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숨겨진 계급투쟁의 역사

[인터뷰] 로마 제국 파업 연구, 사라 본드(Sarah Bond)

고대 로마는 지배 엘리트들이 손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을 낙인찍던극도로 위계적인 사회였다그럼에도 로마의 노동자들은 파업과 다른 형태의 집단 행동을 통해 착취에 저항할 방법을 찾아냈다.

계급투쟁은 현대에 발명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와 함께해왔다출처: Unsplash, Birmingham Museums Trust

계급투쟁은 현대의 발명이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부터 우리와 함께해왔다.

사라 본드(Sarah Bond)는 아이오와대학교의 고전학 교수이자 ⟪파업로마 제국의 노동노동조합저항⟫(Strike: Labor, Unions, and Resistance in the Roman Empire)의 저자다그는 인터뷰에서고대 로마에서 노동계층의 구성원들이 로마의 사회 엘리트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며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은 <자코뱅> 팟캐스트 롱 리즈(Long Reads)’에서 진행된 인터뷰의 편집본이다인터뷰 전체는 이곳에서 들을 수 있다.

Long Reads: Class Struggle in Ancient Rome w/ Sarah Bond

다니엘 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로마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아닌 사람들의 시각에서 서술할 때사료를 확보하는 데 있어 주요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사라 본드 가장 어려운 점은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들이 — 문헌 속 일부 언급을 제외하면 — 파피루스 문서비문낙서 같은 것들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이런 자료들은 대부분 이야기 서술형이 아니다다시 말해어떤 사람의 전기나 완결된 서사를 전달할 목적이 아니라일상적으로 쓰이던 기록들이다.

이런 사소한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를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창문 같은 것이다예컨대 로마의 결사체(collegia) 같은 조직에 관한 3,200여 개의 비문수백 개의 파피루스 문서가 있긴 하지만그것들 중 어느 것도 전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쓰인 건 아니다.

이런 사료들을 바탕으로 전체 서사를 구성하려면 마치 조각조각 모자이크나 퀼트를 꿰매듯이 작업해야 한다이런 '퀼트 조각'들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로마 이야기로 엮는 일은 쉽지 않다.

'밑으로부터의 역사'는 수많은 미시사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이를 보다 넓은 거시사로 확장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왜냐하면 사료 자체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고그 자체로는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상상력 있는 역사가가 이런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야만 한다.

다니엘 핀 로마 제국에 대해 말할 때우리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제국을 이야기하고 있으며그 지리적 범위 또한 매우 넓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도 변화했다그렇다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대다수 인구의 노동과 사회 조건에 대해 일반화된 설명이 가능할까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주요 경향이나 패턴은 무엇인가?

사라 본드 모든 노동자나 전체 노동 인구에 대해 일반화하기는 매우 어렵다그럼에도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경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그중 하나는 노예 노동의 문제다특히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노예 노동이 크게 증가했고이 흐름은 기원후 2세기까지 지속되었다로마 노동조건과 노동계층 내 반응을 이해하려면 이 노예 노동의 구조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탈리아 같은 지역에서는 노동 인구의 최대 25%가 노예였다는 점에서노예제는 당시 노동 구조의 핵심 요소였다동시에 우리는 해방(manumission)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시민권을 획득하고 사회에 편입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노동계층의 이동성과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우리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국 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노예제가 증가했으며해방도 함께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로마 엘리트 계층이 특히 육체노동에 대해 매우 악의적인 편견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편견은 입법문학그리고 개별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스어로 바나우소이(banausoi)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즉 육체노동자들에 대한 편견은 매우 심했다이들은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콰에스투스(quaestus), 즉 '이윤'만을 좇는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반박해야 했다도자기를 만들거나광산에서 일하거나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문학이나 조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돈과 임금에 대한 욕망이 동기라고 간주했다.

