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혁명과 예술 특히 음악과의 연관에 대한 서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술과 미학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이 부족한 상황이기에 더더욱 고민하였지만 쿠바에서의 사례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쿠바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작은 사례 분석이 되겠지만 부디 타산지석이라도 될 수 있길 바란다. 부족한 솜씨에다가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라 부끄럽기 그지없다. 생소한 고유명사와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기에 읽기 쉬운 글은 아니겠지만 읽어보신 후에 비판과 조언을 던져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다.
자본주의와 문화 예술 그리고 혁명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에게 가하는 폐해는 비단 경제적인 비참한 뿐만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강요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러한 분리는 점점 더 가속화되며 광범위하게 진행된다. 특히 정신노동 중에서 과학이나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부분과 예술이 분리된다. 뿐만 아니라 예술분야의 내적 연관성조차 상실되며 제도화된다. 예술과 과학이 상품화 제도화되고 대중과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심지어 한 분야의 전문가는 그 분야 밖의 다른 분야는 즐길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문화를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과정으로 파악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반면에 대중들은 상품화되고 일차원적인 욕구, 욕망, 말초적인 것만을 즐기게 된다. 문화 전반에 대한 개개인의 소외는 점점 더 심해진다. 또한 음반제작이나 출판 같은 것도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자본에 거의 대부분 포섭되게 된다. EMI를 보라! 이와 관련해서 고 김진균 선생이 탁월한 분석을 내린바 있다.
19세기 말 독점자본주의 완성단계에서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방법을 도입했습니다. ...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에게는 순수한 육체노동만 맡기는 것이고, 노동에 대해 통제하던 부분은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정신, 의식이 되지요. ... 정신, 의식이 소위 정신문화의 핵심이 되고, 조금 더 나가면 전문 경영자층의 기반으로서의 지식을 확보하는 방법,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문화, 정보 이쪽까지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죠. ... 그런데 상품화의 대상은 좀 더 나가면 광고, 포장, 이런 식으로 가죠. ... 독점자본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중적인 노동계급의 결집력을 다원주의를 가지고 균열시켜 나가는 것이죠. 말하자면 하나의 계급의식에 바탕하는 하나의 계급조직을 허물어뜨리는 작동을 하는 것이고 ...
그 다음에 이런 자본가 계급의 헤게모니 문제와 다른 측면에서 하나의 축으로 되는 것은 특히 미국의 독점 자본가들은 생산에서 집적시키고 집중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영역의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해 들어갑니다. ... 그 문화 관리가 이런 식이니까 원래 노동자계급들이 갖고 있는 창의력, 인간적인 요소, 진보적이고 참신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부각될 여지는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노동자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 또는 예술표현의 기회를 거의 빼앗아버립니다. 그 대신 순수미술, 순수음악, 이런 형식을 제공해서 그것이 마치 모든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인 양 인식토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
대다수의 노동계급이 심각한 빈곤에 경제적으로 시달리고 있고 생계유지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소비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문화’는 그 경제적 토대의 파생물인 동시에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역할을 수행해낸다. 노동계급이 진보적인 문화 생산의 담지자로 올곧게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 혁명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해서 혁명기 이후의 문화변혁과 관련한 과거의 유산을 찬찬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은 문화ㆍ예술적으로도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와 관련해서 다소 길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의 레닌의 발언을 인용하겠다.
레닌은 체트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2)
혁명은 지금까지 묶어두었던 모든 세력들을 풀어 주고 현실 속에 깊이 갇혀 있던 사람들을 표면으로 끌어냅니다. 우리의 그림, 조각, 건축의 발전에 대한 귀족주의적 사고와 부르주아지의 호사스러운 변덕뿐 아니라 짜르 궁정의 유행과 무질서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영향력을 예로 들어봅시다. 사유재산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시장과 고객의 수요에 의해 작품을 생산합니다. 우리의 혁명은 극단적으로 이러한 소모적인 멍에로부터 예술가들을 해방시킵니다. 예술가들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의 사고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창작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왜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에 등을 돌리고 단지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발전적 미래를 위한 시금석을 포기하는가요? 넌센스! 정말 넌센스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요? 물론 서구를 지배하는 예술적 경향에 대한 무의식적 복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혁명가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우리가 현대 문화에 뒤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서구의 반역사적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야만인들임을 선언합니다. 나는 표현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 그리고 예술적 천재들의 가장 고상한 표현으로서의 여타의 다른 ‘주의’들에 대해서 거리가 멉니다. 나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들로부터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예술은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미의 예술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술은 인민들의 것입니다. 예술은 인민대중에 의해서 사랑받고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예술은 인민의 감정, 사고, 그리고 의지를 통일하고 고양시켜야 합니다. 예술은 인민들 속에서 예술적 재질을 발전시키고 행동을 촉발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 대중이 흑빵을 먹는 동안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인민에게 예술이, 예술에 인민이 보다 더 접근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교육과 문화를 위한 전환적 출발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우리가 성취한 거대한 문화적 진보에 대해 열성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만 명 그리고 내일 또 다른 만 명의 사람이 모스크바 극장에의 화려한 공연에 깊은 감명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백만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어떻게 그들의 이름을 쓰고 어떻게 계산을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합니다.
...
