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시기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의 교훈

공황시기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의 교훈


1. 세계공황 시기, 자동차산업의 국내외 동향


(1) 국내동향 : 구조조정이 시작되다


2008년 이후 공황이 심화되면서, 한국의 자동차 공장에는 구조조정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공격을 받고 있다. 쌍용자본가는 “쌍용차는 2009년 4월 8일, 전체 인력 7천179명의 36∼37% 가량인 2천646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였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날, “4월 중순부터 노동자들의 희망퇴직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연합뉴스 2009.04.09).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4월 15일을 기점으로 총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대우자동차 자본가는, 지난 3월 20일 고용안정특별위원회를 통해서, 노동조합과 합의하에, “비정규직에 대한 무급순환휴직”을 내놓았다. 이어서 다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10% 임금삭감과 단협 개악, 정비소 매각”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규직의 임금삭감안” 등을 내놓고 있다. 결국, 정규직 노동조합의 양보와 타협이 비정규직뿐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한편,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조합이 자본과 생산유연화를 ‘합의’함에 따라, “공장간 물량이동이 자유롭게 됨에 따라 작업속도 (UPH) 조정과 그에 따른 전환배치, 비정규직의 정리해고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울산 공투본, 2009) 1). 한편, 4월 9일에는 현대자동차 노사가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특별 노사협의체’를 구성하였다.


(2) 국제동향: 파산직전에 몰린 미국자동차공장


미국자동차공장의 파산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3대 자동차 제조회사(지엠, 포드, 크라이슬러; BIG 3)는 24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고, 부품공급업체들은 2,200만명을 고용하고 있어, 거의 미국노동력의 2%에 가까운 인구이다. 노동자의 가족들 (배우자, 자녀, 노부모)까지 포함한다면 약 1억에 가까운 인구이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에 가입되어 있는 노동자들은 13만8천명인데, 노동조합의 가입자수가 최근 20년동안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미국 자동차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1억에 가까운 인구가 고통을 당할 것이고, 노동조합은 실질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Dan La Botz 2008)2).


지엠(GM)의 파산은 47,000명의 실직과 14개 공장의 폐쇄를 의미한다. 현재 지엠(GM)과 크라이슬러에 대한 파산논의가 진행 중에 있으며, 오바마대통령도 공장폐쇄와 대량해고라는 놀랄만한 계획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한 노동자신문(Labornote)은 만약 대공장들을 폐쇄하기엔 너무 크고, 너무 형편없게 운영되어와서 정리하기도 어렵다면, 그것들의 경영권을 탈취할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Labornote,2009)3)




2. 1997년말 “IMF 경제위기”시기에 한국 자동차공장의 구조조정과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


1997년말부터 시작된 공황의 시기에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은 10년이 지난 바로 오늘 우리의 갈 길을 말해주고 있다. 우선, 1997년말 경제위기의 시기에 대우, 현대, 기아 자동차 3사에서 자본가들의 공황대처방법과 그에 맞선 노동자 대투쟁에서 우리가 올곧이 간직하여 발전시켜 나갈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1) 대우자동차 공장


투쟁개요: 

대우그룹의 해체이후, 1999년 8월 26일 인천 대우자동차공장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정부와 채권단은 포드로 매각을 추진하였다. 노조는 한시적 공기업화를 통해 정상화 후 장기적 발전전망 속에서 대우차처리를 요구했으나, 포드는 입찰을 포기하였다. 그 후, 김대중정부4)는 노조에게 부도협박을 하며 구조조정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였고, 노동조합은 결국 2000년 11월 27일 회사와 “공장정상화를 위한 노사협의서”를 합의하였다. 사측은 2001년 1월 16일 2794명에 대한 정리해고 계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하였고, 2001년 2월 16일 1754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하고 공장을 거점으로 조합원을 집결시키는 활동에 주력하였고, 사측은 경찰을 불러 공장을 봉쇄하고 출입문을 차단하였다. 노동조합의 투쟁의 수위가 높아지자, 경찰은 2001년 2월 19일 경찰병력 35개 중대 4200명, 지게차, 포크레인을 동원한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을 펼쳤다. 노동조합지도부는 회사밖으로 밀려나와 산곡성당에 대우자동차공투본 상황실을 설치한 후, 1년 동안 가열찬 투쟁을 진행하였다. 김대중정부는 2001년 4월 10일 경찰폭력만행을 저지르며, 노조죽이기를 계속하였고, 노동조합은 김대중정권퇴진운동으로 전선을 확대하여 밀고 나가려고 했으나, 그 한계가 있었다. 5월 30일 지엠이 대우차 인수제안서를 제출하게 되고, 노동조합은 지엠매각반대결사대를 미국에 파견하면서 투쟁을 했다. 그러나 공장 내 정추위 등 자본의 사주를 받은 세력들이 금속연맹에 항의하는 등 매각을 반대하지 말라며 재차 노조와 상급단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내에서는 범추위라는 임의기구를 내세워 집행부를 압박하던 이들은 급기야 노조를 무시한 태도를 보이고 공공연히 무분규 노사화합을 선언하는가 하면 구속되어있는 집행부의 현 위원장을 대신해 직무대행체계를 요구하였다. 결국 노동조합은 전략적 후퇴를 결정하며 직무대행을 위촉하고 산곡동 지도부는 자진출두하여 직무대행체계로의 전환에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해고자들에게 공장 내에서의 투쟁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였다. 결국, 9월 21일 대우차는 분리매각되고, 단협 등의 양보를 골자로 한 양보교섭의 합의도출 후 해고자복직을 위한 800일이 넘는 길고 긴 협상과 투쟁 끝에 7월 27일 300명의 복직합의로 정리해고자 복직의 물꼬를 튼 채 정리해고 분쇄투쟁은 1차 마무리 되었다 (김창곤, 2009)5).