물론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그러나 지중해 전역에는 손으로 일하며위로부터의 편견에 맞서 싸운 수백만 명의 장인과 기술자들이 있었다이 편견은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 원로원 의원(senators)이나 기사 계급(equestrians) 등 상층 엘리트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흔히 문서나 저술 속에서 장인들에 대해 매우 고정관념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드러냈다키케로(Cicero), 유베날리스(Juvenal), 또는 로마법을 다룬 법률가들조차도 노동자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비록 고대 로마의 모든 노동자에 대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엘리트들의 수백 년에 걸친 편견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 사이에는 대단한 자부심이 존재했다.

다니엘 핀 로마 시 자체를 생각해보면귀족(patrician)과 평민(plebeian) 사이의 분열이라는 주제는 익숙한 테마다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를 떠올릴 수도 있고⟪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떠올릴 수도 있다그렇다면 귀족과 평민 사이의 분열이라는 이미지에는 실제로 얼마나 역사적 근거가 있으며그것은 현대의 계급 분할과 어떤 점에서 비교 가능한가?

사라 본드 : ⟪공산당 선언⟫에서는 신분투쟁‘(Struggle of the Orders)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초점이다이것은 귀족 계급인 파트리키(Patricians)와 평민 계급인 플레브스(Plebeians) 사이에서 200년 넘게 지속된 갈등이었다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플레브스가 하나의 계급즉 노동과 생산수단에 대한 공통된 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보았다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계급’ 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평민에 대해 아는 바에 따르면이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계급을 형성하지는 않았다평민들은 서로 다른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갔고로마 공화국에 복무하거나 기여한 방식도 다양했다평민과 귀족은 실제로 각자 내부적으로 위계와 분화를 지닌 집단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귀족은 원래 로마 건국 당시부터 존재한 파트레스(patres), 즉 건국 시기의 원로 가문 출신들이었고평민은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었다이는 단일한 경제 집단이 아니었다평민이라 해서 모두가 가난한 것도 아니고부유하거나오늘날 중간계층에 해당할 만한 사람들도 있었으며이들이 노동 경험이나 생산수단에 대한 공통된 관계를 공유했던 것도 아니었다.

신분투쟁을 살펴보면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평민 중 일부는 집단적으로 병역 거부를 통해 더 나은 노동 조건을 확보하거나정부 내 대표성을 얻기 위해 행동했던 것은 맞다예컨대이들은 집정관 등의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사용했고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사례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노동을 거부하거나 야니쿨룸 언덕을 점거하거나 징병에 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각기 달랐다귀족과 평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주제이기 때문에 중요하지만평민이라는 범주는 고위 군 장교에서부터 당대의 부채노예 상태에 놓인 가장 가난한 농민에 이르기까지 포괄하는 범주였다따라서 동일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으로 간주할 수 없었다.

다니엘 핀 노동력 중 노예가 차지한 비중은 어느 정도였고그 비중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가또한노예제가 비노예 계층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나?

사라 본드 노예들은 일반적으로 로마의 팽창 과정에서로마 군대가 사로잡은 포로들로부터 유입되었다하지만 그 외에도로마 가정 내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녀를 낳는 등출생을 통해서도 노예 계급이 보충되었다우리는 이 거대한 제국이 전성기에는 약 7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녔으며그 가운데 약 60퍼센트에 이르는 노예들이 농촌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나머지 노예들은 도시 환경에서 일했다.

도시에서 일한 노예의 경우열 명 중 아홉 명은 언젠가 해방될 가능성이 있었던 반면농업에 종사하는 농촌 노예의 경우 열 명 중 한 명만이 해방되었다밭에서 일하도록 배정되었는지아니면 아이들의 교사속기사도서관 사서유모처럼 가정 내에서 일하도록 배정되었는지에 따라 그 차이는 매우 컸다가정 내에서 수행되는 이러한 일들은 상대적으로 해방 가능성이 높았으며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예제를 정당화하거나 윤리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밭일과 같은 농업 환경에 배치된 경우평생을 노예로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농업 분야의 노예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있었고가정 내에서 일하는 노예들에 대한 반감도 컸다하지만 전반적으로 로마는 노예 노동에 크게 의존한 노예사회였다특히 이탈리아와 로마 도시에 살던 시민들은 자신들이 하기 꺼려하는 수많은 육체노동을 노예와 자유민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다니엘 핀 당신은 고대 로마의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집단행동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던 '결사체(association)'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이런 결사체는 어떤 성격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어떻게 집단행동의 수단으로 작용했나?

