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Alex Shuper, Unsplash+
최근 다보스에서 세계의 부유층과 권력자들이 모여 연례 잔치를 벌인 정상회의에서는 인공지능(AI)에 대한 큰 흥분이 있었다. 물론 AI는 아직 널리 도입할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은 단계는 아니지만, 다보스에 모인 자본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머지않아 전환점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AI가 만들어낼 실업 문제도 간간이 제기됐지만 대체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떤 이들은 AI 사용으로 생기는 실업이 유지·보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고용으로 충분히 상쇄될 것이라는 견해까지 내놓았는데, 이는 명백히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우익 성향의 남아프리카공화국·캐나다·미국 국적 사업가인 일론 머스크도 AI가 실업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하나의 제안을 했다. 그는 AI 이용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를 만들거나 AI 사용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보상하자고 제안했다.
이처럼 AI 사용이 일자리를 파괴한다는 사실은 일론 머스크조차 인정할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서 간과되는 점은 문제의 원인이 AI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사실이다. 일론 머스크의 AI 이용자 과세 제안을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을 하는 데 100명이 고용돼 있었는데 AI를 사용하면서 50명이 실업자가 됐다고 하자. 이 50명에게 이전과 같은 임금을 보상으로 지급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실업수당처럼 더 낮은 금액을 주지 않는다면, 임금 총액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경우 AI 도입은 충분한 이윤을 보장하지 못하므로, 생산량이나 매출을 늘리면서 고용을 줄이는 효과까지 동반하지 않는 한 기피된다. 그런데 매출 증가는 새로운 상황에서 임금과 보상 비용을 합친 총액이 이전의 임금 총액과 같더라도 이윤을 늘릴 수 있지만, 그 대가는 AI 없이 매출이 증가했을 경우 고용됐을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데서 나온다. 다시 말해 매출 증가는 실제 고용이 아니라 잠재적 고용을 줄이며, 이 잠재적 고용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직접 해고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실업이 낳는 것과 동일한 사회적 문제를 겪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논리는 어떤 보상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기술 발전이 실업과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 기술 도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태도는 19세기 초 영국에서 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트(Luddites)를 연상시키지만, 기계가 그들의 물질적 고통을 직접적으로 만들어내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술 발전, 여기서는 AI가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 아래에서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실업 문제는 단순히 완화되는 수준이 아니라, 실질 임금 총액과 노동자의 실질 임금률을 줄이지 않으면서 모든 노동자의 여가를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술 발전은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의 고됨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고 각자가 내면의 창의성을 키울 시간을 제공함으로써 모두의 삶을 개선한다. 앞의 예를 사회주의 사회에 적용하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과거에 100명이 하던 일을 이제 50명이 같은 노동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노동시간과 임금률을 그대로 둔 채 50명을 해고하는 대신, 동일한 100명이 계속 일하되 각자의 노동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이전과 같은 임금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산출물에서 잉여, 즉 이윤에 해당하는 몫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으며, 기술 진보의 효과는 이윤을 늘리는 데 쓰이지 않고 각 노동자의 노동 부담을 줄여 삶을 개선하는 데 전적으로 돌아간다.
이런 결과는 이윤 확대라는 동기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런 기술 발전은 고용 인원을 줄일 수 있을 때만, 그리고 그와 함께 도입된다. 고용 규모가 줄어들면 노동자의 교섭력도 약해지고, 이처럼 실업이 늘어난 상황 자체가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가로막는다. 그 결과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률은 오르지 않는 반면, 고용 인원은 줄어들고, 산출물에서 잉여의 몫은 커진다. 이는 기술 도입에 앞서 기대했던 이윤 확대를 정당화하는 결과다.
이처럼 노동과 생산물을 나누는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와 이윤 확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는 또한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되 여전히 이윤 동기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는 이론들이 왜 잘못됐는지를 보여준다. 국유이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로 이루어진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결코 드물지 않지만, 이는 사회주의의 핵심 개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의 소유만 바꾸고, 독점이 아닌 경쟁적 자본주의조차 따르는 운영 논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사회주의 개념은 사회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이런 생각은 한때 널리 퍼져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경제가 그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졌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유독 유고슬라비아만이 뚜렷한 실업과 경기 변동을 겪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이해할 수 있는 투자 집중의 ‘메아리 효과’와는 무관한 현상이었다.
사회주의만이 인류가 주요 과학·기술 발전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주장은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크게 강화한다. 인류를 전진시킬 잠재력을 가진 과학·기술 발전이 자본주의 조건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고통만 안긴다면,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된다. 자본주의가 기술 발전을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도입하는 기괴한 성격은 마르크스가 “살해된 자들의 해골에서만 꿀을 마시는 흉측한 이교도의 우상”에 비유한 바 있다(「인도에서의 영국 지배의 미래 결과」). 만약 인류가 중대한 과학·기술적 돌파구의 문턱에 서 있다면, 그런 돌파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더욱 압도적으로 커진다. 사회주의는 단지 더 평등한 사회일 뿐 아니라, 노동과 생산물을 공정하게 나누는 성격 덕분에 인간의 창의성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심대한 기술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다.
과학적 진보가 클수록 그런 진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사회의 필요성은 더 절실해지며, 오직 사회주의만이 그런 사회를 대표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AI가 재앙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AI라는 기술이 지닌 그 놀라운 진보성 자체가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강력하고 압도적인 근거가 된다.
물론 AI는 고용 파괴 외에도 여러 사회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회주의 사회만이 AI의 고용 파괴 효과를 단순히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출처] AI and the Case for Socialism | Peoples Democracy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
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