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시작한다.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지 29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4.3과 전국적 규모의 5.10 단독선거 반대를 거치는 등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격렬한 정치적 반대와 유혈이 벌어지는 가운데 수립되었다. 더구나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불과 2달여인 10월 19일, 여수에서는 제주 토벌 목적의 출병을 거부한 국군 14연대 병사들이 여수에서 무장봉기하였다.
이승만은 여순항쟁이 벌어진 지 6일이 지난 10월 25일에 계엄을 공식 선포한다. 이 계엄령은 국무회의를 거쳤으며, 국무위원들이 서명을 거쳐 발표되었다. 하지만, ‘공식적’ 계엄 선포 3일 전인 10월 22일에 이미 현지 5사단 사령부 사령관인 김백일에 의해서 법적인 근거 없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이승만도 같은 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 일대에 계엄이 실시 중’이라고 발표하여 이 계엄을 인정하였다. 계엄은 11월 1일 호남방면 계엄사령관에 의해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전남북으로 확대되었으며, 11월 17일에는 제주에 11월 26일에 이승만은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여수 순천 지구에 재차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0호 대통령령으로 선포한 계엄령, 1948년 관보
첫 계엄부터 불법인 계엄
우선 그 이유로 당시 계엄은 헌법상에만 존재할 뿐, 그 계엄을 실행하는 하위법인 계엄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의 계엄법은 여순항쟁 발발로부터 1년이 더 지난 1949년 11월 24일에 제정되었다. 당시 계엄의 법적 근거는 제헌헌법 64조인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가 유일한 법적 근거였다. 더구나 1948년의 계엄의 진행 과정에서 봤듯이 최초의 계엄인 10월 22일 계엄은 현지 사령관에 의해서 선포되었고, 그 계엄의 확대조차 정당한 절차조차 거치지 못하였다. 집행과정에서도 계엄은 그 집행자의 자의적 판단만으로 집행되어 교전 중인 대상이 아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형이 수없이 자행되었다.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처형은 중대한 범죄행위다. 이승만은 오히려 이런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를 부추겼다. 이승만은 계엄을 선포한 뒤 김완룡 법무관을 불러 “임자가 가서 한 달 안에 그 빨갱이들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討殺)하고 올라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불법계엄이 선포된 이유는 첫째,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작동하였다고 생각된다. 1948년도의 대한민국은 1945년의 한반도의 대다수 주민의 열망과는 어긋나는 국가였다. 이 땅 그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인 친일파들조차도 자신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누리던 지위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리라 예상치 못했고, 그 누구도 분단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 누구도 특정한 정치세력을 물리적으로 배제한 분단국가 수립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민중의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에게 여순항쟁으로 인한 계엄은 잠재적 적대세력을 ‘일거에 척결할’ 기회였을 수 있다.
둘째, 당시 여순항쟁의 토벌군의 핵심 지휘부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군 소속의 군인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인 중일전쟁 시절 토벌과 군 행정 경험은 그 이후 토벌과정에서의 지침 같은 것이었기에 여순의 참혹함이 거리낌 없이 자행될 수 있었다.
셋째, 이미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미군정은 계엄을 실시한 바가 있다. 이 시기는 여순항쟁으로부터 불과 2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고 1948년 계엄을 진행하는데 실무적 경험이었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여순항쟁에서 현장지도의 가장 큰 역할은 미군의 군사고문단이었고 그들은 이미 남한에서 계엄과 같은 군정을 3년간 집행해본 경험이 있는 집단이었다.
반공 국가의 탄생
여순항쟁에서의 계엄은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대로 군부를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반공체제를 낳았다. 그 반공체제는 공동체 내부에서 배제, 차별, 혐오, 심지어 죽여도 탈이 없는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들의 사회적 호명은 ‘빨갱이’였다. 이 ‘빨갱이’라는 호명에 실제로 그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동의하는가는 가장 중요 사항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반대자 모두였다. 실제로 여순항쟁 과정과 그 이후 반공 노선에 가까운 백범 김구 계열의 한독당조차도 빨갱이로 몰려 극심한 탄압을 겪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는 ‘반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고, 이승만세력은 이것을 강제할 법적, 제도적 장치를 공고히 했다.
