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지워버린 한 사람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과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부터)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안의 마테르 파밀리아스(mater familias), 즉 외가의 중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이모가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지만, 어쨌든 그 이모는 외가 식구들의 구심점이었다. 이모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기 치과를 운영하던 치과의사였다. 기술자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동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형적인 부유한 중산층 가정을 꾸렸다. 독일군의 베오그라드 점령과 세르비아의 친독 우익 협력 정권,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장악을 모두 견뎌냈고, 내가 어린 시절에는 베오그라드 도심의 아주 넓고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들은 주변에서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장만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1960년대 어느 여름 오후면 아버지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집까지 걸어가 로마 올림픽에서 윌마 루돌프(Wilma Rudolph), 발레리 브루멜(Valery Brumel), 그리고 여러 창던지기 선수들이 세계 기록을 갈아치우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해마다 몇 차례, 슬라바(Slava·가문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세르비아의 축일)나 정교회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이모는 열 명에서 열두 명가량을 초대해 성대한 저녁 식사를 열었다. 이모는 프랑스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어서 식사에도 프랑스식 방식을 따랐다. 흰 식탁보와 빳빳하게 다린 냅킨을 깔고 음식을 아름답게 차려냈으며, 식사가 끝나면 디저트와 치즈까지 내놓았다. 나를 포함해 당시 어린아이였던 우리 모두가 저녁 식사는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를 이모에게서 배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런 식사를 좋아한다. 나는 주인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손님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각자 가져오라고 하거나, 어설프게 조리한 그저 그런 음식을 배달시켜 내놓는 것을 싫어한다. 이모는 저녁 식사를 대단히 진지한 행사로 여겼다.

이모와 남편, 그리고 아들은 계속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일원으로 살았다. 그들은 잘살았고, 이런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누구도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정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가끔, 정말 드물게 네 자매에게 남자 형제가 한 명 있었다는 이야기가 대화 중에 언뜻 나오곤 했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나 역시 죽은 사람은 언제나 죽어 있었던 사람, 다시 말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마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면서, 우리 집안에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남자 형제가 한 명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네 자매뿐 아니라 남자 형제도 한 명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왜 거의 아무도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1920년대의 많은 젊은이처럼 그는 군인의 길을 택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장교가 되었고, 당시 모든 장교가 그랬듯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비밀리에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당시 공산당은 불법 정당이었고, 당원들은 살해되거나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던 시절이었다. 1941년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 어쩐 일인지 그가 속한 연대는 항복하지 않았고, 세르비아 장교단의 대다수처럼 독일군 포로수용소(절멸수용소가 아니라 전쟁포로수용소)에 갇히지도 않았다. 내 아버지는 당시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장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티토(Tito)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파시스트와 ‘국내의 배신자들’을 상대로 싸웠다. 그는 4년 동안 전투를 계속했고, 군사 지식도 갖추고 있었던 만큼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서 빠르게 진급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소련 붉은 군대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지원을 받아 나라를 해방했다. 오늘날에는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이제 파르티잔이 권력을 잡았다. 내 사촌은 계속 군인으로 남았고, 이제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 당시 계급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소령이나 대령쯤이었을 것이다.

1948년 스탈린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도 분명하지 않은 채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을 공산권에서 축출하기로 했다. 공산당원들, 특히 정권의 중추를 이루던 군과 보안기관 소속 인사들은 티토와 스탈린 중 누구를 지지하는지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티토가 이길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았고, 이념적으로 티토가 옳고 스탈린이 틀렸다고 보기도 더욱 어려웠다. 어떤 사람들은 스탈린 지지를 선언했고, 어떤 사람들은 소련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받았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자리를 탐낸 동료들의 모함을 받아 친스탈린파로 몰렸다. 이들은 결국 감옥에 갔다.

약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수감됐는데, 모두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수용지는 아드리아해의 골리 오토크 섬이었다. 크로아티아어와 세르비아어로 ‘벌거벗은 섬’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만으로도 섬의 황량한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수감자가 흔히 굴라크(Gulag)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진 방식의 고문을 당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런 고문을 스탈린주의자들, 또는 스탈린주의자로 몰린 사람들이 당했다.

내 사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아마 이모들도 정확히는 몰랐을 이유로 그 섬에 수감됐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춰, 그가 특히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한 번은 국왕에게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어긴 사람이니, 두 번째로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에 충성하겠다고 한 맹세 역시 겉치레에 불과하거나 교묘하게 꾸민 것이라고 그를 배신자로 몰던 사람들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배신자로 취급됐다. 하지만 단지 정치적·이념적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을 배신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아내는 슬로베니아인 공산주의자였고, 우리 가족은 이후에도 줄곧 그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950년 무렵 티토가 류블랴나를 방문했을 때, 그는 남편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티토의 자동차 앞으로 몸을 던져 길바닥에 엎드렸다. 물론 보안요원들이 곧바로 그를 일으켜 세워 데려갔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사촌은 1951년이나 1952년에 풀려났다. 그러나 감옥 생활 동안 몸이 쇠약해진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 같은 병으로 죽었다. 충격을 받은 가족은 그 뒤로 정치는 절대 입에 올려서도, 하물며 토론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는 그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춰 나누는 반쯤 숨죽인 대화 속에서만 남아 있었다. 그는 결국 자기 가족 안에서조차 진정한 ‘비인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출처] My cousin, a non-person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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