대우자동차노조 17대 김창곤 쟁의부장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1년간에 걸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숱한 노동조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를 막아내는 데는 실패했어도, 이 투쟁의 시기 동안 공투본 결성과 연대투쟁의 위력을 나름대로 떨치며 정리해고의 후유증이 무엇인지 자본과 정권에게 똑바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창곤, 2009) 6).


투쟁의 한계와 교훈:

대우자동차 투쟁의 가장 큰 한계로, 김창곤은 대우그룹해체 후, 노동조합이 정부와 채권단의 협박에 휘둘려서 노사합의를 위해 낭비했던 시간 때문에 1754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을 때,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즉각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고, 투쟁의 시기를 놓쳐버린 점을 지적하였다. 즉 초반에 노사협의에 너무 집중하다가 투쟁의 시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집행부는 노사합의를 했더라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 시기가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하고, 투쟁의 열기를 끌어올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김창곤, 2009).



(2) 기아자동차 공장


투쟁개요: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대상이 되자, 기아자본과 노동자는 조사협약을 통하여 ‘기아살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7). 이때 노동조합은 삼성독점자본 대 기아자본ㆍ기아노동자라는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삼성독점자본에 맞서서 기아자본과 함께 ‘기아살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기아사태의 현상과 본질을 보면, 현상적으로 “기아사태의 배후에는 독점자본 간의 항쟁과 암투 그리고 음모”8), 삼성독점자본이 기아그룹을 흔들고 목을 조이는 것이 있었지만, 기아사태의 본질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과 과잉생산”에 있었다 (채만수 1997). 즉, 기아사태는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정부성에 있었던 것이고, 이 모순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부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었다 (채만수 1997). 


노동조합은 ‘기아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기금사업을 전개하여 노조복지기금 19억원을 회사에게 조건없이 대여하였으며, 1천억원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8월 9일 현재 600억원을 모았다 9). 또한 상여금과 하기휴가비 및 상반기 월차수당을 반납했으며, 1997년도 임금인상을 동결하고 복지부문 및 단협 비용부담 항목을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유보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10) (강연자, 1997). 민주노총11)은 1997년 7월 23일 ‘기아 정상화와 국민기업화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부지원을 촉구하고, 특정재벌의 기아인수반대와 기아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기아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운동은 부도유예협약체결이 된 지 한 달만에 계열사 3164명(기아차 1197명)이 실질적으로 해고되는 결과를 낳았다12). 기아자본과 정부는 10월 22일 기아차 법정관리13)를 선언하게 되고, 기아노동자들과 범대위는 파업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1998년 4월 14일 정부와 기아자동차 자본은 법정관리를 개시하고, 법정관리인으로 류종렬을 선임한 후, 바로 제3자매각 결정발표를 하게 된다. 이렇듯 법정관리, 소위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의 관리는 바로 자본주의적 국유화에 불과한 것이며, 기업을 또 다른 자본가에게 넘기기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결국 법정관리인은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 강제휴업조치 등으로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휴업을 단행하였고, 이에 분노한 기아차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등 노사화합구도속에서 단사차원의 옥쇄파업까지 감행하였다. 그러나, 끝내, 자본의 노사화합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지 못한 채, 1998넌 6월 18일 노사정교섭이 자본가의 힘에 밀려서 타결되었다. 이후 채권단과 법정관리인은 기아를 공개입찰을 통하여 1998년 8월 현대자본에게 넘기게 된다 (박윤천, 2009) 14)


결국, 기아노동자들은 “법정관리”의 시기까지 자본가와 동반자로써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려했으나, 채권단과 법정관리인이 제3자 매각을 결정하자, 파업투쟁을 했던 것이다.


투쟁의 한계와 교훈: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의 한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 노동자의 ‘회사살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회사살리기를 통하여 노사화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정부와 자본가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특히, 공황 의 시기에는 살아남기위해 위선에 찬 모습을 하면서 내미는 자본가의 손을 절대 잡아서는 안 된다. 그동안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착취하고 배신해왔던가?

둘째: 기아자동차는 ‘법정관리’ 이후에 제3자 매각에 의해서 현대자동차에게 인수되었는데, 법정관리, 또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국유화’는 정부와 자본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언제나 뽑아들 수 있는 그들의 카드라는 것이다. 여기에 현혹되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경제위기 시기마다,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공장마다 정부와 자본가는 ‘법정관리’ 또는 ‘국유화’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거덜난 자본을 추스려서 또 다른 자본가에게 넘기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 차라리 자본가에게 처분을 기다리지 말고,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공장을 접수한다고 이야기하자.

셋째: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투쟁의 의지를 고취시켜야 한다. 우리는 1998년 공황 시기에 투쟁했던 경험이 있다. 이제 다시 시작된 공황의 시기에 정부와 자본이 취할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굽히지 않는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기아도 몇 달 더 투쟁을 지속했었더라면 곧 이어서 불붙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기아자동차 투쟁의 교훈 속에 현 시기 자동차 노동자들의 갈 길이 있다.



(3)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투쟁 개요:

현대자동차 1998년 7-8월까지의 투쟁을 보자. 그 당시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에는 “현대자동차의 생존권사수투쟁은 처음부터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5). 1998년 2월 15일 임시국회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입법화되고 나서 처음으로 민간대기업에 적용시키는 것이어서,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투쟁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8년 6월 29일 현대자동차 사측은 노동부에 5830명의 정리해고신고서를 제출했으며, 임금을 22%로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정리해고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6월 30일 오후 3시부터 7월 1일까지 26시간 1차 경고파업을 했다. 이후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7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약 36일간 전면 총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16)

사측은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임시휴업에 들어간다고 발표했고, 23일부터 27일까지 5차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희망자는 2천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 투쟁과정에서 노동조합집행부 (김광식위원장)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현장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여러번 사측에 양보안을 제시하였고, 마침내 8월 24일 새벽 2시경에 노동조합위원장이 단독으로 회사측과 잠정합의를 하였다17).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집행부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새벽 2시경 TV를 통해서이다. 조합원들은 김광식노조위원장이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회사측과 타협을 해버린 것에 대해 강력히 노동조합 집행부를 비판하였다. 9월 1일 현대자동차 노조는 8월 24일 김광식 위원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회사측과 타협한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63.58% 반대로 부결되었다. 현장노동자들의 투쟁력과 자각이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적 집행부보다 앞선 것이었다.


