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정치 영화는 때때로 대중에게 너무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프랑스-그리스 출신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Costa-Gavras)는 혁명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도 충분히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69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는 반파시즘 통합전선을 위한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for a United Front Against Fascism)가 사흘간 열렸다. 이 회의에서 블랙 팬서당(BPP, Black Panther Party)이 경비를 담당했으며,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활동가와 혁명가들이 참석했다.
연설과 다양한 의식 고양 활동이 이어진 후, 참가자들을 위한 영화 상영이 진행되었다. 그 영화는 바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제트(Z)>였다.
영화 <제트>는 공식적으로 1969년 12월 미국에서 개봉되었지만, 블랙 팬서당(BPP) 대장 아론 딕슨(Aaron Dixon)과 그의 동료들은 사전에 영화를 입수해 오클랜드 회의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제트>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한 지중해 국가를 배경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좌파 정치인이 암살당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이 암살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가장 깊숙한 층과 연결된 세력에 의해 계획된 사건임이 밝혀진다. 강력한 좌파 세력의 등장을 막기 위해 기득권층, 특히 우익 정치·군사 동맹 내부의 반동 세력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들에 의해 젊은 국회의원(프랑스 배우 이브 몽땅이 연기)은 결국 제거된다.
몽땅이 연기한 인물은 영화가 시작된 지 15분 만에 처참하게 살해된다. 이후 영화는 살인범을 법정에 세우려는 움직임과 이를 은폐하려는 세력 간의 치열한 공방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낸다. 자동차 추격전, 탐정식 수사, 살인, 법정 장면, 심문이 이어지며 영화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로 전개된다.
영화가 끝날 즈음, 관객들은 이 사회가 정치·역사·경제적으로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철저히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살인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혁명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론 딕슨은 자서전에서 오클랜드에서 열린 <제트> 상영회를 간략히 언급하지만, 이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어떻게 단순한 문화적 작품을 넘어 역사와 정치의 일부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의를 계기로 반파시즘 통합전선(United Front Against Fascism)이 결성되었고, 영화 <제트>가 그려낸 일상적이고 교묘한 파시즘에 맞서기 위한 급진적 지역 공동체 센터가 만들어졌다. BPP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국가 폭력에 맞선 ‘자위권’ 수호였으며, 이는 영화 속 몽땅이 연기한 인물이 국가의 탄압으로 목숨을 잃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이처럼 <제트>는 영화와 현실을 비극적으로 연결했다. 이후 미국에서 <제트>가 상영될 때마다, 많은 관객은 1969년 12월 시카고에서 발생한 블랙 팬서당 지도자 프레드 햄프턴 암살 사건을 떠올리며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한 평론가는 <제트>의 미국 내 반응을 설명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영화 <제트>는 단순히 유럽의 정치 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퍼진 공포와 불안을 정확히 포착한 작품이었다."
반파시즘과 반권위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 <제트>의 상영이 직접적으로 정치적 결정을 바꾸거나 역사적 사건을 예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1969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열린, 거의 잊힌 상영회는 1960년대에 급진적 예술, 특히 영화가 사회운동과 같은 공기를 호흡했던 방식을 보여준다.
