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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마손이 지난해 스페인 발렌시아의 우익 정부 수반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기후 위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보수적인 국민당(Partido Popular)과 극우 정당 복스(Vox) 간의 연정을 형성했으며, 이 연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발렌시아 비상대응팀(Valencia Emergency Response Unit)을 폐지하기로 합의했다. 지난달 발렌시아는 홍수로 황폐화되었고, 경고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이 안전한 곳으로 퇴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위기가 한창인 상황에서도 마손은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이 정치적 책임에도 불구하고, 재난 이후 극우 세력은 이를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페드로 산체스 총리와 그의 좌파 연립정부가 프랑코 시대의 댐을 철거해 이러한 홍수를 유발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엘 디아리오(El Diario) 보도에 따르면, 철거된 댐의 대부분은 높이가 2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보였으며, 모두 “쓸모없는 인프라”였다. 프랑코 시대의 댐은 발렌시아 시민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재난을 부정하고 가상의 재난을 만들어내는 우익들에게 이러한 환상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파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다.
이런 우익 사상은 리처드 시모어의 신간 ⟪재난 민족주의(Disaster Nationalism)⟫의 주제다. 이 책에서 시모어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도구를 사용해 글로벌 극우 세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분석한다. 올리 헤인스는 자코뱅(Jacobin)에서 그의 신작에 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올리 헤인스] 재난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당신의 표현대로 “아직 '파시즘'이 아니거나 '아직은-파시즘이-아닌' 상태”인지 설명해줄 수 있는가?
[리처드 시모어] 몇 년 전 나는 새로운 극우 세력이 상상 속의 극단적인 악에 대한 판타지 시나리오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FEMA 죽음의 수용소(FEMA death camps),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 ‘그레이트 리셋(The Great Reset),’ 15분 도시(fifteen-minute cities), 5G 타워가 마음을 조종하는 신호라는 믿음, 백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설치한다는 음모론 등이 그것이다. 인도에서는 로미오 지하드(Romeo Jihad)라는 이론이 있는데, 이는 무슬림 남성들이 힌두 여성들을 유혹하고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일종의 인구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혹은 큐어넌(QAnon)의 판타지를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세계를 사탄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아동 성범죄자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극우는 이런 환각적인 극단적 재난 시나리오에 정말 매료되고 집착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실제 재앙은 부족하지 않다. 산불, 홍수, 전쟁, 경제 불황, 전염병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종종 이런 실제 재앙들과 부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많은 이들이 COVID-19가 단지 제4제국(Fourth Reich)을 위한 구실이라고 하거나, 기후 변화가 자유주의적 전체주의 정권이나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를 위한 구실이라고 주장한다.
극우 세력은 환각적인 극단적 재난 시나리오에 정말 매료되고 집착한다.
나는 종종 오리건의 산불 사례를 든다. 불길이 평야와 숲을 휩쓸며 섭씨 800도의 온도로 타올랐고, 이는 사람들의 생명에 실제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산불이 실제로는 안티파(Antifa)가 불을 지른 것이며, 이는 백인 보수 기독교인을 전멸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기보다는 무장 검문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며 안티파를 경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왜 이런 대규모 종말론적 판타지를 선택하는가? 그것은 재난을 실제로는 상당히 활력을 주는 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재난을 겪으면 우울증에 빠지거나 삶과 공적 영역에서 약간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극우는 다른 방식을 제공한다. 극우는 “당신이 지금까지 씨름해온 그 악마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당신은 그것들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어려운 것, 추상적인 것, 또는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나쁜 사람들이며, 우리는 그들을 처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경제적 충격이나 기후 변화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감정을 유효하고 정당하게 느낄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재난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직 파시즘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을 매우 반동적인 방향으로 조직하고 있지만, 이들이 의회 민주주의를 전복하거나 모든 인간적·시민적 권리를 철저히 파괴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조직적·이념적 성숙도도 부족하다. 우리는 파시즘적 힘이 축적되는 단계에 있다. 전간기(interwar period)로 돌아가 보면, 그 축적 과정은 이미 진행되었으며, 대규모 학살과 선행된 극우 운동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발전하고 있는 미완성된 파시즘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본다.
