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 기간에 윤치고 동지를 찾아 뵈었다. 이미 ��정세와 노동�� 2006년 3월호에 윤치고 동지의 이야기 “양심수 인권에서 재소자 인권으로"에서 소개된 바 있고, 또 양심수 후원회의 소식지 ��후원회소식�� 188호 p. 15에 “출소양심수 윤치고님의 편지"라는 한 쪽 분량의 편지가 실려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휴 기간 중에 약속을 잡아서 직접 살고 계신 곳으로 방문하였다. 손님이 온다고 하니 역까지 마중나오셨다. 전철역에서 제법 떨어진 곳 단칸 월세방에 외풍이 방안까지 들어오고 있었고, 세간 살림은 전에 살던 사람이 쓰던 것을 몇만원 주고 얻어서 쓰고 계셨다. 그런 중에 고기 몇 점에 김치찌개까지 대접을 받았으니 송구스러운 마음 뿐이었다. 여유가 되면 오히려 설에 내가 초대를 해야 마땅한데 공연히 찾아가서 폐만 끼친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 실리는 글로 그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 서술은 당시 말씀 나누었던 내용을 문답식으로 구성했다. 내용은 되도록 살리되 평어체 문장으로 다듬고 재구성했다. 혹시라도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다면 전적으로 옮긴이의 책임임을 밝힌다.
윤치고 동지께서는 여느 양심수들과는 다른 점이 많다. 다른 양심수들은 감옥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정치적인 사유로 간다. 일반 재소자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하시는데 계기가 있다면?
부산 구치소 독방에 감호를 받아서 있었다. 힘들어서 목매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지금 경기지사로 있는 김문수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감되어서 왔다. 그때는 교도소 안에서 인권은 없었다. 처우에 대해서 난동부리고 폭동부리고 이러는 것밖에 없었다. 감옥 안에서 난 어디가도 난동부리고 따지고 하니까 지들도 골치 아파서 잘 안 건드리더라. 나는 감옥 안에서 ‘꼴통’으로 찍혀있었다. 김문수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때 같이 들어온 학생들에겐 내가 빵도 주고 쪽지도 전해주고 그랬다.
그때가 언제인가?
1986년 인천 5․3 투쟁 이후다. 그 사람들을 보니까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해서 감옥에 들어왔나 싶더라. 그 전에도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고아로 형제원에 있던 시절부터 의식이 박히더라. 형제원 원장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도 구속도 안 되고 나오고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 근데 김문수와 학생들이 들어오고 해서 저것들은 뭐하는 것들인가 싶어서. 아니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이오 이러니까 뭐 운동권 그러더라. 난 지들 밥그릇 찾으려고 운동권하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김문수가 ��철학연습��이라는 책자를 하나 주더라. 그거 보니까 이게 뭐야, 내가 찾고자 하는 세상인 거라. 확 깨는 거야. 와 무슨 이런 책이 있나 싶었다. 얼마나 놀랬겠는가. 갑작스레 그렇게 변화가 왔으니.
그 책이 대략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는가? 그때가 처음으로 의식화되는 계기였는가?
기억이야 안 나지. 그냥 취지가 사회주의 체제였고 평등 뭐 맑스 말들 줄여서 나온 것들이니까. 아니다. 그 전에도 내가 좀 알긴 알았다. 그때 감옥에서는 인권이 없었다. 인권 단체도 없고 감옥에서는 폭동을 부리고 난동을 부리고 해소하는 것 밖에 없었다. 말로는 안 되었다. 행동 대 행동으로써 해야 했다. 1969년도에서 1년 째 수감 중이던 1970년도 김천 교도소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1969년도니까 열 여덟인가 열 아홉인가 그랬다. 소년원에서 나온 나는 먹을 것이 없었기에 서리꾼들을 따라 다니면서 어울려야 했다. 국수 한 그릇 얻어먹고 잡혀 들어갔다. 정작 도둑질 한 친구들은 풀려났다. 내가 고아라 만만해서 덮어 씌어버렸다. 저거들은 부모가 있으니까. 면회 온다고 하더만 면회도 안 오더라. 감옥 안에서는 이 새끼는 면회도 안 오네 하며 차별의 연속이었다. 단식 같은 거야 뭐 묶이면 단식이니까. 밥을 못 먹는데 손 발이 묶여 개처럼 개밥 먹이는데...
마산서도 감옥에서 부식 등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주임을 인질로 잡아서 폭동을 부려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또 1년 6개월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 추가를 받아 감옥에 있었다. 그 폭동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대략 1973~4년도였나 싶다. 교도관들 17명이 다쳤다. 물론 재소자는 엄청나게 더 다쳤다. 칼 들고 몽둥이 들고 최루탄 터지고 난리였다.
