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다섯 달을 돌아보면, 우리는 국제 자유주의 질서의 근본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붕괴했는지 목격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상투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은 최소 47,500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고(이는 과소평가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휴전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도 매일 잔해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고 있으며, 기반 시설과 생계 수단 또한 전면적으로 파괴되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여러 기구와 전문가들, 학자들, 법률가들이 이스라엘의 전쟁은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한 집단학살이라고 명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사태는 국제법의 완전한 결핍과 미국이 후원하는 '규칙 기반 국제 질서'의 허망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이는 서방 국가들의 파괴적인 폭력에 대한 완전한 면책을 보장하는 구조로 밝혀졌으며(이미 그렇게 평가되었을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금 입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몇 학자들은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의 종말’ 개념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개념은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1992)에서 소련 국가들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겉보기에 승리한 듯한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화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의 종말’이 후쿠야마적 의미에서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붕괴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헤겔이 ⟪역사 철학 강의⟫(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에서 전개한 철학적 프로젝트의 핵심을 탐구하여,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이 시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세계 역사의 순환적 교착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가자에서 목격한 전례 없는 참상을 헤겔이 역사에서 제시한 자유 개념과 연결시켜 보려 한다. 겉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헤겔의 역사 개념 속에 자리 잡은 철학적 자유 개념을 통해 희미한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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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벅-모스(Susan Buck-Morss)가 ⟪헤겔, 아이티, 그리고 보편사⟫(Hegel, Haiti, and Universal History)에서 처음 던졌던 질문을 변형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헤겔과 가자에 대한 침묵을 끝내는 것이 중요한가?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 헤겔의 저작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비유로 가득 차 있으며, 하미드 다바시(Hamid Dabashi)가 주장하듯이 이는 시오니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을 말살하려는 와중에도, 그들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적 광기에 대해 훨씬 더 포괄적이고 긴급한 비판과 분석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가자가 이 시대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가 자행되는 장소로서, 역사적 진보가 허구적인 기술적 형태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헤겔의 보편사 프로젝트의 반복적 붕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펼치기 위해 나는 헤겔을 하나의 도구적 개념(heuristic)으로서 가자에 위치시켜, 그를 통해 우리가 역사에 대한 다른 구조와 의미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마르크스가 했던 것처럼 헤겔을 거꾸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헤겔을 재배치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머리와 어쩌면 마음까지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유럽 철학자들의 일단이 간과해 온 과제이기도 하다.
헤겔이 ⟪역사 철학⟫(Philosophy of History)에서 전개한 논의를 간략히라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반적으로 헤겔은 세계 역사가 여러 단계를 거쳐 상호 초월하며 전개된다고 주장한다. 인간 이성이 지닌 변증법적 발전이 이러한 역사적 운동을 추동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정신(Geist)의 실현을 보장한다. (정신은 조야하게 표현하면 ‘집단적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유가 펼쳐지는데, 자유야말로 ‘정신의 본질’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헤겔이 주장하는 역사적 ‘진보’ 또는 운동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헤겔 시대의 서구 세속 국가가 가장 ‘발전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명백히 문화적 형태와 의식의 방식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며, 인류 역사는 ‘뒤처진’ 민족들이 백인 유럽인들에 의해 계승되는 과정으로 제시된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 전반에 나타나는 이러한 노골적인 문화적 인종주의는 오랫동안 식민지 프로젝트와 군사적 십자군 원정으로서의 민주주의 강요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해 왔다. 수전 벅-모스는 ⟪헤겔, 아이티, 그리고 보편사⟫에서, 헤겔이 설정한 역사적 도식이 목적론적(teleological)이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가 자유를 실현하는 궁극적 목표를 따라야 한다는 개념이 오늘날 서구 정치 담론에 여전히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역사 철학⟫에서 헤겔은 역사가 끊임없이 소모되고 파괴되며, 이어서 더욱 ‘고양되고, 찬미받으며…정화된’ 정신으로 자기 자신을 계승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즉, 역사에서 각 단계는 변증법적으로 이전 단계를 극복(Aufhebung)하며 새로운 ‘고양된’ 형태로 재구성되는데, 이는 과거의 요소들을 포함하면서도 점진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역사적 관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헤겔적인 시각을 통해 우리의 시대를 절대적 종말의 지점으로 경험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무(無)보다 적은⟫(Less Than Nothing)에서 설명했듯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헤겔을 독일의 좁은 지역적 맥락에서 벗어나 가자의 자발리야(Jabaliya) 난민 캠프에 위치시킨다면, 자유주의적 역사 진보 서사는 순식간에 붕괴해버린다. 지난 열다섯 달 동안 시간은 분명하게 흘렀지만, 동시에 가자에서 계속된 잔혹한 학살, 병원 파괴, 학교 불태우기는 멈추지 않았다(그리고 지금은 서안지구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적 진보가 아니라, 역사는 끝없는 악몽처럼 반복되었으며, 그 누구도 깨어날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율리시스⟫(Ulysses)에서 묘사한 악몽과도 같은 시간성과도 닮아 있다.
