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PC는 빼앗겼어도 백두산 말발굽 소리 들었네

주간<교육희망>-트래블메카 고구려 백두산 1차 여행기

#7월 23일 첫날- 대련과 단동
알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중국산인데…


7월 23일 오후 6시 45분(중국시간) 중국 다롄(DAlian)은 안개가 자욱했다. 공항은 한산했다. 청사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건물도 하늘도 담배연기처럼 뿌옇다.

고조선의 중심지이며 4세기 고구려인들이 말달리던 고장은 이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다롄’이라는 이름은 구한말쯤 러시아인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동방의 멀리 떨어진 도시’란 뜻이란다.

우리 일행 23명은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이 버스 오른쪽에는 ‘지역 공부방 지원 2007 여름 고구려+백두산 5일 문화답사 공동주관: 교육희망, (주)트레블메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전교조란 말이 빠진 것이 아쉽긴 했지만 ‘교육희망’이란 글귀가 반가웠다.
첫식당, 첫식사

공항에서 5분 떨어진 곳에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반찬은 예닐곱 종류가 나왔다. 푸짐했다. 더러 중국 고유의 향내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다들 입에 집어넣었다.

이제 우리 땅 신의주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단동으로 달릴 일만 남았다. 300킬로미터 거리다.

단동을 막 나서니 비사성이라는 곳이 보인다. 안개 때문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버스 왼편으로 보이는 산이 해발 600미터 비사성이란다. 그 유명한 고구려 산성 말이다. 그냥 지나쳤을 평범한 산인데 가이드의 말을 듣고 보니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7시쯤 출발한 버스가 단동에 들어온 것은 4시간 후인 오후 11시쯤. 관광버스가 골목으로 들어서는가싶더니 23층 큰 건물 앞에 섰다. 3성급 단동국제주점이다.

이 곳 전망대격인 23층 식당에서 보면 신의주가 한눈에 보인다고 한다. 아침을 먹으면서 북조선을 바라봐야겠다.

단동 시내에 있는 우리 나라 연예인 얼굴.

호텔은 겉보기는 좋은데 내부 시설은 낡았다. 이불이 좀 더 깨끗했으면 좋겠다. 바닥도 그렇고. 에어컨도 약하다 약해~~

이번 여행은 강행군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6시다. 지금 시간은 1시 18분. 어서 자야겠다.

#7월 24일 둘째날- 집안과 통화
플래카드 들고 사진 찍지 못하는 집안과 백두산


24일 오전 5시. 처가 나를 깨웠다. ‘밥 먹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행은 원래 처와 아들(초등학교 2학년)은 가고 나는 서울에 남아서 두 살 먹은 둘째 아들을 돌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 어찌되다 보니 아들 대신 내가 따라 나서게 되었다.

4박5일 참가비는 비자 비용까지 65만5000원. 아이 엄마가 내 것까지 모두 내주었다.
처가 나를 깨운 건 '시간 착각' 때문이었다. 한 시간을 더 자도 되는데 한국시간과 헛갈리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김일성 부대가 활동했다는 관전현 노령산맥이 보인다.

아무튼 일찍 일어난 김에 세수를 하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앞에는 큰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문은 닫혔다.

중국인들 특유의 부지런함 때문일까. 200미터 정도를 걷는 동안 집단으로 모여 체조를 하는 사람들 모임이 세 군데나 눈에 띄었다. 물론 바닥은 구정물이 흘렀다. 악취도 쿨쿨...

간판에 걸려 있는 연예인 얼굴은 둘에 하나는 한국 연예인이다. 최지우, 전도연 얼굴이 많이 보였다. 이들은 한국 연예인한테 돈을 주고 허락을 받은 것일까.

호텔 23층 식당. 마치 남산에 있는 서울 타워 레스토랑의 그것처럼 바닥이 돌았다. 나는 일부러 압록강 너머 북쪽 신의주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변변한 건물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안개 때문에 흐릿했다.
집안시 골목길.

오전 7시 30분 우리 버스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는 집안에 가기 위해서다.

버스는 압록 강변 위화도 바로 앞을 달렸다. 안정복 가이드는 말했다.

“이 곳 단동은 신시가지라 밤이면 불이 휘황찬란한데 강 건너 북쪽 신의주는 깜깜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안 가이드는 중국 집안에 있는 한 국립고교 교사라고 한다. 한국어를 중국아이들한테 가르치는 게 그의 과업이다. 그는 가이드 역사 시험에서 당당히 1등을 해서 그런지 우리 역사에 대해 꼼꼼히 알고 있었다. 햇수까지 외고 있었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대오가 여기 노령산맥에서 끝까지 일본과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장수왕릉 위로 구름의 기운이 뻗혔도다.