“투쟁의 주체인 현장 노동자들이 이끌어온 36일간의 투쟁은 지도부의 양보와 배신으로 이렇게 끝이 났다18).” 결국, 김광식 노조위원장은 ‘정리해고 반대를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투쟁’에서 자본에게 투항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투쟁의지를 외면하고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였다.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에게 이후의 사업장들에서 ‘정리해고’의 명분을 부여하게 되었다. 더욱이, 227명의 정리해고자 명단 속에는 식당여성노동자 176명이 포함되어 있어, 결국, 김광식노조위원장은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비정규직화 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9).


현대자동차의 36일간의 전면총파업투쟁의 의의와 한계:

현대자동차노동자들의 36일간의 전면총파업의 의의는 공장 내 파업을 통하여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력이 고양된 점이다. 민주노총과 현대노조집행부의 노사협조주의와 대타협에도 불구하고, 굳건했던 현장노동자들의 투쟁 대오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7월 20일 파업투쟁의 깃발이 올려졌을 때, 3천여명의 대오가 텐트농성을 시작했고, 1만명이 넘는 저녁집회대오를 형성하면서 전면 총파업을 경험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노동운동사에 획을 그을만한 일이었다. 또한 총파업을 사수하려는 300여명의 ‘녹색사수대’, 식당 ‘아지매부대’ ‘가족대책위’ 등은 36일 동안 파업의 선봉이었고 주역이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36일간의 전면총파업은 공황시기에 총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단결력을 보여줌으로써, 총자본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었던 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현자노동자들의 투쟁은 공황시기에 노동자투쟁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36일간의 전면총파업의 한계는 무엇인가? 어느 현대자동차 노동활동가의 평가20)를 보자. 투쟁의 가장 큰 한계는 민주노총과 현자노조지도부의 배신이었다. 현대자동차 현장노동자들의 36일간의 역사적인 전면총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참여와 노동조합의 양보교섭은 노동자들의 끓어오르는 힘을 사그러뜨린 자본가와의 “역사적 대타협”이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역사적 배신”이었다21).


전면적인 계급투쟁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계급타협적인 노사협조주의로 갈 것인가? 어느쪽으로 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노사정위원회와 양보교섭문제가 있었다.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와 현자노조의 양보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36일 동안의 현자 파업은 출발부터 이미 조합원에 대한 배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현자 노조의 배반은 현장 활동가들의 피를 토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층 지도부가 정부와 총자본의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노사정위 참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8월 24일의 극적인 협상으로 투쟁하는 조합원과 활동가를 배신하면서까지 집행부가 ‘정리해고”에 도장을 찍어준 것은 민주노총 등 공식 노조운동지도부가 기존 민주노조운동의 모든 성과와 전통을 내팽개치고 노사협조주의로 돌아섰음을 확인시켜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현대자동차 36일 파업의 교훈”)


파업시기에 노동자대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22) 현대자동차노동자투쟁의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한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파업지도부를 확대 개편하는 일이다......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이끌기 위한 투쟁 지도부는 일상적인 교섭에 능수능란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리해고 철회에 사활을 걸고 투쟁할 동지들로 구성되는 것이 올바르다......둘째는 내부 동력을 극대화할 파업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셋째: 연대투쟁을 적극 이끌어내는 것이다......”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교훈은 무엇인가? 현대자동차의 한 현장 활동가는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교훈23)으로 첫째: 노조의 양보교섭시도를 처음부터 저지할 것, 둘째: 노조의 관료주의에 맞서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할 것, 셋째: 현장권력쟁취와 계급적 연대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제안하고 있다.




3. 세계공황시기에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과 교훈 


(1) 1930년대 세계공황 시기에 미국 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과 교훈


2009년 세계공황에 직면한 이 시기에, 이전 세계공황의 시기에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세계공황시기에 자본의 움직임과 거기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사례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나아갈 길을 찾아보자.