나는 우리 사회의 예술적 표방과 그것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들의 수입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시회보다 산간벽지에 두 세 개의 초급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대중의 문화적 수준의 상승은 소비에트 예술과 과학 및 기술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과학적 기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적 창조의 열정과 그것을 꽃피우기 위한 부단한 싸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험하는 모든 것은 허용되어야 합니다. 별로 중요하지는 않으나 우리의 에너지와 재산을 엄청나게 필요로 하는 미성숙된 일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획득 이래로 문화혁명에 필수불가결한 조건들(대중의 각성과, 문화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폐해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설한 20세기 초 레닌의 발언을 현재의 모든 예술분석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혁명의 선배로부터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교조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예를들어 표현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을 그 정치적 맥락을 도외시 한 채로 현재 시점의 모든 예술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리얼리즘에 대한 기계적인 적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언명의 핵심은 지금도 빛을 바래지 않고 있다. 혁명은 진실로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향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를 지양해내고 절대 다수의 근로인민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을 밝혀내고 그것의 달성을 위해 치열하게 전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경제 조건에 대한 부단한 진보의 노력과 예술에 있어서 치열한 실험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문화 역시 이데올로기적이며 실물적인 계급투쟁의 전장이다.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적ㆍ문화적 장치로 노동자계급을 장악하는 기술은 점점 혁신되고 있고 그 영향도 전면적이다. 문화운동은 부문의 영역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그리고 문화라는 한 영역 그 자체를 독립화한 ‘문화운동’만을 ‘닫힌 상상력’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으로 특권화하는 것은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3) 문화 분석에 있어서 사적 유물론을 손쉽게 폐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혁명과 예술에 관한 루쉰의 짧지만 탁월한 발언을 보자. “혁명은 피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피는 쉽게 지워지고 읽기가 어렵다. 여기에 문학(예술)의 필요성이 있다.” 또 칠레의 경우를 살펴보겠다.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권이 세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선거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빅토르 하라(Victor Jara)4)'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노동하는 기타라 부르던’ 그 시대에 가장 대중적인 가수였다. 칠레의 전통 정서와 당시 젊은 층의 외래 문화적 성향까지도 체화해낸 가수이다. 그의 대중적 설득력은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그를 알아본 군인들이 ‘위험인물’인 그를 살려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와중에서도 칠레 스타디움(Estadium Chile)5)이라는 곡의 작사를 하였다. 혁명과 예술은 일직선적이거나 위계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며 침투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더욱더 과학적인 예술관과 문화적 실천이 필요하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삐딱하게 보기
쿠바 혁명기 이후의 음악에 대해 서술하기 이전에 쿠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필자의 좁은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노동계급 동지들은 쿠바 혁명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을 지라도 쿠바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룸바, 차차차, 살사 등의 춤곡을 떠올리거나 최근 한국에서도 소폭의 붐을 형성하고 있는 아프로 쿠반 음악(Afro-Cuban Music)6)까지 떠올린다면 상당한 음악 매니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에게 쿠바 음악은 상당히 생소하리라 예상한다. 그래도 빔 벤더즈(Wim Wenders) 감독의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보았거나 알고 있는 이들이 제법 있을 테니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거기서부터 시작해보겠다.
쿠바의 노년의 거장―주요 인물들은 현재 대부분 사망했다―들의 관록이 담겨있는 매력적인 연주활동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는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또 영화의 주요 인물들의 한국공연이 성사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영미 음악 중심의 편향의 ‘문화제국주의’를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라고 찬사만을 던지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분명히 있다.
이 영화에 딴죽을 거는 것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국 마이애미에 주로 거주하는 쿠바 혁명이후 쿠바를 떠난 세력들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같은 영화와 현재 쿠바의 음악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나, 라틴팝을 세계화했다는 평을 듣는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같은 미국 국적의 쿠바출신 가수들은 노골적인 반(反) 카스트로, 반(反) 쿠바 선전의 선봉에 있다. 이들은 쿠바의 유화적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쿠바 입국공연을 거부하고 있다. 또 영미의 주류 대중음악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시점에 ‘월드 뮤직’7)이란 이름으로 쿠바 음악을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은근한 제국주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먼저 직설적인 표현은 등장하지 않으나 내용 곳곳에 담겨있고 또 영화 홍보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저의가 있다. ‘쿠바 혁명 이후 이들 음악인들은 제대로 된 음악활동 기회도 갖지 못하고 묻혀있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획자 라이 쿠더(Ry Cooder)8)나 서구인들 시각에 의한 잘못된 비난이다. 영화제목이며 주요 등장인물들이 회상하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쿠바 혁명전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과 상류층을 위한 사교클럽이었다. 당시엔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독재정권에 대다수의 인민들이 신음하던 시대였고 그러한 종류의 사교클럽은 성매매와도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엘리아드 오초아(Eliades Ochoa. 영화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기타리스트임)가 12살 때(쿠바혁명전인 1958년) 사창가에서 기타를 치던 시절을 회상하는 고백이 등장한다. 그것은 당시 가난하고 교육 받은 쿠바인민이 선택할 수 있는 자아실현의 길 중 하나이었을 것이다.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있는 사창의 숫자만 300에 달했다. 아바나는 미국의 ‘단골손님’이 자주 찾아드는 ‘휴양지’였다. 그 단골손님들에겐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Buena Bista Social club)이 있던 당시가 ‘좋은 시절’이었으리라.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소수의 특권계급을 위한 사교클럽을 폐쇄하는 것은 혁명정부로서 마땅히 수행해야할 임무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그로 인해 음악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카스트로에 대해 비판적일지언정 쿠바혁명의 대의에 공감함은 영화 곳곳에서 읽어 낼 수 있다. 또 주요등장 인물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엘리아드 오초아 같은 인물은 쿠바 혁명 이후의 음악기관인 Casa de la Trova9)과 오랜 기간 교류를 갖고 활동한 인물이기에 혁명이 곧 대중음악에 대한 억압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견해이다.