관전현이란 곳을 지날 때 그는 산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중국에서는 이렇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 2시 20분쯤 집안시에 도착했다. ‘고향집’이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름에서 보여주듯 향채가 덜 섞여 있어 일행은 맛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2002년 8월 이 곳에 왔을 때와 별반 다른 점은 없었다. 몇 해 전만 해도 호남 지방에 가면 항상 그 건물이 그 건물이었듯 이곳도 비슷해 보였다.

버스는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부른다는 장수왕릉으로 달렸다. 오후 3시 10분이다. 시멘트로 깔린 1차로를 지나니 장군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다다랐다.
고구려 옷을 입은 중국 안내원들.

장수왕릉 바로 앞에 있던 주차장은 한 50미터쯤 뒤로 물러서 있었다. 대신 주차장이었던 곳은 떼가 씌여 있었다. 왕릉에 혼이 있다면 조금은 더 편안하게 되었을 것 같다.

장수왕릉에 다가서는데 구름의 기운이 왕릉 위를 감쌌다. 마치 장수왕이 구름으로 번개를 만든 것처럼 보였다. 예사롭지 않았다.

집안과 백두산을 갈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고 안 가이드는 힘주어 말했다. 이곳에서는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무슨 무슨 여행단’이라고 적힌 단순한 내용도 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은 다음날 백두산 바로 밑에서 플래카드를 빼앗겼다. 중국 공안이 나오더니 뭐라고 큰 소리를 내면서 안 가이드가 든 플래카드를 낚아채 갔다는 것이다. 나는 화장실에 가 있느라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환도산성에서 서로를 소개했다.

플래카드라도 앞에 놓고 백두산 천지에서 단체 사진을 찍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잘못하다간 천위엔, 이천위엔씩 벌금을 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공안이 욕만 하고서리 플랭카드를 갖고 갔으니 얼른 줘버리고 말았어요. 한 고비 넘겼습네다.”

가이드는 상당히 얼어 있었다. 중국이란 곳이 아직도 공안한테 꼼짝 못하는 사회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백두산 서파쪽 천지엔 다음과 같은 현판이 붙어 있다. ‘어떤 조직과 개인은 국경 지역에서 제사, 례배, 앉아버티기를 금지해야 한다.’

2002년 방문 당시 우리 일행은 천지에 소주잔을 놓고 절을 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앉아버티기’에 해당되어 금지 사항이 된 것이다.
아! 압록강. 집안에서 압록강을 봤다.

“동북공정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요. 사실 한국 관광객들의 탓도 있어요. 플래카드에 고토회복이니 ‘만주는 우리 땅’이니 적어 놓고 사진을 찍었으니 중국 당국이 기분이 상한 것이지요.”

가이드의 해석이다.

다음으로 조심할 점은 비디오 촬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동영상을 싫어할까.

우리 일행은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 들른 뒤, 100미터 쯤 뒤에 있는 호태왕릉에 올랐다. 석실은 장수왕릉보다 절반 크기였다.

사실 후대 학자들이 장수왕릉, 호태왕릉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 진짜 이 분들이 이곳에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오후 4시 48분, 버스를 타고 간 곳은 5호분묘다. 고구려 왕족으로 추정되는 무덤 다섯 개가 몰려 있어서 붙인 이름이란다.
백두산 1300계단.

집안 지역 중국 안내원들은 몇 해 전부터 하늘 색 옷을 맞춰 입었다. 윗옷엔 검정색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습이 바로 ‘삼족오’다. 이들이 입은 옷이 다름 아닌 고구려 옷인 것이다.

5호분묘 가운데 한 무덤의 관 속에 들어갔다. 한 교사는 ‘용의 눈물이 보였다’고 했다. 습기 때문에 용 그림 눈 주위에 이슬이 맺힌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랬다.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소중한 그림들은 결로 현상 때문에 지워지고 있었다. 중국 쪽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면서 분묘의 돌 틈을 시멘트로 메우는 공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공기 순환이 막히니 ‘용의 눈물’이 생긴 것이다.

환도산성에 올랐다. 5년 전엔 없던 전망대가 그럴 듯하게 서 있었다. 당시엔 돌무지였던 곳이 3, 4미터 높이의 성곽으로 바뀌어 있었다. 땅을 파니 성곽이 있었다고 가이드가 말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돌무지를 그럴 듯하게 다시 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천지는 살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통화로 향했다. 인구 30여만 명의 중소도시 통화. 이곳에 단동과 대련, 집안과 달리 조선족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묵은 곳은 통화 위용호텔. 3층짜리 작은 호텔이라 더럽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새로 지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깨끗한 모텔급 이상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몇몇 교사들과 함께 발마사지를 받았다. 가격은 80위엔. 40분 정도밖에 받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시원했다. 원래 가격은 이보다 약간 낮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버스가 우리를 태우고 간 것과 가이드가 안내하는 수고를 했으니 이를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호텔 4층 발마사지 비용은 40분에 50위엔이다. 약식인 듯한데 제법 시원했다.