[올리 헤인스] 2005년에 출간된 ⟪파시즘의 해부학(The Anatomy of Fascism)⟫의 마지막에서 로버트 팩스턴은 이스라엘 정치가 파시즘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신이 말하는 ‘아직(은)-파시즘-아닌(not-yet-fascism)’의 틀에서 이 스라엘은 어디에 위치한다고 보는가?
[리처드 시모어]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이스라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더 큰 국가들에 초점을 맞춘 글로벌 퍼즐 속에서 부차적인 요소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가자에서의 집단학살 때문에 아예 새로운 장을 써야 했다.
어떤 면에서는 시온주의는 항상 잠재적으로 집단학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왜냐하면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 파시즘(Hebrew fascism)의 요소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항상 존재해 왔다. 나는 이들의 정착민 식민주의적이 역동이 상당히 독특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 물론 정착민 식민주의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현실이지만, 현재의 살아 있는 현실은 아니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정착민 식민주의가 국가의 조직 방식과 일상생활을 구조화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그들의 존재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는 욕망을 의식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치에는 미국, 영국, 인도, 브라질 등 해외와 유사한 양상도 있다. 이런 양상은 전후 시스템의 쇠퇴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는 1948년 인종 청소를 기반으로 유대인 노동계급, 유대인 자본가, 그리고 국가 간의 조합주의적 협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체제는 1970년대에 무너졌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로 전환했다. 이스라엘 노동당은 쇠퇴했다. 그들은 제3의 길(Third Way) 정치로 적응하려고 했고, 마지막 시도는 아마 오슬로 프로세스(Oslo Process)였을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노동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
이스라엘은 점점 더 깊어지는 비관주의와 계급 불평등의 흐름 속에 있으며, 전후 세계의 오래된 민족주의적 이상향은 사라졌다. 자본가 계급은 세계 시민적이며 워싱턴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건설하려고 했던 유대인 민족주의 이상향이 아니다. 그래서 시온주의 운동 내 일부는 유대인의 안식처, 유대인의 고향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익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 단계를 지났다. 이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 번에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 이들에게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하고 그들이 ‘대(大)이스라엘(Greater Israel)’의 일부라고 믿는 모든 땅을 결정적으로 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파시즘으로 이어질까? 다양한 헌법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 시스템이 있는 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배타적 민주주의이며, 이 점에서 특별히 독특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이전까지 미국도 배타적 민주주의였으며, 사실 나는 오늘날까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그러하다고 본다. 이스라엘은 점점 더 인종차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집단학살적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파시스트 쿠데타에 가까운 상황이다. 나는 집단학살과 그로 인한 일반 대중의 급진화 과정이 카하네주의(Kahanist) 또는 극우파 쿠데타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파시즘이 상당히 진전된 곳을 찾고 싶다면, 나는 그것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경고 신호가 울리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집단학살의 문턱에 있다." 인도에서는 역사적 파시즘과 연결된 우익 권위주의 운동인 인도국민당(BJP)이 국가를 장악하고 시민권을 억압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독특하고 특이한 역할을 하는 글로벌 현상이다. 이스라엘은 천년 왕국론적 파시스트 정권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중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가능성이며, 특히 이스라엘이 핵 보유국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올리 헤인스] 당신은 “우익의 재난 판타지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들은 종종 자유주의적 낙관주의가 인정하기를 꺼리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썼다.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시모어] 우익은 때때로 현실의 꽤 중요한 요소들을 건드리곤 한다. 예를 들어 15분 도시(fifteen-minute cities)에 대한 이야기를 보자. 그것은 공산주의적 반자동차 독재를 예고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환각적이고 망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실제로 자동차 이동성, 교외 생활방식, 그리고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에서 오는 상대적 이점에 대한 위협이 있다. 만약 사람들이 자전거 도로를 어디에나 배치하고, 가능한 한 오염을 줄이며, 주차 공간을 없애고, 편리함을 중심으로 도시를 설계한다면, 차를 이용해 어디든 이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특정 도로를 차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교통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변화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삶이 급격히 변할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기후 변화는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필요로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다가오는 변화의 심각성과 사람들이 이미 겪고 있는 문제들을 부정하려 한다. 나는 좌파의 대응이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에게 훨씬 더 나은 방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렇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떠오르는 예는 2016년의 버락 오바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운동에서 재앙을 과장한다며 조롱했고, 이렇게 말했다. “다음 날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는데 새들이 지저귀고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냉소적이고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던 감정은 사람들이 사실 꽤 행복하며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거에서 그는 대답을 받았다. 트럼프가 이겼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황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취임 연설에서 (스티브) 배넌이 쓴 연설문으로 “미국의 참혹함(American carnage)”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반동적 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참혹함(carnage)이라는 표현은 산업화된 미국의 붕괴를 묘사하는 데 있어 부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 문제를 발견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중국을 비난하고 동아시아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일자리의 대부분은 위로부터의 계급 투쟁, 즉 구조조정과 노조 파괴로 인해 사라진 것이었다. 아웃소싱이 일부 영향을 미쳤지만, 그 책임은 동아시아의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들에 있다.
