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Maksym Pozniak-Haraburda, Unsplash
오늘날 ‘민족 문제’를 다룬 책을 서평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민족 문제는 언제나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지만, 민족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에는 책에서 다루는 모든 당사자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동유럽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두 국가가 4년 넘게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며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의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The Formation of the Soviet Union)을 다시 읽고 싶은 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 책은 1954년에 처음 출간됐고, 1964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가장 최근의 서문은 1997년에 썼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파이프스는 볼셰비키 혁명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1991년에 출간한 『러시아 혁명』(The Russian Revolution)에서 그는 혁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쿠데타로 취급하며, 이를테면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과 비슷한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파이프스는 뛰어난 역사학자였으며, 내가 위대한 역사학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자질인 뛰어난 문장력도 갖추고 있었다. 오래전 파이프스가 1917년 9월 페트로그라드(Petrograd·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묘사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실제로 사태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 ‘쿠데타’가 다음 달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이프스는 독자가 1917년 9월 당시의 사람처럼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독일과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평화를 맺을 것인가, 임시정부가 존속할 것인가 새로운 제헌의회가 들어설 것인가,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군부가 케렌스키(Kerensky) 정부를 전복할 것인가.
파이프스는 소비에트 연방이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다. 이는 서술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주제다. 바르샤바(Warsaw)에서 중국 국경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데다 말 그대로 수백 개의 세력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력이란 정치조직에서 강도 집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을 포괄한다. 파이프스는 제정 러시아의 민족 문제를 전반적으로 논의한 다음 세 개의 광대한 지역, 즉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캅카스, 중앙아시아를 차례로 다룬다. 그리고 임시정부, 볼셰비키 ‘쿠데타’, 내전과 외세의 침공, 마지막으로 1923년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이라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제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크라이나, 술탄갈리예프,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라는 세 가지 문제로 논의를 한정하겠다. 이 책은 민족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변경 지역’을 모스크바가 지배하는 체제로 다시 통합하는 과정만 다루고, 러시아 내부에 사는 러시아계 주민의 태도는 다루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러시아 내부라는 것이 지리적으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우크라이나.명백한 이유, 즉 우크라이나의 중요성과 규모 때문에 파이프스는 우크라이나를 가장 비중 있게 다룬다. 우크라이나의 정치 상황은 극도로 복잡했다. 키예프/키이우(Kiev/Kyiv)에서는 독일의 괴뢰정부와 독일 점령정부를 포함해 적어도 아홉 개 정부가 잇따라 등장했다. 여기에 하리코프/하르키우(Kharkov/Kharkiv) 소비에트 정부, 크리보이로크(Krivoi-Rog) 소비에트 정부 등을 포함하면 1917년에서 1922년 사이 등장한 정부는 쉽게 열두 개를 넘는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명목상의 정부에 불과했고, 이 지역은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파이프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1917년부터 소비에트 정권이 마침내 확립된 1920년대 초까지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급속하게 확산된 무정부 상태를 보여준다. 그 범위와 지속 기간을 모두 고려하면 이는 근대 유럽 역사에서도 아마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148쪽)
다소 단순화할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파이프스는 우크라이나 정치세력이 이처럼 이질적이었던 주된 원인을 이해관계와 어느 정도 문화적 차이에서 찾는다. 한쪽에는 러시아계 주민이 거주하거나 러시아화가 상당히 진행된 도시화·산업화 지역이 있었고 유대인 인구도 여기에 포함됐다. 다른 한쪽에는 훨씬 광대한 우크라이나계 농촌 지역이 있었다. 많은 농민이 민족적 정체성을 그다지 강하게 느끼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우크라이나계라고 규정하는 데는 어느 정도 모호함이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어쩌면 오로지 토지개혁에 관심을 두었다.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흑토를 러시아와 별개로 오직 현지 주민의 이익을 위해 분배하려는 이러한 열망은 우크라이나 농촌 대중 사이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발전하는 강력한 요인이 됐다.”(57쪽)
