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첫 현직 대통령인 윤석열은 이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변론에 직접 나서며 온갖 ‘거짓말’을 내뱉고 있다. 급기야 상황이 불리해지자 3명의 헌법재판관에 대한 ‘회피 신청’을 냈다. 재판관들의 정치성향을 들먹이며 “불공정한 재판”이라며 헌법재판소를 흔들고 있다. 사실상 헌재 판결에 대한 불복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헌법기관인 국회와 선관위 침탈에 이어, 검찰·경찰 수사에 불응하고 헌재 판결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부정선거 신봉자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제도를 모조리 부정하는 최고권력자의 행태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윤석열을 넘어, 극우정치세력에 맞서야
윤석열이 보인 지난 두 달 동안의 행태는 경악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오직 윤석열 때문’이었다면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다. ‘윤석열’만 사라진다면 다시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내란범 윤석열의 곁에는 국민의힘과 비상계엄 내각 관료들, 그리고 광화문과 한남동, 서부지법에 결집한 극우대중이 있다. 속단할 순 없지만, 윤석열도 ‘파면’을 예감하며 헌재 흔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파면 이후 조기 대선에서 ‘정권교체’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만, 그렇다한들 우리가 12월 3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오랜 기득권 세력인 ‘보수세력’은 강한 반공, 반좌파, 반노동, 반페미니즘 태도를 보여왔다. 그럼에도 87년 민주화 이후 형성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규범 아래에서 ‘보수정치’를 펼쳐왔다. 하지만 이번 비상계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이들 다수가 ‘극우화’하고 있다. 이들은 국회, 선관위, 헌법재판소와 같은 헌법기관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뒤흔드는데 주저함이 없다. 헌법이 규정하는 시민의 기본권을 부정했던 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 추켜세우기 까지 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형성해 온 사회적 규범을 더이상 지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더 심각한 점은 이러한 ‘극우 정치’가 상층 권력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회원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자유마을’과 같은 풀뿌리 극우대중운동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삶의 불안과 위기 속에 사회적 연대망을 상실하고, 정치적 주체로서 발언을 봉쇄당해 온 많은 이들이 ‘극우 정치’로 모이고 있다. 삶의 위기와 불평등의 원인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극우 정치’에서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의 민주주의가 아닌 ‘최대한’의 민주주의로
현 상황을 초래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민주주의라고 믿어왔던 ‘최소한’의 제도적 민주주의의 앙상함이다. 정치와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며 ‘일터와 삶터’로 확장되지 못한 민주주의는 선거 때만 정치의 주권자로 시민을 호명하고, 정작 일터와 삶터에서는 적극적으로 배제해왔다.
광장에 모여 ‘윤석열 파면’을 외치는 우리 역시, 과거의 민주주의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배제해온 수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연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누군가는 ‘최소한’의 민주주의가 봉쇄한 정치의 가능성을 ‘극우 정치’에서 찾았다면, 우리는 과거가 아닌 미래로, ‘최소한’이 아닌 ‘최대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광장의 힘은 이제 수백, 수천 개의 풀뿌리 공론장, 토론모임 등으로 이어져야 한다. 동네 소모임, 학교, 일터, 사회운동 단체 회원모임 등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윤석열 비상계엄이 드러낸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현실을 확인하고 우리가 지금 겪는 혼란과 위기가 정확히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에서도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함께 이야기하는 크고 작은 시민공론장 활동을 이제 막 시작했다. 우리가 만들 세상에서 펼쳐져야 하는 사회대개혁 과제를 이야기할 시민공론장은 새롭게 들어설 정부의 정책과제를 토론하는 자리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겪는 위기는 새정부 출범으로 결코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풀뿌리 공론장,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갈’ 든든한 연대망으로
사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공론장’을 경험하고 있다. 12월 3일 이후,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크고 작은 광장들, 집회와 행진, 토론회들이 그것이다. 자신이 겪은 차별과 배제, 억압의 경험들이 광장의 시민발언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가 바뀌어야 할 점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일테지만, 이미 광장 자체가 한국사회의 폭력에 맞선 안전한 공간이자 사회적 연대망으로 자각되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 개의 풀뿌리 공론장을 조직하자는 것은 광장의 경험을 우리의 일상으로 확산시키자는 것이다.
‘최대한’의 민주주의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삶의 위기와 불안을 함께 이겨낼 사회적 연대와 ‘관계’를 조직할 때 가능하다. 극우 정치에 맞선 평등 정치는 바로 내 곁의 사람들과 크고 작은 광장을 열어낼 때 시작될 수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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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가 발행하는 <평등으로>에 실린 글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