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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매우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트럼프주의(Trumpista)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의 강점과 유럽 복지 모델의 쇠퇴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소득 격차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의 줄어들지 않았거나 오히려 커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1980년 미국과 프랑스의 1인당 GDP 비율(구매력 기준 달러로 계산)은 1.2 대 1이었지만 오늘날에는 1.5 대 1이다. 코로나19 이후 회복 과정에서 유럽 경제는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 경제는 훨씬 강하게 반등했다. 유럽의 전반적으로 낮은 생활비를 반영해 가계소득 조사 자료를 사용하면 미국에 유리한 소득 격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2023년 미국의 평균 1인당 소득은 프랑스보다 거의 50% 높았다. 중위소득 기준으로 보더라도 미국이 약 30% 앞선다.
며칠 전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중국을 방문하고 특히 선전을 둘러본 뒤 트럼프주의와 유사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는 유럽 복지국가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이 쇠퇴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나라들에게 추월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996 근무’(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를 하지만 유럽에서는 주당 35~40시간을 일한다. 특히 독일은 노동시간이 짧은 나라로 유명하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
트럼프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은 미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논평가들이 제시했다.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유럽의 노동시간당 생산성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경우에 따라 더 높다고 주장했다. 유럽인들이 스스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더 많은 자유시간을 얻기 위해 더 낮은 소득(물질적 재화와 서비스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문명화된” 삶의 지표라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끝없는 경쟁의 쳇바퀴에 “아니오”라고 말하고 일과 가족, 친구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즐거운 삶에 “예”라고 말한다. 토마 피케티도 최근 같은 주장을 했다. 그는 유럽식 조합이 더 우수하다고 본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주장
첫 번째 주장들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인간의 목적은 강철을 위해 강철을 생산하는 것(스탈린주의가 그렇게 믿었다는 비판을 받았다)이 아니라 강철로 유용한 물건을 만들고 풍요를 이루어 노동의 고된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주의자들과 메르츠의 관점을 지지하는 또 다른 논리도 존재한다. 세계는 경쟁적인 곳이다.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나라들은 경쟁국들에 빠르게 뒤처질 뿐 아니라 2류나 3류의 경제·군사 강국으로 전락하고 인구는 다른 나라로 일하러 떠난다. 기술도 낡아진다. 모든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듯 경제력은 정치력과 군사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많은 유럽 시민들이 오페라를 보거나 친구들과 소풍을 즐기는 동안 중국인과 인도인이 덜 쉬고 더 일한다면 유럽은 쇠퇴할 것이다. 세계 소득 순위에서 유럽인의 위치도 떨어질 것이다(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전환』(The Great Global Transformation) 1장을 보라). 유럽인들은 계속 소풍을 즐길 수는 있겠지만 베네치아 대운하를 내려다보는 집을 중국인과 인도인에게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태국으로 휴가를 가는 대신 훨씬 가까운 곳에서 휴가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국가 간 상대적 힘과 각 나라 국민의 생활수준을 고려하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분명 존재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유한 이유는 과거 네덜란드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대외 정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주민들은 과거의 이점을 누리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역사를 돌아보면 트럼프주의-메르츠 논리를 뒷받침한다
자본주의가 지배적 체제가 된 이유는 사람들이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경제사학자 얀 더 프리스(Jan de Vries)는 산업혁명이 사실상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방대한 연구서를 썼다. 산업혁명 이전 영국의 연간 노동일수는 약 100일이었지만 산업혁명 절정기에는 300일을 넘었다. 연간 노동시간도 2,500시간에서 3,300시간으로 증가했다. 아래 그래프는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증가가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1800년의 평균 노동일수는 3세기 전보다 약 50일 더 많았다.