밤 12시. 남자 5명은 길을 나섰다. 술을 먹기 위해서다. 물론 안 가이드도 따라 나섰다. 통화 기차역 앞 개고기 집에 자리를 트고 앉았다. 개고기는 늦은 시간이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천지 앞에서 찰칵.

오리 머리와 닭발, 그리고 작은 가재 튀김을 시킨 뒤 맥주(비주)와 빼갈도 시켰다. 얼마나 먹었을까. 옆에서 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혁대로 머리통을 갈겼다. 방금 옆 자리에 서 술을 먹던 사람들이었다. 맥주 병도 날아갔다.

웃통을 벗은 사람은 더 싸울 기세였다. 다른 사람은 머리에서 피가 났다. 공안이 차를 끌고 왔다. 나는 겁이 났다. 술을 먹던 자리에서 좀 물러나 싸움을 지켜봤다. 싸움이 끝나자 방금 전까지 싸우던 사람들이 우리한테 다가왔다. 그러더니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술을 먹으라고 손짓했다. 얼굴은 상당히 미안한 낯빛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시킨 대로 먹던 자리로 돌아와 술을 끝까지 먹었다. 새벽 두시까지 먹었던가.

#7월 25일 셋째날- 백두산
하늘엔 연녹색 옥이, 천지엔 진녹색 옥이


7월 25일 오전 7시 15분, 드디어 백두산으로 출발했다. 통화에서 걸리는 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 260킬로미터를 달리면 도착한다고 한다.

정오쯤 우리는 산속 평지를 달렸다. 안 가이드는 ‘이곳이 바로 개마고원’이라고 설명했다. 산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들판에 나무만 무성하게 서 있었다. 야생화와 풀도 많았다. 개마고원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구나.

1300계단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백두산 중턱까지 온 뒤 처음 본 광경이다.
천지 아래 야생화.

사실 5년 전에 트럭을 타고 이곳까지 왔다. 비포장도로를 덜컹대고 달려 이 계단까지 왔는데 이제는 중국 쪽이 마련한 최신식 버스를 갈아타고 잘 포장한 도로를 따라 오게 된 것이다. 중국은 듣던 대로 백두산 관광지 꾸미는 데 큰돈과 공을 들인 게 분명했다.

한 30분을 걸어 올랐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이 컥컥 찼다. ‘보인다 보여!’란 목소리가 주변에서 들렸다. 앞으로 달려갔다. 확 하고 파란 기운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녹색 천지였다. 백두산 천지!

하늘엔 연녹색 옥이 떠 있고, 그것을 담은 천지는 이보다 더 진한 진녹색이었다.

우리는 꽃에 사진기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다. 서로를 찍어주기도 했다. 그냥 천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전체 사진도 찍었다. 물론 플래카드는 빼앗겼기 때문에 앞에 두를 수는 없었다.

일행 가운데엔 가마를 타고 오른 이도 있었다. 값은 260위엔(3만원 정도). 인부 3명에게 팁 10위엔 정도까지 쥐어 줘야 하니 300위엔이 든다고 보면 된다. 아주 어린 아이나 어르신은 가마를 이용해도 좋을 것 같다. 값은 비싸지만.
졸본성에 가려면...

통화 위용호텔로 돌아오는 일행의 얼굴은 모두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모두 땡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하늘엔 조각 구름이 떠 있고, 천지엔 푸른 기운이 감도는 그 장관을 안개 한 점 없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지를 이렇게 고스란히 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7월 26일 넷째 날- 환인과 단동
역사는 바뀌었지만 자연은 말해주었다


7월 26일, 사실상 마지막 일정이다. 환인으로 출발한 시간은 오전 7시였다. 원래 이날 점심을 먹은 뒤 환인조선학교를 방문하기로 했지만 어그러졌다. 차가 말썽을 부려 한 시간가량 일정이 밀렸기 때문이다.

환인은 졸본성이 있는 곳. 주몽대왕이 나라를 처음 세운 그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만주족이 전체 인구의 20% 정도인 터라 만주족 자치구가 되어 있다고 한다.
북쪽 군인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주었다.

오녀산 산성엔 주몽과 오마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집터도 그랬고, 우물도 그랬다.

사방이 절벽이다. 오로지 통로는 사람 한두 명이 다닐 만한 바위 틈새. 하지만 이 바위를 지나면 평지가 나온다. 산꼭대기에 웬만한 마을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곳에 오르려면 990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가마도 있다.

오녀산 꼭대기 전망대에서 비류수(혼강)를 보았다. S형 태극 모양의 팔괘가 보인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S형 물줄기라고 하는데, 나는 이를 잘 가늠하지 못했다.

