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학살을 저지르지 말라

집단 학살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이다.

[출처] Unsplash, Janne Leimola

현재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량 학살을 끝낼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협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주요 협상가인 이스마일 하니예 암살을 포함하여 영구적인 휴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이스라엘로의 모든 무기 수출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인들이 대량 학살을 부추기는 어떤 대통령 후보나 정당도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두 집권 정당에 대한 보이콧에 반대하는 주장은 익숙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보장할 것이다. 카멀라 해리스는 조 바이든보다 더 많은 동정심을 보여주었다. 우리 숫자는 충분하지 않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우리는 민주당 내에서 일할 수 있다. 특히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같은 이스라엘 로비가 대부분의 의회 의원들을 장악하고 있어 너무 강력하다. 협상을 통해 결국 학살이 중단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무력하며, 대량 학살 프로젝트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주체성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수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에 보내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며, 대량 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을 정상적인 통치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집단 학살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범죄로, 이는 정책 문제가 아니다. 무역 거래, 인프라 법안, 차터 스쿨 또는 이민 문제와 동일시할 수 없다. 이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한 민족의 근절과 관련되었다. 집단 학살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국가로서, 인류로서 죄를 지우는 행위이다. 이는 세계 사회를 야만으로 한 걸음 더 내몰며,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기본 가치를 조롱한다. 집단학살은 그 자체로 특별한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해 집단학살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근본 악"이라 정의한 것, 즉 인간이 인간으로서 불필요하게 되는 악에 동참하는 것이다.

수많은 홀로코스트 연구가 이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명확히 했어야 했지만, 홀로코스트 연구는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탈취되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을 반유대주의의 영원한 희생자로 신격화했다. 나치는 특별한 종류의 비인간성을 부여받았고, 워싱턴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은 이스라엘이 해결책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일어난 여러 집단 학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은 무시되었고, 그와 함께 대량 학살의 역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주의를 얻지 못했다. 

프리모 레비와 같은 작가들이 강조하는 홀로코스트의 근본적인 교훈은, 우리가 모두 자발적인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계기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무관심과 냉담을 통해서라도 악에 가담할 수 있다.

"괴물은 존재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레비는 이렇게 썼다. "하지만 그들은 수가 너무 적어 진정으로 위험하지 않다. 더 위험한 것은 질문 없이 믿고 행동할 준비가 된 평범한 사람들,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비록 성공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악에 맞서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바츨라프 하벨이 《힘없는 자들의 힘》에서 쓴 것처럼, 우리가 진실 속에서 살 수 있게 한다. 그 진실은 권력자들이 말해지길 원치 않으며 억누르려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후손들에게 등불이 되어주고, 피해자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강요된 위치에 대한 인간성의 반란'이자 ''자신의 책임감을 되찾으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국가를 무장시키고 자금을 지원하는 세계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조작된 기근과,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발견된 지역의 수원 오염을 지지한다면, 그로 인해 수만 명이 병에 걸리고 많은 이들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10개월 동안 난민 캠프, 병원, 마을, 도시를 폭격하여 가족을 몰살시키고, 생존자들이 노숙하거나 조악한 텐트에서 지내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16,456명의 아이들이 살해되는 것을, 이 숫자도 분명히 과소평가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이스라엘이 유엔 시설, 학교 — 1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새벽 기도 중에 목숨을 잃은, 가자시티의 알타바인 학교를 포함하여 — 그리고 기타 비상 대피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특히 아이들과 노인을 포함한 수갑을 찬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스라엘 군대보다 먼저 잠재적으로 폭발물이 설치된 터널과 건물에 들어가게 하고, 때로는 이스라엘 군복까지 입히며 인간 방패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가 수감자들을 강간하고 고문하는 정치인과 군인을 지지하다면,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가 힘을 실어주고 싶은 종류의 동맹인가?  이런 행동이 우리가 포용하고 싶은 행동인가?  이것이 전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만약 우리가 도덕적 명령을 굳게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악이 승리할 것이다. 이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량 학살을 포함하여 어떤 것도 허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밖에서는 시위자들이 집단학살의 종식과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중단을 요구하지만, 안에서는 병적인 순응만이 강요되고 있다. 희망은 거리에 있다. 

도덕적 입장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비용이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관습적인 믿음일뿐이다. 

"그러나 평화의 대가는 무엇인가?" 베트남 전쟁 중 징병 기록을 불태운 혐의로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급진 가톨릭 사제 다니엘 베리건은, 그의 책 ⟪No Bars to Manhood(어른됨에 장벽은 없다)⟫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는 내가 알고 지낸 수천 명의 선량하고, 품위 있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상성이라는 소모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평화를 외치면서도, 본능적으로 안락함, 집, 안전, 수입, 미래, 계획 — 5년짜리 학업 계획, 10년짜리 직업적 지위 계획, 20년짜리 가족 성장과 단합 계획, 50년짜리 품위 있는 삶과 명예로운 자연사 계획 — 을 지키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평화를 가져오자," 우리는 외친다. "하지만 동시에 정상성도 유지하자. 아무것도 잃지 말자.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유지되게 하자. 감옥도, 악평도, 관계의 단절도 알지 않게 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포용하고 저것을 보호해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우리의 희망은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평화를 위해 칼이 떨어져 우리의 삶을 교묘히 엮어 온 정교한 그물을 끊어버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선한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가족이 찢어지거나 명예를 잃는 일은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는 평화를 외치고 또 외친다. 그러나 평화는 없다. 평화가 없는 이유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없는 이유는 평화를 만드는 일이 전쟁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 최소한 전쟁만큼이나 긴급하고, 최소한 전쟁만큼이나 혼란을 초래하며, 최소한 전쟁만큼이나 불명예와 수감, 그리고 죽음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항이 실용적인가의 여부가 아니다. 저항이 옳은가의 여부다. 우리는 우리 부족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주변의 경험적 증거가 암울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선은 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선은 항상 행동으로 구현되며, 보여져야만 한다. 더 넓은 사회가 비판적일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종종 그렇듯이, 국가의 법이 도덕적 법과 충돌할 때, 시민 불복종과 불순종의 행위를 통해 그 법을 거부하도록 부름받는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이 땅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서야 한다. 만약 우리가 군사화된 경찰의 남용, 광대한 교도소 시스템의 비인간성, 또는 가자에서의 집단학살에 맞서 이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억압하는 자)가 된다.

[출처] Thou Shalt Not Commit Genocide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로, 15년 동안 뉴욕타임스의 해외 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중동 지국장과 발칸 지국장을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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