의 궁중족발, 구 노량진수산시장. 때로는 재개발 사업으로, 때로는 아파트 값 올리겠다는 민원에, 때로는 시세차익 노린 투기꾼 건물주에, 때로는 현대화사업 명목으로 백년을 견딜 가게와 골목, 문화가 쫓겨나는 지난한 풍경의 반복. 도시의 다양성을 끊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얼굴도 그만큼 다양했다. 

강제집행 이후 만선호프 측에서 새로이 개업한 가게와 활동가들이 달아둔 현수막. 출처: 박김형준

소유를 넘어 체제전환의 깃발을 들자!

보존과 상생의 반대편에 파괴와 착취가 있다. 도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지속불가능해지고 있다. 백년은커녕 삼십년만 버텨도 노포라 불리는 도시에서 세입자의 삶은 파편화된다. 낡고 사랑받는 가게를 보며 꿈을 가지는 것도, 한 지역에 머무르며 그 동네의 골목과 가게와 사람을 사랑하는 평범한 삶도, 인간이 인간에 연대하여 보다 살만한 도시를 도모해보는 발칙한 상상도 삼사년을 주기로 변하는 도시와 쫓겨나듯 이사 다니는 주거 불안 속에 꿈결 같은 이야기로, 오래된 구호 중 하나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의 도시는 소유를 넘어서야 한다. 좋은 도시를 향한 도시민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소유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반대하며,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이들이 자연스레 체제전환을 상상하게 되는 이유다. 

홈리스, 상가세입자, 주거세입자, 소상공인과 오래된 골목의 낡고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온 ‘도시’라는 이름의 공동 작품은 사유화될 수 없다는 선언에 기대어 도시 운동은 전개되고 있다. 한때 명백했던 자본의 얼굴은 이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착취는 그 몸을 쪼개 골목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니 우리 저항의 언어, 체제 전환의 목소리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곳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골목의 풍경에서부터 늙은 가게의 오고가는 잔 속에, 지하보도에서 쫓겨나는 홈리스와 기후위기의 일선을 살아내는 쪽방촌 주민의 여름나기로, 철거를 앞둔 마을과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단칸방의 울음으로.

쫓겨나는 도시민의 공간에서 노래하고, 예배하고, 구호를 외쳤던 이들은 한결같이 공공의 개입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입을 맞춘 것처럼 돌아오는 답변은 ‘사인 간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라는 답답스런 공문 한 장이다. 그러나 실재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도시는 소유한 이들의 노력이 아닌, 터에 무늬를 새기며 버텨온 사소한 이들의 엮임으로 그 꼴을 갖춘다. 그러니 이 도시에 사인 간의 문제로 치부되어 버려질 이름은 없다. 우리의 운동은 그 이름을 호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골목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버려진 이들의 행진은 사거리 즈음에서 만나 광장을 향하고, 다시 골목 곳곳으로 향할 것이다. 소유를 넘어 체제전환의 깃발을 들고! 

덧붙이는 말

이종건은 옥바라지선교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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