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기 위한 개발”과 민주주의의 실종
강원도 원주시 평원로 20번지. 이곳에는 한때 ‘아카데미극장’이라는 이름의 단관극장이 있었다. 1963년에 문을 연 이 극장은 영화 상영관의 역할뿐 아니라, 반세기 넘게 원주 시민의 삶과 기억을 품은 문화공간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엔 극장이 없다. 원주시장 원강수는 원도심의 주차난 해소를 위해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을 조성하겠다 했지만, 지금 평원로 20번지에 가보면 야외공연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조악한 구조물만 남은 모습을 볼 수 있다.
2016년부터 진행된 시민 주도의 보존 행동으로 2021년 원주시가 세금을 들여 아카데미극장 건물과 부지를 매입했다.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하며 보존을 위한 국비와 도비 총 39억여 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호소는 외면당했고, 지금은 법정 앞에 선 시민들의 호소만 울려 퍼지고 있다.
원주시는 극장 철거 후 편의시설 조성 예산이 6억 5천여만 원이고, 극장을 보전할 경우 100억여 원이 든다며 여론을 철거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러나 100억의 근거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철거 이후 관련 예산을 16억 5천만 원으로 2.5배 증액했다. 16억 5천만 원을 들여 60년 역사의 단관극장이라는 문화 자산을 부수고 그 자리에 흔하디흔한 야외공연장을 지은 것이다. 보존 사업을 위해 배정되었던 국비와 도비는 불용 처리되었다. 통탄할 일이다.
극장 보존 문제를 둘러싸고, 상황이 본격적으로 바뀐 건 원강수 현 시장 취임 이후였다. 이전에 논의되던 아카데미극장 보존 및 공공 문화공간으로서의 활용 계획은 일방적으로 폐기되었고, 돌연 철거 사업으로 방향이 전환됐다. 전문가와 시민단체의 제안은 무시되었고, 협의 과정도 생략되었다. ‘원도심 활성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이 행정은, 실상 전임자의 정책 흔적을 지우고 시장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적자금을 움직이는 공직자는 무엇보다 시민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공권력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벗어나는 순간 존재 의미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원강수 시장의 행보는 이 모든 가치를 외면한 졸속행정이었다.
지키고자 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가치
철거 위기를 맞은 아카데미극장을 위해 맞서 싸운 이들이 바로 ‘아카데미의 친구들’이다. 이들은 2024년 본격적인 단체 결성 이전까지 단체나 모임 형태조차 갖추지 않은 시민들의 무리였다. 직업도 세대도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평범한 시민들이 지자체장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이들은 시 조례에 근거한 ‘시정정책토론’을 청구하고, 시가행진을 하고, SNS를 통한 챌린지를 전개하며 아카데미극장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적극 알리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것은 곧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 자산, 그리고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무조건 철거 반대를 외친 것이 아니라, 숙의를 거쳐 결정하자고 토론과 공론장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24명은 다른 곳도 아닌 원주시로부터 형사 고발을 당해 재판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철거 업무를 담당한 업체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했지만, 원주시는 엄하게 벌하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지역 문화유산을 공공의 자산으로 살려내자.” 이들의 주장은 도시재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원주시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시민들을 업무방해·건조물침입 등의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이들에게 최고 징역 2년까지 구형한 상태다.
도시의 미래를 묻는 것이 범죄인가
도시의 기억을 지키고자 한 이들이 죄인으로 몰리고 있다. 문화유산 보존과 공동체 가치 수호를 외치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법의 이름으로 탄압받고 있는 현실이다. 사건과 뉴스가 끊이지 않는 복잡한 현대에서, 수도권도 아닌 강원도 한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주목받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원주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기에 민주주의 가치의 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슈를 돌아봐야 한다. 이는 전국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시민권 침해의 사례다.
문화유산 보존은 결코 과거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다. 이는 도시가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이다. 아카데미극장은 낡은 건물이 아니라, 원주의 역사이자 시민 공동체의 자산이었다. 이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충분히 토론과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주시 행정은 최소한의 소통조차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시민의 공적 문제 제기를 범죄로 다루려 하고 있다. 다가오는 8월 11일, 스물네 명 시민들의 1심 선고가 발표된다.
이번 재판의 결과는 단지 몇몇 개인의 법적 책임을 묻는 차원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시민의 문제 제기가 범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사건으로, 추후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해석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역의 문화 자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맥락을 촘촘히 살펴보고 판결을 내릴 필요가 있다. 피고인의 자리에 선 시민들이 사적이익이 아닌 공적인 의제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 그리고 영화산업이 위축되는 시기 영화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기에 전국에서 달려 온 영화인들까지 원주시에 의해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사건의 결말은 곧 우리 사회가 시민의 문제 제기를 존중하고 숙의하는 민주주의를 지켜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기억을 지운 도시, 미래는 없다
도시의 설계는 공공적 가치와 시민의 권리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도시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또 직접 변화시키기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친구들’의 외침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미래를 묻는, 가장 정당한 질문이었다.
- 덧붙이는 말
-
백희림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의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