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교육민주화운동 20년사(24) 교직사회의 지각변동, 교련 탈퇴 운동





전교협의 탄생은 교직사회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오랜 세월 분단체제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 주입 장치로 기능했던 학교교육의 모순이 교사들의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모순을 온존시켜온 주축은 물론 지배 권력의 제도적 폭력이었다. 4·19교원노조의 핵심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교직사회에 공포감을 조성한 국가보안법과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통제하는 국가공무원법, 사립학교법 등이 그것이다. 보조축은 줏대도 철학도 없이 ‘조령모개’로 국민을 헷갈리게 한 교육정책당국과 어용단체의 대명사인 대한교육연합회(교련-한국교총의 전신)였다.



1987년 하반기 교사운동도 이런 상황에 맞추어 위로는 ‘교육법 개정 운동’이, 아래로는 ‘교련 탈퇴 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일 합법 교원단체의 지위를 누리던 대한교련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은 컸다. 이를 바탕으로 전교협은 결성 직후 교련을 교육민주화의 걸림돌로 규정하고 그 정체를 대대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했다. 당시 교련은 사실상 가입 탈퇴의 자유가 없는 조직이었다. 제왕처럼 군림하던 교장들은 대개 교사들을 발령과 동시에 강제 가입시켜 가입 사실도 모른 채 ‘교육회비’만 떼이는 경우가 많았다. 교사들의 눈에 비친 교련의 모습은 ‘카멜레온’이었다. 일 년에 달랑 수건 한 장 주고 아무 활동도 없이, 방학책 장사(80년부터 9년간 12억 원 부당이득 취함-88년 국감자료)나 하는 부도덕한 존재였다.



정치적 행보는 더욱 가관이었다. 4·19혁명 시기 한국교원노조연합회가 교련탈퇴운동을 전개하자 느닷없이 대의원의 2/3, 임원의 1/2를 평교사로 뽑도록 정관을 개정했다가 5·16 후 폐지, 군사쿠데타 정권의 사회단체등록증 제1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다.



1966년에는 정부 지원금으로 교육회관을 건립했고, 제30회 대의원회의(1973.1.12)는 유신선포로 종신집권을 획책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아래 추구되는 모든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의, 제40회 대의원회의(1981. 12.18)는 ‘역사의 일대전환을 마련한 (전두환정권의) 7·30교육정상화 조치의 의의를 새롭게 인식, 국민정신교육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결의했다. 이런 어용성은 교련 회장에게 종종 총리나 국회의원 등으로 출세의 길을 열어 주었다.



운이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981년 정범석 회장은 국회문공위원과 민정당 고위관계자들에게 최고급 화문석을 선물하고 호화판 향응을 베풀어 (돗자리 사건) 사임했고, 1987년 7월에 재선된 정씨는 이듬해 1월 퇴임 직전의 전두환에게 전국 교육장, 시·도 교련회장, 교장 322명의 서명날인을 받아 송공의 병풍을 진상, 불명예 퇴진했다.



이런 사정을 몸으로 체득해 온 교사들은 6월 항쟁이 열어 놓은 공간 안에서 새롭게 교련탈퇴운동을 전개한다. 앞장 선 지역은 전남이었다. 전남교협은 결성과 동시에 ‘교육회비 납부 거부 운동’을 전개하여 한 달이 채 안 되어 95개교에서 2천여 명 넘게 탈퇴했다. 전원이 탈퇴 한 학교도 5개교였다. 당시 「호남교육신보」조사에는 ‘교련이 제 역할을 못한다’(97.9%), ‘탈퇴하겠다’(64.3%)로 나타났다.



전교협도 결성 당일 문교당국에게 ‘어용대한교련 일방적 지지 철회와 교육민주화 운동 동참’을 촉구하고, 실천방침 중 하나로 교육회비 납부 거부운동 계속 추진을 결의했다. 그 해 11월 두 달 만에 전남 5천, 서울 6천여 명이 탈퇴하였고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 교련 관계자가 밝혔다. 32만을 호언하던 회원 수가 바닥을 모르게 빠져나갔다. 이 때 구원투수(?)로 임명된 하용도 사무총장이 열 평도 안 되는 서대문구 냉천동 전교협 사무실을 방문하여 전교협과 교련의 상호협조 모색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는 운전수가 달린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 교련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교련 탈퇴운동의 열기는 전교조 결성 직전까지 식지 않았다. 89년 1월 서울 청구상고 교사 22명이 ‘납부 회비 전액 환불’ ‘교련 해체’를 요구하며 전원 탈퇴하기도 했다. 가장 늦게 출범한 충북교협은 89년 초 매월 13일을 ‘교련 탈퇴의 날’로 정하여 보은군 11개교에서는 2월 봉급날을 앞두고 전체 평교사의 46%에 해당하는 132명이 일거에 탈퇴하기도 했다. 국회문공위원장 정대철 의원과 한국외대 김홍규 교수의 조사에서 교련회원의 73%가 교련을 부정하던 시절이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민곤·서울고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