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Unsplash+ Community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자들뿐 아니라 미국 시민들에게까지 강경한 탄압 조치를 취하면서, 미국 자유주의 진영 안에서는 유럽이 ‘제3의 길’, 즉 오늘날 세계에서 경쟁하는 두 강대국인 중국과 미국과는 다른 ‘모델’을 제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나타났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애초부터 중국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므로, 중국 ‘모델’을 거부하는 일은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미국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약화하자, 그들은 유럽에서 경제적 성과를 민주주의, 인권, 사회정의와 결합할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려면, 유럽이 극우 세력을 억제하면서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미국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3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유럽의 민주주의는 늘 제국주의와 함께 움직여 왔다. 식민 제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이후에도 그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영국은 자국의 천연자원을 스스로 통제하려 했던 이른바 ‘말 안 듣는’ 제3세계 정부들을 상대로 미국이 벌인 여러 공작에 적극 가담했다. 이란의 모사데그, 콩고의 루뭄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그 사례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는 탈식민화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형식상 독립한 옛 식민지 다수에 계속 주둔했다.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가 프랑스군 철수를 추진하자, 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쿠데타로 축출되고 암살당했다. 최근에야 부르키나파소를 포함한 일부 서아프리카 국가들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유럽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을 지지한 일도 같은 흐름에 속한다. 게다가 일부 유럽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자국 정부의 그런 입장을 따랐다. 예를 들어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이 집단학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정치는 영화와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유럽 자유주의 진영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잠시 잊어보자.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민스크 합의를 무산시킨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보자. 유럽이 오늘날 이 분쟁의 어떤 평화적 해결에도 가장 목소리 높게 반대한다는 사실도 잊어보자. 나토를 러시아 국경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에 유럽이 공모했다는 사실도, 심지어 미국의 케이토 연구소조차 인정하듯 자유주의 성향의 오바마 행정부가 지원하고 방조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복에 유럽이 공모했다는 사실도 잊어보자. 우리는 오직 유럽이 ‘제3의 길’을 제공할 가능성에 관한 협소한 논증만을 살펴보자.
이 논증은 대체로 트럼프의 각종 난동이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 결함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논증은 그런 사람이 대체 왜 미국에서 권력을 잡았는지, 그리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며 자유주의적 중도 지대가 붕괴한 것처럼 유럽에서도 왜 자유주의적 중도 지대가 붕괴하는 듯 보이는지를 묻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이 논증은 트럼프의 당선이나 유럽의 정치적 전망을 어떤 기저의 경제적 원인, 특히 자본주의의 현재 상태와 연결하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노동계급의 국민소득 몫이 엄청나게 감소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 몫의 감소는 너무나 심각해져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2011년의 평균적인 미국 남성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1968년보다 절대 수준에서 더 낮았다고까지 시사한다. 유럽에서도 유럽중앙은행에 따르면 2022~23년에 절대 수준에서 급격히 떨어진 실질임금이 2024년 4분기에도 2021년 4분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독일의 에너지 위기는 그 노동계급의 고통을 더했다. 그러나 구체적 변동을 넘어 더 일반적으로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수십 년 지속된 현상에서 비롯된 전반적인 임금 충격이 유럽 노동자들(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해져 왔다. 자본의 이동성이 이 노동자들의 임금 요구를 제3세계의 방대한 노동력 예비군이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를 촉진해 온 자유주의 정치 체제에 대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들의 분노는 중요하며 이해할 만하다. 이들 모든 나라에서 극우와 좌파 사이에 있는 이른바 ‘중도’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약화한 것은 바로 그 직접적 결과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이든, 영국의 뉴 레이버(시장 친화적으로 전환한 노동당 노선)든, 프랑스의 마크롱이든,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든, 이른바 ‘중도’ 정치 세력은 자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만큼 공감도 하지 못했다. 메르츠처럼 금융 대기업 블랙록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인물도 있었듯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이 극우나 좌파로 이동했다. 그러나 영국의 제러미 코빈이나 미국의 버니 샌더스 사례에서 보듯, 좌파가 이 ‘중도’ 세력의 견제와 방해로 좌절되면 노동자들은 대거 극우로 향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단결한 좌파가 이런 움직임을 막아내고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를 2위로 밀어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따라서 극우의 공세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을 이루는 노동자들의 국민소득 몫 급감 현상을 되돌리려면, 국가는 적극적인 재정 개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 통제가 없는 세계에서는 그런 개입이 불가능하다. 그런 개입은 그것을 시도하는 나라에서 자본 도피를 낳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들의 국민소득 몫 급감 현상을 되돌리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탈해야 하며, 이는 오직 좌파만이 이룰 수 있다. 극우는 그 몫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 약속을 배반한다. 극우는 성공을 위해 독점자본의 지지가 필요하고, 독점자본은 당연히 자기 소득 몫의 감소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이 ‘모델’, ‘제3의 길’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하며 유럽 경제가 변모하길 바라는 미국 자유주의 진영은 이 기본 지점을 건드리지 않는다. 즉 전후 케인스주의적 국가 개입의 시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되살린 자본주의의 자생성은, 내재적으로 소득 불평등을 심화하는 경향을 수반하며, 그 경향이 노동계급에게 고통을 안겼고 그 여파가 극우의 부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유럽은 노동계급의 요구에 호응하는 정부, 즉 좌파 정부가 개입을 통해 이 자생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어떤 ‘모델’도 될 수 없다. 좌파 정부만이 자본 통제를 부과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손아귀에서 경제를 끌어낼 수 있다. 이 진영은 현 수준의 세계화에서 어느 정도 후퇴할 필요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 통제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건드린다.
오늘날 유럽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가 결정적 순간에 도달했다. 민주주의를 보전하려면 노동계급의 지지(제3세계의 경우 노동자, 농민, 농촌 노동자, 영세 생산자로 구성된 노동 대중 전체의 지지)에 의해 떠받쳐지는 정부가 집권해야 한다. 유럽에서 정부 행동의 한계는 유럽 통합의 성격이나 수준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코르셋 때문이다. 미국 자유주의 경향을 포함해 우리가 논의해온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유럽의 곤경은 미국의 곤경과 다르지 않다. 물론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계급 세력 관계가 미국과 매우 달랐기 때문에 다른 역사와 그에 따른 다른 경제적 유산을 지녔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모두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내재적 경향에 공통으로 노출된 현재의 조건 앞에서 압도되었다. 그 노출의 여파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과 구별되는 어떤 유럽 ‘모델’을 추구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강조하건대, 도널드 트럼프는 관세 공세에도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자본 이동, 특히 금융 흐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충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출처] Can Europe Provide a “Third Way”?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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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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