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청두 공항 라운지에서 정신을 부여잡고 앉아 있었다. 홍콩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나는 달러 시스템에 대한 글을 쓰는 데 몰입하고 있었다. 차트북의 마지막 글이었다.
글쓰기는 생산적인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 전체—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수직적’ 대도시를 떠올리며, 출발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단수 입국 비자의 만료 시점을 의식하고, 중국이라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필터를 통과하며 느끼는 비현실감, 대부분 비어 있는 거대한 공항,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지적 집중력이 갑자기 솟구치는 경험—이 모든 것이 더해지며 나는 탈진했고, 다소 흔들렸다.
기력을 회복하려고 남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Zynischen Vernunft)(1983)을 펼쳤다. 이 책은 이번 여름 내내 간간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독일어 문체와 놀라울 만큼 명쾌하고 접근하기 쉬운 사유는 나를 회복시켜준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 이미 스스로 환멸을 겪은 비판적 이성,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이성에 대한 그의 진단은 오늘날에도 강력한 울림을 가진다.
어제 저녁,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 구절이 있었다. 이는 ‘주체성’ 혹은 ‘자기됨’이라는 압박,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명령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구절은 1983년 수어캄프(Suhrkamp) 판본의 156~158쪽에 실려 있다.
이 페이지들이 영어 번역본에 포함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번역본은 디지털화되지 않은 듯해서 나는 현재 그 책을 손에 쥐고 있지 않다. 그래서 직접 번역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중국의 친구 추이즈위안(Cui Zhiyuan)과 나는 AI를 활용한 중영독 3개 국어 번역 그룹에 대해 논의 중이었기에, 이번에는 딥시크(DeepSeek)를 파트너로 삼아 슬로터다이크를 영어로 번역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놀랍도록 빠르고, 유능하며, 지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딥시크가 완벽한 건 아니었다. 세 페이지 중 세 군데에서 번역이 벗어나 있었고, 한 군데에서는 독일어 원문에 없는 언어적 상상력을 슬로터다이크에게 부여하며, 꽤 흥미로운 논리를 자의적으로 추가하기도 했다.
이 부분들에 대해 몇 차례 의견을 주고받았고, 딥시크는 기꺼이 자가 수정했다. 나는 다음번 교류를 벌써 기대하고 있다.
아래는 내가 기계에 입력한 세 장의 스크린샷이다. 놀라운 건, 이게 전부라는 사실이다. 딥시크는 뛰어난 OCR 기능을 갖추고 있다. 물론 PDF를 업로드하는 게 더 간편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스크린샷 한 장이면 충분하다.
딥시크와 내가 함께 만든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가장 세련된 영어 산문은 아니지만, 독일어 원문에는 꽤 충실한 번역이다. 내 주의를 사로잡았던 논점은 두 번째 문단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불안정성을 마주하며 새로운 맹목적 동일시가 등장한다. 삶은, 뒤흔들림과 깨어나는 순간들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안정성을 추구하며 관성에 복종한다. 그 결과, 지적 역사는 단지 이데올로기의 회전목마일 뿐이라는 인상이 생겨난다—미성숙과 환상의 상태에서 인류 문명이 체계적으로 출현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탈계몽’의 황혼 속에서, ‘나들(Iche)’의 어리석음은 점점 더 정교하고 뒤틀린 위치들 속으로 파고든다: 의식적인 무의식, 방어적 정체성 속으로 말이다.