이 정도의 이질성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무정부 상태를 더욱 심화한 것은 두 개의 또 다른 분열선이었다. 하나는 친부르주아 정당과 친노동자 정당 사이의 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앙집권 강화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의 분열이었다. 따라서 온건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당은 볼셰비키와 함께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를 약화하려 했을 때 볼셰비키와 이해관계를 같이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집권하자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는 사라졌다. 볼셰비키는 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고, 우크라이나 온건 민족주의자들은 자치나 독립을 원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볼셰비키를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냈을 때, 그리고 내전 중 백군이 볼셰비키를 몰아냈을 때 온건 민족주의자와 심지어 급진 민족주의자까지 볼셰비키와 다시 손을 잡았다. 양측 모두 러시아에서 친차르 세력이 복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동맹 관계가 뒤바뀐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보다 훨씬 복잡한 변화도 많았다. 러시아군 내부에 우크라이나인만으로 구성된 병사 대대를 만드는 문제부터 전선 탈영에 대한 태도,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세우도록 허용하기 위한 우크라이나 측의 독일과의 협상, 마지막으로 1918년 독일 점령에 대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쟁점이 동맹의 향방을 좌우했다.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분열이 나타났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했을 때 레닌은 독일과 전쟁을 재개하는 데 반대했지만, 많은 볼셰비키는 찬성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좌파는 농민혁명과 일정 수준의 당간 민주주의를 지지했고, 우파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모스크바의 당 기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주장했다.”(131쪽)
흥미로운 역설 가운데 하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평화협상을 벌이던 전 소비에트(러시아) 대표단에 포함된 우크라이나 라다(Rada) 대표단이 독자적으로 독일 대표단과 접촉해 독일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독일군이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빼앗고 인질을 잡아 처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잔혹성을 오늘날 독자가 보면, 10여 년 뒤 벌어질 소비에트의 집단농장화와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제1막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결코 중요성이 작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는 우크라이나 정당들이 극심하게 분열했다는 사실이다. 혁명 이후 정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여러 지식인이 정당을 이끄는 상황에서는 이 역시 드문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라면 라다의 한 의원이 마르크스의 초기 논평자이자 비판자 가운데 한 명이며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투간바라노프스키(Tugan-Baranovsky)가 몇 달 동안 사라져 아무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고 불평하는 대목을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아마 우크라이나 인구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집단은 정치적으로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SRs)에 가까웠다. 실제로는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krainian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과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krainian Socialist Revolutionary Party)이라는 두 정당이었으며, 이들이 내세운 핵심 정책은 농지개혁과 농민의 토지 취득이었다. 다시 말해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온건한 민족주의를 결합했다. 제정 러시아가 금지했던 우크라이나어 교육과 우크라이나어의 공식 사용이라는 당연한 요구뿐 아니라 러시아 내부에서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인정하는 방안도 받아들였다. 이들은 1917년 12월 실시한 제헌의회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모스크바의 중앙집권 세력이 강해질수록 우크라이나 정당 가운데 이 세력은 더욱 독립을 지향했다. 볼셰비키는 주로 도시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다. 키예프 자체는 양쪽을 오가는 역할을 했다. 러시아화한 도시 인구의 중심지인 동시에 독립을 지지하는 사상가들의 지적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중앙집권을 지지하는 것과 친러시아 입장은 서로 다르다. 현실에서는 결국 두 입장이 대체로 겹치게 됐지만, 내전과 소비에트 연방 형성 과정에서 많은 사람은 중앙집권을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볼셰비키 권력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따라서 중앙집권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이들이 종종 러시아인이 아닌 볼셰비키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이념적 열정과 국가 건설에 대한 열의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제르진스키, 오르조니키제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두 사람은 스탈린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형성과 조지아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지아 문제는 1922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헌법을 둘러싼 결정적 논의를 불과 몇 달 앞두고 가장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라 전체 과정을 거의 좌초시킬 뻔했다.
레닌의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졌으며, 파이프스는 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주의와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위험에 관한 레닌의 마지막 글을 네 쪽에 걸쳐 전문으로 인용하기까지 한다. 나는 소비에트 연방주의, 연방공화국과 자치공화국의 차이, 일부 러시아 기관과 소비에트 기관을 통합한 비대칭적 당 연방주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공화국이 자체 공산당을 두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었다는 점 등을 좀 더 논의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책의 중심이 역사에서 정치와 정치철학 쪽으로 지나치게 옮겨갔을 수 있으므로 이해할 만하다.
