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노동자가 고공에 올랐다. 도로 위 10미터 높이의 철제 구조물, 노동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고작 가로 세로 90cm 정도다. 구조물 아래로는 끊임없이 차들이 내달리고 있다. 고진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는 해고자들이 복직될 때까지, 땅을 밟지 않겠다는 각오로 생애 두 번째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세종호텔 앞으로는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13일 새벽 5시, 고진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가 호텔 앞 지하차도 진입 차단시설 철제 구조물에 올라 농성에 돌입했다. 지난 2017년 박근혜 탄핵 이후 정리해고법 폐지,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광화문 사거리 광고탑에서 고공단식농성을 한 지 9년만에, 다시 고공에 오른 것이다.
고진수 서울호텔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현장. 참세상
고진수 해고노동자는 "세종호텔지부는 지난 3년간 투쟁해오며 대법원 판결까지 패소했다. 대법원 판결을 넘어선 투쟁을 결의한 우리 6명의 조합원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노동조합답게 승리하는 방법뿐"이라며,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증명하려면 고공농성이라는 극한의 투쟁으로 저 스스로를 몰아넣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의 쿠데타 이후 2030 메탈말벌동지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메탈말벌동지들은 세종호텔 앞 목요문화제를 채워주시고, 호텔 안에 우리의 요구를 담은 스티커를 붙여주시고, 매일매일 농성장을 사수해주고 계신다. 동지들의 열렬한 연대에서 고공농성 투쟁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고진수 노동자는 "신발 속 거슬리는 모래알을 넘어 나와 일터를 지키는 위협적인 송곳이 되겠다"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지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쉽게 하지 못하도록 싸우고 싶다. 세종호텔 정리해고가 철회되고, 남은 조합원들이 복직할 수 있게 한 번만 더 연대와 희망을 모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도로 10미터 철제 구조물에 오른 고진수 해고노동자. 참세상
세종호텔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오전 9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대책위는"국회와 교육부, 노동부, 사법부, 세종호텔 사측 중 어느 곳 한 곳이라도 자기 역할을 했다면 세종호텔 정리해고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것은 일터의 비상게엄이다. 고진수는 일터의 비상계엄 해제를 위해 고공에 올라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이라 짚었다.
또한 "주명건 대양학원 전 재단이사장은 재단과 수익사업체를 사유화하고, 아들 주대성에게 3대 세습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 대양학원이 100% 지분을 가진 가장 큰 수익사업체인 세종호텔의 민주노조는 주명건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교육부 감사 결과 재단이사에서 해임됐다가 2008년 세종호텔 회장으로 복귀하면서부터 민주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정리해고는 노조파괴의 최종 단계였다. 주명건은 일터의 윤석열"이라 규탄했다.
이어서 "333개 객실의 세종호텔에서 280여 명의 정규직인 일했지만, 지금은 22명의 정규직과 40여 명의 비정규직으로 운영되고 야간에 투숙객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자는 1명 뿐"이라 지적하고 "노동자들의 안전과 투숙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해고자 복직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대책위와 함께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시민들은 ▲경찰은 강제진압 생각 말고 고공농성자의 안전과 인권을 보장할 것 ▲국회와 노동부는 정리해고법 폐지와 세종호텔 정리해고 사태 해결에 나설 것 ▲교육부는 주명건의 재단 사유화와 3세세습을 중단시킬 것 ▲세종호텔은 즉각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고공농성 현장으로 모여든 시민들. 참세상
세종대학교 재단 대양학원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세종호텔은 지난 2021년 12월, 민주노총 조합원 12명을 정리해고했다. 노동조합에 따르면 사측은 코로나 19에 따른 경영위기를 이유로 들었으나, 정리해고 후 1년 만에 흑자 전환을 달성하고도 해고자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노조는 당시 "정리해고만은 피하고자 고용유지지원금의 사측 부담금마저 노동조합이 책임지겠다는 안도 제시했지만 세종호텔 측은 이를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정리해고의 목적이 민주노조를 뿌리뽑는 것이었기 때문"이라 짚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구체신청을 냈으나,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어 행정소송도 제기했으나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호텔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왔고, 광장에서, 또 다른 투쟁의 현장에서 분투하는 이들과 연대를 나누며 함께 싸워왔다. 정리해고 투쟁은 어느덧 3년을 넘겼고,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에 맞서 투쟁해온 시간은 15년이 흘렀다.
허지희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는 "(고진수 해고노동자가 오른 철제 구조물) 바로 아래가 차도이지 않나. 조금이라도 혹 실수가 있다면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냥 바닥도 아니고 수많은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지하보도다. 살기 위해 복직을 요구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이런 위험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정말 화가 나고 너무 참담하다"면서 "경찰의 강제진압 등으로부터 농성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고진수 해고노동자가 오른 철제 구조물 아래에는 소방차와 경찰 병력이 대기하고 있다. 해고노동자의 곁으로 시민들도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이날 저녁에는 농성장 가까이에서 매주 목요일 이어온 문화제를 열고 고공농성자와 함께 정리해고 철회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