지나칠 수도 있으나 체 게바라에 대한 지나치게 과도한 애정과 카스트로에 대한 지나치게 부당한 비난은 죽은 모리슨(Jim Morrison), 커트 코베인(Kurt Cobain) 같은 록 스타를 살아서 활동하는 이들과 비할 수 없는 이들로 신격화하는 것과 비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 게바라의 이미지도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물론 선배 혁명가 체 게바라의 헌신적인 투쟁과 그를 따르는 남미인민들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혁명적 이상은 분명히 소중하지만 동시에 혁명은 냉엄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바로 코앞에 있는 쿠바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카리스마적인 리더 카스트로만을 지나치게 영웅화 한다거나, 쿠바의 현단계와 카스트로 정권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배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영화 곳곳에 제국주의적 시각이 등장하는데, 영화 비평이 주목적이 아니니 일부만 지적 하겠다. 거대한 빌딩이 마천루를 이룬 뉴욕 거리를 지나는 주인공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 거리에서 미국 대통령들의 인형을 보고 지나가던 주인공들은 그들에 대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여하튼 ‘지도자’라고 대화한다. 그렇다. 요새와 같은 뉴욕의 부는 미국의 노동계급과 제3세계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한 결과물이며, 그들이 대화 중 언급하던 ‘지도자’들은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쿠바를 지속적으로 탄압하던 인물이다. 그 인형 중엔 1961년 4월 17일 피그만 침공을 일으킨 케네디 같은 이도 섞여있었다. 또한 영화와 음반판매로 얻은 상당한 이윤은 쿠바인민이 아니라 서구의 독점자본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영화에서 드러나는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있기만 하다가는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문화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쿠바 혁명이 이들 예술가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질 기회를 박탈했다’는 잘못된 비난은 다시 말해서 쿠바 혁명 이후에 이러한 예술을 상업화하여 이윤을 남기려는 자본의 의도가 관철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오히려 쿠바 혁명은 쿠바의 대중음악적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쿠바 혁명과 누에바 뜨로바
바티스타 독재정권과 미국에 정면으로 대결해 승리해낸 쿠바인민들은 1959년 쿠바 혁명이후 단지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총체적인 사회변혁을 이끌어냈다. 혁명이후에 반혁명 세력은 척결되었다. 20세기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 과정은 폭력을 수반한 것이었다. 당시 혁명정부가 총살한 인원은 550명이었다. 이에 대해 혁명의 폭력성에 대해서만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것이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대로상에서 감옥에서 2만이 넘는 인원에 대한 학살을 비호하고 조정하던 미국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당시 총살된 인원은 바티스타의 직속 암살대원이었다. 물론 혁명의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그 과정의 폭력은 최소화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부르주아 독재정권과 반혁명세력이 항상 먼저 폭력투쟁을 시작하는 현실에 눈 감아서는 안 될 것이다. 21세기 혁명이 어디에서 시작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이 되도록 적은 폭력을 수반하길 필자도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사형제도의 궁극적 폐지에도 물론 동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결된 인민의 조직된 힘과 반혁명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분쇄가 필요할 것이다. 상비군과 경찰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존재하는데 ‘비폭력 투쟁’만을 내세우며 그것을 ‘평화주의’라 우기는 것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무장해제 하겠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라. 1980년 광주에서 쿠데타 계엄군에 대항해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한 것은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쿠바 혁명정부가 제일 먼저 착수한 사회 변혁은 주택 개혁으로 유상몰수 후 무주택자에게 주택을 분배한 것이었다. 의약품 가격을 비롯해 갖가지 공공요금 인하도 뒤따른 조치였다. 그 외 노동계급과 저소득층을 위한 갖가지 혁명적 정책이 집행되었다10) 쿠바 혁명 투쟁 과정 중에 그리고 혁명이 이후에도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이 주안점을 둔 것은 문맹퇴치였다. 1961년에 성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약 12만 명의 지식인 노동자들이, 백만을 웃도는 문맹자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자 쿠바 전국으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동년 12월에 전국 24%의 문맹률이 3%로 떨어지는 경이로운 성과를 얻었다.11) 뿐만 아니라 혁명정부와 쿠바인민은 인종차별을 척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네오 나치나 KKK같은 백인 극우 테러조직은 쿠바에 뿌리를 내릴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혁이 일어난 시기를 직접 경험한 젊은 예술인들의 활동에 혁명은 귀중한 자양분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서술할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음악12)을 창작했던 주요 작가들은 혁명이 한창 사회를 변혁하던 시기에 사춘기를 보낸 이들이다. 스페인어로 Nueva(누에바)는 ‘새롭다’라는 뜻의 형용사이고, Trova(뜨로바)는 ‘음유시인’이라는 뜻의 명사인 뜨로바도레(Trovadore)의 축약어이다. 따라서 누에바 뜨로바를 직역한다면 ‘신음유가요’정도가 될 것이다.13) 누에바 뜨로바는 아름답고 미묘한 가사를 지닌 전형적인 쿠바 스타일의 대중음악이다. 시적인 가사와 서정적인 선율로 쿠바인들에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쿠바의 뜨로바 전통에 대해 먼저 살펴봐야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뜨로바 전통은 어원에서 드러나듯 방랑자의 음유가요에서 유래했다. 뜨로바도레라 불리는 떠돌이 음유시인들은 20세기 초 쿠바 전역을 유랑하며 기타를 중심으로 자유분방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 음악적 내용은 시적인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주의적 정서와 낭만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자칫 지극히 개인적이며 현실도피적인 음악이 될 수도 있던 뜨로바 음악의 전통이 쿠바 인민의 투쟁역사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얻게된 것이다. 