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한편 그것은 내가 속한 단체의 화두이기도 하다. 운동단체에서 일어나는 계급주의, 나이주의, 동료에 대한 모욕과 막말 등의 문제에 관심의 온도가 높아졌다. 어디까지가 허용될 수 있는 사람의 캐릭터이고 어디서부터 폭력으로 규정해야 하는지. 여성학 강사 정희진 씨는 최근 모 신문 사설에서 ‘이 판’에도 만만치 않게 최순실과 트럼프 같은 ‘캐릭터’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성폭력은 기본이고, 사기, 표절, 계급주의, 학벌주의, 소비주의, 연줄 문화, 약자에 대한 모욕과 막말, 이중성 등을 탑재한 ‘이 판’의 사람들 말이다.
그녀의 글은 최근 내가 들은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 따위로 거지같이 일을 처리하니까….’, ‘싸가지 없이…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었다. 지속적으로 그런 류의 ‘말’을 듣고 있는 또 다른 동료가 이번에는 참지 않고 ‘폭언’을 멈추라고 말했다. 그간 들어온 처참한 말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버텨온 동료의 단호함은 예상과 다른 논쟁을 불러왔다. 폭언의 진위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진정한' 폭력의 진위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은 평화로운 집회 시위에 한해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쌍욕은 아니니 폭언이 아니지 않느냐고 거들었고, 일을 제대로 하면 그런 소리 안 듣지 않겠냐는 ‘대단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문제의 발화자는 자신을 반인권적인 사람으로 몰아간다며 거세게 항의했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동료에게 명예훼손을 주장했다. 폭력사실을 부인하고 정당한 요구를 왜곡하면서, 도리어 가해자가 명예훼손을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은 폭력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받는 사람들이 숱하게 보이는 행태 중 하나다.
문제의 발단은 그 ‘거지같은 일처리’였다. 일처리의 여부에 따라 마치 막말을 들어도 싼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되었다. 밤낮없이 일하지 않고, 퇴근 후 연락도 되지 않는, 또한 일처리도 ‘거지같이’ 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다.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기본전제는 인권 단체 내부에서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말이 폭언이라고 지속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노력과 거기에 드는 감정 노동은 왜 오롯이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난데없이 고개를 들어 무심한 하늘에 대고 ‘하늘이시여’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다행히 하늘은 그리 무심하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한 직후, 동료들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마련해 나가자고 했다. 그들이 ‘우리’가 된 것이다. 방관하고 묵인하는 목격자가 아닌 폭력적 상황을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우리’라는 상호 의존적인 노동의 현장의 문제에 적극 가담하는 당사자의 위치에 서 주었다. 폭력을 폭력이라고 말해 주었고, 일터에서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복원하는 일, 모든 사람은 사람을 정중하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작업을 함께 해나가자고 했다.
조직 내 민주주의에 관한 인권교육에 참여한 사람들의 글<사진 출처-인권오름>
인권연구소 창의 류은숙이 공저한 책 <일터 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존중이란 한마디로 다시 보기다. ‘당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존엄성의 렌즈로 다시 보고 ‘당함’의 의미를 달리 보자는 것이다.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고통의 전시장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얘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복잡해지고 더 어려워진 노동환경의 문제를 존엄성 존중으로 꿰어보려는 시도는 결코 한가한 사안이 아니다.” 존엄성과 존중으로 꿰어내려는 시도, 그것이 조직 내부의 폭력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유일한 자세가 아닐까.
출처: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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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임 님은 일도 많고 탈도 많은 인권단체에서 조직 내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