이처럼 이들은 특정 형태의 재난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통합적이고 일관된 세계적 분석으로 엮어낼 수 없다. 그들이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어느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인도에서 무슬림을 학살하거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거나, 브라질에서 노동자당 지지자를 살해하거나, 미국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 시위자를 총으로 쏘거나, 찌르거나, 차로 치거나, 또는 영국에서 난민 신청자들을 호텔에서 불태우려는 인종적 폭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설계된 증상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익이 재난에 대한 대안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더 나은 재난,” 즉 자신들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재난이다.
[올리 헤인스] 당신은 인도에서 무슬림 학살을 언급했다. 구자라트 학살(Gujarat pogrom)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 재난 민족주의의 물결에 있어 왜 출발점으로 여겨지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가?
[리처드 시모어] 나는 그것이 '탄광 속 카나리아'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인도의 유일하게 관련된 학살은 아니다. 인도에는 일종의 학살 기계가 있다. 폴 브래스는 이것을 우아하게 기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한 열차에서 불이 나 힌두 순례자들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극우 단체인 BHP 소속으로, 힌두 민족주의(Hindutva) 운동은 무슬림들이 휘발유 폭탄으로 불을 질렀다는 가정을 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었다. 공정한 조사 결과 화재는 단순 사고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은 힌두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후 며칠간 사람들에게 무기를 들고 나가 무슬림을 사냥하고 죽이고 고문하라고 선동했다. 이는 BJP(인도국민당) 의원들이 직접 조직하고, BJP 지도자들이 선동했으며, 경찰과 사업가들이 협력하거나 돈을 주어 사람들이 이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는 공공 폭력의 집단적 폭발이었으며, 위에서 어느 정도 통제된 허용성이 있었다. 그 결과, BJP의 득표율은 5% 증가했으며, 이전에는 지진 대응 실패로 이 지역에서 선거 패배가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패턴을 볼 수 있다. 실제 재난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정부가 이를 형편없이 대응한 뒤, 대신 가짜 재난의 버전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선동해 누군가를 죽이도록 한다. 이는 매우 흥미롭다. 그들이 하는 일은 끔찍하다. 그들은 어머니 앞에서 아기를 살해하고, 여성들의 다리 사이에 가시를 박고, 칼로 사람을 반으로 자른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한동안 쌓여왔다. 이후 몇 달간 나렌드라 모디는 힌두 자부심 집회를 열었고, “우리가 힌두 민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면 모든 ‘알리(Ali), 말리(Mali), 자말리(Jamali)’들이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분명히 집단학살을 겪은 무슬림 인구를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BJP 기반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전율시키고, 모디를 처음으로 섹스 심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정치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이런 패턴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만약 무장한 반-봉쇄 시위와 BLM 시위대에 대한 폭력이 없었다면, 1월 6일의 실패한 반란도 없었을 것이다. 브라질도 마찬가지다.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20%p 뒤쳐져 있었는데, 그는 2022년 선거에서 거의 승리할 뻔했으며, 2018년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가? 혼란스러운 폭력의 여름 동안 좌익을 기관총으로 쏴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돌아다니고, 그의 지지자들은 노동자당 지지자들에게 총을 겨누거나 폭행하거나 살해했다. 나는 구자라트 학살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현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초기 사례였다. 그리고 모디가 2014년에 선출되었을 때, 이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황을 용인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올리 헤인스] 1990년대 이후로 발생한 집단학살적 폭력의 대부분은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서구 정치에는 여러 집단에 대한 인종차별이 널리 퍼져 있지만, 가장 격렬한 공격은 무슬림들에게 집중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토미 로빈슨은 자신의 집회에 흑인이 참석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자랑한다. 재난 민족주의 담론에서 추상화된 “무슬림”이라는 인물상은 어떤 역할을 하며, 극우 혐오의 상징으로서 “유대인”을 대체했는가?