스페인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뜨로바 음악의 전통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신도 가라이의(Sindo Garay) ‘바야메사’(La Bayamesa. 뜻은 ‘바야모(Bayamo)14)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는 1868년 시작된 스페인에 대항한 ‘10년 독립전쟁’의 상징인 노래이다. 쿠바인은 음악이 없이 한 시도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다. 쿠바인들은 전쟁의 와중에도 전투곡인 이곡에 몸을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15). 러시아 혁명기에 ‘불가강의 뱃노래’에 맞추어 적군이 백군을 격퇴한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한 1930~40년대 마차도 독재정권 시절에 시인 호세 마르띠16)의 시에 호세이또 페르난데즈(Joseito Fernandez)가 곡을 붙인 ‘관따나메라(Guantanamera)’17)가 작곡되기도 하였다. 당시 라 보데구이따 델 메디오(La Boteguita del Medio)18)라는 까페는 비판적 음악인과 문인을 비롯한 예술인이 자주 모인 저항적 예술의 근거지였다. 이 시기에 뜨로바는 고독한 방랑자의 노래에서 좀 더 구체적인 현실적인 색채를 띤 예술로서 질적 전환을 한다. 그 시절 카스트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혁명적 시인이자 음악인인 까를로스 뿌에블라(Carlos Puebla)를 비롯한 뜨로바 가수들이 이 까페에서 잦은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음유가요라는 뜻을 지닌 누에바 뜨로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단 형식적 측면에서 뜨로바적 전통이 현대화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쿠바 혁명기를 거치며 60년대 중반에 시작된 혁명적 체험이 음악 곳곳에 체화된 새로운 음악 양식이며 음악 운동이다. 이것은 쿠바만의 독자적인 산물은 아니다. 누에바 뜨로바는 지역에 따라 누에바 깐씨온, 누에바 깐씨오네로, 칸또 누에보, 노바 깐싸웅(모두 새로운 노래라는 뜻) 이나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남미대륙의 저항적 노래 운동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누에바 뜨로바의 등장은 쿠바의 혁명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독자적인 것이다. 카스트로의 “혁명 속에 모든 것이 있고, 혁명 밖엔 아무 것도 없다”는 발언은 당시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어떤 논리보다도 주요한 것이었다.
쿠바 혁명의 문화적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 그것은 단지 쿠바 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유례없는 단결을 가져다주었으며, 혁명적 물결은 남미 전역을 휩쓸어 지식인ㆍ예술가 집단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어 새로운 문화적 공간의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쿠바 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파야드 하미스(Fayad Jamis)와 로베르또 페르난데스 레따마르(Roberto Fernandez Retamar)가 음유시를 짓기 시작했다. 하미스는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직접 불렀다. 1966년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 미국을 풍자해 붙인 이름의 월간지 [수염난 악어]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창간사에서 그들은 시와 음악의 만남을 추구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후 이 잡지는 쿠바 신음유시 운동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예술 지원 정책으로 아바나에 영화 예술 및 영화 산업 연구소(Instituto Cubano de Arte e Industrias Cinematogrficas: ICAIC)19)를 설립하고 여기에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또한 혁명정부는 혁명의 예술적 성과를 남미 전역에 보급하려는 창구로서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ericas)을 설립했다. 이 기관은 문학, 미술, 음악, 출판, 연극 등 제반 문화 활동을 지원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결속을 위한 정신적 토대 마련을 시도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보급에 있어서 아메리카의 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미국의 쿠바 봉쇄 정책에 맞서 쿠바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문화 기관을 연결하는 교량이었다. 이곳에 라틴 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청하여 창작 활동을 하도록 지원함으로써, 미국의 고립화 기도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 활동의 메카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쿠바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과 연대기구’(Organization of Solidarity of the People with Asia, Africa, Latin America: OSPAAAL)라는 단체가 있다. 제3세계의 민중들과 폭넓은 정치적, 문화적 연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그를 위해 필요한 정치 선전사업도 벌이고 있다. 쿠바 포스터의 형식상 특이한 점은, 1966년에서 72년 사이의 발전기를 거치는 동안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소비에트 스타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카리브적 정열을 반영하는 색채와 구도, 그리고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작가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모더니즘적 양식이나, 심지어는 사이키델릭20)한 양식까지 그대로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쿠바는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모더니즘을 배척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자와 제국주의자들이지 추상미술이 아니다”라는 카스트로의 말은 그런 상황을 입증해준다.21)
이렇듯 누에바 뜨로바는 쿠바 혁명이후의 사회ㆍ문화적 변혁의 산물이었으며, 쿠바 정부의 전폭적인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자라난 새로운 음악양식이며 음악운동이다. 그것은 단순한 관변음악과는 궤를 달리한다. 신음유시는 그 주요 내용이 혁명 조국과 사랑에 관한 것이며, 여기에 혁명과 혁명 영웅에 대한 찬사와 저항가요가 첨가되었다. 거기에 누에바 뜨로바가 태어난 극적인 상황에서의 뚜렷한 시적ㆍ음악적 서정성이 잘 결합되어 매우 다양한 음향과 정서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토양을 바탕으로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민중에게 전달할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음유시 형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혁명 후 새롭게 건설되는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합창했고, 민중은 그들을 자신들의 대변자로 믿었다. 누에바 뜨로바의 내용에는 심지어 그 내용에 있어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관변가요라니 당치않은 말씀!