당시 예술과 문화는 이러한 운동에서 동일한 영감을 얻었으며, 동시에 그 시대의 격동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모든 것이 변할 것처럼 느껴졌던 그 시절, 영화와 예술은 단순한 표현 수단을 넘어 혁명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급진적 영화(Radical Cinema)
1960년대의 정치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사람, 사상, 구호, 유행, 무기 등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전 세계를 오갔다는 점이다. 특히 혁명적 문화의 산물들은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중심에 있었다. 낡은 종이책 한 권이 여행가방 속에 담겨 이동하고, 45회전 바이닐 음반의 노래가 퍼지며, 손으로 베껴 쓴 대본이 공유되었다. 혹은, 그리스 출신 감독이 알제리에서 촬영한 프랑스 영화의 필름 릴 한 통이 오클랜드로 보내지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나 경계를 초월해 공유된 혁명적 시, 음반, 연극, 영화 등 1960년대의 공통 문화 레퍼토리는 사람들이 “여기서 시작된 일이 저기에서도 시작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퍼져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갖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한 편의 영화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는커녕, 혁명적 상황에 기여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코스타 가브라스와 그의 동시대 급진적 영화감독들은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는 장 뤽 고다르나 질로 폰테코르보 같은 좌파 감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는 영화가 혁명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일 수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의식을 고양하면서도 동시에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아방가르드 실험이나 뉴스릴 같은 다큐멘터리적 정확성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는, 자신만의 영화적 접근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식초로는 파리를 잡을 수 없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흥미진진한 스토리, 액션, 서스펜스였다. <제트>에서처럼, 빠른 편집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활용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는 대중 영화의 문법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급진적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만약 할리우드 영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는 코스타 가브라스가 이루었던 정치와 오락의 융합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2018년 영화 <쏘리 투 보더 유>(Sorry to Bother You)나 <더 퍼스트 퍼지>(The First Purge) 같은 작품들은 대중적인 형식 속에 좌파적 메시지를 담아내면서, 건강한 ‘팝-좌파(pop-leftism)’ 문화가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정치적 영화의 전통을 돌아보고, 오늘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1965년 흑백 미스터리 스릴러 데뷔작부터,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회고록을 영화화한 <어른의 부재>(Adults in the Room)까지 매우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또한 1982년 <의문의 실종>(Missing)에서는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비판했고, 최근에는 지중해 난민 위기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 인생을 되짚어보면, 1960년대 영화의 급진적 요소들 중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다. 진정으로 대중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영화 문화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코스타 가브라스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이픈이 들어간 이름, 그 정체성
코스타 가브라스는 1933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콘스탄디노스 가브라스(Konstantínos Gavrás)였다. (그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코스타-가브라스(Costa-Gavras)라는 이름의 하이픈은 단순한 오타에서 비롯되었으며, 프랑스에서 영화 작업을 하던 초기부터 굳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고, 아버지는 오데사 출신의 반왕당파 인사였다. 1941년 추축국이 그리스를 잔혹하게 침공하자, 그의 아버지 파나요티스 가브라스(Panayotis Gavras)는 점령군에 맞선 좌익 저항 세력에 합류했다.
가브라스의 아버지는 주요 저항 지도자들처럼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독일군뿐만 아니라 그리스 왕실을 몰아내기를 희망했던 도시 빈민과 농민층과 힘을 합쳤다. 결국 좌파 유격대는 나치를 격퇴했고, EAM/ELAS(그리스 국민해방전선/그리스 인민해방군) 유격대는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며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국왕과 영국의 지지를 받은 우익 세력이 반파시스트들을 배제하려 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곧이어 내전이 벌어졌고,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세력들이 무장해 좌파를 말살하는 데 앞장섰다. 한때 점령군을 몰아낸 영웅들이었던 좌파 유격대원들은 1946~49년 그리스 내전이 끝날 무렵, 대부분 학살당하거나 추방되었으며, 외딴섬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처럼 1930년대 메탁사스 독재 정권부터 1967~74년 군사정권까지, 그리스 정부는 항상 좌파를 "위험한 시민"으로 간주하고 탄압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인생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지만, 그의 그리스에서의 어린 시절과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그의 영화적 상상력과 정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시선은 독재, 기근, 점령, 내전, 제국주의 개입, 반공 탄압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내전이 끝난 후, 우익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전직 좌파 유격대원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취업, 운전면허 취득,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정부가 발급하는 ‘시민 신원 증명서’가 필요했으나, 이는 좌파 유격대원과 그 가족들에게는 발급되지 않았다. 가브라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쟁이 끝난 후, 좌파 저항군에게 속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우리는 매우 가난해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 입학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영화 공부를 하려 했으나 비자 발급도 거부당했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이 극심한 시기였다. "나는 냉전의 희생자였다. 그것은 그리스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였다...하지만 다행히도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만약 아버지의 정치적 문제만 없었다면, 나는 그리스에 남았을 것이다."