[리처드 시모어] 브라질이나 필리핀에서는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대부분의 서유럽, 심지어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들에서 이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호학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인물상과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극우 담론에서는 무슬림들이 지구상의 비참한 하층민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바트 예오르 의 유라비아(Eurabia) 이론과 같은 음모론을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슬림이 비밀리에 모든 것을 지배하며 금융 시스템을 운영한다는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전복적이고 폭력적이며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집단으로, 폭력과 국경을 통해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것이 1980년대에 민족 절대주의(ethnic absolutism)로의 전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리쿠드당(Likudniks)과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연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든 사람이 특정한 정체성 상자에 맞춰져야 하는 일종의 정체성 절대주의 정치로 이어졌다. 이는 냉전 시대에 우리가 보았던 반인종주의적 연대, 영국에서 정치적 흑인성(political blackness)으로 나타났던 통합적 운동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런 연대가 모두 무너졌고, 이후 루시디 사건(Rushdie Affair)이 발생하면서 무슬림이 구체적으로 문제시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적 삶의 일상적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북부 도시나 항구 지역에서 같은 노동조합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산업이 폐쇄되고 노동조합이 붕괴된 이후 경제의 분리된 영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주거지 역시 여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 학교 시스템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었고, 지방 의회는 분리 정책을 실행했으며, 경찰은 그러한 의미에서 분리주의적으로 매우 인종차별적이었다. 여기에 긴축 정책이 더해지면서 공공의 빈곤이 발생했고, 아무도 가진 것이 없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탓했다. “저 사람들은 다 가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북부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테러와의 전쟁은 이런 모든 문제를 촉발했다.
이것은 “나쁜 무슬림”을 기준으로 자유주의 문명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글로벌 현상이다. 처음에는 “모든 무슬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슬람 파시즘이라 부르는 것만 문제다”라는 개념이 있었다. 조지 W. 부시는 이를 명확히 말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이해된 방식과 정치적으로 이용된 방식은 이 문제를 모든 무슬림으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무슬림”은 중심적 인물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트랜스젠더 화장실 성범죄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이주민과 연결된 등가 사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리핀에서는 주요 대상이 마약 중독자들인데, 이들은 학살당했다. 각 지역마다 강조점은 다를 수 있지만, 글로벌하게, 특히 서구에서는 “무슬림”이 이러한 다른 문제들을 모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동의한다.
[올리 헤인스] 가장 흥미로운 장 중 하나는 재난 민족주의 담론에서 성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은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에 대해 다룬 장도 썼지만, 다른 장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된 것 같았다.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에서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속옷과 함께 찍은 틱톡 영상, 혹은 감옥에서 구금자들을 강간한 혐의를 받은 병사들을 옹호하는 폭동 같은 사건들로 성적 착취와 성폭행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재난 민족주의적 상상 속에서 성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분석을 더 설명해줄 수 있는가?
[리처드 시모어] 나는 이 새로운 극우 세력의 리비도 경제(libidinal economy)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근본적인 전제가 누군가는 항상 피해를 입는다는 것, 그리고 문제는 "공산주의자들"(그들이 카멀라 해리스 같은 인물을 지칭하며 사용하는 말)이 잘못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셀(Incel) 운동이나 남성 권리 옹호론자(men’s rights advocates) 등은 종종 강간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 리비도 경제에는 모순이 존재하는데, 한편으로는 동성결혼 금지, 트랜스젠더 반대, 아내들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통적 아내 페티시즘과 같은 엄격한 금지 조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들에게는 선택적으로 허용되는 완전한 포식적 자유가 있다. 이런 현상이 전쟁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강간이 빈번하며, 적을 희생시키는 행위는 특히 여성들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포함한다.