사라 본드 기원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시점부터 서기 카롤루스 대제가 대관식을 올릴 때까지지중해 전역에는 결사체가 널리 존재했다우리는 약 3,200종에 달하는 다양한 유형의 그룹과 결사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이들은 각기 다른 성격과 목적을 가졌으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장 널리 쓰인 명칭은 콜레기움(collegium)으로오늘날 ‘college’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그러나 고대 그리스어로는 에클레시아(ecclesia)와 같은 명칭도 있었다이들 명칭은 모두 특정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이들은 신을 숭배하기 위해혹은 목수나 은세공사처럼 특정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또는 죽은 자를 매장하기 위해 모였다.

오늘날 우리가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해 있고 또 정체성을 공유하듯이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사람들은 복수의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어떤 단체는 정치적인 실체로 활성화되기도 하고또 어떤 단체는 그냥 지역 술집에서 모여 포도주나 맥주를 마시는 사교 모임이기도 했다.

로마인들도 다르지 않았다그들은 사교를 사랑했고클럽 활동을 즐겼다하지만 내가 집필한 책은 이런 콜레기움이 특정한 시기에는 집단적인 능력과 전문성을 활용해 더 나은 임금이나 작업 환경을 확보하고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현대의 노동조합처럼콜레기움도 전문성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더 좋은 계약을 따내거나 황제로부터 특정한 특혜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다니엘 핀 로마사 전반에서 집단행동과 대중 항의의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 들어줄 수 있나?

사라 본드 우리가 가진 증거는 고대 세계에서 파업이나 집단행동이 오늘날처럼 자주 일어난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나는 매일 같이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하지만 특정 시기에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집단이 국가에 필요한 존재임을 이용해 작업 조건을 개선하려 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신분 투쟁과 평민의 여러 차례 세세시오(Secessio)이 세세시오는 말하자면 불복종 행위이자 일종의 보이콧이었다비록 '파업'이라는 단어가 18세기에 처음 등장했지만고대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연상하는 파업이나 보이콧과 비슷한 행동 양식들이 나타났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로마 군대의 확대에 필수적인 존재임을 알고 있었고이 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그들은 다양한 시기에 로마로부터 이탈했다세세시오는 네 번다섯 번혹은 여섯 번 있었다고도 하는데이는 참고하는 고대 문헌에 따라 다르다.

나는 또한 서기 200년경에 있었던 덜 알려진 파업 사례들도 살펴본다에페수스(Ephesus)에서는 제과업자들이 아시아 총독으로부터 '파벌(faction)'로 모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그들은 빵 공급을 중단하거나 가격을 올릴 수 없었고도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았다이 일화를 전하는 비문을 보면제과업자들은 빵값을 인상하거나 로마 정부와 더 나은 계약을 맺기 위해 공급을 중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아시아 총독이 나서서 집단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다이 제과업자들은 로마 시민의 주된 열량 공급원이었던 빵에 대한 독점을 활용하려 한 것이며당국은 그런 독점적 행동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적 물가 상승을 겪는 것을 보면당시 총독이 왜 이런 행동을 막으려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집트의 직물 공방에서 여성들과 노예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한 파업 사례도 파피루스를 통해 알고 있다이들은 공식적인 콜레기움 조직이 아니었지만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작업 중단을 결정했다.