1953년, 가브라스는 파리로 떠나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다. 그는 소르본대에 입학한 후, 프랑스의 권위 있는 국립영화학교 IDHEC(Institut des hautes études cinématographiques)에서 공부했다. 파리의 레프트 뱅크(Left Bank)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원자폭탄 반대 집회와 로젠버그 부부(Ethel and Julius Rosenberg) 지지 시위에 참석했으며, 장 폴 사르트르, 빅토르 위고, 존 스타인벡, 마르크스, 레닌을 읽으며, 1950년대 중반 그의 정치적·문화적 감수성이 더욱 확립되었다.
그는 프랑스 영화계에서 장 지오노와 르네 클레르 같은 감독들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1965년, 첫 장편 영화 <더 슬리핑 카 머더>(The Sleeping Car Murder)를 발표했다. 그의 향후 영화 제작 기회는 이 작품의 흥행 성적에 달려 있었기에, 그는 미국 영화 누아르의 스타일을 차용해 빠른 전개와 서스펜스를 강조한 경찰 스릴러이자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1966년 두 번째 영화 <쇼크 트루프>(Shock Troops)에서는 정치적 색채가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프랑스 남부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사보타주 작전을 수행하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따라가며 반나치 저항운동을 그렸다.
이 영화에서 전개가 급반전되는 순간은, 주인공들이 독일군 포로수용소를 급습하는 장면이다. 원래 계획은 12명의 동료를 구출하는 것이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13번째 수감자가 발견된다.
영화의 핵심 갈등은 이 정체불명의 인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그는 확실한 동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도 아니다. 이 설정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교육극 <조치들>(The Measures Taken)을 연상시킨다. 영화는 "집단의 안전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생명을 구하면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영화 속 혁명가들이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것과 달리,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살리기로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이 영화에서는 감옥 탈출과 은행 강도 같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펼쳐지는 한편, 전우들 간의 철학적 논쟁도 함께 그려진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한 레지스탕스 대원이 전투 중 전사하자, 동료들이 모여 애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한 인물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다른 이들이 죽는지, 왜 사람들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적들과 같지 않을 것이다."
<쇼크 트루프>는 필요한 혁명적 폭력을 실행하면서도 어떻게 윤리적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주제는 훗날 코스타 가브라스의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탐구된다.
1967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상영된 <쇼크 트루프>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코스타 가브라스가 향후 정치적 영화감독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3부작
<제트>(1969), <고백>(The Confession)(1970), <계엄령>(State of Siege)(1972)으로 코스타-가브라스는 자기 경력에서 정점에 올랐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들을 연출했으며, 정치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 세 편의 영화는 각각 암살과 그에 따른 은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조작된 공산당 간부의 보여주기식 재판(show trial), 그리고 우루과이 투파마로스(Tupamaros) 게릴라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다룬다. 세 영화의 핵심 주제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코스타-가브라스는 역사를 거대한 음모로 묘사한다. 그의 영화에는 비밀스러운 뒷거래, 악의적인 모의, 폭력적인 공격, 그리고 긴장감 넘치는 반전이 가득하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그는 기자, 수사관, 심문관, 변호사 같은 권력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물들을 주요 캐릭터로 활용해 왔다.
1940년대 흑백 할리우드 스릴러처럼, 그의 영화에는 관객이 응원할 수 있는 정의로운 인물과 조롱받아 마땅한 악당이 등장한다. 물론 때때로 단순한 악역과 신념으로 가득 찬 주인공의 대립이 다소 극적인 구도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항상 강렬한 재미를 보장한다.
