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 50분 전투경찰 200여 명 철갑차 2대 군용차 1대 짚차 1대가 학교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고 전경 150여 명이 학교로 쳐들어왔다. 교장선생님이 감금되었다나! 앞장서서 들어온 사람이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분이라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부 체육담당 손0현 선생님이 목장갑을 끼고 사복경찰· 전경과 함께 단지 교장만을 빼내기 위해서 학부모, 졸업생, 재학생(30명 정도)을 상대로 무참히 쳐들어 왔던 것이다...권0룡, 김진0, 김0호, 어0혁 등 비서명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을 상대로 더 난폭한 폭행과 폭언을 사용했다는 것이 우리 학생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무술경찰이 교장실에 침입해 유리창 비품을 던지고 깨뜨리고 해서 18명이 부상당했다. 이렇게 맞고 때리는 동안 사복경찰은 김숙희 교장을 빼 가고...”(서울 정화학원 민주화 투쟁 일지 87.11.19 중에서)
11월 4일 진경환 이석천 박상규 등 13명의 교사가 누적된 학교의 비리를 중앙현관에 대자보로 폭로하면서 서울 정화여상 교육민주화 투쟁이 불붙었다.
이 투쟁은 7월1일 일어난 경기 파주여종고 전교생 농성 투쟁과 함께 6월 항쟁 이후 전국에서 줄을 이은 중·고교 사학민주화 투쟁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박철웅의 독재왕국 조선대의 학원민주화 투쟁은 1980년 서울의 봄부터 시작, 1987년 상반기 고양되다가 하반기에는 113일의 장기항전으로 이어졌다.) 여느 사학민주화투쟁과 큰 차이 없이 이 두 학교도 재단 비리와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파주여종고는 강제노역과 성폭행 등의 이유로 학생들이 먼저 투쟁에 나선 후 교사와 학부모가 결합했고, 정화여상은 재단의 비리에 양심적인 교사들이 문제 제기를 하고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스스로 투쟁의 주체가 되었고 뒤에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동참했다는 점이다.
예나 제나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중학교의 30%, 고등학교의 50% 이상(서울은 70%)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의 사립학교는 구조적으로 비리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과중한 교육예산 부담을 학부모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학 설립을 유도했고, 사학자본의 비정상적인 돈벌이를 묵인·비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악덕 사학’이라 불린 학교 교주들의 모리 수단은 벼룩의 간을 빼먹을 정도로 치졸하고 집요해서 교육자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교사라면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4년 3월 이후 연거푸 터진 의정부 복지고(현 영석고)투쟁을 필두로 87년 하반기에 집중 전개된 나주 세지중, 순천상고, 공주 신풍중·종고, 서울 유성전공, 서울 명신고 등의 정상화 투쟁과 88년에 요원의 들불처럼 퍼져 나간 사학민주화 투쟁, ‘채용 기부금 반환 투쟁’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된다.
수백 억대가 넘는 재산가인 이사장(교장의 동생)의 족벌체제로 운영된 정화여상 재단은 학생들을 KBS(88올림픽 D-365)에 출연시켜 받은 450만 원을 횡령하고 수재의연금 중 일부(25만 원)를 착복하는가 하면, 수학여행이나 교내 협동조합 운영, 전입생, 유령교사, 재단수익사업, 경리 부조리 등을 통한 숱한 비리를 저질렀다.
그러나 학교 시설 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고, 교지는 ‘10년에 한번 빼꼼 얼굴을 내밀고’ 학급신문 발행도 ‘학교가 가난해서 선생 월급도 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서 못하게 하고, 학생회비마저 횡령하면서 장학금은 1기분 수업료 면제 1명뿐이었다. 이사장의 친척인 학생주임은 훈계를 한답시고 학생들에게 ‘갈보보다 못한 년’, ‘588에 가서 몸이나 팔 년’ 등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학교 측은 교사들이 학교운영 개선을 요구하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았다.
교사들의 폭로로 사태를 알게 된 학생들은 스스로 투쟁 주체가 되어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여 재단이사진과 비리교사 13명 퇴진을 주장하며 운동장 농성, 수업거부, 백지동맹 등 불복종운동을 전개하고, 학교 일과를 자율로 운영하며, 폭압을 뚫고 두 차례 시교위 항의 시위, 경찰서, 왜곡보도 언론사 항의 시위와 규탄대회, 대통령 후보 유세장 가두선전 등으로 12월 방학도 없이 60일을 뜨겁게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