그 무렵 안에서 같이 행동했던 재소자들은 어떤 사유로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었는가?
폭력이나 절도 등 이른 바 사회에서 말하는 ‘잡범’들이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큰 범죄자는 감옥에 없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항소를 하였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는 고등법원이 없고 대구에 있었다. 공범들 넷과 대구로 이송을 갔다. 이송가자마자 유리창을 깼다. 왜 그랬냐면 가자마자 항문까지 확인하는 신체검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독방으로 보내졌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대구에 미전향수들이 있었어.
미전향수보단 비전향수로 바꾸는 것이 맞겠다.
그치. 그때 서승씨와 비전향 장기수들을 본 거야. 방에서는 동무 막 이랬는데 그때만 해도 무슨 말들을 하는 지 몰랐다. 나는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되었으니까. 처음 들어 보는 말들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 접하기는 접해도 말을 하지는 못했다. 포승에 묶어 독방에 갇혀있던 처지였다. 옆방에서 동무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묶여있는 내게 먹을 것도 갖다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보안법이라고 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의식이, 책을 본 것도 아니고 빨갱이라고 하니 내 수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벌벌 떨고 있던 겨울이었다. 독일 광부 간첩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인데 대구에서, 그 사람 이름이 김 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명한 사람이라 아마 당시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연세가 많을 것이다. 그 사람과 말을 많이 나누었다. 같이 운동도 나가고. 담요도 갖다주고, 세면도구도 갖다 주고 했다. 원래는 접근조차 안 된다. 교도소에서 이전에 난동부린 전력이 다 알려진 꼴통이니까 가능했다. ‘미전향방’이 따로 있었고 일반수들 하고 분리되어 있었다. 그 이후 아까 그 김문수씨와 만나는 것까지 그렇게 연결된다.
변절해버린 김문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기분이 안 좋지. 그때만 해도 대단한 투쟁자야. 지금은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싶다. 깜짝 놀랬다니까. 삐쩍 마른 게 쪼만해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 질질 끌면서 뭐 저런 악종이 있나 싶었다. 지금은 부자되고 이래서 투쟁자에서 돼지로 변했다. 인간돼지로 변했고 평가할 것도 없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변하나 저런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통일이 늦어지나 싶었다. 사회주의 물을 먹은 사람이 변절되면 더 겁나잖아. 동지를 배신하고.
특히 청송감호소에 계실 때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1988년도에 청송감호소로 보호 감호를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한겨레��, ��말��도 반입이 안 되었는데 반입을 요구하였다. 그렇다. 당시만 해도 ��한겨레신문��이 상당히 선동적이었다. 그것 때문에 많이 두드려 맞고 징벌도 받고 모질게 고문도 당했다. ��한겨레��, ��말��지를 재소자들에게 많이 보라고 권유도 했다. 그래서 재소자들이 ��한겨레신문��을 많이 봤다. 청송에 있을 때 ��정세와 노동�� 2006년 3월호 “양심수 인권에서 재소자 인권으로"에 내 이야기에서 언급한 박영두, 김재열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김문수 말고 감옥에서 만났던 다른 인상적인 인물이 더 있는가?
1980년대 대구에 있을 때는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구속된 문부식을 보았다. 건국대, 서울대 출신들 이름은 뭐라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기는 많이 보았는데 일반 재소자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폭 김태촌 등 이름 대면 알만한 사람하고 마주한 적도 많이 있다.
김문수에게 건네받은 ��철학연습�� 말고 다른 보신 다른 책을 더 소개해 달라.
뭐냐 한라산인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책을 봤고 그거는 청송 감호소에 있을 때 운동권 학생이 보내주었는데 불허되었다. 재소자들 중에 영치계 하는 얘들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보게 되었다. 또 대구에 있을 때 운동권 학생들이 책을 빌려주긴 하더라. 같이 대화는 안하더라도. 청송에 갔어도 무의탁 고아들에게 나오는 만원의 영치금으로 책을 봤다. 배고파서 빵을 사먹고 싶었지만 책을 봤다. 비싼 것은 못 사고 빌려보고 했다. 배고파도 책을 볼 수밖에 없는 게 그 많은 교도관들과 싸우려면 정신무장이 필요했다. 내편은 하나도 없는 거야. 왜나면 재소자들은 당장 눈 앞에 이득이 있어야 움직이잖아. 교도관들도 내가 이야기 하면 벌써 법대 출신들이 들러 앉는 거야. 오직 정신무장 하려면 사회주의 책을 봐야 했다. 고문도 하지 얼마나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했겠는가. 곁에 도와주는 동지들도 없고 혼자서 그 많은 교도관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때만 해도 살벌했으니까. 처음에는 책으로 접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무장이 되었다. 청송에 있을 때 답답했던 것이 많이 있다. 단체들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도 안 보내고 내의 하나 양말 하나 보내주는 곳이 없었다.
