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계를 눈물의 계곡으로, 우리의 삶 자체를 죽은 신의 부패하는 시신으로, 존재보다는 비존재가 더 나은 것으로 보는 “비관주의적” 관점과 공산주의에 대한 헌신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는 인간 조건에 내재한 절망을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공산주의를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좌파가 지닌 묵시적 인본주의적 낙관주의를 버려야 한다. 전통적 좌파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연대와 협력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고통과 절망은 단지 소외된 사회에서만 두드러진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악에 대한 경향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 없이도, 자본주의 아래서 좌절된 인간의 본질적 창조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사상은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의 걸작 《운명 없는 삶: 마르크스 이후의 자유와 필연》(Fatelessness: Freedom and Fatality After Marx)에서 탁월하게 전개된다. 브라시에는 철학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비현실화(deactualization) 개념이 헤겔의 가능성과 현실성의 결합을 어떻게 문제 삼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은 단순히 느슨하게 조정된 사회적 현상의 총합이 아니라,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전체성이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최근에 등장한 현상이지만, 자본은 자신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역사의 현재와 미래를 종속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은 단순히 ‘정신의 연속적 형태’ 중 하나가 아니라, 정신의 치명적 소외(fatal estrangement)이며, 인간의 보편적 생산력을 (즉, 인간 본성 또는 종적 존재(Gattungswesen)) 자본의 무한하지만, 무의미한 팽창을 위해 동원하는 특정한 생산 양식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본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본 또한 인간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즉,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노동하며, 자본은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이 관계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노동의 실현은 자본을 실현하지만, 자본의 실현은 노동을 동시에 실현하고, 비현실화(deactualize)한다. 이 비현실화는 착취, 지배, 빈곤화(immiseration)와 같은 자본주의 아래 인간의 비자율성을 나타내는 모든 지표와 동의어다.”
마르크스에게도 헤겔에게도 의식적으로 자기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는 단순히 여러 인간적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인류의 본질적이고 규정적인 특성이다. 자본은 인간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을 실현하며, 가로막는 것은 단순한 인간적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가능성(humanity as possibility)"이다. 이러한 차단은 헤겔의 현실성(actuality) 개념에 내재한 문제를 드러낸다.
자본이 차단하는 가능성은 단순히 존재할 수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현재보다 덜한 빈곤, 고통, 착취)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지만 자본 아래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즉, 자본이 초래하는 불필요한 빈곤, 고통, 착취를 완전히 제거하는 인간 해방이다. 이는 헤겔이 "형식적 당위(formal ought)"라고 경멸했던, 현실성과 분리되어 실현될 수 없는 공허한 당위가 아니다. 오히려 맥도날드가 아도르노의 사상을 확장하여 설명하듯, "실질적 당위(real ought)", 즉 우발적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내재적이고 실현 가능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고통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이다. 즉, 인간의 현실성(actuality)에는 필수적이지 않지만, 자본의 현실성에는 필수적인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브라시에는 여기서 마르크스를 다시 아리스토텔레스화(re-Aristotelianizes)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능성과 그것이 우발적으로 현실화하는 방식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고 있다. 헤겔에게 현실화(actualization)는 어떤 가능성이 가진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즉, 가능성이 현실화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이 진정 무엇이었는지가 밝혀진다. 예를 들어,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스탈린주의는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레닌주의(혹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 프로젝트의 진정한 현실적 귀결(truth of the Leninist or even Marxist project)이다.
반면 마르크스에게는 모든 현실화에 균열(split)이 존재하며, 자본주의에서 이 균열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간 존재를 정의하는 창조적 가능성은 현실화를 향해 나아가지만, 이 현실화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노동자의 비현실화(de-actualization)로 이어진다. 즉, 노동자는 방대한 물질적·정신적 부를 공동으로 생산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들은 빈곤하고, 고통받고, 지배당하며, 착취당하는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러한 비현실화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만 필연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본질은 고통과 지배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혁명적 노력은 자본주의적 현실화가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며, 따라서 폐기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러한 헤겔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자체에서 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에서 마르크스는 오직 자본주의 안에서, 그리고 자본주의를 통해서만 노동 계급이 무실체적 주체성(substance-less subjectivity)으로 형성될 수 있으며, 이후 (혁명적 행위를 통해 집합적 주체로서) 소외된 실체를 자기 자신의 산물로 다시 획득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착취와 지배는 인간 현실성(human actuality)에 필수적이며, 그것들이 잠재적 해방의 주체를 형성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미 내재적으로(in itself) 해방이며, 혁명을 통해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for itself) 해방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前) 자본주의 사회들은 자본주의보다 덜 소외(alienated)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유기적 사회 생산 과정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사회 전체성 안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리(a place of no-place)"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헤겔 변증법의 일반적인 오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과정은, 흔히 "(집합적) 주체가 자신의 생산물을 객관화하고, 이후 그것을 더 이상 자신과 동일시하지 못한 채 타자로 인식하며, 마지막으로 그것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획득하는 과정"과 다르다. 소외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주체란 없다. 오히려 소외 과정 자체가 주체를 창조하며, 주체는 바로 이 과정에서 객관적 질서(objective order)와 구별되는 존재로 형성된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변증법적 운동의 세 번째 순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주체가 타자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산물로 전유하는 것도 아니며, 타자 속에서 고정된 자기 자리를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해결책은 전적으로 헤겔적이다. 주체는 타자를 관통하는 결핍(lack), 불일치(inconsistency), 불가능성(impossibility)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타자의 결핍과 상호 연관된 존재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이 입장이 함의하는 바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유일하게 적절한 존재론은 급진적 존재론적 비관주의(radical ontological pessimism)라는 것이다. 따라서 또 하나의 중요한 비관주의 철학자의 이름이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19세기 중반 독일의 "비관주의 철학자" 필리프 마인랜더(Philipp Mainländer)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결별한 철학자로, 오늘날 거의 잊힌 사상가다.