미국자동차노동조합 (UAW)의 역사와 한계: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의 역사는 1930년대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회변혁운동으로 이끌지 못한 채, 자본가를 위한 양보와 자본가와의 타협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미국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대해 거세게 저항했고, 특히 1937년에는 지엠 플린트(GM Flint)공장에서 점거투쟁을 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지엠과 새 미국자동차공장 노동조합은 잠정협정을 맺게 된다. 2차대전 후에, 회사측과 노동조합의 갈등관계는 밀접한 협조관계로 바뀌게 된다. 1950년대에 와서 미국자동차노동조합지도부는, 자동화를 도입하고, 노동자들의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회사측의 전략을 허용하면서, 임금ㆍ수당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힘과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회사측과 거래를 했다. 작업속도가 빨라졌으나, 노동자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1960년대의 디트로이트에서 흑인노동자들과 로드타운 및 신시내티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과 관리자들 사이의 협력관계를 깨뜨리지 못했다. 지엠과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이 파트너쉽을 형성했고, 미국자동차노동조합과 그 조합원들 사이에는 더 이상의 파트너쉽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동차공장은 1974-75, 1979-81년 경기침체와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다. 크라이슬러는 이러한 공황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데, 크라이슬러에 시행된 긴급재정보조는 밀물같이 밀려오는 양보요청을 위해 포문을 연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법인체선별과 구제에 있어서 파트너가 되었다. 노동조합은 이제 양보를 팔아 노동자들을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 지미카터와 미국 의회가 지엠과 미국자동차노동조합과 협상하여 100,000명에서 57,000명으로 인원을 감축시켰다. 이때 실직한 집단은 흑인노동자들이었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3대 자동차사(BIG 3)를 대신하여 양보를 팔고 있고, 공장폐쇄와 해고를 주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회원이 아니라면, 노동력감소의 운명에 맡기고 있다 (Dan La Botz, 2008).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의 자본가를 위한 양보와 타협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Dan La Botz (2008)24)는 현재 미국의 3대 자동차사(BIG 3)와 미국자동차노동조합가 함께 결탁하여, 노동조합을 지키고, 자본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민중들의 운동에 반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전에 30년 동안 얻은 것을 헐값에 넘기고 있는 와중에, 노동조합 안에 있는 여러 일반조합원들로 구성된 반대세력들에 의해 매 단계마다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반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공장폐쇄와 양보협약이 미국노동조합 3대 자동차사(BIG 3) 조합원들을 세 개의 집단, 즉, 퇴직자집단, 임금과 보너스를 완전히 다 받는 집단, 낮은 임금과 적은 보너스를 받는 집단으로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도 자동차공장에는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예를 들면, 3대 자동차사(BIG 3) 노동자들과 하청업체 노동자들, 미국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자동차공장과 소속되어 있지 못한 외국 자동차공장들이다. 오늘날, 이들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단결력을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수많은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기업, 노동조합, 심지어 그들의 단협과 임금을 보존하기위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Dan La Botz, 2008).


오늘날 미국 노동조합이 실패한 것은 노동자계급권력에 대한 넓은 전망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기 위한 진정한 국제적인 노동운동을 세우지 못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은 미국 내에서 자본의 힘에 대항하고, 경쟁을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 운동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미국의 다수의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다른 노동조합과 연대하지도 않았다. 노동조합은 그 자신의 역할을 3대 자동차사(BIG 3)의 협력자로, 그 다음에는 조수로, 마침내는 기생집단으로 격하시켰다 (Dan La Botz, 2008).


미국자동차 노동조합의 실패의 원인은 노동조합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독립을 상실한 것, 관료주의화와 민주적 문화와 그것들의 실행과정에서의 부패, 노동자계급과 대중집단의 행동반경을 넓혀야할 때 그렇지 못했던 노동조합의 근시안적인 대응들이다. 그러므로,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그들의 지도력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그들이 원하는 노동조합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고, 지역, 국가단위에서 어떤 추가적인 노동자계급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Sam Gindin 2008).


1930년대 대공황기에 좌파들의 투쟁의 의의와 한계:

1930년대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폭발했다. 1929-1932년 세계공황 시기에는 주기적으로 발생했던 이전의 어떤 공황에서보다도 노동자들의 전투정신이 보다 한 단계 고양되었고,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 사이의 새로운 단결, 또 실직노동자와 저항적인 빈농 간의 적극적인 협력이 나타났던 시기였다 (포스터, 1987)25).


1930년대 대공황시기에 사회운동좌파들은 옛 노동조합 (AFL)의 노사협조주의에 반대하여,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26)를 구성하였고27), 이것이 1930년대 노동운동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28)29). 대공황기에 미국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활동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산업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30). 공산당의 많은 활동가들이 1930년대 시기에 조직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종류의 좌파들은 미국 전역에 걸쳐서 실업자협의회를 구성하고 정부로부터 공공일자리와 구제를 요청하기 위하여 정부당국자들과 직면하기도 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몇백명의 좌파활동가들이 곧 수천명의 실업노동자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 실업자협의회는 배반자들을 막고, 단결력을 만들어 나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34년까지 여러 좌파정당들의 활동이 산업노동자들 가운데에 활발해졌고, 1934년에는 3개의 큰 파업을 이끌었다31). 1936-37 GM 공장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농성투쟁32)은 미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던 공황시기 노동자들의 대투쟁이었다33). CIO가 이끄는 공장내 점거투쟁은 전기공장들에서부터 소규모 공장들에까지 미국 전역을 쓸어버렸다. 4년 안에 4백만명의 노동자들이 CIO로 조직되었다. 대철강공장 자본가들이 몰락했고, 자본가는 그들의 공장이 볼모로 잡혀있는 상태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미국 노동운동의 절정이었다34).


그러나, 1930년대 세계대공황시기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위시한 좌파활동가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미국공산주의자들은, 쏘련에서 볼세비키들이 조직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공산주의혁명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투쟁과 혁명의 요구를 결합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볼세비키는 전투적 계급투쟁을 지도하고, 이를 최종목표인 공산주의 혁명과 연결시켰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노동자들을 조직했었다. 그러나, 미국공산주의자들은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 즉 혁명과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빠트렸다 35).


이러한 미국 좌파활동가들의 한계는 오늘날 노동자계급투쟁의 교훈이 되고 있다 36).


미국 시카고 파업사례37):

2008년 12월 5일, 시카고에 있는 창문과 문을 만드는 공장 (Republic Windows and Doors factory in Chicago)에서 250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이 폐쇄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장을 점거하였다. 이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연좌파업과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2001년 공장점거투쟁의 반향이었다. 노동자들은 휴직이나 공장휴업에 대한 임금을 지급받거나 공장이 계속 가동되기를 요구했다. 12월 5일 교대근무를 하던 50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안에 의자나 팔레트위에 앉았고, 지지자들로부터 담요, 침낭 및 음식이 공급되었다. 공장점거투쟁은 미국공황의 중반기, 즉 실업률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60만명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있는 시기에 발생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미국은행이 7000억달러의 정부구제금 중에서 250억달러를 받았는 데도 공장의 신용을 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장문을 닫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미국은행이 노동자들이 번 돈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제적 폭력에 저항하는 대중운동으로써 대투쟁의 시작이다.