책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는 3세기 후반에 일어난 사건일 것이다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 주화 제조 노동자들이 동전 주조를 거부하고 조폐국에 틀어박혀 버렸다이들은 로마 세계에서 지급 수단으로 유통되던 금화은화청동화의 생산을 중단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집단행동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 현대 노동자와 노동조합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고대 경제는 결코 원시적인 체계가 아니었으며통합된 시장 경제였다이 체계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자신들의 노동을 중단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 핀 고대 세계에서의 사회 갈등을 떠올릴 때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게 기억하는 사례는 스파르타쿠스(Spartacus)가 이끈 반란일 것이다이 반란은 어떻게 시작되었고로마사에서 어떤 유산을 남겼나?

사라 본드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고대 세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반란이다당시 이 반란은 '소란을 일으킨 자스파르타쿠스를 진압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었다스파르타쿠스는 원래 트라키아(Thrace) 출신이었으며기원전 73남부 이탈리아의 검투사 학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점은 스탠리 큐브릭의 1960년 영화가 정확히 포착한 부분이다검투사들의 파밀리아(familia)는 이들 전투 부대의 가장 작은 사회 단위였다검투사 파밀리아는 본질적으로 내부에 위계를 가진 노예 병력 집단이었다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이 속한 부대를 동원해 주방을 습격했고주방 기구들을 무기로 삼아 검투사 훈련소에 맞선 첫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거쳐 베수비오산 근처로 이동했고이후 북쪽 알프스를 향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반란의 시작점이 되었던 소규모 부대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합류했다처음에는 7명에서 40명 정도의 파밀리아 단위로 시작했지만시간이 지나며 스파르타쿠스를 따르는 반란군은 약 1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책에서 다룬 많은 사례들과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반란을 명확히 구분하고자 한다스파르타쿠스의 궁극적 목표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검투사 훈련소로 돌아가 포획자들로부터 더 높은 임금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그와 그를 따르던 약 10만 명의 노예들이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자유였다.

이들은 지중해 전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그런 요구를 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구속에서 벗어나 다시는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콜레기움이 임금을 인상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노동을 중단하고 다시 일터로 복귀하는 전략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자유를 위한 봉기였다.

비록 스파르타쿠스는 성공하지 못했지만기원전 71년에 전쟁이 종결되었을 무렵에는 로마 공화정 전체에 공포의 물결을 일으켰다검투사들이 힘을 합쳐 우리가 오늘날 '군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민병대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로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이는 특히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여러 검투사 부대와 훈련소들을 해산시키거나로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전시켰다이렇게 해야 이들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소규모 반란들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로마는 검투사 부대가 너무 커지거나이들이 잘못된 정치인의 손에 들어가면 민병대나 사병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실제로 이런 일은 공화정 후기에 일어나기도 했다.

다니엘 핀 로마 제국 말기에는 기독교가 처음에는 불법 종교로이후에는 공인된 종교로 부상하게 된다기독교는 사람들이 노동과 사회 질서를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사라 본드 :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이를 합법화하면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많은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로마 귀족 출신이었다이들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수공 노동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로마 제국 내에서 허용되는 노동 유형에는 변화가 나타났다예를 들어기독교의 성윤리 관념은 이전 로마 사회의 관념과 매우 달랐기 때문에 성노동이 불법화되기 시작했다로마 사회에서는 매춘이 합법이었고매춘굴은 도심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노동과 노동윤리에 끼친 가장 뚜렷한 변화다.

하지만 수도원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도 등장했다수도사들이 손으로 일을 하며 수행하는 모습이었다하나님과 경건함을 위한 수공 노동은 개인 이익을 위한 노동보다 훨씬 더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믿음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많은 사상이 로마 제국 말기 노동 철학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수도사들의 바나우소스(banausic) 노동은 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외로 여겨졌다이는 새로 지어진 교회에서 작업하던 모자이크 예술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로 간주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여전히 오늘날 말하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얕보았다그들은 노동자들이 기독교 교회에서 상층부에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장려하지 않았다키케로 같은 인물들이 보였던 노동자에 대한 속물적 태도는 로마 제국 말기와 중세 초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이제는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처럼 가죽 세공인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싶지만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편견과 속물주의가 중세 시기를 넘어서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다니엘 핀 중세 및 근세 초기 유럽의 역사 속에서는빈민이나 노동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사적 소유가 없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회를 상상했던 다양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이들은 그러한 비전을 지지하는 근거로 종종 기독교 문헌이나 기독교 초창기 역사를 인용하곤 했다고대 로마에서 이러한 종류의 종말론적 사고(millenarian thinking)를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있을까?