코스타-가브라스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관객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그의 영화는 심오하고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지만, 사유와 성찰은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진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영화 <제트>
코스타-가브라스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제트>는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한 영화다. 이 작품은 분명히 암살을 다루고 있지만, 누구의 암살이며, 어디서,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질문을 가능한 한 열린 형태로 유지하며 보편성을 강조한다.
<제트>에는 특정한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는 강한 맥락적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 당시 가장 최근의 암살 사건을 영화 속 이야기와 연결할 수 있었다. 존 F. 케네디, 메디 벤 바르카, 파트리스 루뭄바, 마틴 루서 킹, 프레드 햄프턴 등, 누구의 이야기든 투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면, 영화 속에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암시하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영화 음악, 짧게 스쳐 지나가는 픽스(Fix) 맥주병, 그리고 "NATO 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 등이 바로 그 예다.
이 영화는 폭력과 저항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동시에, 철저히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유명한 오프닝 자막은 흔히 볼 수 있는 "실재 인물 및 사건과의 유사성은 우연이며,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면책 조항을 비틀어, 이렇게 선언한다.
"실재 인물과 사건과의 유사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의도된 것이다."
<제트>는 1963년 테살로니키에서 암살당한 그리스 정치인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의 실화를 간접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람브라키스는 우파 정권이 지속되던 시기, 민주좌파연합(Union of the Democratic Left)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전직 올림픽 선수이자 뛰어난 의사였으며, 반전 운동가로서 그리스 내 미국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3년 5월 22일, 반전 집회에서 연설을 마친 람브라키스는 거리에서 우익 깡패 두 명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당했다. 그는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고, 닷새 후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들이 군부 및 지역 경찰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건의 목격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폭로는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친 영향과 비슷한 충격을 그리스 사회에 불러일으켰다. 분노한 대중 속에서 람브라키스 청년운동(Lambrakis Youth Movement)이 1964년 결성되었으며, 이는 1960년대 초 그리스 좌파의 부활을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제트(Z)> 트레일러,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vras) 감독
그러나 이러한 좌파의 부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7년 4월 21일, 극우 성향의 군 장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 정부를 장악하면서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람브라키스 암살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몇몇 인물들은 복권되었으며, 사건을 파헤쳤던 검사와 수사 관계자들은 정권의 표적이 되었다.
<제트>는 이러한 사건들을 거의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라간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영화의 영감을 바실리스 바실리코스가 1966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에서 얻었다. 그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접한 이 책은, 그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람브라키스 암살 사건은 정치적 음모의 전형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경찰의 공모, 주요 목격자의 실종, 정부의 부패—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동기는 또 있었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은 코스타 가브라스가 그리스를 떠난 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람브라키스를 살해한 세력과 군부 정권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세력이라고 의심했으며, 따라서 이 영화가 그 정권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작품이 되기를 원했다.
영화 제목 <제트>는 람브라키스 사후, 시위대가 거리 곳곳에 남긴 낙서에서 따왔다. 그리스어로 "ζει(제이, Zei)"는 "그는 살아 있다"라는 뜻이며, 이 문구의 첫 글자 "Z"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람브라키스의 죽음을 은폐하려 했던 세력에 대한 강한 도전이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국회의원 미망인 역을 맡은 그리스 출신 배우 이리니 파파스의 캐스팅도 군사 정권을 겨냥한 직접적인 비판이었다.
람브라키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제트>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장-루이 트랭티냥이 맡은 수사 판사가 범인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과정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같은 1970년대 음모론적 정치 스릴러를 연상시킨다.
또한, 영화의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는 프랑스 누벨 바그 운동과 연결된 인물로, 그의 촬영 기법은 핸드헬드 카메라, 역동적인 이동 샷, 현기증을 일으킬 듯한 몽타주 기법을 활용해 <제트>에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부여했다.