(2) 2001년 공황 시기에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투쟁과 교훈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붕괴의 시기에, 정치가들과 은행들이 실패했을 때, 많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단결하여 구시대의 난파선으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가난한 사람들, 집없는 사람들은 실업에 대한 대안책으로 물물교환제도, 대안화폐 (Alternative currency), 상호 간의 단결을 위한 이웃 간의 모임, 지역사회에서 음식이나 지지 등으로 맞섰다.

이러한 투쟁들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공장과 기업체의 점거였다. 공장점거후에 공장과 기업체들은 노동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운영되었다. 아르헨티나에 약 200개의 노동자가 운영하는 공장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2001년 경제위기의 중반기에 시작되었다. 자동차 부품생산에서부터 고무풍선공장에 이르기까지 15000명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공장과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3) 2009년 세계공황의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공황시기에 노동자 대투쟁을 위한 미국좌파활동가들의 제안


2009년 세계공황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 1930년 세계대공황을 경험했던 미국 좌파활동가들의 제안을 정리하였다.


Sam Gindin (2008)은 대공황기에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약한 점과 사회적 장벽을 극복하고, 투쟁과 조직을 위한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노동자들은, 결단력과 창조력을 가지고, 모이고, 토론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David Bacon (2005)38)은 좌파활동가들의 대안적인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면서, 1930년대의 좌파활동처럼,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David Bacon (2005)은 미국노동조합운동의 전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 노동운동은 정치적 독립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한다. 몇 십년전 좌파노동활동가들은, 사회가 전체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지켜줄 수 있는, 대안적인 사회전망을 제시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슷한 방법들―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조직을 하기 위한 새로운 임무는 단순히 더 많은 돈, 조직가, 지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구조적 변화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노동조합이 질적인 발전을 할 때, 노동조합들의 활동력은 스스로를 조직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지, 임금받는 노동조합직원에 의해 지도받는 군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 희생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더 정당한 사회의 전망을 보여주는가? 수십년전 노동운동의 진보적 전망은 운동을 강하게 만들었었다. 1950년대에 “반공주의"로 인하여 전망을 상실한 후,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메카시즘의 수년 동안 노동조합회원들이 감소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급진적인 생각이 항상 변화시키는 힘―특히 당신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을 지라도, 당신이 굳건히 싸운다면 당신의 자녀들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30-40년에 이러한 생각들은 노동조합 안에서 좌익정치조직들에 의해 선전되었었다. 일반적인 급진적 문화가 그들을 강화시켰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더 이상 이러한 좌파적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하다. 노동운동 자체가 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노동조합들은 사회변혁을 위한 근본적인 생각들을 즉각적인 경제적인 빵과 버터의 요구들과 연결시켜줄 모든 수준에서의 핵심활동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그들 조합원 밖의 노동자들과 전망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1930년대에 수백만 조직노동자의 갑작스런 급증은 공황과 좌파활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미국노동조합의 현재의 변화들은 어떤 크고 심대한 변화의 시작일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노동조합이 직면한 장애들은 이전의 시기의 것들 만큼 빠르게 역사적 유물로 될 것이다.“

 

Dan La Bots (2008)39)은 오늘날 미국 좌파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써,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라는 문제를 들었다. 즉, 좌파들이 수적으로 열세이고, 너무 작은 조직들로 분열되어있으며, 정치적 프로그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Dan La Bots (2008)는 미국좌파의 임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써 무장된 좌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혁명적 좌파그룹은 미국사회에 대한 변혁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미국정부, 경제, 사회, 외국인 정책 등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사회의 변화를 통한 해결방법을 제시해야 한다40). 셋째, 미국 노동자계급과 미국 국민들을 연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략은 좌파와 인구집단 중 가장 비판적이고 활동적인 집단 사이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전략은 노동자계급의 전략을 위해 발전되어야 한다. 모든 사회의 착취와 억압의 구조에 대한 고려가 바로 계급단결력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현 시기에 노동자계급정당을 위한 원칙, 정치적 프로그램, 전략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4. 세계공황 시기에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역사에서 얻은 교훈


(1) 공장점거파업을 하라


세계공황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조건:

2009년 세계공황에 직면한 이 시기에, 세계공황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조건은 어떠한가? 공황 으로 인한 총자본의 공세는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요구들이 전계급적 요구로 일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공황은 분명 자본의 위기이며, 그들의 존재기반인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황시기는 혁명의 시기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의 절대수를 감소시키는 생산력의 발달 - 즉 국민 전체가 보다 짧은 시간에 총생산을 달성할 수 있게끔 하는 생산력의 발달 - 은 이 생산양식 아래에서는 혁명을 유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산력의 발달은 인구의 다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한계를 보게 되며,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은 결코 생산력의 발달이나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점에 달하면 이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충돌의 하나의 측면은 주기적 공황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 그 이유는 노동인구의 이러저러한 부분이 자기의 종래의 직업에서 불필요하게 될 때 공황은 발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41).”


“자본축적의 증대는 집적의 증대를 포함한다. 이리하여 자본의 힘이 증대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 생산자들에 대하여 사회적 생산조건들―자본가로 인격화되어 있다―이 점점 자립화되어 대립한다. 자본은 점점 더 사회적인 힘―이 힘의 행사자가 자본가이다―으로서 나타나는데, 이 사회적인 힘은 어느 특정의 개인의 노동이 창조할 수 있는 것과는 이미 어떠한 관련도 없다. 그러나 자본은 소외된 독립적인 사회적 힘으로 나타나며, 이 사회적 힘은 물로서 그리고 이 물을 통해 자본가가 행사하는 힘으로서 사회에 대립한다. 자본이 일반적 사회적 힘으로 발달되어 가는 것과, 이러한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지배하는 개별 자본가들의 사적인 힘이 증대하여 가는 것 사이의 모순은 점점 더 첨예화되어 가는데, 그 반면에 이러한 첨예화는 이 모순의 해소를 또한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첨예화는 동시에 생산조건들을 일반적, 공동적, 사회적 조건들로 전환시키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생산력의 발달에 의하여, 그리고 이러한 발달이 달성되는 방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42).”


