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는 올해 대선에서 3%의 득표율을 얻었다. 참패다. 당초 목표였던 10% 득표율 달성, 최소 300만 표 획득에 한참 못 미친다. 지난 16대 대선과 비교하면 득표율은 비슷하지만, 올해 대선의 낮은 투표율을 고려하면 득표 수는 70만 표로, 100만 표에 근접했던 지난 대선보다 저조한 성적이다.
대선 막판까지 권 후보의 지지율이 2%대에서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민주노동당은 “집토끼라도 잡자”며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 등 대중조직 공략에 나섰다. 이번 대선 결과는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올해 대선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독주로 그 흔한 ‘사표론’마저 없던 선거였다.
지난 10일 노회찬 공동선대위원장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BBK 공방’ 등으로 정책선거가 실종됐고, 내년 총선을 바라본 후보 난립과 단일화 미완성으로 관심이 분산됐기 때문”이라고 부진 원인을 짚었다.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그것만으로 진보진영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이유가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권 후보가 그토록 열망했던 ‘100만 민중대회’의 ‘100만’은 모두 어디로 흩어진 걸까.
‘원조 진보’ 권영길은 왜 ‘무늬만 진보’ 문국현에 뒤졌나
권영길 후보는 지난 10월 14일 선대위를 출범시키면서 산하 기구로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위원장을 맡아 ‘비정규직 후보’임을 피력하는 데 애썼다. 또 내년 총선에서 ‘비정규직 비례대표’ 선출을 전격적으로 제안하며 실제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비정규직 일시적 업무 제한 사용, 파견노동 폐지, 특수고용직 노동3권 보장 등 그가 제시한 비정규직 해법은 주요 대선후보 6인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50만 비정규직’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대신 권 후보는 ‘착한 CEO’ 문국현 후보에게 비정규직 의제를 완전히 선점 당했다. 유한킴벌리 사장 출신이라는 배경에 노동시간 단축, 4조 2교대제, 평생학습 체제 등 참신성과 진보성을 담은 공약은 ‘문국현 현상’을 만들어냈다. ‘정치입문 4개월’의 문 후보는 지지 기반인 시민진영 뿐 아니라 진보진영까지 흡수하면서 5.8%의 득표율을 거뒀다.
권 후보가 문 후보와의 차별화 전략에 성공하지 못한 결과였다. “기업 경영과 비정규직 문제에서 견해가 같은 부분이 많다”는 권 후보의 발언은 자충수였다. 노회찬 공동선대위원장은 지난 10월 “문국현을 ‘친쥐적 고양이’라고만 하기에도 답답한 노릇”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노동 계급을 쥐, 자본 계급을 고양이에 비유한 표현이다. 신자유주의 세력이 다원화되면서 소위 ‘신자유주의 좌파’의 등장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고민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한물 간’ 대중 동원과 정파 갈등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한 달 가까이 지지율 제자리걸음을 지속하던 권 후보는 ‘100만 민중대회’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한미FTA 저지, 비정규직 철폐, 삼성 비자금 문제 해결 등의 의제를 내세운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기층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1월 11일에는 100만이 모이지 못했고, 이후 권 후보의 지지율은 2%대로 바닥을 치게 됐다.
대중조직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낡은 대중동원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민중대회 조직 중에는 후보의 독단적 결정으로 전국 순회가 추진되면서 당은 파열음을 냈다. 당 지역위에서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아 각 지역 방문 일정은 전일 저녁이나 당일 오전에 급조됐고, “후보 혼자 1인시위한다”는 냉소와 불만이 당내에서 터져 나오기도 했다.
경선 시기부터 불거진 정파 문제도 대선 끝까지 권 후보를 물고 늘어졌다. 경선에서 권 후보를 조직적으로 지지한 자주파는 선거 과정 내내 입김을 행사하며 갈등의 불씨를 제공했다. 자주파가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주요 슬로건으로 정할 것을 적극 밀어붙이면서 당은 한동안 진통을 겪어야 했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인쇄된 2천만 원 상당의 선거포스터 대량 폐기 사건도 있었다.
정파 갈등으로 인한 소모전으로 권 후보와 민주노동당은 쟁점이 된 통일 분야 외 다른 공약을 알려낼 기회를 잃었다. 이광일 성공회대 교수(정치학)는 “현실과 동떨어진 민족주의 논쟁으로 민주노동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당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식상함을 느끼면서 떨어져나갔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어디로?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은 격랑에 휩싸일 전망이다. 대선 과정에서 자주파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이른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분당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는 좌초됐지만 진보대연합을 통한 외연 확대와 진보신당 창당 역시 유효한 카드다.
향후 진로에 대한 주장은 엇갈려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정파를 막론하고 당내 공통된 인식이다. 당의 민주적 운영을 방해하는 고질적인 정파 문제 해소, ‘대기업-정규직’ 중심 정당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정규직 포섭이 이들의 주장하는 ‘당 혁신’의 요체다.
그러나 ‘당 혁신’만으로 일소되지 않는 과제도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좌파’ 성향의 ‘문국현 정당’과 차별화하며 정치적 선명성을 부각시키지 못하면 내년 총선에서도 입지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 ‘원조 진보’로는 더이상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에 남겨진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