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요금 논란은 일종의 계절성 논란이다. 가스요금이나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는 계절에 불쑥 솟아올랐다가 날이 풀리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럴수록 본질적 해법은 요원해져 왔다. ‘요금 폭탄’ 프레임의 자극적 보도와 선심성 정책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차분히 문제를 복기하기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다만 지난겨울의 가스요금 인상을 지나치며 기후운동 진영은 ‘414 기후정의파업’을 계기로, 좋든 나쁘든 논란의 해법을 주밀하게 토론할 기회를 다시 한번 만들었다. 기후정의파업 조직위원회는 핵심 요구사항으로 ‘전기·가스요금 인상 철회’를 내걸었다. 앞뒤로 단서가 붙었고, 몇 번의 수정이 있었지만, 이 문구 자체는 최후까지 견지됐고 가장 논쟁적인 구호가 되었다.
거칠게 요약해보겠다. 기후운동 진영 내에는 전통적으로 ‘에너지요금 합리화’를 주장하는 조직들이 있었고, 기후정의파업은 ‘에너지 공공성 강화’를 더 전면에 내걸었다. 이 두 담론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충돌한 지점이 에너지요금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에너지요금 합리화론의 요체는 전기·가스 등의 에너지요금에 충분한 환경 비용이 부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에너지요금은-원별 차이가 있으나-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에 비해 대략 2~3배가량 저렴하게 공급돼 왔으며, 심지어 원가 이하로 공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값싼 에너지요금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가시화된다. 첫째는 에너지 수요관리의 측면에서 가격이 수요 조절 기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에너지 사용도 줄어야 하는데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화석연료와 핵발전으로 발생하는 막대한 환경·사회적 비용을 누락·은폐함으로써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이다.
한편, 에너지 공공성 강화를 위한 요금 인상 철회 주장은 다른 차원의 접근을 시도한다.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 에너지 사용의 경우 종래처럼 ‘시장주의적 상품’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너지 사용에 부과돼야 하는 환경 비용은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부유층과 대기업이 부담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필수적 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요금은 동결함이 마땅하다. 기후정의파업 조직위는 세부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예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월간 전력 사용량 200kWh 미만을 ‘필수적 에너지’로 상정하면, 이 구간에 한정해 ‘원가주의’ 등 시장 원리를 적용하지 않도록 ‘탈상품화’할 수 있다. 즉, 기초적 수준의 에너지는 공공재 또는 필수재 성격을 가짐으로 상상하기에 따라서는 요금 동결에서 나아가 무상 공급도 가능할 것이다.
두 주장이 모두 각각의 맥락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단순히 현재 국면에서의 요금 인상 여부라는 납작한 논쟁으로 이를 축소하는 것은 어리석다. 오히려 각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고 보완하는 토론을 통해 에너지 요금 합리화와 에너지 공공성 강화라는 각 테제의 완결성을 갖출 기회로 만들어야 할 테다.
그러자면 우선, 작금의 에너지요금 요금 인상 추진 상황에 대해 먼저 톺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요금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기업에서 산정하고, 산업부의 인가를 받게 돼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재부와 협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인한 국제 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상승에 우리도 영향을 받은 것은 요금 산정 과정에 ‘연료비 연동제’가 있기 때문이다.
연료비 연동제는 석탄·석유·가스 등 연료의 원가를 에너지 공급 가격에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 원가주의적 접근이 공공적 필수재를 상품화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공공 영역의 사회적 형평성을 위협하고 민영화의 물꼬를 트는 것으로 해석한다. 일견 적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전통적 환경진영이 주장해 온 ‘에너지요금합리화’가 ‘원가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걸 밝혀두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에너지 영역은 분명 시민들의 필수적 생활을 지탱하는 공공재·필수재의 기능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공성을 지탱하는 것이 화석연료라는 모순이다. 한국의 최종에너지 소비를 보면, 석유(51.5%), 전력(20.6%), 석탄(13.2%), 천연가스(11.4%)로 화석연료 비중이 압도적이다. 전력 역시 화석연료로 생산하는 전력의 비중이 60%가 넘고 약 25%는 핵에너지에 의존한다. 즉, 우리 에너지 공급 시스템에서 에너지를 원가 이하로 공급할수록 오염원의 유통·소비를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물론 환경진영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원가 반영’이라는 쉬운 해법에 기대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환경진영의 에너지요금 합리화 주장은 오히려 정부와 시장의 ‘원가주의’ 너머를 지향한다고 봐야 한다.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유통되는 가격(원가)에조차 기후·환경·생명 비용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인간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은 화석연료의 채굴과 유통·소비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비인간 생명에 대한 총체적 파괴와 착취·추출을 수반한다. 하기야 이것을 가격이라는 형태의 비용으로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도 불충분하다. 그렇기에 총소비량을 줄이는 것이 가장 근원적 해법이지만 그럼에도 결국 이 문제는 어떻게든 환경 ‘비용’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가 지속되는 한-에너지 부문이 완전히 시장화되건 공공통제를 강화하건- ‘값싼 에너지’ 주장은 이 딜레마를 회피하는 것이다. 굳이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더라도 에너지는 값비싼 것이다.