공황 시기에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구조조정으로 자본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자본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산력의 사회적 발달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더 발전된 새로운 사회의 생산관계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성에 놓여져 있다.


현재와 같은 세계공황의 시기에서는 노동과 자본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타협은 불가능하다. 자본가도 자본가끼리의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그들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공황 시기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그들의 위기를 전가시키려 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게 되지만, 그것은 자본도 그만큼 위기에 몰려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다.


세계공황의 시기에 왜 공장점거파업을 해야 하는가?:

공황의 시기에 공장점거파업의 의의는 무엇인가? 왜 공장점거파업을 해야 하는가? 미국 전기노조(Electrical workers) 국제부43)에 있는 Mark Meinster (2008)44)은 공장점거투쟁이 노동자들에게 서로 신뢰를 주고, 투쟁을 고양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더 중요하게는 지역사회의 지지와 정치적 지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Mark Meinster (2008)는 공황 시기에 아르헨티나 공장점거투쟁이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전술 상의 폭넓은 선택권을 제공해주었던 점을 예로 들면서, 경제하강의 시기에는 그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전투적인 행동이 폭넓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Mark Meinster (2008)은 “공장점거투쟁은 나라 전역에서 연대행진에서부터 재정기부, 음식,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과 1년전까지만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이러한 지지는 노동자계급이 경제적 맹공격에 대해 저항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한편, 이 투쟁이 발단이 되어 다른 여러 투쟁들이 그 뒤를 이어서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조직된 노동자들은, 필요할 때는 노동자계급의 의제의 전진을 위해 일차적인 방법으로써 정치공작에 의존하는 것을 버리고, 전투적 전술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Mark Meinster 2008).



(2) 노동조합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와 단절하라


세계공황 시기에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역사에서 얻은 교훈은 노동조합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와 단절하는 것이다. 1930년대 세계공황시기에 미국 자동차공장 노동자투쟁에서 노동조합의 노사협조주의는 결국 미국 자본가계급에게 이용당했고, 노동운동을 변혁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방해물이 되었으며, 2009년 현재까지도 변혁운동에서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한국에서도 1998년 이후 2009년까지 두 번의 공황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던 결정적인 시기에 노동조합지도부의 노사 간의 협상과 타협으로 고양되던 투쟁이 한순간에 꺾이는 역사를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역사를 교훈삼아 공황 시기에 만연하는 노사협조주의와 단절해야한다. 그 방법은 현장에서 가능한 빨리 핵심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투쟁대오를 결성하는 일이다. 핵심노동자들은 현장 노동자들에게 현재 공황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해시키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견지한 해결방법을 제시해야 한다45)



(3)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연대하라


1997-1998년 공황 시기 이후 10년 동안 크게 변화한 것은 비정규직노동자의 증가와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리이다. 자본은 지난 10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을 성공적으로 이뤄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노동자 갈등을 조장하여 노동운동을 교란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 부분이 당면 전체 노동자계급이 해결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 GM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등에서 자본가는 이미 구조조정의 칼을 비정규직에게 먼저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그 칼로 곧 정규직을 내려칠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정규직에게 들이대고 있을 때, 정규직의 침묵은 곧 전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고통의 시기만 증대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10년전에 비해서 달라진 지형, 이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4) “국유화”테제? 기업의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투쟁밖에 없다 


최근 파산위기에 처한 쌍용자동차에 대해 정부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부 활동가들은 국유화테제를 내세우고 있다. 파산의 위기에 처하고, 몰락위기에 처한 기업을 노동자들이 접수하여 스스로 운영하는 것은 당연하고 앞으로 추구해야할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자본가와 정부는 쌍용자동차를 “법정관리”의 상태에서, 또 다른 자본가에게 넘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미 기아와 대우 같은 역사적인 사례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공황 시기마다 노동운동진영뿐 아니라 심지어 자본가계급 내에서도 회자되는 “국유화”테제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조직화를 증대시키는 측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자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자본에게 의존하게 되어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현재 거론되는 “국유화”테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유화”에는 자본가에 의한 자본주의적 국유화와 노동자계급에 의한 사회주의적 국유화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국유화의 전형적인 한 형태가 “법정관리”일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가에 의한 국유화라는 것은 뻔하지 않는가? 바로 그들의 국유화인 것이다. 즉, 정부와 자본가의 사적소유를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적 국유화는 기업의 자본주의적 구조조정과정의 하나이다. 즉, 부도가 난 기업이 제3자에게 인수되거나, 법정관리 또는 “국유화”가 되거나, 공적자금의 투입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한 개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러한 “국유화”는 정부와 자본가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 의해서 제기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국유화라는 것은, 자본주의 모순을 감추고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밖에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역사가 이야기해주는 것은 지금까지 4개 자동차회사 (현대, 기아, 대우, 쌍용)의 투쟁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국유화는 절대 종착점이 아니었고, 독점자본의 그들 내부에서의 경쟁과 나눠먹기를 위한 중간단계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좌파활동가들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국유화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국유화”, 즉 지역사회와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하는 형태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자본에 대한 우선적 양보와 타협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고, 투쟁없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자본보다 우위에 선 노동자계급의 단결된 힘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국유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결과이어야지 투쟁보다 선행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투쟁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공황시기의 임박한 노동자투쟁을 위하여 국유화테제를 먼저 전면으로 내거는 것 보다는 분노에 찬 노동자들을 “총자본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총공격”의 기치아래 힘을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5. 맺음말


대우, 기아 현장 노동자들은 지난 토론회46)에서 “우리에게는 1997-1998년 IMF 공황 시기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번에는 결코 먼저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고, 먼저 굴욕적인 타협에 응하지도 않을 것이며, 굴욕적인 타협은 종국에 가서는 노동자들의 해고로 귀결됨을 불을 보듯 뻔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공세시기 초반에 단결된 투쟁만이 노동자들이 살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결론이다.