헤겔의 명백한 유럽 중심주의와 문화적 인종주의는 그가 역사를 통해 표면적으로 진보적인 정신의 종결을 보았음을 확고히 했다. 1806년, 헤겔은 그의 친구 니트하머(Niethammer)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낡아가는 프로이센 제국을 격파하러 가는 길에 말을 타고 예나를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것에 경이로움을 표했다. 헤겔의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세계 정신의 진보적 운동으로 의인화했고, 역사는 프랑스 군단의 뒤를 따라 그 순간에 발전하고 있었다. 그의 집을 나서서 자발리야 난민 캠프의 엄청난 파괴 속을 거닐던 헤겔이 만약 미국이 공급한 마크 84 2,000파운드 폭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본다면, 그는 이 폭탄이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이 전 세계 공급망을 통해 제공한 이스라엘 F-16 전투기에 의해 투하되어 학교를 향해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마크 84는 서방 군대에서 사용되는 가장 치명적인 폭탄 중 하나로, 살상 반경이 350미터에 달한다. 서방 군사력 전체가 대부분이 난민인 여성과 아이들이 거주하는 교육 시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진보의 개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피상적으로 보면, 기술적 발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 형태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러한 기술 숭배 속에 담긴 실질적 내용은 야만적인 폭력이다.
실제로, 가자에서 헤겔의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역사의 ‘전진하는 행진’이나 어떤 형태의 진보적 운동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학살, 생명을 유지하는 기반 시설의 무차별적인 파괴, 이스라엘 군대가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여 악명 높은 수용소로 끌고 가는 모습, 그리고 기아와 치명적인 유아 저체온증을 강제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이 구호 물자를 차단하는 모습이 펼쳐졌을 것이다. 헤겔이 이 순간에 ‘역사적으로 사고’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는 단지 정체된 세계 역사, 끝없이 반복되는 경계적 시간 속에 갇힌 세계를 인식했을 것이다. 역사적 전진이 아니라, 그는 바르샤바 게토(Warsaw Ghetto),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아부그라이브(Abu Ghraib), 1943년 벵골 대기근, 르완다 학살, 미국 개척지 학살, 팔루자(Fallujah), 제2차 보어 전쟁, 1945년 드레스덴 폭격, 1948년 나크바(Nakba) 등의 끔찍한 사건들을 동시에 다시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는 역사가 마치 얼어붙고, 시간 속에서 마비되며, 스스로 깨어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19세기 정착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불명확하고 팽창주의적인 국경 속에서 새롭게 활력을 얻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다중위기(polycrisis)와 ‘강박적’ 비상사태(compulsive emergencies)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가자에서의 집단학살은 세계 역사 개념의 종말과 정신의 종말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적 폭력의 반복적 순환이 펼쳐지는 과정이며, 비극의 속도가 그것을 이해하고 애도하거나 받아들이는 속도를 훨씬 초과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가자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연쇄적인 비극을 이해하는 것을 막는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아오를 시간을 기다리는 조바심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철의 나비(iron butterfly)’ 폭발탄에 의해 올빼미가 격추되었기 때문이다.