누에바 뜨로바를 음악 내적으로 보면 시적 전통의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가사에 상당한 주안점을 둔다. 즉 그것은 노래로 부르는 시이다. 음악 형식적으로 손(Son)22)적인 전통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작곡자와 연주자가 일치하는 포크 음악의 전통이 오히려 강하다. 1960년대 중반에 쿠바 섬에 상륙한 남미의 음악에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조안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등 당대의 미국의 진보적 저항가수의 음악적 영향력도 많이 받았다. 요컨대 누에바 뜨로바는 쿠바의 혁명적 상황 하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세계 인민의 음악적 양분을 골고루 섭취해 자라난 것이다. 그러나 영미 중심의 상업주의적 음악의 침투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다. 자국의 민속 음악적 전통이 타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며 고도의 창조성을 발휘한 누에바 뜨로바 운동은 실로 남미 음악 운동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성 속에 담은 혁명의 노래
실비오 로드리게즈의 음악
여기서 대표적인 누에바 뜨로바 작가인 실비오 로드리게즈(Silvio Rodrigez)의 음악을 맛보기 해보자. 그 외에도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 등 주요한 작가가 많지만 그를 택한 것은 한국에선 그의 음악을 택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현실적인 이유 하나와 그가 누에바 뜨로바를 대표하는 인물로 처음 접하는 이에게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첫 작품 1975년작 “꽃의 나날들(원제 ‘Dias y flores’의 의역임)”과 1982년작 “유니콘(Unicornio)”이 라이선스23)로 발매되었고 그외 주요 작품들이 수입되기도 했으며 모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간간히 음악이 소개되었기에 비교적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비록 접근성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선택한 것이지만 그는 300명이 넘는 누에바 뜨로바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가이다. 그는 미학적 감성을 문화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노래를 통해 잊혀진 전통을 복구했다. 그의 작업은 쿠바 인민의 역사를 기록하며, 그들을 대변하며, 창작 활동을 통해 끊임없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92년부터 쿠바 의회에서 활동하는 현실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쿠바 음악적 유산 뿐만 아니라 비틀즈(The Beatles), 밥 딜런(Bob Dylan)같은 영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스트라빈스키나 모차르트와 같은 클래식 작곡가나 애드가 앨런 포우나 조지 고든 바이런 같은 작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24) 이러한 영향력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없이는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쿠바의 옛 음악의 유산을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변형시킨 것. 격조 높은 가사와 지적인 기교로서 놀랍도록 창의적인 음악을 창조해낸 그의 음악을 지금이라도 접해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실비오 로드리게스는 남미 각국에서 수만 명을 모아놓고 경기장에서 공연을 갖는 인물이었다.25) 1990년 독재자 피노체트의 이후의 민선정부가 들어선 칠레에서 8만 관중 앞에서 빅토르 하라의 추모공연을 펼친 이이다.26)
가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만 하덕규27)의 음악 같다고 할 이도 있을 것이고 ‘열린 음악회 풍의 음악같다’는 엉뚱한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스페인어를 배워서 가사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노래의 배경을 모르면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기 쉬울 것이다. 1982년작 유니콘 중에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Por Quien Merece Amor)를 들어보자.
내 사랑은 가장 많이 사랑하지만
그 오래된 고통 속에서 가장 잊혀져 왔습니다
내 사랑은 죽음에게도 그 가슴을 열어두며
좋은 시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용감한 이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위한 타오르는 태양입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와 후반부에 잔잔히 깔리는 현악반주와 다채로운 악기군을 중심으로 한 반주와 서정적인 가사와 감미로운 목소리만으로 평범한 사랑타령 노래로 이곡을 판단하면 그것은 예술에 대한 실례이다. 이곡은 1981년 12월 경 미국이 쿠바가 엘살바도르에 무기를 보내고 있다는 구실로 의한 쿠바 해상 봉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미국 측의 협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곡은 엘살바도르 인민에 대한 연대와 사랑의 표현이라고 실비오 로드리게즈는 언급한다.
니콰라과를 위한 긴급한 노래(Cancion Urgente Para Nicaragua)의 가사를 보면 직접적으로 니콰라과 혁명과 산디니스타에 대한 찬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제목과 달리 너무나도 경쾌하고 발랄한 곡이다. 이런 내용이 반드시 정형화된 행진곡 풍의 곡에 담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니카라과는 그들만의 영광의 길을 걸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를 만든 건
신성한 피흘림이었기 때문에
타이틀 곡 유니콘은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는 곡이다. 이 곡은 1971년 에르베르또 빠디야(Herbero Padilla)가 자신의 시집에서 쿠바 혁명정부에 대한 비판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강제추방되는 사건 발생이후 만든 곡이다. 이곡에서 유니콘은 바로 빠디야를 가리킨다. 당시 이 사건은 일련의 해외 지식인들이 쿠바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28) 그러나 빠디야의 시가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 쿠바 정부의 판단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한 자료를 입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함부로 판단을 내리기엔 난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쏘련에서 있었던 즈다노프 비판29)에 대해서도 일면적인 매도를 내리는 것에도 상당히 조심스럽다. 이를테면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는 러시아 혁명 이후 서정시를 금지한 조처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의 배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다가, 그 영화는 노골적인 반혁명 영화이지 않는가. 빠다야가 이 사건 후에 해외에서 반 쿠바 선전을 하였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여하튼 이곡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곡이며, 직접적으로 쿠바정부를 비난하는 어조를 담고 있지 않음을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이다.
내 푸른 유니콘이 어제 사라졌습니다
풀을 뜯게 내버려두었더니 사라져버렸어요
실비오 로드리게즈의 첫 작품 “꽃의 나날들”도 역시 추천작이다.
