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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어이없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여당은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사죄와 반성에 나서기보다는 ‘배신자’를 이지메하고 윤석열의 방탄 전략에 보조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 나날이 밝혀지는 윤석열의 애초 계획은 놀라움을 넘어 황당함의 영역으로 가는 중이다. ‘계엄 실세’로 지목된 민간인 상태인 전 정보사령관이 점집을 운영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한국 사회가 근 반세기 동안 극복해 온 무언가가 한꺼번에 다시 되돌아온 느낌이다.
일각에서는 ‘개헌’을 이야기한다. 이번에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꿀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지금 상태에서 제기되는 개헌론에는 배경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버전이 섞여 있다. 윤석열 방탄에 조력하는 측에서 내놓는 주장이 그것이다. 애초에 이쪽에서 제기한 개헌론, 대통령의 임기를 1년 단축하고 4년 중임제를 도입하며 지방선거와 대선을 함께 치르자는 안은 윤석열의 통치를 가능한 최대한도로 연장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개헌론은 윤석열 방탄의 맥락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번 사태의 반복을 막기 위해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한 파장이 1987년 헌법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1987년 헌법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듯,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는 헌법을 무시하고 짓밟은 폭거였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1987년 헌법의 한계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1987년 헌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근거를 갖추기까지 상당한 노력을 요한다.
오히려 이번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고찰해 봐야 할 것은 윤석열의 집권을 가능케 한 정치 환경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불법 계엄 선포 사태를 통해 드러난 윤석열의 면모는 대선 기간 동안의 다양한 논란을 통해 이미 그 단서를 노출했었다고 볼 수 있다. 불법 계엄 선포까지는 아니지만, 대선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만 다시 떠올려봐도 윤석열이 정권을 이러한 방향으로 운영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구조는 1987년 체제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7년 체제는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세력 간 대결 구도라는 면에서 보면 ‘독재 대 민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구도는 실제로 독재와 민주를 각각 추구하는 세력 간의 대결이 아니라, ‘독재를 반대하는 세력’과 ‘민주를 외면하는 세력’의 대결로 표현된다. 그래서 1987년 체제에서의 선거는 대개 ‘독재 잔존 또는 후신 세력을 반대하는 유권자 연합’과 ‘민주화 세력의 탈을 쓴 불순 세력을 반대하는 유권자 연합’의 힘겨루기로 귀결되어 왔다.
이러한 구도의 힘겨루기는 민주화가 이미 달성됐음에도 장기간 지속됐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한국의 양대 세력은 이 구도에 기댄 정치 캠페인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체제의 생명력은 이미 그 기한을 다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와중에도 ‘불순세력’을 말하는 것보다는 ‘독재 잔존 및 후신에 대한 청산’을 외치는 게 그나마 시대정신에 맞다는 점에서, 시간이 ‘민주’의 편에 유리하게 흘러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은 보수의 새로운 전략이 성공한 사례다. ‘독재 잔존 및 후신 세력’으로 규정되어 온 보수 정치가 오히려 상대를 ‘유사-독재’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민주’로 규정한 것이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한 문재인 정권이 체제적으로 중국 및 북한에 기울어져 있으며 전체주의적이고 연성파시즘으로 볼만한 통치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둥의 평가가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전략의 성공 덕분에 윤석열은 집권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진보 세력은 1987년 체제의 극복을 꿈꿔왔다. ‘독재 대 민주’ 구도가 아니라 ‘자본 대 노동’ 구도가 체제적 모순을 더 잘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재 대 민주’ 구도에서 진보가 대변하려는 노동은 설 자리를 잃고 대개 민주의 하위 파트너가 되기를 강요당한다. 전통적 진보 세력은 이 구도를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 일부 진보 출신 인사들은 이 구도를 다소 급진적(?) 방식으로 이탈하였다. 문재인 정권에서 원내 진보정당이 ‘민주’에 다소 협조적으로 비춰졌다는 이유로 윤석열을 사실상 지지한 것이다.
1987년 체제가 만든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구나무선 1987년 체제에 기댄 이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1987년 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일부의 선택이 일조한 윤석열 정권의 등장이 결국은 1987년 체제의 탄생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 ‘독재 타도’의 순간을 현현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원래 이미 지나간 역사로서,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빌자면,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흘러간 강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순간이 다시 되돌아 오는 것으로, 황혼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던 1987년 체제는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불법 비상계엄 선포 덕분에 다시 생명력을 보충한 것처럼 보인다.
1987년 체제의 끝에서, 1987년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 오히려 1987년 체제의 시작으로 되돌아오게 한 것은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1987년 체제가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을 체제에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독재’라는 안티테제로서의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권력 구조를 형성한 1987년 체제는 그 자신에 근거한 권력 구조에 대한 반대 역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괄 가능한 것이다.
윤석열 방탄 전략에 입각한 개헌론이 아니라, 1987년 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개헌 논의도 종국적으로는 이러한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1987년 체제 극복을 말하지만, 대개의 개헌론은 이른바 권력 구조 개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4년중임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내각책임제 등을 기본으로 이런저런 정치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첫째로 그러한 제도를 운용하는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볼 때 권력 구조 개편과 그에 뒤따르는 제도의 도입만으로 ‘독재 대 민주’ 구도에서 서로를 반대하며 지지층을 최대 동원하는 1987년 체제의 극복이 이뤄질 것인가는 의문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의 최근 정치 상황을 돌아보면 이게 본질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둘째로 이상적 제도의 도입이 반드시 이상적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이미 우리가 확인했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이른바 ‘제도 해킹’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7년 체제는 한국 사회가 미처 상정하지 못한 경로를 통해 다시 회귀할 수 있다. 윤석열 계엄 선포의 수많은 다른 버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 그렇지 않다. 큰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제도의 도입, 어떤 법안의 입법을 달성하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선전 문구의 무력함을 절감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렇게 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 마음을 다잡고 애초에 불완전했던 요구안과 그 누구의 타협적 태도를 탓할 것이 아니다. 애초에 과정이 중요했음을 처음부터 모두가 알고 있는 게 중요하다. 그게 개헌이든 특정 법안의 쟁취든 더 아래로 향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끝이 없는 달성 과정에 불과하다는 현실 인식에 합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합의는 누가 누구와 어디서 하는 것인가? 대중에 뿌리 박고 있는 진보의 저변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것은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칭 진보정치는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진보의 역량은 지속적으로 유실되고 있다.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을 가능케 한 하나의 축은 거리로 나온 시민이다. 시민이 손에 들고 나온 응원봉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그것은 시민이 더 이상 노조나 직장, 직군 등 노동자-생산자의 대표성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시민은 특정 산업이 형성하는 소비, 기호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사이엔 분명 진보의 에너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보의 역량으로서 조직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조건 속에서, 윤석열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 덕에 낡은 1987년 체제가 다시 새롭게 회귀함으로써, 진보는 더욱 어려운 과제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제는 단지 양대 세력 중 한쪽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쪽의 편을 들거나,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명확한 자기 비전과 로드맵을 기획하고 이에 합의하는 정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방향은 앞서 언급대로 이미 정해져있다. 더 아래로 향하는 민주주의, 더 많은 영역에서의 민주주의, 영구히 지속 달성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1987년 체제의 극복은 이러한 시도가 분명하게 이루어질 때에야 가능할 수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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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는 정치·사회 평론가, 칼럼니스트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서 일하며 한국의 진보정치가 현실적 대안으로 자리 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으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냉소 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