가자에 대한 시간적 시각조차도 완전한 역사적 부정 속으로 붕괴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에 유엔은 2020년대가 되면 가자가 거주 불가능한 곳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오늘날, 그 예측은 마치 신의 기계 장치(Deus ex machina)처럼 비틀린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은 가자를 실제로 거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례 없는 시도로 나타났다. 미래를 바라보면,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가 상상하는 가자는 끔찍한 인공지능(AI) 생성 자유무역지대처럼 보이며, 이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성을 완전히 지우는 인식론적 말살을 완수하려는 계획이다. 가자의 과거, 현재, 미래는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서 수행하는 집단학살의 철학적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동결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떠한 역사적 운동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파비오 비기(Fabio Vighi)가 언급했듯이, ‘우리 세계의 지평선이 스스로를 접어가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환경 파괴의 반복적인 악화에서든, 혹은 가자의 작은 영토 속에 수 세기에 걸친 역사적 참상이 압축되는 모습에서든 드러난다. 가자에서 바라본 헤겔의 역사 철학 프로젝트를 고려하면, 인간 이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한다고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해석하면서 헤겔의 역사 논제를 염두에 두고 쓴 글에서, 그는 과거를 응시하면서도 진보의 폭풍에 의해 억지로 미래로 내던져지는 천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러나 역사 철학이 명백히 마비된 헤겔적 시각을 다시 구성하면, 우리는 ‘새로운 천사’가 실현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면서도 폭력적으로 과거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야만적 유혈 사태의 현대적 기적(modern marvels)은 바로 이러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최신 군사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라벤더 AI(Lavender AI) 표적 시스템과 같은 기술을 도입하여 완전히 공허한 기술적 숭배 형태를 구현하지만, 이 기술은 가장 원시적인 대량 학살 방식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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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자에서 벌어지는 집단학살 속에서 자발리야 난민 캠프 내부에서 바라본 특정한 헤겔적 관점이 세계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대답은, 이것이 특정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인 관점이라는 데 있다. 이 관점은, 실패한 세계 역사가 침체된 자유 개념과 연결되어 있으며, 자유야말로 정신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헤겔의 역사 철학 프로젝트는 단순히 오늘날 역사적 참상의 반복적 순환 속에서 정체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헤겔에게 있어 역사는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해질 때에만 ‘종결’된다. 토드 맥고완(Todd McGowan)이 ⟪헤겔 이후의 해방⟫(Emancipation After Hegel)에서 주장했듯이, 2025년 현재, 우리는 보편적 자유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멀어져 있다. 자동화된 학살이 벌어지는 가자, 군사화되고 권위주의화된 서방 거리, 전례 없는 불평등이 팽배한 빈곤한 뒷골목,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상승하는 해수면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모두를 위한 자유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수 세기 동안 자본의 탐욕스러운 폭력이 우리의 개념적 상상력을 완전히 왜곡하고 부식시켜 왔으며,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신기루는 가자의 대학살 속에서조차 이익을 취해 왔다. 가장 끔찍한 깨달음은 역사가 단순히 정체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멀어졌기 때문에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비참한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정신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닌 보편주의적 빛이 자유의 부활을 통해 반짝이고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Phenomenology of Spirit)에서 수행한 과제 중 하나는 평범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특수성 속에서가 아니라 더 넓고 보편적인 인류의 일부로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개인은 자신을 즉각적인 삶에 묶어 두는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야 했으며, 역사를 통해 전개되는 정신의 보편적 운동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넓은 시각을 가져야 했다. 이는 자유가 다른 어떤 것으로, 해방된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었다.