중국에서도 이곳은 신성한 산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많았다. 출세와 청명을 바라는 이들의 몸과 마음은 오녀산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 시절 다섯 명의 자매가 도적질을 한 곳이라 5녀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비류수에서 배를 타고 오녀산을 바라보면 초기 졸본성 그 절벽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날 일정에는 빠져 있었다.

졸본성을 둘러보고 ‘고려성’이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1층은 식당이고 2층과 3층은 여관이었다. 일단 야외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는데 반드시 옆에 있는 1층 식당에서 비류수를 보기를 권한다. 이 비류수 건너에 오녀산이 보인다. 그 주몽의 산세가 정확히 보인다.

단동과 환인, 집안, 백두산 이곳의 산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한국의 그 산과 빼닮았다는 것이다. 산세도 같고 나무와 풀도 같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건물은 달랐지만 자연은 꼭 같은 것이다. 백두대간이라 그런 것일까. 역사는 바뀌었지만 자연은 말해주었다. 이곳이 한국의 자연과 같은 곳이라고.

4시간을 달려 다시 단동에 왔다. 압록강가에 다다른 우리는 유람선을 탔다. 끊어진 철다리 밑을 지났다. 그리고 간 곳은 북쪽 신의주 바로 앞. 한 5미터 앞에 북한 선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을 건네자 손을 흔들었다. 북한 해군복을 입은 병사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도문이나 집안보다 이 곳 단동 유람선이 북쪽에 더 가까이 갔다. “서로 말이 통하니 한민족이지. 중국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잖아.” 바로 옆에 있던 한 교사가 혼잣말을 했다.

묘향산이란 북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조선족 학교를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당을 바꿔 마련한 일종의 특식이었다. 나온 음식들은 우리 입맛에 정확히 맞았다. 일행은 중국 술을 곁들여 북쪽(?) 접대원이 차려준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곳은 정통 북한식당은 아니었다. 복무원들의 태도나 실내 인테리어 따위를 봤을 때 왠지 ‘짝퉁’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동엔 북에서 중국과 함께 운영하는 식당이 4개 정도라는데, 이 묘향산이란 곳도 과연 이 범주에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압록강변을 걸으며 북한 우표집을 샀다. 이 게 다음 날 인천공항에서 산통이 났다. 국가정보원 직원 두 명이 와서 우표집을 왜 샀는지 조사를 했다. “기념으로 우표를 산 것이 잘못인가. 우표집도 사지 못하냐”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은 “다른 나라 것은 다 되지만 북한 것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별일은 아니지만 우표집을 찾아 가려면 정식 허가를 받아라. 가봐라”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이 오기까지 공항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우리나라에서 북한 우표를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한나라당도 북한 신문과 방송을 개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우표 하나 사기도 쉽지 않은 남북 현실이다.

26일 마지막 저녁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우리 일행은 함께 모여 술을 먹기로 했다. 안 가이드가 호텔 주변 장소를 물색해보니 좋은 곳이 없더란다.

결국 단동국제호텔 3층 바를 이용하기로 했다. 호텔 바인지라 값이 비쌀 줄 알았더니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칭다오 맥주 큰 것 한 병에 20위엔이었다. 마른안주는 10위엔이나 5위엔 정도.

이곳은 무척 깨끗했다.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양주 잔과 칵테일 서비스가 있었다. 우리 일행 어른들 18명이 모두 앉아 술을 먹기엔 그만이었다.
단동에서 동요에 맞춰 율동을 했다. 그들은...

간사할 간자를 쓰는 우리의 놀이꾼 ‘박재간’ 형님이 사회를 봤다. 서로 이름 알기 놀이를 한 뒤 느낌을 나눴다.

자정을 넘기고 술좌석에서 곯아떨어지는 이도 있었다. 맥주를 한 30병 먹었을까. 그리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참이슬 팩 다섯 개도 모두 먹어 치웠다. 우리가 맘껏 먹은 술값은 모두 990위엔. 한 사람마다 55위엔(7천원 정도)씩 주머니를 털었다.

#7월 27일 다섯쨋날- 단동과 대련
고구려에서 다시 한반도 남쪽 땅으로


27일 마지막날 일어나는 시간도 새벽 6시쯤이었다.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다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안내해 준 안승덕 가이드는 “시간과 공간이 작아지는 세상이기 때문에 꼭 다시 만날 것이라 믿습니다”란 말을 뒤로 한 채 우리한테 손을 흔들었다.

우리 일행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국 수속을 밟았다.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쪽 땅으로 다시 들어서기 위해서다.

덧붙이는 말

\'취재 뒷이야기\' 등 더 자세한 내용은 개인홈페이지인 윤근혁의 교육돋보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교육돋보기edu.mygoo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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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grgu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