1973년 칠레 투쟁의 패배를 노래한 ‘칠레의 산띠아고’(Santiago de Chile)에서는 깊은 슬픔이 잔잔한 풀룻 연주와 격렬한 기타 반주에 전해온다.
산띠아고는 죽지 않았어
시간도, 사악한 군인들도
내게서 산띠아고를 빼앗진 못했네
‘꿈속의 바다뱀’(Sueno Con Serpientes)은 상당히 재미있는 곡이다. 브레히트의 시를 스페인어로 번역해서 낭송하는 도입부가 지나고 음악이 시작되면 다소 난해한 동화와 같은 가사가 전개된다. 혁명이 끊임없는 투쟁이어야 함을 비유한 것이라 짐작한다.
하루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일년을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사람들이다
여러 해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평생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꼭 필요한 존재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타이틀 곡 ‘꽃의 나날들'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맞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와 폭탄 전쟁을 원초적인 본능으로 증오해야 하는 것은 시인의 임무라 선언하며 그와 같은 내용을 시적으로 전개해 내고 있다. 가녀리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와 곡의 전개에 유의해서 들어보자.
증오는 나의 임무
시간의 때가 묻은 채
지쳐 돌아올 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해 돌아오는 건 아니네
그때 난 숲이나 태양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거고
동지여, 그때 당신은
내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맞이할
새로운 영혼이 필요할 것이네
실비오 로드리게즈의 인터뷰에서 그는 리얼리즘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미적 관점에서 인민의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부를 인용한다. 이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쿠바의 현실과 아직도 자본주의의 폐악에 허덕이며 치열하게 투쟁해야 하는 대다수 국가의 현실은 분명히 다르기에,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되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인터뷰는 누에바 뜨로바의 성과인 동시에 한계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노래들이 혁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이 시점에, 우리 노래들은 베트남 전, 인종차별, 반 제국주의 같은 잘 알려진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혁명 노래 가수라는 그런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좁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한 것들, 의도한 것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것조차 좀 더 넓고 깊은 의미에서 반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뜨로바 음악의 전통을 더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계승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혁명 가수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나쁘게 들린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뜨로바 음악, 시와 아름다움에의 자유에 우리가 속해 있다고 느끼며 우리에게는 이런 열망은 분류 될 수 없고, 한계가 없으며 상황에 맞는 슬로건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30)
쿠바의 현상황에 대한 비판적 점검31)
1990년대 이후 쿠바는 “특별한 시기(the special period)"라 불리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구쏘련 노동계급의 ‘쓰라린 패배’ 이후 쿠바혁명의 든든한 우군을 잃게 되었다. 더군다나 소위 ‘냉전’을 근거로 했던 1962년 쿠바 봉쇄령 이후 40년이 넘게 지속된 미국의 경제제재는 더욱 더 강력해졌다. 궁여지책으로 카스트로가 선택한 대안은 관광산업 강화를 중심으로 한 ‘수정’의 길이었다. 현재 쿠바의 관광산업은 전통적인 사탕수수 재배를 기반으로 한 설탕산업과 비등한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니콰라과나 엘살바도르 같은 나라와 비교할 때 노동자들의 경제적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라는 것은 이러한 ‘수정’의 ‘공(功)’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과(過)’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광업을 위한 호텔은 캐나다와 유럽의 자본가의 손에 넘어 갔고 그 대가로 여러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쿠바의 페소화보다 미국의 달러화가 더욱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32) 뿐만 아니라 근절되어가던 인종차별이 다시 고개를 들 조짐을 보이고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사라져가던 성매매가 관광업의 활성화와 더불어 부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관광의 상품화는 쿠바의 근로 인민 대중을 배제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바라데로(Varadero) 관광특구의 어떤 호텔은 하루 투숙비가 400달러에 달한다. 많은 쿠바인들은 호텔에 투숙하기 위해 여러번 제지당하고 질문 받아야 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도 많다.33) 쿠바의 관광산업을 지배하는 캐나다와 유럽의 자본가들이 쿠바를 위해 한 일이라곤 호텔을 건설한 것 밖에 없다. 관광산업의 막대한 이윤은 미국의 자본가도 군침을 삼킬만한 것이다.
경제적 변화는 당연히도 음악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쿠바 누에바 뜨로바의 양태도 변화하고 있는데 그 방향은 우려스러운 쪽에 가깝다. 1990년대부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까를로스 바렐라(Carlos Varela)같은 신진 작곡자들의 작품은 실비오 로드리게즈와 같은 선배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혁명의 영향력이 작품 곳곳에 내면화된 곡들 보다는 개인적인 좌절감과 고통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쿠바의 현재 젊은이들은 1959년 혁명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극심한 경제 제재로 인한 사회ㆍ경제적 상황에서 극심한 좌절감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자칫 1959년 혁명적 열정과 사회구조의 전반적 해체와 재건설은 쿠바 거리의 벽에 적힌 구호처럼 낡은 것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쿠바는 인민들에게 균등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문맹률도 또한 남미 여러 국가에 비할 수 없이 낮은 등 혁명의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있긴 하다. 현재 쿠바 정권의 성격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국주의에 대항한 저항적 민족주의 정권에서 그치는 것인지, 현재 쿠바의 성격이 아직도 사회주의 사회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주의적 색채가 점점 희미해지고 1959년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전쟁을 앞세운 자본주의의 마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쿠바는 세계 제국주의의 거두인 미국으로부터 불과 150km 떨어져있는 작은 섬이라는 것, 미국의 40년 이상의 경제제재뿐만 아니라 ‘대테러전’34)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은 섬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기지였던 쏘련의 패배이후 더욱 고립무원해진 쿠바의 대안이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민족주의적 해결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현실이다. 그러기에 쿠바 노동계급은 더욱더 분발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쿠바의 투쟁은 쿠바 인민들만의 몫은 아니다. 전세계 각국의 노동계급이 자국의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투쟁이 국가적/민족적 경계를 넘어 국제연대로 확장되어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파열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헌신적 투쟁과 뛰어난 문화유산을 창조적으로 가꾸어온 쿠바 동지들의 분투를 적극지지하며 이에 국제주의자로서 연대하자.