최근 나는 가자지구 집단학살과 관련된 가해자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클라우스 테벨라이트 가 말한 ‘위험한 여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현대적 맥락에서는 이것이 빨간 머리를 하고 소리치는 사회적 정의의 전사를 의미할 수 있지만, 그가 다루던 1920년대 자유군단(Freikorps) 운동 시기에는 위험한 여성이란 치마 속에 총을 숨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죽이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그 위험한 근접성은 매혹적이다. 왜냐하면 위험에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극복하고, 최악의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많은 남성 우익 정치가 무력감, 무기력, 마비 상태 등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강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말로 성적 욕구가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증거에 따르면, 젊은 남성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 전반이 이전 세대만큼 성에 관심이 많지 않다. 그들은 성에 관심이 적고, 로맨스에도 관심이 적으며, 현대 생활에는 섹시한 요소가 거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신들이 욕망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여성들을 탓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비자발적 금욕(involuntary celibacy) 상태다"라고 말하며, 만약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다면 항상 성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 주장이 의심스럽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겪고 있고, 좌절하고, 엉망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힘, 효능감,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바꾸어 이를 부풀리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가자지구의 경우 특정한 맥락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병사들이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훔친 속옷을 입고 촬영한 영상은 명백히 풍자적이고, 집단학살적이지만, 이는 피해자에 대한 무의식적 동일시를 암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올리 헤인스] 이 책에서 빠져 있다고 느낀 부분 중 하나는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 자유주의 중도파의 역할에 대한 분석이었다. 카멀라 해리스가 체니 가문과 함께 선거운동을 벌이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한 사례가 떠오른다. 책에서는 이런 점이 배경으로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그림 속에서 어떻게 위치한다고 보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가?
[리처드 시모어]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개인 및 집단으로서의 자유주의 중도파와 극우와의 공생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문명 자체이다. 내 책에서는 두 번째, 즉 자유주의 문명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제국주의와 전쟁, 인종차별, 국경에서의 가학적 행위, 노동과 착취, 그리고 계급 위계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고통에서 드러나는 본질적 야만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그리고 현재의 카멀라 해리스와 조 바이든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형성물을 권력으로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가가 문제다.
나는 철학자 태드 딜레이가 기후 정치에 관한 그의 최근 저서 ⟪부정의 미래(The Future of Denial)⟫에서 제기한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자유주의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이 평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가치에 동조한다고 주장하지만,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자유주의자들이 막상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유주의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구별해야 할 점이 있다. 철학적이고 정치적으로 진정으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고수하며 그것을 위해 싸우는 자유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좌파에 대한 혐오를 중심으로 정치가 조직된 강경 중도파도 있다.
여기서 나는 주로 극우와 관련된 환각적 반공주의(hallucinatory anti-communism)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자유주의자들도 좌파와 그 가상적 위협에 대해 비현실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좌파가 더 강력했고 공산주의 혁명을 막 일으키려는 상황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나 버니 샌더스가 출마했을 때 미국 자유주의자들의 공황 상태가 떠오른다. 한 방송인은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벽에 세워져 총살당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 영국에서 무슬림들이 버밍엄 학교를 장악하려 한다는 '트로이 목마 작전(Operation Trojan Horse)' 같은 음모론이 나온 점을 생각해보라. 이는 극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관계다. 극우는 자유주의 중도파가 이미 설정해놓은 전제를 가져와 이를 급진화하고 더 내적으로 일관되게 만든다. 몇 년 전, 초기에 신노동당(New Labour)이 집권했을 때, 이들은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종종 장관이 도버에 내려가 사람들의 밴에서 난민 신청자를 찾는 모습 같은 장면을 뉴스에 내보내곤 했다. 그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국민당(BNP)은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인터뷰에서 그들은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이 정말 마음에 든다. 그들이 우리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1997년에는 사람들의 관심사 목록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문제를 그들은 최상위로 밀어 올렸고, 이는 BNP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이유로 이미 돌고 있던 반동적 흐름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후 극우가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면, 그들은 “이것이 우리가 이 문제를 더 강력히 다뤄야 할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극우가 더 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공명 기계(resonance machine)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증폭된다. 그래서 중도파 민주당원과 극우 공화당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구조적으로 좌파를 배제하는 데 기반을 둔다. 구조적으로 둘 다 그것을 기반으로 번영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수혜자는 극우다.