맑스-레닌 선집 뭐 이런 거였나 하고 러시아 혁명 이런 내용도 보고. 초등학교도 안 나온 놈이 그런 것을 읽는다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대학생들도 이해 못하는데. 얼마나 어린 시절부터 쌓인 것들이 많았으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시집도 보고. 푸시킨 그거 하고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하고 톨스토이 ��부활�� 어려운 책을 많이 봤지. 돌배게에서 나온 뭐였더라 사상관련 책이었는데 그거도 보고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나온 책이 그거 무슨 책이 있어 생각이 안 나네. 감옥에 있을 때는 그랬는데 요즘에는 살아가는 게 힘들고 찌들이다 보니 책을 잘 읽지 못한다. ��정세와 노동�� 정도는 차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가방에 넣고 본다.
��정세와 노동��을 보시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그래도 한국에서 나오는 것 중 최고 진보적인 책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노동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내용과 읽어서 와닿을 수 있는 글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윤치고 동지가 청송 감호소에서 나오고 인권유린 사건과 보호감호제의 문제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7년도 감옥에서 출소해서 ��한겨레��로 찾아갔다. 나는 청송에서 ��한겨레�� 신문을 반입하려고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일단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퇴자를 놓더라. 문전박대를 당하고 갱생보호소까지는 돈이 없어 걸어서 갔다. 신월동 갱생보호소에서 노가다를 하다가 힘이 없어서 그건 더 이상은 못하겠더라고.
당시 텔레비전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 뭐야 “아침 세상" 등을 촬영했다. 법무장관 했던 박상천 씨도 나오고 나는 청송감호소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준법 서약서 문제로 박노해는 경주 교도소에 구속되어 있어 못 나오고 했는데, 배우자가 나왔다. 나는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이 총칼로 사람 죽인 놈들은 감옥에 안 보내고 배가 고파서 라면 훔친 사람들은 청송에 가고 그런 말도 했다. 그때 출연료로 몇 푼 나오는 게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교도관 독직폭행을 고발했는데 그것이 무고죄로 걸려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청송감호소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닌데 이게 파묻히는 바람에 너무 안타깝다. 이걸 내가 최초로 폭로했고 그걸 폭로했다고 구속된 건 나 혼자인데. 8년간을 법정에서 싸우다가 해결을 못 보았다. 그런 중에 춘천교도소 재소자 인권유린사건을 고소하였는데 오히려 무고죄로 감옥에 또 들어갔다.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무고죄는 성격이 다르다. 의성지청에서 대검에서 누구 위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봤는데, 아니 말 잘하다가 전화를 받더니 검사가 긴급구속을 시켜버리더라. 그래서 의성에서 그 골짜기에 가서 구속되어 버렸고 또 징역 1년을 살고 나왔다.
변절해 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아직도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비결같은 것이 있는가?
첫째는 정신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여러 자칭 사회주의자들을 만났는데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가짜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대학 나와서 책 몇 권 읽어보고 해서 다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변절도 빨리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책 그거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막걸리하고 소주 먹을 때만 사회주의자고 양주 먹고 잘나가면 팽개쳐버리는 것이 무슨 사회주의자인가 변절자지. 나는 어렵게 살아도 도둑질 안 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변절해버리면 말이 안되지.
이명박이가 건국 60년이라 말했는데 나는 꼭 이렇게 쓰고 싶어. 이 나라가 건국 60년이 아니라 범죄자 60년 전부다. 민족반역자가 국가를 설립한 역사다. 범죄자라고 해서 남의 집 담을 튀먹는 게 아니고 이명박이가 월급을 받아서 그 재산을 모았겠어. 탈세, 투기 이거 다 범죄지. 이 나라에서 재산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다 도둑놈이야. 월급 받아서 그렇게 잘 살 수가 없지. 전부 범죄꾼들이다. 이승만이도 국제 사기꾼이고. 사기꾼, 범죄자, 민족반역자들이 건국을 했다. 그런 나라에서 뭐가 되겠는가.
