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손을 잡고 반도체특별법 통과를 밀어붙이고 있다. 주52시간제 적용 예외 조항을 두고 이견이 있었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앞장서 그마저도 합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 저항이 이어지자 민주당은 다시, 노동시간 상한 예외 조항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이달 중 국민의힘과 함께 반도체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은 고수하는 모양새다.
노동시민사회는 이번 특별법이 "노동시간을 연장해 노동자를 죽이는 반도체 계엄법"인 것뿐만이 아니라 "재벌 대기업의 초과 이윤만을 위해, 노동자와 시민 모두의 삶과 우리 생태를 파괴하는 기후 부정의 악법"이라 규탄하면서 반도체특별법의 전면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재벌 특혜, 노동시간 연장 '반도체특별법' 저지하자". 참세상
10일 오전 국회 앞에서 '재벌 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 출범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여자들은 반도체특별법이 "법정 노동시간 적용 예외뿐만 아니라 온갖 재벌 특혜 내용으로 가득하다"면서 "노동자·민중이 낸 세금으로 특정 산업과 기업에 보조금,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전력이나 용수, 도로 등 국가 자원의 이용도 자본 입맛대로 하는 것은 특혜나 다름없다. 특별법은 재벌 퍼주기 그 자체로 전체 내용을 폐기해야 마땅하다"고 짚었다.
또한 "필수재이자 기본권인 물과 에너지를 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해 무한정 빨아들이는 것을 제한 없이 허가하는 기후 부정의로서, 인근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삶까지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앞당길 것"이라 비판했다.
은혜 기후정의동맹 활동가는 "주 52시간 적용 예외만 제외하면 양당은 (반도체특별법 입법에) 이견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기후재난 시대에 우리는 생태적 한계 내에서 생산과 소비를 줄여나갈 것을 민주적으로 계획하고, 공공재생 에너지로 신속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해도 모자란 상황이다. 그런데 데이터 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를 이유로, 대기업의 초과 이윤을 이유로, 전력 소비도 막대하게 증가시키고 에너지 민영화도 추진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라고 규탄했다.
은혜 활동가는 "농민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민중들은 장바구니를 내렸다 놨다 하고, 이 겨울에 가스보일러를 켜는데도 덜덜 떠는 이 기후위기와 불평등 시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우리 생태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뱃속까지 착취하면서 무한히 반도체를 생산하도록 산업 규제를 활짝 푸는 것이 맞는지, 그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성장이 맞는지 질문해야만 한다"면서 "노동자와 지역사회, 기후 생태계 모두 위협하는 기후 부정의한 반도체 특별법을 막아내자"고 촉구했다.
“노동자·지역사회・기후 생태계 모두 위협하는 기후 부정의한 반도체특별법 폐기하라". 참세상
권영국 정의당 대표도 반도체특별법은 "민간 반도체 재벌들의 이익을 위해 공기업 내지 국유산업에 맞먹는 공적 지원과 특혜를 부여하고 있는 법"으로 "공적 지원을 통해 반도체산업을 육성함으로써 민간 재벌들이 벌어들이는 이익을 어떻게 환수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과점과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점들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한 안전장치는 전무하고, 오로지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지원 규정으로만 채워져 있다"고 지적했다.
권 대표는 "이와 더불어 근로기준법에서 인간다운 노동을 위해 정하고 있는 주52시간 상한제 노동시간 규제를 반도체 특별법의 특례조항으로 풀어헤치려 하고 있다"면서 "재벌특혜, 기후위기와 환경파괴, 그리고 장시간 불규칙 노동을 조장하는 현재의 반도체특별법안 폐지하고 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섭 금속노조 수석부위원장은 "시민들이 매주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이때,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법은 노조법 2·3조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이 아닌가. 이주노동자와 성소수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거두는 법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묻고 "그런데 (여야는) 노동시간 상한 예외 조항을 포함하는 반도체 특별법을 가장 먼저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 마주 보며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노동자를 죽이는 법안을 만들 때는 한마음 한뜻"이라 지적했다.
이 수석부위원장은 "반도체 특별법은 노동시간을 상한한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는 판도의 상자가 될 것"이라면서 "금속노조는 (특별법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노동시민사회와 함께, 여야 그리고 정부가 논의를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 논의가 중단될 때까지 힘차게 투쟁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노동자 죽이는 반도체특별법 중단하라". 참세상
공동행동은 반도체특별법의 전면 폐기와 함께 "모든 노동자의 건강권 쟁취, 부의 공정한 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을 펼치고, 윤석열 이후 탄핵 광장이 꿈꾸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행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공동행동에는 2월 9일 기준,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사회단체 등 노동계와 시민사회 72개 단위가 참여하고 있다.
한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 "창의와 자율이 핵심인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장시간의 억지 노동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주4일제와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특별한 필요 때문에 불가피하게 특정 영역의 노동 시간을 유연화하더라도, 그것이 총노동시간 연장이나 노동 대가 회피수단이 되면 안 된다"고도 덧붙였으나, 반도체특별법의 노동시간 상한제 예외 조항에 대한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강행에 여지를 주는 발언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 대표는 지난 3일 민주당 정책 디베이트에서 "중요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중에서도 고소득 전문가가 동의할 경우, 몰아서 일할 수 있게 해주자, 이걸 왜 안 해주냐라고 하니 할 말이 없더라"고 발언하면서, 사실상 주52시간제 적용 제외 조항을 수용하는 듯한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국민의힘과 재벌 대기업의 요구에 선을 긋지 못하고 되레 힘을 싣는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의 오락가락 행보에, 현장 노동자와 시민의 우려와 분노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