현재 해고와 구조조정의 문제는 쌍용자동차공장 노동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대결구도인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력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이 확보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격렬해지고, 무너지는 자본가계급의 광기를 제어할 수 있을 때에 자본주의사회보다 더 발전된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전망이 생길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는 사회주의적 국유화 또는 사적자본의 철폐를 외쳐나갈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총파업이요, 공장점거투쟁이다. 파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의식고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장파업을 통하여 노동자들이 서로 교육을 통하여 의식고취를 해 나가야 한다. 이 투쟁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없다. 얻을 것은 전세계이다47). <노사과연>



1)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울산 공투본 (준비모임), 2009.4.7.


2) Dan La Botz. 2008. What's to be done about the Auto industry?. 2008.Nov.21.

 (http://www.monthlyreview.org/mrzine/index211108c.html)


3) http://labornotes.org/node/2173


4) 그 당시 김대중정부, 진념노동부장관의 시기였다.


5) ‘임박한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의 해법은 무엇인가?’ 정종남, 백일, 허영구, 박윤천, 김창곤 등 발제.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 투기자본 감시센터, 쌍용자동차 지부. 2009.4.2.


6) 같은 글.



7) 그 이전에 이미 기아자본가는 1997년 6월 28일 노동조합에게 임금협상에서 백지위임을 요구하였고, 노동조합은 이를 승인해주었었다.


8) 채만수, 1997.6.26 한노정연 ��현장에서 미래를�� “기아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2금융권이 자금회수를 선도하고, 기아그룹 주가의 폭락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 당시 기아 노동자들은 1인당 천만원씩을 결의했고, 이렇게 해서 4063명의 기아노동자들에 의해 모여진 기아회사채의 규모만 해도 260억원이었다고 한다 (박윤천, 2009).


10) ��현장에서 미래를��, 25호 특집, 1997. 9월 1일자.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1) 1997년 7월 23일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과 한국자동차산업정상화와 삼성자동차포기를 위한 대책위원장 조준호의 공동발표내용에 보면, “......3. 기아자동차노조는 임금교섭권 위임에 이어 1조합원 1천만원 모금, 하기 휴가비, 월차반납, 노조 복지기금 회사지원, 임금동결, 차량할부금 일시금으로 공제, 가족판매 켐페인 등을 결의했다. 우리는 이러한 기아자동차 노조의 기아살리기 운동에 공감하며, 아울러 우리는 기아자동차 경영진이 뼈를 깍는 자성 속에 경영 정상화에 혼신의 노력을 거듭할 것을 촉구한다......” 라고 발표 되었다.


12) “기아의 노조 그리고 기아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본의 그러한 대량해고, 통제, 노동강도 강화 음모를 좌절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지금 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른바 ‘노사협조’나 ‘노사화합’을 통해서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사협조’나 ‘노사화합’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노조는 철저히 무력화되고, ‘회사살리기’란 이데올로기만 무성해져,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허위의식이 노동자들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만수 1997).



13) 1997년 정부는 기아자동차에 법정관리를 발표하면서 산업은행 부채를 출자전환하여 최대 주주화함으로써 기아자동차가 정상화될 때까지 공기업형태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기아노조 14대 고종환 집행부를 찾아서. 한노정연 ��현장에서 미래를�� 제28호 1997년 12월 1일).


14) ‘임박한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의 해법은 무엇인가?’. 


15)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 자료. ��현장에서 미래를�� 제 37호 1998년 10월 5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6) “7월 20일 협상이 결렬되자, 전직위원장 (3대 이헌구, 4대 윤성근, 6대 정갑득)들이 45m 굴뚝농성에 돌입했고, 노동조합지도부 삭발식을 가졌다. 그리고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조합과 각 출입문중심으로 4~5천명이 참여한 대규모 텐트농성에 돌입했다. 조합원 가족들이 모여서 가족대책위를 구성해 정문앞에 텐트를 쳤다.”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 자료. ��현장에서 미래를�� 제 37호 1998년 10월 5일. 한노정연기관지.


17) 1998년 8월 24일 잠정합의안은 다음과 같다. ① 정리해고 227명 ② 정리해고자 선정-합리적인 기준으로 선정 ③ 정리해고자 취업보장 -계열사 취업노력, 2년후 본인 원할 때 리콜약속 ④ 휴직임금-1년휴직, 6개월은 재교육훈련, 휴직임금-노조-급여의 2%, 사측과 정부-일정부분부담(고용안정기금으로) ⑤ 정리해고자위로금  - 5년미만 :7개월 통상금, 5년이상 10년 미만 :8개월 통상금, 10년이상 :9개월 통상금-계산방법은 5차 희망퇴직자와 동일. - 85억원의 고용안정 기금을 확보하여 추가지원. ⑥ 고용안정기금 - 노사공동으로 기금을 마련한다. ⑦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철회 - 일괄철회 ⑧  노사 평화선언 채택 - 2년간 고용조정하지 않겠다는 약속. ⑨ 리콜제 도입 - 정리해고자 리콜약속, ⑩ 식당 여조합원 처우 문제 - 인원 :식당은 노조에서 운영, 위로금 지급, 9개월 + 45일분(기지급) + 운영권 전환때까지 기존임금 지급, 경영상 해고자 및 배우자 취업노력. ⑪ 외주 하도급 전환문제 - 외주, 하도급으로 전환코자 할 때는 노조와 합의하고 경영상 해고자 우선 재고용한다. - 노사 합의없이는 하도급을 제한한다. (참고: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 자료. ��현장에서 미래를�� 제 37호 1998년 10월 5일. 한노정연기관지)


18) “현대자동차 36일 파업의 교훈”.