가장 먼저 제정된 법은 계엄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초안 제출이 11월 3일이었고 제정이 된 것은 12월 1일이었다. 불과 29일 만에 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 법안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대한 것을 떠올려본다면 얼마나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법은 일제 시절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의 골간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제정한 법안이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국회는 소장파를 중심으로 ‘선량한 남녀노소를 비롯한 전 국민을 공산당 좌익으로 규정하는 법이며, 이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정부가 일반 민중을 믿지 못하고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승만 정부가 반정부는 반국가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식하에 법안 폐기 발의가 있었지만, 국회의 다수파를 구성했던 이승만세력과 한민당의 극우세력은 제주의 4.3과 여순항쟁을 중대한 체제의 위기로 인식하고 법안을 밀어붙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범법자를 양산하였다. 1949년 한 해 동안 11만 8621명이 검거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상반기 4개월 동안 3만 2018명이 검거되었다. 그중 국회의원 19명, 법조계 11명, 언론계 31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체제 내의 여론을 이끄는 사람들의 국가보안법 구속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이 시점에서 남한 내 합법적 체제 내의 주요 인사들은 이미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대표적인 좌익정당이었던 남로당은 불법화가 되어 체제 내의 진입은 불가능하였다. 대부분의 좌익 단체들은 5.10 단독선거를 불참했다. 선거에 참여한 세력은 대부분 단독정부 구상에 찬성하는 비 좌익 계열들이었다. 이는 국가보안법의 의도가 일상적인 국가통제와 국가폭력을 합법화시키기 위한 법령이라는 점을 웅변한다. 또한, 이는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제헌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주민 생활을 깊숙이 감시, 통제한 제도는 유숙계 제도가 대표적 일상적 통제체계였다. 유숙계란 유동인구 파악을 위해 외부 사람이 거주자의 집에 묵으면 세대주가 소속 반장에게 신고하고 반장은 유숙인의 본적, 현주소, 여행목적, 세대주와의 관계 등을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하여 파출소에 신고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유숙계는 이승만이 1949년 4월 9일 제주도를 시찰할 때 ‘각 동리와 촌락에 절실히 세포조직을 완성하여... (중략) ... 반란분자들이 자유 행동할 곳 없도록 만들 것이다’라는 발언 이후 그 내용의 부당함으로 국회의원과 정치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숙계는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시령 제6호로 공포되어 시행되었다. 유숙계는 주민 상호 간의 감시체계를 만들었고 결국 국가폭력을 정점으로 하는 일상적 통치체계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1948년 제주와 여순을 거쳐 형성된 반공체제는 2년 후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더 공고화되었다. 한반도라는 하나의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유혈 투쟁은 결과적으로 남과 북 양측 모두에서 배타적인 정치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물음. 계엄이 합법적으로 진행된다면 아무 상관 없는 좋은 제도인가?
‘계엄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력 동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발포되는데, 계엄의 발포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위기감을 더욱더 증폭시킨다. 어떤 상황을 위기라고 판단하는 주체는 대부분의 경우 통치권자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어떤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권자가 통치자에게 있음을 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빨갱이의 탄생, 김득중 저)
군은 기본적으로 외부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만들어진 국가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물리력이다. 외세에 맞서야 하는 이 물리력이 국가 내부로 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국민에 대한 전쟁선포일 것이다. 기존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국가는 경찰 등의 제도적 물리력을 두는데 그것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일 때 계엄을 선포하는 것이고 선포되어 동원된 군대가 마주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국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공고화된 반공체제는 계엄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에서의 계엄은 계속되었는데 그 계엄은 반정부 세력의 입을 막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계엄을 통해 그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했다.
그것의 생생한 모습을 지난 역사로 우리는 보아왔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조작하고 계엄을 선포하여 권력연장의 길을 열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고 계엄을 통해 정권을 세웠으며,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더 공고히 했다. 전두환은 12.12 반란과 5.17 전국비상계엄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생명과 재산, 자유를 빼앗겼으며, 이 땅의 민중은 이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2024년 12월 3일 22시 27분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선포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가짜뉴스’거나 지인들의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계엄은 현실성이 없었다. 계엄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그 밤에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연령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다시는 독재의 뿌리가 될 계엄을 막아야 한다는 비상한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새벽 국회 앞 도로를 메웠던 사람들, 국회 안을 지켰던 사람들, 부당한 명령을 소극적으로 저항했던 군인들 그들 모두의 힘으로 비상계엄을 막아냈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가 2개월이 지나가는 동안 각종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내용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저들이 계엄을 통해 무엇을 구상하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제거였다. 특히 계엄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진 전 정보사 사령관 노상원의 구상에 따르면 수백 명의 사람을 수장, 폭파, 제거, 수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를 보면서 이승만의 민간인 학살과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지하고문실이, 전두환의 광주학살이 떠올랐다. 이는 비극의 현대사를 겪은 트라우마만은 아닐 것이다. 계엄을 선포했던 자들이 꿈꾸는 세상이란 바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국가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독재 세상이었다.
- 덧붙이는 말
-
나영선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연구원이며, 한국지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와 참세상이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