우문현답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기획자 라이 쿠더가 주요 등장인물인 기타 치며 노래를 하는 노장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에게 쿠바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대답한다. “뭐하러? 여기 평온이 있는데. 내게 필요한 건 다 있다고. 내가 왜 다른 곳에 가야 하지?”35) <노사과연>
특집 : 혁명―20세기, 그리고 21세기
쿠바 혁명과 예술 운동
― 누에바 뜨로바(Nueva Trova)를 중심으로
최상철 | 운영위원
1) “창간좌담: 현단계 문화현실과 과학적 문화이론” 중 고 김진균 선생의 발언, [문화과학 창간호]
2) 편집부, [레닌의 문학론] 여명출판사에서 재인용
3) “특정의 문화(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는 특정사회의 정치 경제의 반영이자, 나아가서 특정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경제가 기초이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다. 이것이 문화와 정치, 경제와의 관계 및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관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신민주주의론” 구라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문화활동 세미나] [도서출판 공동체]에서 재인용
4)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 자체로부터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소통능력 때문에 예술가는 게릴라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빅토르 하라. 심영보, [월드 뮤직 - 세계로 열린 창]에서 재인용
5) 당시 쿠데타군은 학생과 교수를 중심으로 무차별적인 인민들을 칠레 스타디움에 모아놓고 고문을 자행하며 학살하였다. 우석균,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6)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은 노예들로부터의 특유의 리듬과 카리브 해역의 쿠바 특유의 음악이 결합된 음악으로 재즈를 비롯하여 여러 장르의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7) 흔히 영미 등 주류권 음악에 대항한 개념으로 월드 뮤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용어 자체도 온전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용어에 대해 쿠바의 ‘라디오 쁘로그레소’(Radio Progreso)와 텔레비젼의 연출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기예르모 빌라르(Guillermo Vilar)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만든 것으로, 세계 각국의 음악을 쉽게 분류해서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인 용어이다. (기예르모 발라르의 인터뷰 출처는 인터넷 다음(http://daum.net)의 블로그 ‘안개마을에 내리는 일상들’이다.)
7) 흔히 영미 등 주류권 음악에 대항한 개념으로 월드 뮤직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 용어 자체도 온전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용어에 대해 쿠바의 ‘라디오 쁘로그레소’(Radio Progreso)와 텔레비젼의 연출가이자 음악 비평가인 기예르모 빌라르(Guillermo Vilar)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만든 것으로, 세계 각국의 음악을 쉽게 분류해서 판매하기 위한 상업적인 용어이다. (기예르모 발라르의 인터뷰 출처는 인터넷 다음(http://daum.net)의 블로그 ‘안개마을에 내리는 일상들’이다.)다른 예를 들자면 남성 포크 2인조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 출신의 폴 사이몬(Paul Simon)의 1986년 음반 “Graceland”를 보자. 이것은 이른바 ‘월드 뮤직’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에 소개시킨 작품이다. 남아프리카 음악을 중심으로 대중적 기호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인데, 그 판매로 얻은 이윤과 명성은 남아프리카 인민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 워너와 폴 사이몬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쿠바와 브라질과 같이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지닌 나라의 음악을 월드 뮤직이라고 뭉뚱그려 소개하는 것은 음악을 이해하는데 심각한 제약을 주는 것이다.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소위 ‘제 3세계 음악’이라는 저속한 편견이 담긴 용어보다는 진보적이나 그 한계를 명확히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남성 포크 2인조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 출신의 폴 사이몬(Paul Simon)의 1986년 음반 “Graceland”를 보자. 이것은 이른바 ‘월드 뮤직’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에 소개시킨 작품이다. 남아프리카 음악을 중심으로 대중적 기호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인데, 그 판매로 얻은 이윤과 명성은 남아프리카 인민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 워너와 폴 사이몬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쿠바와 브라질과 같이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지닌 나라의 음악을 월드 뮤직이라고 뭉뚱그려 소개하는 것은 음악을 이해하는데 심각한 제약을 주는 것이다.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는 소위 ‘제 3세계 음악’이라는 저속한 편견이 담긴 용어보다는 진보적이나 그 한계를 명확히 보아야 할 것이다.
8) 미국인 기타리스트로 빔 벤더즈 감독에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제작을 제의하고 전체적인 기획을 담당한 인물이며 영화에도 주요하게 등장한다. 빔 벤더즈 감독의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음악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9) 직역하면 ‘Trova의 집’이라는 뜻이고 쿠바 혁명 이후에 설립되었다. 쿠바 산티아고(Santiago)등 주요 지역 곳곳에 위치한다. 여기선 무료 공연과 음악인들의 자유로운 교류가 행해진다. Simon Brougton and Mark Ellington, [World music - The rough guide volume 2.] 참고로 국내의 많은 ‘월드 뮤직’ 관련 서적이 바로 이 책 [World music - The rough guide volume 2.]을 참고로 하고 있다. 심영보의 [월드 뮤직 - 세계로 열린 창] 같은 책은 거의 이 책의 번역에 주석을 담고 있는 거친(rough) 한국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Trova 음악 및 Nueva Trova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히 서술하겠다.