19) 고길섶. 2004. 어느 다중적 소수자의 삶과 투쟁이 보여주는 문화적 의미 -최종희,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 직영식당 노동자. [어느 소수자의 사유]. 문화과학사. 2004. P. 306.


20)  "현대자동차 36일 파업의 교훈".


21)  같은 글.


22) 같은 글.


23) 같은 글.


24) Dan La Botz. 2008. A Big Caravan to Washington? The Auto Crisis: Management, Labor, and the Struggle for the Future. Monthly Review. 2008.11.25


25) W.Z.포스터, ��세계노동운동사��. 정동철역, 백산서당, 1987


26) 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는 강철, 고무, 유리, 자동차, 전기, 기타 여러 산업에서 산업노동조합들을 총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27) 구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노동조합은 회사 경영주와 결탁하여 어떠한 저항도 없이 임금삭감을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을 달래고 있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자동차, 철강, 전기 등 기간산업의 비숙련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CIO(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이 조직되었다.


28) 비록, 1930년대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들 간에 중요한 이론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세 집단이 같은 원칙적 목표: 산업노동조합들을 조직하는 것, 노동당을 창당하는 것, 미국 내에 사회주의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Dan La Botz (2009).


29) CIO는 기간산업의 수백만 노동자들을 조직했고, AFL도 CIO의 전략과 전술을 채택하면서 성장했다.


30) 이렇게 해서 1928년에는 거의 10000명이 되었는데, 건축업계에서 1000명, 바늘제조업계에서 1500명, 800명의 금속노동자들, 400명의 자동차노동자들, 그리고 150명의 목재산업노동자들이었다.


31) 그 중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샌프란시스코 항만노동자 파업, 두 번째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톨레도의 autolite 파업,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한 미네아폴리스의 트럭운전노동자들의 파업 등이었다. 좌파들은 이들 파업을 실업자협의회와 연합하여 대중 선전부대를 만들고, 비행부대의 파견, 파업시기에 배반자와 경찰에 대한 폭력대응 등의 전술을 활용했다.


32) 1930s Depression: Red-Led Working Class Fought Like Hell. Friday, 26 December 2008. (http://progressivelabor.890m.com/index.php))


33) 미국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자들과 좌파 활동가들이 미시간주의 플린트에 있는 GM공장을 점거하고 44일 밤과 낮 동안 공장에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밖에서 그들을 지지했다. 루즈벨트대통령이 미방위군을 동원하여 파업노동자들 앞에 총을 겨누자, 40000명의 일리노어, 인디아나, 오하이오, 미시간 등지의 노동자들이 공장밖에 모여서 GM을 향해, GM이 어떤 공격을 해오면, 10억달러 가치의 기계를 파괴시키겠다고 했다. 그러자 GM이 항복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협상권을 획득하여, 8시간 노동시간과 임금인상을 받아냈다.


34) 1930s Depression: Red-Led Working Class Fought Like Hell. Friday, 26 December 2008. (http://progressivelabor.890m.com/index.php)


35) 1930s Depression: Red-Led Working Class Fought Like Hell. Friday, 26 December 2008. (http://progressivelabor.890m.com/index.php))


36) Dan La Botz는 “현재의 시기에 미국 좌파활동가들의 임무는 자본과 노동, 정부,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적 협약의 공고화를 막고, 돌아오는 10년간 사회주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운동과 정치정당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문헌참고: Dan La Botz. 2008. The Economic Crisis, the American Working Class, and the Left: The Situation Today and the Situation in 1930. Monthly Review. 2008.3.17


37) Benjamin Dangl. 2008. Workers occupy Chicago factory: Echos of Arhentina's 2001 worker uprising. 2008.12.8


38) David Vacon. 2005. Labor Needs a Radical Vision, Monthly Review. 2005.6


39) Dan La Botz. 2008. The Economic Crisis, the American Working Class, and the Left: The Situation Today and the Situation in 1930. Monthly Review. 2008.3.17


40) “예를 들면, 민영화된 미국의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금제도와 환자, 의사, 간호사, 노동자들로 구성된 민주주의적 조직체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대안적 사회로 모색해볼 수 있다. 이행강령의 프로그램이 현재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Dan La Botz. 2008).”


41) 칼 맑스. ��자본론��, 제3권 제3편 제15장 법칙의 내적 모순들의 전개, 제3절, p. 313.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9년 인쇄판.


42) 칼 맑스. 같은 책, p. 313.


43) International representative for the United Electrical Workers (UE).


44) Benjamin Dangl. Firing the Boss: An Interview with Mark Meinster, Organizer of the Chicago Factory Occupation. Monthly Review. 2008.



45)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잘 계몽되고 계급의식적인 전위이다. 그들을 팔짱을 낀 채 숙명론적 방식으로 ‘혁명적 상황’이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늘 그렇듯이 지금도 사물의 발전을 촉진하고 사태의 진행을 가속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멋대로 대중파업 ‘구호’를 불쑥 내거는 식으로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일은 무엇보다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광범한 층에서 혁명적 시기의 필연성과 혁명적 시기를 구성하는 내적인 사회적 요인들, 그리고 그 정치적 결과들을 설명해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로자룩셈부르크, 최규직 역. ��대중파업론��. 풀무질. 1995.


46) ‘임박한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의 해법은 무엇인가?’ 정종남, 백일, 허영구, 박윤천, 김창곤 등 발제.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공동투쟁본부, 투기자본 감시센터, 쌍용자동차 지부. 2009.4.2


47) 맑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며 얻을 것은 전세계라다”라고 하였다. 참고: 맑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범우사, 1989.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45호(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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