헤겔이 1800년대 초반 설정한 이 목표를 읽으면, 이것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이 수행하는 작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그들은 매일같이 우리 모두를 인간성, 집단성, 그리고 자유라는 보편주의적 개념과 연결시키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범죄를 충실하게 기록하며, 서방의 정치적·언론적 구조가 기꺼이 은폐하려는 공포를 폭로하고, 국제적 연대를 끊임없이 촉구하며, 정착 식민주의의 파시즘적 욕망에 굴하지 않고 단호하게 맞서는 과정 속에서, 팔레스타인 언론인, 노동자, 그리고 시민들은 헤겔의 프로젝트 중심에 놓인 인간 보편주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실시간으로 집단적 인간성에 대한 세계적 의식을 해방시키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으며, 특히 서구에서 그 효과가 두드러진다. 서구는 스스로의 존재 조건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망각해 왔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우리가 통제된 ‘공식적’ 원칙들과 동조하는 기존의 도덕적 태도를 벗어나, 집단적 자유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상상할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는 대학 캠프에서, 해방을 외치며 행진하는 수백만 명의 거리 시위에서, 그리고 잔혹한 폭력을 위한 노동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행동 속에서 나타난다.
수전 벅-모스는 ⟪헤겔, 아이티, 그리고 보편사⟫에서 이와 관련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제시한다. 서구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전해주는 가자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휴대전화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목격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도덕적 감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지배하는 ‘공식적 원칙’ 사이의 커다란 모순 속에서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우리는 집단학살의 진실을 분명히 볼 수 있지만, 기득권에 의해 그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동시에 부정한다. 그 결과, 우리의 도덕적 감정은 사회적 복종과 절대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에 놓인다. 벅-모스가 계속해서 설명하듯이, 우리의 사회적으로 규정된 의무—즉, 가자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지지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은 곧 각자의 국가에 대한 ‘배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대학 캠프에서 연대 행동을 펼치는 학생들, 대학에서 발언하는 학자들, 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그리고 직장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는 이유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 속에서 호소되는 도덕적 보편성은 ‘부정성의 영역’(register of the negative)에 속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공식적 가치’에 의해 판단될 때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그 행동들은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공식적 침묵’을 깨뜨린다. 이는 서구의 진보와 문명이라는 내러티브에서 벗어난 집단적 행동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인간 보편성을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 서구인들에게 있어, 안젤라 하루튜냔(Angela Harutyunyan)의 말을 빌리자면,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적 길은 매일 같이 학살당하는 이들과 죽기를 거부하는 이들, 난민 캠프에서, 대학에서, 예술 기관에서, 그리고 자유주의적 인문주의 이후의 폐허 속에서 저항하는 이들에 의해 개척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역사가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중심부, 즉 가자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자유 개념이 등장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는 칸트(Kant)의 표현을 빌리면 ‘무한한 미래로 열리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가자의 관점에서 본 헤겔적 역사 개념이 전통적인 헤겔의 프로젝트에 대해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는 매우 깊다. ⟪역사 철학⟫(Philosophy of History)에서, 헤겔은 오직 ‘세계 역사적’(world historical)인 사람들이 자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들은 백인 유럽 식민주의자들이었다. 더 나아가, 자유의 조건은 오직 국가의 발전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 속에서,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세계적 집단을 형성하여 자유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세계 역사적’ 인물들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국가로서의 지위를 철저히 부정당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깃발은 전 세계 모든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헤겔은 역사 철학에서 “아브라함이 험준한 팔레스타인을 향해 떠났다”고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헤겔이 자발리야 난민 캠프에서 글을 쓴다면, 그는 새로운 정신의 여명이 팔레스타인에서 솟아오르고 있다고 관찰했을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출처] The Everlasting End of History: Hegel in Gaza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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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돌란-에반스(Elliot Dolan-Evans)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정치경제학과 법학을 가르치는 강사이며, 헤겔주의자다. 그의 연구는 평화 구축의 정치경제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는 2025년 출간 예정인 ⟪자본주의에 안전한 전쟁 만들기⟫(Making War Safe for Capitalism)의 저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