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의 상설적 연대조직, 이른바 상설연대체 한국진보연대 준비위가 오늘 발족한다. 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따르면 한국진보연대(준)에는 19개 부문조직과 3개 지역조직 등 22개 단위가 참여하고, 조준호, 문경식, 김흥현, 문성현, 윤금순, 정광훈, 오종렬, 한상렬 등 8명의 공동대표와 박석운 상임운영위원장 체계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진보연대(준)은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등 기층 대중조직을 중심으로 진보적 정당 및 진보적 학술, 양심적 종교, 문화예술, 시민, 여성 등 광범위한 단체와 개별인사를 망라한 진보운동진영의 총단결체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형식상으로는 노농빈 대중조직을 포괄하고 있지만, 기존 전국민중연대 소속 단체 상당수가 불참하고 있다. 이는 상설연대체 건설이 진보진영의 폭넓은 동의를 구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3월로 예정된 본조직 출범도 크게 기대되지 않을 전망이다.
상설연대체 건설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 전국민중연대(준)이 만들어진 이래 전국민중연대 본조직 출범을 둘러싼 논란에서부터 단일전선체, 상설연합체 건설 논란까지 지리한 과정을 겪어왔다. 상설연대체 건설을 추동한 세력은 이른바 엔엘, 또는 자민통, 또는 우파로 불리우는 민족민주운동 세력이다. 실제로 상설연대체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주체가 지금은 해산한 전국연합과 통일연대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반신자유주의 공동 연대투쟁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자는 좌파 진영의 목소리를 외면해왔다.
구 전국연합은 2001년 이미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으로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연방통일조국 건설'을 골자로 하는 9월테제를 채택한 바 있다. 단일전선체와 민족민주정당을 통해 한국 사회 변혁의 그림을 그려온 것이다. 9월테제 이후 이들은 전국민중연대 본조직 건설 추동, 단일전선체 건설 제기 등 민족민주전선체 모양 만들기에 뛰어드는 한편,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 2004년 총선 이후 1기 최고위원 선거에서 다수파를 장악, 2006년 2기 선거에서도 당내 좌파를 확실히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민중연대 소속 단체 상당수가 반대하고, 시민운동진영까지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진보연대(준)를 출범시키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시점이다. 향후 운동진영 질서 재편을 내다보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가 내부 논란을 뒤로 한 채 서둘러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구 전국연합, 통일연대 등 민족민주운동세력이 한국 사회 진보운동의 한 주체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들이 한국 사회 진보운동에 유력한 세력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역시 분단모순에 기인한다. 북과의 밀접한 교감 속에 한국 진보운동의 쟁점에 부단히 개입하고 실천하는데, 세계 계급투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족주의 운동 경향을 보여준다. 한국진보연대(준)은 두말 할 것 없이 10년의 전망, 그 꿈을 이루려는 이들의 성과물이다. 따라서 한국진보연대 출범 자체에 외교적인 박수마저 마다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한국진보연대(준)이 앞으로 우리 사회 진보에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이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운동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가령 진보진영의 총단결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들어올 것을 강요하는 종파적 모습을 보여준다. 좌파운동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조차 고개를 설레설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더욱이 현실 투쟁에 대한 기획이 없다. 모양은 그럴 듯 하나, 들여다보면 공허한 선동 수준의 일정잡기가 전부다. 대중행동 기획이라 쳐줄 만한 게 사실상 전무하다.
한국진보연대(준)이 계획에서 밝히는 대로 과연 2007년 정세에 대응하는 연대체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령 한미FTA 저지를 위한 실천, 노사관계로드맵 이후 예고되는 노동탄압에 맞선 실천, 또는 한반도 반제 평화를 위한 계급적 연대 실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소화해낼 것인가. 유감이지만 회의적이다. 오히려 대선, 총선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내 우파의 활동을 지원하는 외곽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게 점쳐지는 실정이다. 우파가 대선 후보 경선과 대선, 총선을 경과하는 과정에서 당 안팎에 주도권을 잃지 않도록 긴장을 유지하는데 경주할 것이고, 여기에 한국진보연대(준)을 십분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이유도 그러하다.
전국민중연대 우파와 통일연대가 만들어낸 독특한 합작품, 한국진보연대(준). 2007년 정세와 계급투쟁 속에서 어떤 우여곡절을 보여줄 것인가,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