[올리 헤인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은 사람들의 이성과 자기 이익에 호소하는 것이 항상 효과적이지 않으며, 생계형 정치(bread-and-butter politics)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면 그들의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빵”과 함께 제공해야 할 “장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리처드 시모어] 책에서 그 비유를 썼어야 했다.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는 이를 표현하기에 좋은 방식이다. 나는 삶 자체에 내재한 초월에 대한 정당하고 타고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삶은 우리가 어떤 발전적 정점으로 나아가려는 목적론적 과정이다. 또한 지식을 추구하고, 타인을 추구하며, 플라톤의 언어를 빌리자면 선(good), 참(true), 아름다움(beautiful)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좌파적 파열(left-wing rupture)이 나타날 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샌더스 선거운동을 보자. 생계형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료, 최저임금 인상, 착취적 고용주에 맞서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국경에서의 가학적 행위를 해결하며, 사람들에게 “당신은 더 나은 사회에서 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양심이 있는 본능을 가진 사람들은 그 선거운동에 이끌렸고, 전율을 느꼈다. 궁극적으로 그가 뭐라고 말했나? “나를 찍어라, 그러면 당신에게 더 많은 물질적 혜택을 주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찍어라, 그러면 정치적 혁명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나만 찍지 말고, 나와 함께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라. 권력을 잡고, 우리 사회의 낡고 가학적인 요소들을 뒤엎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자”고 말했다. 그는 함께 나라를 다시 만들고 변혁시키는 불가능해 보이는 여정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함께 협력하여 더 높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현대 생활의 병리적 문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좌절감, 마비 상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샌더스의 대표적인 연설 방식은 “우리가 함께 서면(if we stand together)”이었고, 그 말을 할 때마다 군중들은 열광했다. 이는 좌파적 단절의 한 예일 뿐이다. 장뤽 멜랑숑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고, 제레미 코빈은 매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같은 기본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그것은 사회적 윤리(social ethos), 즉 함께 나아가는 열망이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노동조합에 처음 가입하는 이유는 더 높은 임금이나 더 짧은 노동시간 등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지만, 그 과정에서 더 풍부한 필요를 발전시키게 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종종 임금 손실이나 물질적 조건이 약간 나빠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조합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자신의 조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더 나아갈 수 있고, 훨씬 깊은 방식으로 정치화될 수 있다. 가장 급진적인 필요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보편성을 향한 필요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거리에 몸을 접착제로 붙이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은 모든 도구들과 상품을 다 갖춘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종이 번성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세상이다. 나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한 바와 같은 본능적 기저의 공산주의(instinctive baseline communism)가 어떻게 방해받고, 억압되고, 왜곡되는가이다. 이 타고난 정당한 필요가 어떻게 무시되고 병리화되어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거나 표현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는가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냉소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장미는 우리의 "함께함(togetherness)"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플라톤적 용어로 '선, 참, 아름다움'을 언급했는데,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 함께 폭력과 강간을 멈추고 인종차별을 끝내려는 도덕적 기준을 세우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 찬 삶을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출처] Disaster Fantasies Are Paying Off for Right-Wingers
[번역] 류민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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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시모어(Richard Seymour)는 ⟪코빈: 급진 정치의 기묘한 부활(Corbyn: The Strange Rebirth of Radical Politics)⟫을 포함한 여러 책의 저자이다. 그는 '레닌의 무덤(Lenin’s Tomb)'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올리 헤인스(Olly Haynes)는 정치, 시위, 환경, 그리고 문화를 다루는 기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