10) 우리의 노동자들은 무위도식하지 않습니다. 생산주체인 그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현재의 그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혁명을 쟁취했고 그 혁명을 위해 붉은 피를 뿌리며 처절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공공교육기관을 설치하고 거대한 규모로 훈련시키는 이유입니다. 물론 식량문제가 해결된다면, 문화적인 기초도 다져나갈 수 있습니다. 새롭고 위대한 사회주의 예술은 그것의 내용에 걸맞게 행태도 새롭게 창조되면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매우 고귀한 일들이 바로 우리의 지식인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클라라 체트킨에게 한 레닌의 발언 중 편집부,[레닌의 문학론]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11) 낡은 국가기구를 파괴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권력쟁취를 위한 투쟁 기간 동안 문맹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괴를 위한 파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맹은 복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복구는 맑스에 따르면 노동자의 과업임에 틀림없습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런 과업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인민에 대한 폭넓은 교육과 훈련은 관료제를 근절하고 극복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제공합니다. 상동.
12) 음악적 근원과 내용에 관련해서는 주되게 Mark Ellington, [World music - The rough guide volume 2.]를 참고했다.
13) 마크 크레머(Mark Cremer),[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쿠바] 원제는 [Culture Shock! Cuba]
14) 온갖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미군의 수용소가 있는 관타나모(Guantanamo)에서 위도 상 일직선상 서쪽인 쿠바 남단에 있다.
15) 리우스,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에 따르면 이 곡은 모차르트를 표절한 곡이라 하는데 모 음악 동호회에 자문을 구했지만 답변을 얻진 못했다.
16) Jose Marti. 쿠바의 독립투사이자 영웅적 시인이며 1868년 10년 독립전쟁시기부터 활약한다. 스페인에 대항한 투쟁 중에 1895년 5월 19일 적의 흉탄에 맞아 사망한다.
17) 관따나모의 여인이라는 뜻. 한국에도 재즈곡으로 널리 알려진 곡인데 배경을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이곡은 1963년 미국 저항포크의 선구자 피트 시거(Pete Seeger)가 쿠바 혁명에 대한 연대감의 표시로 불러서 히트하기도 하였다.
18) 지금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남아 있으며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던 곳이다.
19) http://www.spain.or.kr/korea/index_15.html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운동’
20) Psychedelia. 60년대 말 서구 록(Rock)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등장한 하위문화로 반전운동, 약물을 통한 환각체험, 히피즘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에 반문화적 성격을 지닌 원초적 저항성을 담은 것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이것마저 상업화하는데 성공한다.
21) 이영준, “정치 포스터와 이미지 조작”, [문화과학 창간호]에서 오류 수정 후에 인용하였다. OSPAAAL의 홈페이지도 있으니 한번 들어가봐도 좋을 것이다. http://www.ospaaal.com/
22) 쿠바의 주요한 음악적 전통이다. 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아프리카적인 리듬의 영향력을 간직하던 음악이 집단 음악 축제를 거치면서 구체화되었다. 쿠바의 거의 모든 음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3) M2U라는 음악 재발매 회사에서 재발매 되었다. 음반 커버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고 무엇보다 가사에 대한 충실한 번역을 담고 있기에 추천한다. 이 이후에 인용하는 번역 가사는 여기서 발매된 음반의 해설지에 담긴 정승희님의 것이다. 음반을 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자료를 공유하는 음악 동호회에 파일을 요청하면 구해서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선 소량 발매된 것이라 현재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24) Howard J. Blumenthal, [The world music CD listener's guide]
25) http://blog.empas.com/victorjara/12392862 신현준의 글에서 인용.
26) 그 당시엔 피노체트의 독재는 끝났으나 군부를 비롯해 칠레에서 피노체트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우석균,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27) ‘시인과 촌장’이란 팀에서 활동하던 대중음악인이었으나 현재는 종교에 귀의한 목사이다.
28) [백년의 고독]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즈(Gabriel Garca Marquez)는 그 이후에도 끝까지 쿠바 혁명을 옹호하였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쿠바의 조처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은 위험하리라 생각한다.
29) 1948년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가 행한 ‘형식주의’적 예술에 대한 비판. 당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마야코프스키 같은 예술인들이 이 비판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개인적으로 더 공부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30) 번역은 http://cafe.daum.net/silvio의 성희님의 것.
31) 미국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 PLP)의 홈페이지 http://plp.org의 쿠바 관련한 논쟁이 담긴 일련의 글들 “Is Cuba Communist?", "Red Tourist in Cuba"와 같은 글들을 참고하였다.
32) 현재 쿠바는 미국의 달러화가 지배하는 경제와 페소화가 지배하는 경제의 이중적 경제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여행가이드 책이지만 마크 크레머(Mark Cremer)의 [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쿠바]를 보면 현재 쿠바경제의 모습이나 사회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간접적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지들께선 비판적 관점에서 독해하리라 믿는다.
33) http://plp.org "Red Tourist in Cuba"
34) 전세계의 도처에서 그러하지만 진정한 테러리스트인 미제국주의자들은 쿠바에서도 테러조직을 배후조정하고 있다. 1973년 쿠바 항공기 폭파로 73명이 사망하는 사건의 범인은 전CIA 직원인 쿠바 망명자이다. 또 1997년 쿠바의 호텔과 레스토랑의 연쇄 폭탄테러는 쿠바의 관광산업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극악무도한 테러에 대해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테러리즘이라는 영역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궤변도 따라다닌다. 마크 크레머(Mark Cremer), [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쿠바]
35) Mark Ellington, [World music - The rough guide volum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