사라 본드 노동 철학과 관련한 증거는 주로 엘리트 계층의 문헌에서 나온다우리가 오늘날 빈민층으로 부를 만한 개인들이 전혀 다른 사회를 상상했던 사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대부분은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드는 반란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고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문서로 남긴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 속 특정 시점들에서는 황제에게 제출된 청원서를 통해 당시 사회와 노동자들이 바랐던 조건들을 엿볼 수 있다예컨대 2세기 후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여러 청원서가 존재한다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소작농’ 또는 농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며 자신들의 노동 조건이 개선되기를 원했고자신들이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 무상으로 배급되는 빵의 곡물 공급을 담당하고 있음을 강조했다이처럼 곡물 공급의 핵심을 이루는 이들이야말로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디오니소스의 테크니타이(tecniti)들이 제출한 다른 청원서들에서도 확인되듯이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엘리트 계층으로부터 받는 대우가 달라지기를 바랐다.

이와 별개로콘스탄티노플의 경기장(factions)에서처럼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벌인 소규모 반란도 고대 말기에 존재했다하지만 전반적으로는사람들이 바랐던 이상 사회에 대해 그들 스스로가 직접 쓴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장인과 노동자들의 묘비명은그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자부심 있게 여겼으며단지 장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콜레기움 안에서의 지위를 사랑했다고 말해준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전문 협회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로마 제국 전체 안에서는 지위를 얻을 수 없었지만각자의 소모임이나 협회 안에서는 지위를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콜레기움을 연구할 때 중요한 점 중 하나는그것이 아주 작은 규모에서 명예와 지위를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이는 사람들이 로마 지중해 전역에서 결코 가질 수 없었을 자아감과 정체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이들은 결코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이 될 수 없었지만자신이 속한 클럽의 회장이 되거나 콜레기움의 서기가 될 수는 있었다.

다니엘 핀 당신이 해온 연구가 사람들이 로마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길 바라는가?

사라 본드 내 책이 제시하려는 핵심적인 점 중 하나는 비교사(comparative history)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고대사학자이자 로마 경제의 이론가였던 모세스 핀리(Moses Finley)당시 하버드 대학교 사회학과의 오를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 현재 명예교수)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그때 패터슨은 ⟪노예제와 사회적 죽음⟫(Slavery and Social Death)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책은 우리가 노예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왜냐하면 패터슨은 66개의 서로 다른 노예 사회를 살펴보며 이것이 공통점이고이것이 연속성이고이것이 미묘한 차이점이며이것이 차별성이다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그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연구는 전근대중세그리고 현대의 역사학자들을 하나의 대화로 모아주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요구하는 것은모든 콜레기움이 노동조합이었다고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를 잇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너무 자주현대 경제학자들은 산업혁명 이후부터 시작하는 역사만을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로마사를 그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로마의 노동자들도 현대 노동조합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는 공통점을 만들어주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노동자들의 행동과 삶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자집단행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떤 방식으로 이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출처The Hidden History of Class Struggle in the Roman Empire

[번역이꽃맘 

덧붙이는 말

사라 본드(Sarah Bond)는 아이오와대학교(University of Iowa) 역사학과 고전학 부문 부교수이며, ⟪파업: 로마 제국의 노동, 조합, 저항⟫(Strike: Labor, Unions, and Resistance in the Roman Empire)의 저자다. 다니엘 핀(Daniel Finn)은 <자코뱅>의 특집 편집자이며, ⟪한 사람의 테러리스트: IRA의 정치사⟫(One Man’s Terrorist: A Political History of the IRA)의 저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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