<제트>는 1969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으며, 알제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출품되었다. 코스타 가브라스와 제작진이 알제리에서 촬영하던 1968년, 파리에서는 5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68년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프랑스 사회에서 경찰과 사법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마찬가지였다. <제트>는 정확한 타이밍에 나온 영화였다."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대적 분위기를 정확히 포착한 덕분이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만약 자신이 여전히 대학생이었다면 바리케이드를 쌓고 거리에서 싸웠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서른여섯 살의 성인이었기 때문에, 대신 <제트>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제트>는 정치 영화라기보다는 정치적 행동에 가깝다. (정치 영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트>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강렬한 경고를 남긴다. 영화는 군사 정권하에서 금지된 목록을 나열한다. 그 목록에는 장발, 노동조합, 톨스토이, 비틀즈, 미니스커트, 소포클레스, 러시아어 교육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 있다’를 뜻하는 문자 Z."
이러한 금지 조치는 1974년 군사 정권이 무너진 후 해제되었지만, 영화가 남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중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안전하지 않다."
영화 <고백>
<고백> 또한 하나의 경고였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1970년 영화 개봉 당시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 새롭게 시작되며, 체코슬로바키아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백> 역시 원작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부였던 아르튀르 런던(Artur London)이 1968년에 발표한 동명의 회고록을 각색한 것이다.
책에서는 1951년, 동유럽 관료 조직 내 "전복 세력"을 색출하는 고위급 보여주기식 재판(show trial)이 벌어지던 시기, 런던이 체포되어 겪은 끔찍한 경험이 담겨 있다. 영화에서 그는 이브 몽땅(Yves Montand)이 연기했으며, 몽땅은 배역을 위해 상당한 체중 감량을 감행했다.
<고백>은 오랜 세월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 동지들에게 배신당해 고문당하고, 강제 자백을 한 뒤, 결국 체제의 "본보기"로 법정에 서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가혹한 시청 경험을 선사한다. <제트>처럼 세련된 액션이나 긴박한 전개는 없다. 대신, 몽땅이 연기하는 런던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인간성을 말살당하며, 끝없이 고통받는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관객은 점점 더 깊은 불편함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린 전개는 영화의 심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며, 관객이 이 역사적 사건의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만든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작품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었지만, 반공(反共) 영화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국가 자본주의와 국가 공산주의 모두에 비판적인 1960년대 신좌파(New Left)의 사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PCF) 내부에서 더욱 정통적인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인물들은 <고백>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논란 속에서, 코스타-가브라스는 한동안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기피 인물’로 취급되었다.
<고백>은 과거의 과오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현재에 대한 암시를 던지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재심 끝에 복권되고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이 한창 진행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거리를 거닐던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동유럽 국가들의 탱크가 혁명의 희망을 짓밟고 도시를 점령하는 모습이었다.
소련 지도부가 공산주의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의 실험을, 배신한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생들이 벽에 남긴 문구를 비춘다.
"레닌이여, 깨어나라! 그들은 미쳐버렸다!"
영화 <계엄령>
1972년 작 <계엄령>(State of Siege)에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제국주의가 수행한 역할에 주목했다. 영화는 1970년 우루과이에서 투파마로스 게릴라 조직에 의해 납치된 미국 국제개발처(AID) 소속 관리의 운명을 그린다. 코스타 가브라스와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이브 몽땅은 필립 마이클 산토레 역을 맡았으며, 이는 실제 납치된 AID 관리였던 댄 A. 미트리오네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코스타 가브라스와 각본가 프란체스코 로시는 미트리오네의 활동과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6주간 라틴아메리카를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정보는 그들의 의혹을 확인시켜 주었다. 인도주의자로 위장했지만, 미트리오네는 사실 코스타 가브라스가 말한 바와 같이 “미국 제국주의의 외판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리스, 과테말라, 브라질, 태국 등을 오가며 정부의 배후에서 조종하고, 극우 세력과 연계하며, 군사 쿠데타와 억압적인 정권을 남기는 방식으로 개입했다.