<프랑스의 노동일수, 1250~1800년> 프랑스의 실제 연간 노동일수
농민들은 파종과 수확 시기에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거의 일하지 않거나 마을 축제에 참여하는 삶을 훨씬 선호했다. 그러나 그들은 토지 울타리화, 빈민 수용소의 설치(이는 두 세기 뒤 굴라그가 수행한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등을 통해 사실상 농촌에서 쫓겨나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일을 거부하고 떠돌이 생활을 선택하면 이마에 낙인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고 자본주의를 전 세계의 지배적 체제로 만들었다.
경쟁은 국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크루그먼과 피케티의 생각을 더 밀어붙이면 사회주의가 매우 즐거운 체제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하루 두세 시간 이상 일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그들은 임금을 주는 척한다.” 외국 방문객들은 물자 부족을 볼 수 있었지만 노동하지 않는 삶이 주는 즐거움은 보지 못했다. 1970년대 세르비아가 운영한 피아트(FIAT) 공장과 토리노의 거의 동일한 공장을 비교한 박사논문에 따르면 사회주의 공장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 노동자들보다 절반도 일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공장의 총생산이 이탈리아 공장의 절반 정도였으므로 세르비아 노동자의 시간당 생산성은 비슷했고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더 많은 여가를 누렸으며 따라서 더 즐거운 삶을 살았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압도적으로 패배시켰고 그 핵심 이유는 더 많은 상품을 생산했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보다 물질적으로 더 부유해지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심히 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 수준, 국가 수준, 문명 또는 생산양식 수준에서 모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히 마지막 수준에서는 어떤 체제(예를 들어 오늘날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다른 체제를 지배하게 만든다.
케인스라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이 논쟁을 더 밀고 나가 보자. 케인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사실 그는 이미 이 논쟁에 참여했다. 그는 1930년 마드리드에서 한 강연 「우리 손주들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서 오늘날의 유럽과 비슷한 세계를 상상했다. 사람들은 충분한 풍요를 누리며 “우리 대부분 안에 있는 옛 아담을 만족시킬 만큼”의 물질적 풍요를 갖고 주 15시간만 일하며 나머지 시간은 문화적·사회적 활동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의 전망은 아마도 틀렸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잘못 진단했다. 자본주의는 슘페터가 지적했듯 정지 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평균적으로 순이익을 기대하지 못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이익이 생기면 그 일부를 재투자하고 경제 성장률은 양(+)의 값을 유지한다. 이 성장을 지속하려면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야 한다. 멈출 수 없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지 않고 사람들의 욕구가 갑자기 충족된다면 자본주의는 끝난다. 모두가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겠는가. 케인스가 간과한 점은 자본주의가 결코 “만족한 사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핵심 단어는 “만족”이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상품과 서비스의 풍요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풍요가 사람들을 만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체제가 끝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의 지속을 전제했다면 주 15시간 노동이라는 그의 조언이나 희망은 이 체제의 핵심 특징과 양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라면 뭐라고 말했을까
마르크스는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지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았을까. 그의 견해는 매우 정교하다. 그는 인간의 자유가 임금노동과 노동분업의 고된 부담이 끝날 때 비로소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임금노동은 어떤 자유로운 개인도 원하는 노동일 수 없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임대하고 자신이 단순한 톱니바퀴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포기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자의 목표는 덜 일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밖에서만 자신을 느끼며 노동할 때는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일하지 않을 때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일할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한다.”(『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그렇다면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무엇이 일어날까. 임금노동이 없고 “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며 소외가 사라지고 여가가 보편화되는 완전한 풍요의 체제가 될까.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갈라선다.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의 중요한 욕구라고 보았다. 노예제와 자본주의 같은 강제 노동 체제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강요받기 때문에 그 욕구가 왜곡된다. 그러나 인간은 호모 파베르다.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 자유의 영역에서 우리를 규정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각 개인이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도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사회는 내가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도록 가능하게 만든다.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는다.”(『독일 이데올로기』)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개인, 국가, 그리고 체제 사이의 경쟁이 존재하는 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국가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국가를 지배할 것이다. 그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유지하려면 경쟁에서 벗어나는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출처] To work or not to work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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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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