운동권은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인권 신부로 알려진 함세웅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하니 처음에는 돈도 보내주고 여러 도움도 주더라. 그런데 언젠가는 나에게 세례를 받으라 했다. 거절을 하니 그 다음부터는 태도가 돌변하였다. 함세웅은 부천 성가 병원 노동자들이 싸울 때 노동자들의 중재를 부탁하는 요청에 천막을 거두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던 사람이다. 또 모 양심수는 내가 감옥에서 교도관에서 항의를 하는데 교도관에게 왜 그러냐고 되려 나에게 뭐라고 하더라. 사이비고 사기꾼이다. 그에 반해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은 사상적으로 잘 무장이 되어있다.
이번 국가폭력에 의한 용산학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 폭력에 대한 생각은 너무 시민단체들이 안이하게 대처하고 이러니까 경찰들이 그러는 거다. 우리도 조직하고 한다면 저것들도 겁이 나서 그러지는 못했을 거고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을 것이다. 법은 힘있는 사람의 편이다. 시민단체라는 것들이 국가에서 돈을 받고 있으니 힘을 못 쓰는 거야. 국가에서 주는 돈 끊어질 것을 겁내는 게 무슨 시민단체인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다. 정치인들이 껌뻑하면 ‘국민들을 위해서’ 그러는데 각종 이권을 떠나서 1년에 받는 연봉만 얼마인가. 이건 도둑놈들이지. 지들이 ‘국민을 위한다’면 월급을 안 받고 봉사를 해야지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용산참사 현장에 한번 들렀다. 없는 돈이지만 모금함에 만원짜리 한 장 집어 넣었다. 사회주의자는 의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때 모임 주체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았다. 어느 쪽은 명동으로 가야한다. 어느 쪽은 여기 있어야 한다. 거기에 대놓고 내가 그랬다. 이게 뭐하는 거냐고. 보수는 똘똘 뭉쳐 단결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는 거냐고.
지금까지 말씀을 계속 듣다보니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진다.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인터넷에 많이 올려 달라. 학생들도 많이 보고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 올려 달라. 물질적이 것은 안 바란다. 통일이라든가 진보에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 국가보안법도 사라져야 한다. 감옥에서 기독교도 믿어보고 불교도 믿어 봤지만 내가 찾고자 하던 사상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사상을 찾았다. 원하는 사회주의 사회가 되고 재소자들도 없어야 한다. 자본주의 자체가 범죄자를 만든다. 짓밟고 일어서는 자본주의 자체가 범죄집단이다. 사회주의는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뭐 나도 어떨 때는 경제적으로 힘들어 다른 사람을 괴롭힐 때도 있다만... 그래도 신조는 변함이 없다.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는 내 조국이 아니다. 진실하고 약자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주의 조국을 바란다.
교도소에 오래 있던 교도관들은 나를 잘 안다. 지금도 남아 있다면 소장급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교도소 대통령인데 (웃음) 나를 잘 알지. 당시엔 교도소 전국 꼴통 중에 최고 막내였는데 당시의 꼴통은 다 죽었다. (한숨) 그때는 인권이고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 1969년부터 1986년까지 감옥을 왔다갔다 드나들 정도였다만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고 나서는 그러지 않았다. 사회에 나오면 며칠 있고 뭐 그렇게 밖에 못 있었다. 배가 고프니 그랬고 공무집행 방해로 들어가기도 했고 또 때로는 억울하게 들어가기도 했다. 대도(大盜) 조세형이는 나오자마자 도둑질 했지만 나는 1986년 이후에는 일절 그런 것이 없었다.
옥중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다르더라.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요새 강력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어렵게 살더라도 나는 사회주의자로 꿋꿋하게 산다. 술 먹고 싶으면 소주나 막걸리 하나 먹으면 될 뿐이고. 물질적으로 어렵기도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내가 감옥에 있었을 때 일을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게 안 되는 것이 갑갑하다. 인권운동을 하고 싶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어 정신적으로 괴롭다. 설에도 찾아 오는 이가 없으니 떡국 한 그릇 못 먹고 그렇다고 떡국을 사먹기는 뭐하지 않는가.
윤치고 동지는 댁을 나서는 내게 자신은 이미 다 보았다면서 두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하나는 민주공원에서 나온 ��부산민주운동사��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다른 재소자에게는 주지 않고 부산 출신에게만 주었다면서 쓴 웃음을 지으셨다. 다른 한 권은 사람생각에서 나온 호치민 시집 ��옥중에 자유인 머물다��였다. 책에 있는 호치민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정리를 마친다. <노사과연>
정서현의 감옥에 들어가며
감옥 안의 고참들 신참들을 맞이하고
하늘의 갠 구름 비구름을 쫓는다.
비 개이자 뜬구름 날아가건만
감옥에 자유인 머물러 있구나.
入靖西縣獄
獄中舊犯迎新犯
天上晴雲逐雨雲
晴雨浮雲飛去了
獄中留住自由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