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Jason Leung
좌파 경제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과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가 이번 주 영국 신문 <가디언>에 공동 기고문을 실었다. 제목은 “우리는 자본주의 모델을 넘어 기후를 구할 수 있다 – 그 첫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였다. 제이슨 히켈은 바르셀로나 자치대학교 교수이자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 방문 선임연구원이다.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메라25(MeRA25) 대표이자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며,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 기술봉건주의): 무엇이 자본주의를 죽였는가⟫의 저자다.
히켈과 바루파키스는 논지를 분명히 밝힌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21세기에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놀라운 역설을 목격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놀라운 신기술과 함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혹은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식량과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집단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수백만 명이 극심한 결핍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히켈과 바루파키스는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라고 단언한다. 이는 최근 ⟪테크노퓨달리즘⟫라는 책에서 자본주의는 이미 죽었고 봉건제, 더 정확히는 ‘테크노퓨달리즘’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 바루파키스에게는 다소 이상한 답처럼 보인다. 더욱이 두 사람이 내리는 자본주의 정의도 다소 특이하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온 시장, 무역, 기업가 정신”으로 보지 않는다. 그 점은 옳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를 “대형 은행, 주요 기업, 그리고 투자 가능한 자산의 대부분을 소유한 1%가 지배하는 소수 집단이 운영하는 일종의 독재 체제”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것이 왜 ‘이상한’ 정의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인류 사회 조직의 역사는 원시 시대 이후 사람들을 계급으로 분할하고, 지배 계급이 서로 다른 사회적 방식—노예제, 봉건제, 절대주의, 그리고 지난 약 250년 동안에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 인간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을 통해 나머지를 착취해 온 역사였다. 실제로 두 저자가 말하듯이, 자본주의하에서 “생산의 목적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거나 사회적 진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생태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축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우선 목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가치 법칙이다. 그리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은 끊임없는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필요하든 해롭든 상관없이 총생산을 계속 확대해야 한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동력으로 삼아 노동 대중을 착취하는 체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두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그 측면보다는 자본주의의 ‘비합리성’이다. 즉 “자본에는 높은 이윤을 안겨주기 때문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대저택, 패스트패션 같은 것들은 대량 생산하면서도, 자본에는 이윤이 적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저렴한 주택이나 대중교통처럼 분명히 필요한 것들은 만성적으로 과소 생산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지구 온난화와 온실가스 감축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짚는다. 재생에너지는 이미 화석연료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화석연료 생산은 최대 세 배까지 더 높은 이윤을 낸다. “마찬가지로 고속도로 건설과 유지 사업은 민간 계약업체, 자동차 제조업체, 석유 기업에 초고속·안전한 현대적 공공철도망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안겨준다. 그래서 세계가 불타고 있는 와중에도 자본가들은 정부에 화석연료와 도로 건설 보조금을 계속 요구한다.” 두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본주의가 우리 종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도는 늑대가 어린 양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도와 같다.”
자본주의는 공동선을 위한 기술과 투자를 가로막고, “우리를 끝없는 제국주의적 폭력의 순환 속에 가둔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선진국의 자본 축적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값싼 노동력과 자연을 대량으로 투입받는 데 의존한다. 이러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은 부채, 제재, 쿠데타, 심지어 노골적인 군사 침공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남반구 경제를 종속 상태에 묶어둔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두 저자는 다시 단호하게 말한다. “해답은 우리 눈앞에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가치 법칙을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가치 법칙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그들의 제안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뎌진다. 히켈과 바루파키스는 세 가지 필요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독재”를 “기능적이고 생태적으로 건전한 민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가 아니라,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다. 이 글에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제시하는 세 가지 조건을 보면 분명해진다. “첫째 조건은 파괴적인 민간 ‘투자’에 불이익을 주고 공적 목적을 위한 공공 재정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금융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다. 그들은 “이 구조의 핵심에는 중앙은행과 연계해 유동성을 공동의 지속 가능한 번영에 부합하는 투자로 전환하는 새로운 공공투자은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금융 자본의 지배에 대한 해법이 은행과 보험회사, 헤지펀드 등을 국유화해 투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본주의 금융 부문과 경쟁하는 공공은행 하나를 세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현대 경제에서 민간 자본 투자가 공공 투자보다 약 다섯 배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제안이 어떻게 그 비율을 뒤집고 자본주의의 ‘독재’를 끝낼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둘째 조건은 “부문별, 지역별, 국가별 목표(예를 들어 특정 생산의 확대 또는 축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숙의 민주주의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새로운 공공 재정 수단을 그 목표에 맞추는 것”이다. 즉 공공투자은행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투자 결정도 민주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 민간 투자은행이나 영국의 대형 상업은행들이 내리는 투자 결정은 그대로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 번째 조건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두 저자는 자본주의적 ‘독재’를 끝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으로 “한 명의 노동자, 한 주식, 한 표”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기업의 설립을 제시한다. 기업을 공동 소유로 전환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주식 한 주와 의결권 한 표를 갖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도 노동자는 원하면 기업 주식을 매입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미 거대 기업, 사모펀드, 금융기관이 보유한 주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몰수할 것인가. 몰수할 것이라면 왜 명확히 말하지 않고 ‘한 노동자, 한 표’라는 구상만 제시하는가.
두 저자는 생태적 붕괴를 피하고 세계 빈곤을 종식할 수 있는 세계는 “현실적 전망”이라고 글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세 가지 정책 처방은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적 ‘독재’를 끝내는 길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Replacing capitalism – not with socialism, but with democracy?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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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