영화 속에서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산토레는 게릴라에게 납치된다. 투파마로스는 그가 몬테비데오 경찰을 대상으로 불법 고문 및 대반란 전술을 훈련하는 데 관여했다고 의심한다. 가면을 쓴 게릴라들은 폭력이 아니라 날짜, 문서, 증거로 가득한 압도적인 사실을 통해 산토레에게 진실을 끌어내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영화는 우루과이 의회에서 고문 행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장면을 교차 편집한다. 논의의 초점은 전기 충격을 생식기에 가하는 비인도적 고문 기법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우루과이 경찰이 국제경찰아카데미에서 미국의 우방국 경찰들과 함께 이러한 잔혹한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회상된다.
이렇게 촘촘하게 구성된 증거 앞에서 관객이 긴장감을 느끼는 지점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산토레가 유죄인지 아닌지, 그리고 정부가 투파마로스의 최후통첩에 응답하지 않을 경우 그를 처형해야 하는지 여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는 사실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흐름이 관객이 투파마로스의 결정에 동의하도록 이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외세 개입을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투파마로스의 투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활주로에서 산토레의 관이 비행기에 실려 본국으로 송환되는 바로 그 순간, 그의 후임을 태운 또 다른 비행기가 착륙한다. 한편, 이 모든 과정을 투파마로스 조직원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계엄령>이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이 초래한 파괴적 결과를 보여주는 일종의 논쟁적 영화라면, 가장 흥미로운 점은 투파마로스의 일상적인 활동을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데 있다. 1970년대 초반은 신좌파(New Left) 운동이 여전히 ‘영웅적 게릴라’라는 이상을 품고 있던 시기였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투파마로스를 혁명적 신념의 본보기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투파마로스에 매료된 이유는 그들이 정치적 성숙함, 자국의 현실에 기반한 분석 능력, 그리고 군사적·정치적 차원에서 완벽한 기술과 효율성을 갖췄기 때문이다.”
영화는 투파마로스가 작전을 수행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보여주며, 마치 도시 게릴라 전술을 다룬 매뉴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경찰 검문소를 피해 이동하는 방법, 은행을 털어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 정찰 작전 수행 방식 등이 면밀하게 묘사된다. 또한 영화는 투파마로스가 얼마나 효과적인 조직이며,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조직이 협력하여 산토레를 납치하고, 그를 ‘인민 감옥’으로 신속하게 이송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몬테비데오 곳곳에서 다양한 차량을 동원해 산토레를 납치하고 도주하며 추격을 따돌리는 치밀한 전략도 담겨 있다. 작전이 끝나면 게릴라 대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흔적도 없이 군중 속으로 녹아든다.
또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는 투파마로스가 어떻게 조직적으로 결정을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한 버스에 타고 있는 여러 승객이 특정 정거장에서 내리고 타면서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렇게 직접 만나지도 않고도, 투파마로스의 지도부는 산토레 처형 여부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투표까지 진행한다. 이러한 세부 묘사는 투파마로스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조직인지 강조하며, 그들의 철학인 “말은 우리를 나누지만, 행동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신념을 구현한다.
영화 속에서 저항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몬테비데오 대학 캠퍼스에서 펼쳐진다. 돌로 만들어진 안뜰 곳곳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쿠바 혁명가를 기리는 노래 아스타 시엠프레(Hasta Siempre)가 울려 퍼진다. 당황한 경찰들이 소리를 멈추려고 하지만, 한 스피커를 끄는 순간 또 다른 스피커에서 노래가 다시 시작된다. 음악은 끊이지 않는다.