파이프스는 처음에 레닌도 매우 교조적으로 공유했던 표준적인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설명한다. 즉 민족은 대체로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며 사회주의가 승리하면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견해다. 마르크스에서 비롯한 이 관점은 대규모 국가의 창설, 민족 문제 자체의 중요성 축소, 그리고 오토 바우어(Otto Bauer)와 카를 아들러(Karl Adler)가 제시한 오스트리아식 구상에서는 이른바 ‘인적 자치(personal autonomy)’를 통한 민족 문제의 해결과 일치했다. 다시 말해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성인이라면 모스크바든 베를린이든 빈이든 화성인 학교에 다니고 화성어로 글을 발표할 수 있지만, 화성인 인민공화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적 자치는 허용하지만 영토적 자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도 체코와 슬로바키아 정당들은 이러한 입장을 거부했고, 헝가리 지역에서는 실행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레닌도 처음에는 이러한 견해를 가졌지만 아마 1917년이나 1918년 무렵부터 훨씬 급진적인 관점으로 이동했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분리독립을 포함한 자결권을 가진 민족별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보게 된 것이다. 파이프스는 레닌이 입장을 바꾼 이유를 매우 전술적인 필요에서 찾는다. 볼셰비키가 내전에서 모든 민족집단의 지지를 확보하려면 극단적인 형태의 자결권을 약속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레닌의 지적 생애에서 처음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큰 입장 전환이었다. 이제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곧 퇴장할 단순한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필요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르사유 회의가 제기한 식민지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세계 나머지 지역으로 확산하고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이집트 같은 나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상적인 수단을 제공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따라서 레닌은 국내 내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필요에만 이끌린 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을 촉진한다는 세계적 관점에서 사고했다. 이는 1920년 여름 열린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파이프스는 애덤 투즈가 『대격변』(The Deluge)에서 언급한 것을 비롯해 다른 저자들이 지적한 또 하나의 요인은 다루지 않는다. 우드로 윌슨도 마찬가지로 민족자결권을 선언했기 때문에 레닌은 그에게 뒤처질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미국 정치인보다 더 나아가야 했다. 레닌은 인도에 우드로 윌슨보다 못한 것을 제시할 수 없었다.
술탄갈리예프.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든 부유한 세계에서 부르주아의 지배가 계속되는 것이든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저개발 민족’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북반구’의 노동자와 ‘북반구’의 자본가가 모두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착취하는 데 만족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술탄갈리예프가 등장한다. 그는 엥겔스가 1858년에 처음 간접적으로 제기했던 질문을 정면으로 던졌다. “영국 프롤레타리아는 실제로 점점 더 부르주아화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부르주아적인 이 민족은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부르주아적 귀족계급과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를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전 세계를 착취하는 민족에게는 물론 어느 정도 정당한 일이다.”(『마르크스-엥겔스 선집 서간집』, 105쪽)
타타르인 혁명가이자 초기 볼셰비키였던 술탄갈리예프는 이러한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세계적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사실상 민족 간 투쟁으로 보았다. 오늘날의 불평등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면 국가 내부의 소득 격차보다 국가 간 소득 격차가 훨씬 더 클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린뱌오(Lin Biao)가 40년 뒤 세계적 차원의 계급투쟁이라고 선언할 내용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인물이었다. 한쪽에는 도시의 지배계급과 같은 북반구와 서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농민과 같은 나머지 모든 사람이 있으며, 후자가 중국혁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혁명세력을 이룬다는 구상이었다. 술탄갈리예프는 이러한 주장을 펼친 대가로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제명됐고, 당 간부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스탈린식 재판으로 평가받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0년에 자취를 감췄다.

파이프스의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The Formation of the Soviet Union), 278쪽에서 인용했다.
추신. 나는 이전에도 같은 주제를 다룬 글을 쓴 적이 있다(여기). 「소비에트 연방은 왜 만들어졌는가?(Why was the Soviet Union created?)」라는 글로, 매우 훌륭한 논평들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추신 2.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면 파이프스의 책을 읽으면서 민족 문제를 다룬 소비에트와 유고슬라비아의 접근 방식이 어떤 점에서 달랐고 어떤 점에서 비슷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출처] Ukraine, Lenin and Sultan-Galiev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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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