마인랜더는 쇼펜하우어의 핵심 주장—즉, 유일한 구원은 죽음이며, 무(無)로의 귀환이다—을 따르면서도, 의지를 단순히 생존을 향한 의지(will to live)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의지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아니라 "죽으려는 의지(will to die)", 즉 소멸하려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는 처음에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마인랜더는 이를 광기 어린 우주적 비약을 통해 설명한다. 그는 창조(creation)를 일종의 빅뱅으로 해석하는데, 여기서 신(God)—즉 근원적 무(primordial Void)—이 폭발하여 스스로를 죽였으며, 이 과정에서 혼돈의 다수성(chaotic multitude)으로 분산되었다고 본다. “세상은 신의 부패한 시신일 뿐이다(The world is nothing but the decaying corpse of God).” 그리고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non-being is better than being)”는 원칙에 따라, 모든 창조물은 근원적 무(無)로 돌아가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인랜더와 의견을 달리해야 한다. 폭발이 근원적 무를 따른 것이 아니라, 폭발 자체가 근원적 사실(the primordial fact)이다.
이것이 마인랜더의 사상에 대한 명백한 반론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즉, "그렇다면 신은 왜 조용한 무(無)로 남아 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렇다. 근원적 사실은 "죽음 충동(death drive)"이다. 그러나 이 충동은—프로이트조차도 종종 자신의 발견을 잘못 이해했듯이—단순히 "열반(nirvana)"으로 향하는 경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충동은 섬뜩할 정도로 "외설적인 불멸성(obscene immortality)"에 가깝다. 즉, 삶과 죽음의 순환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작동하는 충동이다.
마인랜더에게 그의 철학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한 실천적 헌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마치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의 사상이 그러했듯이). 그는 《구원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Erlösung)의 출간본을 받아 든 날, 자신이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확신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1876년 4월 1일(만우절!) 생을 달리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여전히 유용하게 살아갈 또 다른 이유를 고려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급진적 좌파 정치 참여였다. 하지만 그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가 매우 가까이 지냈던 여동생이 좌파 정치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마인랜더와 쇼펜하우어의 정치적 보수주의 및 반페미니즘 사이의 대조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쇼펜하우어와 달리, 마인랜더는 삶이 대다수 사람에게 끝없는 고통과 비참함이라는 사실이 그를 사회적 실천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고통을 경감하려 했다. 이는 존재론적 비관주의가 어떻게 연민 어린 급진적 정치와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마인랜더는 이 입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는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 체계들은 개인적 고통을 경감하는 길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실존적 고통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데는 실패한다. 마인랜더는 이러한 정적주의(quietism, 평온)가 개인의 도덕적 성장을 위한 수단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함으로써 불의를 지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윤리적 선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과 결합해야 하며, 모든 개인이 삶의 무가치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인랜더 실천 철학의 중심 개념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비관주의적 윤리는 불평등과 고통을 지속시키는 사회적·정치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사회적·정치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악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연민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연애 운동—여기에는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권리도 포함됨—을 정의로운 사회의 필수 요소로 옹호하는 이유가 된다.
“공산주의는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며, 이를 통해 개인이 생존 본능(will to survive)에 내재한 이기적 충동을 초월할 수 있다. 마인랜더는 계급 차별을 철폐하고, 교육과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보장함으로써 사회가 고통을 경감하려는 집단적 헌신을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두 거장, 아우구스트 베벨과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마인랜더에게 공감을 표한 것을 과연 놀라워해야 할까?
오늘날,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이 그 자체로 파괴적인 가능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회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인랜더 같은 인물들뿐이다.
[출처] Why a Communist Should Assume Life Is Hell - The Philosophical Salon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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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슬로베니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로, 현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1989년 영어로 출간한 첫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을 통해 사회 이론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가디언, 디 차이트, 뉴욕 타임스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문화 이론의 엘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를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저서가 출간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