우루과이에서의 촬영은 대부분 칠레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적극적인 승인 아래 진행되었다. 아옌데는 <계엄령>의 시나리오를 “탐정 소설처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고 할 만큼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심지어 칠레 의회에서 하루 동안 촬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옌데 역시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예상대로, <계엄령>은 미국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산토레를 심문하는 투파마로스 대원인 우고(Hugo)가 던지는 질문이 논란의 중심이었다. “당신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방식은 전쟁, 파시즘, 고문이다… 산토레 씨,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하지 않나?” 이 대사는 미국 정부 기관들의 반발을 샀고, 이들은 공식 성명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반박했다. 1971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영화연구소(AFI) 페스티벌에서 상영이 취소되며 큰 논란이 일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영화가 선전물이 아니라, 모든 진정한 영화가 그래야 하듯이 “우리 일상의 정치적 과정을 보여주고 폭로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정치 영화 3부작이 성공한 원인은 바로 ‘일상 속 정치’를 사실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영화의 유산
오늘날까지도 코스타 가브라스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감독이다. 많은 작품을 만들어온 창작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의 작품들도 일정한 기복을 보인다. 이후의 영화들 역시 권력, 부패,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뤘지만, 초기 작품이 지녔던 혁명적 열정과 강렬한 미학을 그대로 유지한 작품은 몇 편에 불과하다.
1975년 작 <스페셜 섹션>(Special Section)은 <쇼크 트루프>에서 탐구했던 주제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배경이며, 반파시스트들의 영웅적 활약이 아니라 나치와 협력한 프랑스의 행적을 중심에 둔다. 1979년에는 <여인의 빛>(Clair de Femme)을 발표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례적인 작품으로, 한 연인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정치적 색채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영화가 “가장 작은 형태의 정치 조직, 즉 연인 관계”를 다룬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돌아갔다. 1982년 작 <의문의 실종>(Missing)은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아옌데 정권 전복 쿠데타 당시 실종된 미국 기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 작품은 우익 세력의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하며 미국의 개입 문제를 조명했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백인 우월주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경제 위기 등 역사적·정치적 문제를 다룬 영화를 계속 만들어 왔다. 그는 마치 황량한 벌판에서 외롭게 외치는 목소리처럼 폭력적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개인이 직면한 도덕적 갈등을 조명하며, 언제든지 다시 떠오를 수 있는 파시즘의 그림자를 경고한다. 하지만 1960년대 사회운동의 활력이 사라진 이후, 그의 영화들은 점점 반복되는 경고처럼 다소 거칠고 단조로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실제로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들은 구조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해부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의 음모에 맞선 인간의 도덕성과 용기 있는 저항에 집중한다. 거대한 사회 구조와 인간적 요소의 충돌은 그의 영화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으며,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면서도 개별적인 도덕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이 어쩔 수 없는 괴리를 낳는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최근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인 영화로 평가받는 <낙원은 서쪽이다>(Eden is West, 2009)는 지중해 난민 문제를 다뤘다. 이 영화는 난민 위기의 원인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감독이 가장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는 ‘인간적 비용’에 집중한다. 중동 출신의 불법 체류자가 그리스의 한 리조트 해변에 헤엄쳐 도착한 뒤, 파리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가혹함과 따뜻함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살펴보면, 그는 긴 여정을 걸어온 ‘정치적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신념을 지키며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한 결과물이자, 한때 성공했던 방식이 아주 새롭게 재창조되지 못했을 때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여전히 그의 영화에서 배울 점과 즐길 요소는 많지만, 결국 우리는 마르크스를 인용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사회 혁명은 과거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미래를 향해야 한다.”
미래의 대중적 급진 영화는, 선배 세대를 기리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초기 영화들은 당대의 사회운동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에 강렬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문화와 정치의 새로운 결합이 발전해 나가길 기대한다.
[출처] Costa-Gavras Directing the Revolution-‘Z’ | Portside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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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난 베흐자트 샤프(Kenan Behzat Sharpe)는 튀르키예, 그리스, 미국의 1960년대 좌파 운동과 관련된 문화적 생산을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블라인드 필드: 문화 연구 저널》(Blind Field: A Journal of Cultural Inquiry)의 공동 창립자이자 공동 편집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