공기업의 적자 누적을 회피하고 지속적으로 공적 재원 투입만을 주장하는 것도 기후위기 대응의 관점에서 되돌아볼 일이다. 한전의 적자는 30조, 가스공사 미수금은 9조 원대다. 직접적으로 여기에 투입될 수 있는 재정은 ‘전력산업기반기금’인데 불용액을 제외하면 연간 약 2조 원대가 운용된다. 물론 대기업과 부유층에게 횡재세 등 더 많은 에너지 비용을 걷고, 전력산업기반기금에 더해 정부 일반 회계를 끌어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기후위기 대응 비용이 꾸준히 상승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투입돼야 하는 재원과 경쟁할 가능성도 높다. 그런 것까지 고민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공공 주도의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탈화석연료와 에너지 공공성 강화를 동시에 이루려면 재원에 대해서 무책임한 태도여서는 안 될 것 아닌가.
그런가 하면 환경 비용, 원가 반영에 기반한 일률적 요금 인상이 가지는 허점도 명백하다. 시민들의 삶에 ‘필수적 에너지’ 양을 산정하지 않고 해당 주장만 반복할 경우 에너지 가격 부담이 일상을 위협하는 경우가 생긴다. 더구나 대부분의 경제적 하위 계층의 주거 열효율이 낮기 때문에, 하위 계층은 누린 온기에 비해 더 큰 비용을 내야 하는 불평등이 발생한다. 선별적 가스요금 할인이나 에너지 바우처 제도와 같은 선별 복지를 통해 이를 사후적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보론은 불성실하다. 당장 바우처 지급 대상 12.7%가 신청제의 장벽으로 기초 복지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필수 에너지 보장량이 없는 한 에너지 바우처의 보장력은 들쑥날쑥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에너지 빈곤층의 필수 에너지 보장에만 초점이 맞춰진 복지 제도는 계층 간 에너지 불평등 문제를 결코 해소할 수 없다.
그러니까 현재의 화석연료-에너지 시스템, 공기업 구조 안에서 에너지요금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협소한 골짜기에 전선이 놓여선 안 된다. 생태적 관점에서 요금을 합리화하자는 것과 에너지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담론이다.
단기적으로 운동 ‘구호’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운동의 핵심적 논점을 확장해야 한다. 공공성이 담보된 에너지요금 합리화는 무엇이겠는가. 하나의 정답만 있을 리는 없다. 양측의 주장은 통합·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비용을 충분히 부과함으로써 요금을 합리화하고, 신청주의·선별주의를 벗어난 에너지 복지 확대로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 거꾸로 아주 필수적 에너지에 한해 저비용 혹은 무상공급함으로써 기초적 공공성을 확대하고 탄소세·누진제·횡재세·지역별 차등제 등으로 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높은 비용을 적정 대상에게 부과하고 이 환경비용을 사회적으로 가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동적·사회적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렇게 기계적으로 두 주장을 통합할 수 없을 것 같다. 양 담론이 모두 더 숙성될 필요가 있다. 에너지비용에 합계돼야 하는 환경비용은 도대체 얼마만큼일까? 산업계가 사용하는 에너지는 모두 우리 삶의 ‘필수적 에너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너지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체계·공기업 구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편하는 게 좋을까? 에너지를 탈상품화한다면 ‘요금’이 아닌 형태로 비용이 청구돼야 하는 건 아닐까? 아직 수많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의 핵심은, 기후위기 극복과 사회 공공성 강화가 상보적 관계를 이루는 해법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요금 인상 철회’ 구호에 운동이 발목 잡히는 것은 오히려 수세적이고 지엽적 국면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에너지 부문에서 화석연료를 빠르게 퇴출할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는 에너지산업·정부 조직 구조를 상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공공성을 주장하면서 기후 대응은 지연시키는 꼴이 되거나, 에너지 부문 민영화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