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곧잘 난 사랑이란 거대한 무력 앞에서 꾸역꾸역 ‘맹세’란걸 했었어요. 그땐 달리 무얼 더할 방도도 없었으니까요.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그런데 잉여 감정이 사라지고, 술기운에 들썩이던 세포도 숨을 죽이고, 도저히 철들 것 같지 않은 나이에도 봄날은 가고 나니 찬란하게도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이런 제기랄. 잉여 이성을 부족 상태인 감정에 자꾸 들이붓던 모든 행위들이. 또다시 사랑을 하겠지만 이젠 ‘맹세’라는 걸 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국기에 대한 맹세’라니요. 한때 아무도 그걸 거절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지요. 맹세를 대행 수령하는 선배가, 담임이, 학생주임이, 교장이, 상사가 일수쟁이 도장 찍듯 그걸 거둬들였으니까. 나도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누구라도 그걸 거절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난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그 우스꽝스런 광경이 떠올라 온 몸에 소름이 끼쳐요.
2002년이었던가, 개미 새끼들 까지도 경적을 울리며 국기를 흔드는 풍경이 가관이라 싶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고 말한다면 정신 감정이라도 의뢰해야 할까봐. 그건 차라리 거대한 “국가 이미지 사기“에 가까워 보여,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어느새 내 정신과 나의 의지와 나의 행동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가끔 나의 공상들은 너무 막막하고 기가 막혀서 나조차 질려버려. 이런 일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맹세하며 잠이 들고 또다시 일어나 신문을 펼쳐들면 이런 일들이 틀림없이 어제의 스포츠문화정치경제사회면의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으니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이야.
내게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런 일이라고 할까. 여기가 자구 또 자도 해가 솟지 않고 늘 밤인 나라가 아니라고 한다면 말이지. 정말이지 그 누군가에 묻고 싶어.
“나에게 그 국가를 하루만 빌려줄 수 없나요? 이놈도 그따위 맹세를 통해 국가에 대한 뭔가 뭉클함이 한 번 더 생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될 텐데... 그럼, 쉬이 편할 텐데. 이래 뵈도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애국주의자였답니다. 지금은 당연히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런데 감히 어찌 맹세 따위를 할 수 있겠어요. 경찰을 동원해 날 때리지만 않는다며, 앞 다퉈 고리사채와 매매혼을 장려하지만 않는다면, 꼬질꼬질한 손에 동전 몇 푼 쥐어주며 생색만 내지 않아도, 애국조회가 내 꿈에 악몽으로 재현되지만 않아도 어떻게 해 볼 텐데... 뭐 그래도, 아직 거짓 연기 하나만은 자신 있으니까. 그러니 나에게 차라리 국가를 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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