‘정체성’에 대한 중독은 무의식적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것으로 보인다. 너무 깊이 감춰져 있어서, 아무리 주의 깊게 반성해도 오랫동안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는 형식적인 ‘누군가’가 사회적 동일시의 담지자로서 준-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 존재는 언제나 자아보다 타자가 우선하도록 만든다. ‘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는, 항상 다른 이들이 먼저 그 자리에 있었고, 사회화를 통해 나를 자동화해왔다. 원초적인 무명성 속에서의 진정한 자아 경험은 이 세계에서 금기와 공포 아래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삶도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탄생’을 통해서만 이름과 정체성을 부여받는 자각적이고 자랑스러운 무명 존재는 여전히 자유의 살아 있는 원천이다. 이 살아 있는 무명 존재는, 사회화의 공포 속에서도, 인격 아래 존재하는 에너지 낙원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토대는 현재에 깨어 있는 몸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body 없음)’가 아니라 예(body 있음)라고 불러야 하며, 이는 개체화의 과정에서 무반성적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우주의 전체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적으로 발견하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안에서, 사적이고 이기적인 환상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궁극적인 계몽이 완성된다. 이전에는 이러한 ‘개인 이전’의 공허한 내면으로의 신비적 접근이 오직 소수의 명상가들만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충돌하는 정체성들로 분열한 세계 속에서, 이제는 그런 계몽에 대해 다수가 동참할 수 있으리라는 정당한 기대가 생겨나고 있다.
순전히 생존을 위한 목적에서라도 무명(無名)이 될 수 있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오디세이아』는 이 점을 가장 장엄하고 유쾌하게 보여준다. 영리한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탈출한 직후 결정적인 순간에 외친다: ‘그 누구도(No-one) 너를 눈멀게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외침을 통해 일안성과 정체성을 극복한다. 이 순간, 교묘한 자기 보존의 달인인 오디세우스는 정신의 극한의 명민함에 도달한다. 그는 원시적인 도덕적 인과성, 복수의 그물망을 초월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신들의 질투’로부터 벗어난다. 키클롭스가 복수를 요구하자 신들은 웃는다. 누구에게 복수하란 말인가? 무명(No-one)에게?
그것은 의식 있는 삶의 유토피아였고, 지금도 그렇다: 누구나 오디세우스가 될 권리를 주장하며 무명 존재가 살아가도록 허락받는 세계. 역사에도, 정치에도, 시민권에도, 누군가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깨어 있는 몸의 형상 속에서, 그는 삶의 유랑 여정을 떠난다. 그 여정은 어떤 것도 피하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 안의 무명됨을 다시 발견한다. 무명성과 유명성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의식 있는 삶의 모험과 부침이 펼쳐진다. 이 의식 있는 삶 속에서, ‘나’라는 모든 허구는 결국 해체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야말로—햄릿이 아니라—현대적이며 끊임없이 재현되는 지성의 진정한 원형이다.”
딥시크가 제멋대로 길을 벗어났던 부분은, 슬로터다이크가 ‘무반성적 나르시시즘’(unreflective narcissism)을 언급하는 대목이었다. 스크린샷에서 볼 수 있듯, 원문에는 단순히 친숙한 개념인 “Narzißmus”(나르시시즘)가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딥시크는 여기에 새로운 단어를 지어냈다:
“Narcitaming” (Narzähmus): 슬로터다이크의 신조어 = Narziss (나르시스) + zähmen (길들이다), 길들여진 자기 집착으로서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비판
이것은 꽤 흥미로운 아이디어다. 어쩌면 “narcitaming(나르지밍?)”은 하나의 개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슬로터다이크 전문가가 아니라서, LLM이 실제 어디선가 이 표현을 찾아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혹시 다른 독자들이 더 잘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Narzähmus’나 ‘narcitaming’을 검색해보면 나오는 결과는 바로 다음과 같다: 없음.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딥시크는 즉시 사과하고 스스로를 수정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성급히 물러설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런 지점이 창의성이 시작되는 곳 아닐까?
어쨌든, 당신이 아끼지만 손이 닿지 않던 텍스트를 꺼내어, 딥시크를 켜고 직접 시도해보길 바란다.
그동안, 우리의 무명 존재들이 살아가도록 하자.
[출처] Chartbook 398 Letting our "no ones" live: translating Sloterdijk with DeepSeek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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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